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권사님은 자정을 넘기고 새벽 1시까지 주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일 춘천에 있는 장애인 시설에 봉사를 가는데 음식을 준비해 가야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만들어 가지고 가는 돼지 족(발)은 장애인들에게 최고 인기다. 아내는 낮에 시장에 가서 크고 잘생긴 돼지 족(발)을 생으로 사왔다. 잘 씻어서 계피와 한약재를 넣고 맛나게 삶는다. 뜨거운 족(발)을 잘 식히고, 다시 냉동실에 넣어서 약간 얼린 다음 먹기 좋게 썬다. 그것을 뚜껑이 달린 그릇에 보기 좋게 담는다. 그릇이 벌써 12개째 놓이고 있다. 저녁에 사온 시골 손두부와 도토리묵도 두 판씩 현관 앞에 놓여 있다. 며칠 전에 담근 김치도 알맞게 익어 커다란 통에 담겨 놓인다. 과일이 몇 박스 준비되어 있다.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놓고 아내와 권사님은 방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해 놓는 이유는 춘천까지 가려면 아침 일찍 출발을 해야 하는데, 도착해서도 현장에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손도 부족하고 왕복 6시간을 차량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에 시간적 여유도 없다. 그래서 많은 시간과 많은 일손이 들어가는 음식은 미리 준비를 한다. 60여명의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미리 할 수 있음도 감사의 조건이다.
아침 5시에 모닝콜이 울린다. 피곤한 몸 추슬러 일어난다. 씻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나면 금방 1시간이 지나간다. 새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가 봉사가고 없는 동안에 자오쉼터 가족들이 챙겨 먹을 음식과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 놓는다. 아들은 여전히 졸려 힘들어 한다. 공부한다는 것이 쉽고도 어려운 법이다. 아들은 차에 봉사 물품을 실어 준다. 아빠가 못하는 부분을 중3인 아들이 쉽게 해결해 주니 참으로 감사하다. 아빠 엄마가 봉사 갈 때마다 해오던 일이라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할법한데 여전히 시켜야 한다. 요즘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한다. 나와 아내, 강권사님, 아들이 차에 탔다. 가다가 학교 후문에서 아들을 내려주고 부지런히 차를 달린다. 비가 내리고 있다. 차창에 계속 빗방울이 부딪친다. 안개까지 자욱하게 시야를 가린다. 베테랑 운전사인 아내는 전천후다. 평소 함께 가던 집사님들이 근무라 함께 하지 못했다. 고속도로를 달리지 않고 국도를 탄다. 청평 호수에 물이 많이 불었다. 권사님 말씀이 며칠 전에 비가 많이 왔기 때문이란다. 화악산을 넘어 가는데 잔설이 많이 쌓여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눈이 녹지 않았다. 기온이 낮아서 그런가 보다. 눈이 얼음으로 변하겠다.
다시 온다는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눔의 동산에 도착하니 조용하다. 비가 내려서 그런가? 차 소리에 반가운 얼굴들이 나온다. 우리를 기다려주는 장애인들이다. 봉사를 마치고 갈 때마다 우리는 “다음 달에 또 올게요.”라고 인사를 하고 온다. 그들은 그 말을 믿고 한 달 내내 우리를 기다려 준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기다려 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참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약속을 하지만, 과연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키고 사는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차에서 짐을 내려주는 장애인들. 오늘은 돼지 족(발)을 푸짐하게 준비해 왔다니 신났다. 주방으로 물품을 옮겨 놓고 바로 식사준비를 하는 아내와 권사님. 커다란 들통에 돼지고기를 먼저 볶다가 김치를 넣고 다시 볶는다. 거기에 물을 붓고 다시 푹 끓여준다. 다시 시골 손두부를 나박나박 썰어서 넣어 준다. 맛있는 김치찌개 냄새가 군침을 삼키게 한다. 야채를 썰어서 도토리묵을 무치고, 반찬들을 만들고 있다. 커다란 밥솥에는 60인분의 밥이 되고 있다. 예배당 겸 식당 방에 앉은뱅이 상이 놓이고 수저와 젓가락이 놓인다. 여러 가지 반찬이 놓이고, 미리 준비해 간 상추와 새우젓, 돼지 족(발)이 놓인다. 김치가 놓이고 도토리 묵무침이 놓인다. 바로 지은 따끈한 쌀밥이 놓이고, 맛있는 김치찌개가 놓인다. 커다란 상이 비좁다. 식사 감사 기도를 해 준다. 기도를 마치고 보니 할머님 몇 분이 보이지 않는다. 연로하셔서 식당으로 올라오기 힘드신가 보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내려가 봐야겠다. 유치원생 정도의 정신연령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들도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미덕은 안다. 할머님들부터 식탁을 차려 드리고 물도 떠다 드린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내려갔다. 눈에 익은 백발의 할머님이 반가워하신다. 내 조막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내 목발도 할머님 곁으로 눕혀 놓는다.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서 일거다. 할머님 손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날씨가 추워졌다는 이야기, 어느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이사 갔다는 이야기,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 나에게 건강 하라는 이야기 등, 이야기 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냥 들어 드리며 고개만 끄덕여줘도 행복해 하신다. 건강하시라고, 다음 달에도 눈이 와서 도로가 막히지 않으면 꼭 오겠다고 약속을 한다. 이렇게 해온 약속이 올 한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다음 달에도 할머님과 약속을 지키는 작은 행복을 누려봐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날씨가 추웠더라면 비가 눈으로 바뀌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봉사도 가지 못했을 텐데, 추운 겨울에 눈 대신 비를 내려주심을 감사드린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본다. 덩달아 기분이 좋다.
2007. 11. 26
-양미동(나눔)―
첫댓글 작년에 갔을 때 장애인들의 해맑은 웃음과 따뜻한 마중이 눈에 선하네요. 언젠가는 저도 매달 같이 다닐 수 있겠죠... 기도해야겠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