10가구당 1가구 꼴… 빈곤도 선진국보다 심각
아이 맡기는 비용 너무 커 취업해도 가난 탈출 못해
'눈폭탄'이 쏟아진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보광동 언덕배기 골목 끝에 위치한 평화(6)네 집. 만화 캐릭터 '파워레인저'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평화는 엄마(40)와 함께 TV로 파워레인저 만화를 보고 있었다.현관에 나와 있는 신발 서너 켤레, 쌓인 빨랫감, 벽에 붙은 평화의 그림…. 하지만 집안 어느 곳에서도 '아빠'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엄마 박승혜씨는 2004년 임신 3개월 때 남편(46)과 이혼하고 '싱글맘'으로 평화를 키웠다.
두 식구는 한 달에 68만원 남짓한 기초생활수급비로 평화를 유치원을 보내고, 박씨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 이혼 이후 박씨는 계속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국가지원을 받아왔다.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직업을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평화가 언어능력이 떨어지고 주변사람과 눈을 맞추지 못하는 등 발달장애 의심 소견이 있어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데 집중하다 보니, 직장을 구할 겨를이 없었다.
- ▲ 아이를 믿고 맡길 곳만 있어도…. 한부모 가정이 10가구중 1가구 꼴로 늘었지만, 보 육지원대책이 부실해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보광동 자택 에서 싱글맘 박승혜씨가 평화군을 안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10가구 중 1가구가 한부모 가정
홀로 아이를 키우는 한부모(싱글맘·싱글대디) 가족은 10가구 중 1가구꼴로, 이미 선진국 수준을 넘었지만 마땅한 보육지원대책 등이 없어 빈곤의 나락에 떨어지는 한부모 가정이 많다. 국내 한부모 가구는 전체 가구의 9.4%로, 독일(5.9%), 호주(5.8%), 일본(8.5%)은 물론 미국(9.2%)보다도 높다.
4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강지원 연구원이 발표한 '국제비교를 통해서 본 한국의 한부모가족정책'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부모 가족의 3세 미만 영아의 보육시설 이용률은 32.1%, 0세는 13%에 불과했다. 일하는 싱글맘·싱글대디는 보통 오후 2~3시면 끝나는 육아시설에서 아이를 찾아올 수가 없어 아예 포기한다는 것이다.
강지원 연구원은 "일반 양(兩)부모 가정의 경우 육아지원시설 이용률이 90%를 넘어선다"며 "영아보육시설은 경제활동을 위한 필수시설로 이용률이 낮을수록 사회적 지원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아이 맡길 곳이 없으면 경제활동을 활발히 할 수 없고, 결국 빈곤으로 연결된다. 빈곤에서 탈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지만, 돌봐야 하는 아동이 있으면 노동시간이 단축될 수밖에 없고, 노동의 숙련도나 재직기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부모가정연구소 황은숙 소장은 "박씨처럼 가족이나 친척 등에서 안전망을 찾기 어려운 한부모 가정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일자리를 포기하고 빈곤으로 빠져든다"고 말했다.
◆'빈곤의 악순환'
실제로 2005년 기준 우리나라의 전체 빈곤율(수입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가정)은 9%인 반면, 일하는 한부모 가구의 빈곤율은 26%, 일하지 않는 한부모 가구의 빈곤율은 29%에 달했다. 강 연구원은 "한부모 가정의 경우 일을 하면 아이를 맡기는 비용이 더 많이 들다보니 다시 빈곤해지는 악순환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특히 싱글맘의 사정이 더 열악하다. 여성 한부모가구의 빈곤율은 20.7%로, 남성 한부모가구의 빈곤율(13.7%)보다 높다(2007년). 황은숙 소장은 "한부모 가정은 학교방문을 위한 휴가나 탄력근무제 등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본인뿐 아니라 친인척 등 주변에서 대신 보육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보육비를 지원하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의 박승혜씨는 지난 9월부터 대학원에 등록해 상담심리사 과정 공부를 시작했다. 평화의 치료를 시작하면서 만난 놀이치료 선생님이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어려운 형편에도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평화'라는 이름은 제가 지어줬어요. 소원이요? 제가 대학원에 공부하러 가는 동안 평화를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