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보에 대하여 사진을 첨부해야 하기에 새창에 글을 올립니다.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부족한 점이 있고 보는 방향에 따라 오류로 느껴 질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山井 류기창 님의 답변이 될지 모르지만 참고가 될 것입니다.)
1. 서울권종친회 류영열 회장님의 구월청풍 글 처럼 원파록이 나온 이후 약 400여년간 구전으로 내려오거나 종사편에 실려 전해 온 이야기를 1976년 병진보에서 처음으로 대승공 아들에 차효전을 썼다고 하였으나 병진보 자손록에도 대승공 아들은 류효금 1명 뿐이고 문현편에는 대승공 아들이 2명입니다.(山井 류기창 님의 글 사진 6번째 아래에서 두번째 사진처럼)
2. 병진보이후 대종회에서 1984년 세계보, 1986년 문류보감, 2003년 무자보를 편찬하였는데 대승공 아들에 차효전은 없는 족보를 편찬하였습니다.
즉 1986년 문화류씨 세계보 1쪽을 보면 대승공 아들은 류효금(선조 존칭 생략) 1명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고하려고 볼펜으로 써진 부분은 무시하고 보십시오)
1988년 보감은 책을 찾는대로 사진을 올리려고 문류보감책을 보니 족보형태로 수단이 기록된 것이 아니고 원파록에 의한 설명으로 되어있어 대승공 아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2003년 무자보는 원파록을 삭제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차효전은 없습니다.
3. 병진보가 나온 이후 2003년 발행된 하정공파보(무자보 발행 이전에 배부함)에도 대승공 아들은 류효금 한명뿐입니다.
그러나 하정공파보 문헌편에는 병진보의 山井 류기창 님의 사진처럼 대승공 아들이 2명입니다.
4. 2003년 하정공 파보가 발행되기 이전 1992년에 발행된 하정공파의 소문중인 모강공파보(2권)에는 위 사진처럼 대승공 아들이 2명 실려 있지만 대광백 등 관직명은 없고 이름만 있습니다.
5. 문화류씨 대종보 모두 대승공 아들 1명이고 문헌편에는 2명인데 일부 소문에서 ㄷ자손록에 대승공 아들을 2명으로 발행한 것은 소문 족보편찬위원들의 소 영웅적 태도로 종사를 잘 안다는 이유로 2명 이들을 넣었으나 이후 발행된 대동보에서 류효금 1명으로 한 선조의 지혜를 받아 1992년 모강공파보에서 대승공 아들을 2명으로 등재하였으나 2003년 하정파보를 발행할 때는 대승공 아들을 류효금 1명으로 발행하여 오류를 바로 잡았습니다.(지후사공파 일부 지파에서는 새롭게 세보를 만들고 있는데 '1991년에 만든 지후사공파세보를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지후사공파에서 해결할 문제인 듯 합니다.)
6. 제가 만난 여러 파의 종원들 중에 차문과 천년 역사라 하는데 대승공이 태어난지 천년이고 원파록이 나온지 450여년 전이고 차문과 일가라고 함께 종친회를 한 것은 1960년대이며 족보에 40년전에 잠깐 오류로 일부 소문에서 대승공 아들에 차효전을 등재하였다가 이후 대동보나 하정공파보(제가 보유한 자료 중심으로 말씀드립니다)에 대승공 아들은 류효금 1명으로 발행되었으며 일부 소문에서 자기소문을 크게 자랑하려고(황제 후손이라고) 차효전을 넣은 것을 족보를 확인하지 않고 차문이 큰집인데 대종회에서 아니라니 따라가지만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분이 많았습니다.
7. 차효전이 천년전부터 대승공 아들이었는데 지금와서 왜 아니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종원들은 족보를 비교해서 확인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가 차문이 큰집이라 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차문에서 지금 국무총리격인 벼슬 18(?)명이 승상을 하였고 이제는 좌승상 우승상이란 관직을 했다는데 신라에 국무총리격의 관직명은 "상대등"이고 선덕여왕때 "각간"으로 잠간 바꾸었으며 승상관직명이 없다고 이야기를 해도 우리 할아버지가 맞다고 했다고 하는 분이 많아 이들을 이해 시키는데 숙제입니다.
8. 신라의 관직 제도는 엄격한 신분체제인 골품제 위에 성립된 신라의 관계(官階)는 왕족·6두품·5두품·4두품이 차지하였는데 왕족이 아니면 상대등에 오를 수 없고 왕을 보좌할 수 없는데 애장왕을 보좌하고 애장왕을 죽인 김언승 헌덕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김언승의 반란 사건에 차승색을 끼워 맞추고 후에 류색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원파록에서 교묘하게 "승상"이란 관직명을 만들었고 김언승을 시해하려한 때와 당시 고구려 땅이였던 구월산으로 피신하여 신라가 아니기에 헌덕왕의 지배력이 없는 곳에서 성을 "류"로 바꿀 이유도 없고 또 류색 이후 6대이후에 대승공이 태어나는데 150년정도 년도 차이가 나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 등 이런 내용을 이해를 못하니 답답합니다. 그래서 숙제입니다.
첫댓글 너무도 명쾌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종사에 등불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