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미당문학상 수상작
봄밤 /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권혁웅 시인
1967년 충북 충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대학원 졸업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평론)
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으로 등단
2001년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문학세계사
2005년 <마징가 계보학> 창비
2007년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민음사
2010년 <소문들>문학과지성사
현재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미당문학상 심사평]
일상 뒤집는 섬뜩한 인식 … 능청스러운 해학으로 포장하다
미당문학상은 한 해에 발표된 시 작품을 망라한다. 엄정한 예심의 첩첩산중을 거쳐 최고의 한 작품을 가려 뽑고 그 과정과 결과를 함께 즐기는 축제다. 그런 험난한 과정을 헤쳐온 시인 10명의 작품에서 우리 문학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지형도를 보게 된다.
올해 최상의 과실답게 후보작들은 제각기 개성적이면서도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었지만 뜻밖에도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한 작품을 찾기는 어려웠다. 과거에 보여주었던 빼어난 성과에 미치지 못한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다 오히려 과도기적인 혼란에 빠진 시인들도 있었다.
논의는 길어지고 이견을 좁히는 일은 더뎠다. 논의와 숙고를 거듭한 끝에 권혁웅의 ‘봄밤’을 이견 없이 수상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수상작은 술 취한 샐러리맨에서 매일 죽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과 일상을 깊이 있게 성찰한다. 얼핏 보면 자신은 빠지고 타인을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보면서 조롱하는 객관적인 태도 때문에 진정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거기에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삶의 비극적인 구조를 꿰뚫어 보는 뼈아픈 자각이 감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를 무수한 타인의 삶으로 확장시키는 지혜도 있다. 일상성을 뒤집는 섬뜩한 인식과 그것을 능청스럽게 풀어내는 해학에서도 이 시의 미덕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수상자의 다른 후보작 역시 통쾌하고 재미있다. 일부러 촌스럽게 쓴 것 같은 문장 밑에 숨겨진 날카로운 유머가 독자를 슬며시 웃게 만들지만, 단단히 멱살 잡힌 일상과 안일한 현실인식에 뒤통수를 후려치기 때문에 결코 편하게 웃어넘길 수는 없다.
허수경의 ‘연필 한 자루’도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수작이었다.
제 삶을 다 던진 것 같은 진정성과 끈질기고 집중적인 몰입이 느껴졌다. 외국에 있으면서 모국어의 감각을 잃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넓고 깊은 시야로 형상화한 결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올해 최고 작품인 동시에 한 시인에게도 최고의 작품 중의 하나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심사위원=김기택·김인환·오생근·정희성·천양희(대표집필 김기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