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시편
파냄새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色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벗겨져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毒한 파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인생이 꽉 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꺼먼 방한복에다 뚤뚤 뭉쳐
눌러 앉혀 놓았으니 낮은,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벽화
벽에, 시멘트 반죽을 바르는 조용한 사내가 있다.
벽이 꽤 넓어서 종일 걸리겠다. 사내의 전신이,
전심전력이 지금 오른 손에 몰려있다. 입 꽉 다문 사내의 깊은 속엔
저런 노하우가 두루마리처럼 길게 감겨있는 것이겠다.
흙손을 움직일 때마다 굵직한 선이
쟁깃날을 물고 깨어나는 싱싱한 밭고랑처럼
제 길 따라 시퍼렇게 풀려 나온다. 뭘 그리는 것인지,
일생을 기울여온 사내의 집중이 확산일로에 있다. 막막한
여백이 조금씩 움찔, 움찔, 물러난다.
작업복 등짝을 적시는 땀처럼
벽에 번지는, 벽을 먹어 들어가는 사내가 있다.
벽을 지우는, 혁신하는 사내가 있다.
벽에, 벽을 그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다시 꽉 찬 벽에
飛階를 내려오는 사내의 고단한 그림자가 길게 그려졌다, 천천히
미끄러진다. 벽에 떠밀리는 사내가 있다. (창에,
석양의 길 건너편 장면이 그대로 액자 속에 담긴다.)
벽에, 마감재 같은 사내의 어둠이 서서히 발리고 있다.
쉬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 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 매려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폐가의 배꼽
이 외곽지 야산의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출퇴근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끌고 온 탯줄 같은 거, 전에 없던 길 한 가닥이 삐뚤삐뚤 나고 있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마당의 소줏병들처럼 나뒹굴며 폭우 아래 지나갔다.
그 위를 뒤덮으며 풀들이 화염처럼 지나갔다.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여서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는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의 조롱박들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자꾸 힘껏 빠져 나온다.
꼭지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앉아보소
--거, 앉아보소
늙은 여자가 강물 물 가까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가진 채 엉거주춤 돌아온 사내더러 한 번 말했다. 꺼질 듯 낮게 말했다. 키가 껑충한, 그래서 그런 건지 낯짝 안 보이는,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건지 낯짝 없는, 낯짝 없는 사내 더러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오랜 세월, 장터거리에서 혼자 국밥집을 해왔다.
저녁노을 그 아래 시뻘겋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러나 쿨럭쿨럭 뒤엉키는 물,
지금은 다만 긴 강.
홰치는 산
방올음산은 북벽으로 서 있다.
그 등덜미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
산
아버지, 엄동의 산협에 들어 갔다.
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 낸 아버지,
흰내 그 긴 물머리 몰고 온 것일까
첫 새벽 홰치는 소리 들었다.
집 뒤 동구 둑길 위에 아버지 우뚝 서 있고
여명 속에서 그렇게 방올음산 꼭대기 솟아올라
아, 붉새 아래로 천천히 어둠 가라앉을 때
그러니까, 이제 막 커다랗게 날개 접어 내리며
수탉, 마당으로 내려 서고
봄, 연두들녘 물안개 벗으며 눕다.
얼룩말 가죽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 백, 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가죽, 호피 같다. 법이 실감난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는 뿔처럼
험악한 수괴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 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 간다.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가 이제
침침하게 미끄럽게 거의 다 지워져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도 어떤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꺼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히
풍금처럼 흐르는 저, 母法이 있다.
간통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그 여자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또 이녁은 샐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 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그 여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 왔다. 해 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 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다시 정선, 어떤 마을 앞에 서 있었네
비 뿌리네 어떤 마을 앞에 서 있네 이 깊은 골짜기 거대한 귓속 같네 큰길에서 가지치고 가지친 샛길, 길 끝엔 한 채씩 집 매달렸네 찌든 허파꽈리 같네 발등에다가 이 마을을 얹고 있는 뒤엣산 몹시 험하네 비안개에 가려 다 보이지는 않지만 높겠네 더러는 팔 뻗어 밀쳤음직도 한 앞엣산, 그러나 끄덕않았을 앞엣산, 그래서 또 호미 걸고 기어오른 비알밭 감자꽃 핀 앞엣산, 앞엣산 더 험하네 더 높겠네 다만 물소리 물소리 빠져나가네 저 물소리 다 닳아 빠지겠네 닳지 않겠네
동강에서 울다
동강은 대뜸 말문을 막는다.
어이없다, 참 여러 굽이 말문을 막는다.
가슴 한복판을 뻐개며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저기 내려 꽃피고 싶은 기슭이 너무 많다.
몸이 먼 곳,
인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었겠으나
어떤 죄가 모르고 자꾸 버렸으리라
늙은 사내는 엎드려 산 첩첩울고
물길은 산에 막히지 않고 간다.
먹구름 본다
- 인도소풍
새벽 차가운 거리에
人道 여기 저기에 웬 누더기 이불들이 시꺼멓게,
뭉게뭉게 널려 있습니다.
저 한 군데
이불자락이 자꾸 꼼지락거리더니 아,
젖먹이 아기 하나가 앙금앙금 기어 나오는군요.
노란 물똥을 조금 쨀겨 놓고
제 자리로 얼른 기어듭니다.
너무도 참 자발적 동작이어서
‘서식’이란 말이 뇌리에
거미처럼 달라붙었다 퍼뜩 떨어집니다.
아기가 단숨에 기어든 이 바닥은 사실
이역만리 보다 멀어서
그 어떤 여행으로도 나는 가 닿을 수 없고요,
멀어서인지 잠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굴곡을 안에서 묶는 오랜 이불속 사정이
그나마 한 자루 그득하게 꿈틀거리며
먹구름, 먹구름 흘러갑니다.
빨래궁전
-인도소풍
야므나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 집 빨랫줄 위로 옛날 옛적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누방울처럼, 분홍 엷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니다.
족보에도 없는, 이 무슨 경계일까요. 오색 대리석으로 지어 졌으나 죽음은 그 어떤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짐이 없는데요, 삶이란 또 몇 벌의 누더기에도 당장 저토록 고단하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린 새댁이 하얗게 웃으며 얼른 움막 속으로 숨어 버렸는데요, 개똥밭에 굴러도 역시 이승에 땡깁니다. 오래 내 마음을 끄는 그녀의 남루한 빨래궁전 쪽, 저 검고 깊은 눈이 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첫댓글 참 좋습니다~~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제목에 파냄새가 아니라 피냄새로 되어 있어요...^^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