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전장을 호령하던 전쟁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그의 이면(裏面)을 살펴 보겠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아칸소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한 이민자 출신 군인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4년 연상의 아서 맥아더3세와 2년 연상의 맬컴 맥아더가 있었는데
둘째형인 맬컴은 5세 때인 1883년에 사망했습니다.
부친의 영향을 받은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여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이후 부관과 하급부대 장교를 거처 참모로 복무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장,여단장,사단장으로
활약하며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1919년 자신의 모교인 웨스트 포인트의 교장으로 임명 됩니다.
교장 임기를 마칠무렵인 1922년2월 백만장자의 상속녀 루이스 크롬웰 브룩과 결혼했으나
1929년에 헤어졌습니다. 결혼당시 그녀는 이혼녀였으며, 이미 두자녀가 있었습니다.
이후, 1935년 필리핀 정부의 최고 군사고문으로 근무하다가 이듬해인 1937년12월 미육군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는데, 그의 아버지 도 필리핀 총독을 지냈을 정도로 맥아더가문과 필리핀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이 무렵인 1937년 4월 마닐라로 향하던 여객선에서 알게 된 진 페아크로스 양과 재혼했습니다.
이때 장군의 나이는 57세, 신부는 38세로 다음해인 1938년 마닐라에서 외동아들 아서 맥아더 4세가
태어나게 됩니다. 흥미로운점은 아들의 이름은 형 아서 맥아더3세에서 따오고 형의 아들에게는 더글라스
맥아더 2세를 붙여줍니다.(형제의 우애가 좋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941년 7월 현역으로 복귀된 맥아더 장군은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했으며, 1942년 3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아빠(doting father)였는데,
이 시기에 맥아더 장군은 좋은 아버지 상(Father of the Year Awards)을 받게됩니다.
시상식에서 맥아더 장군은 행복해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날 위원회에서 제게 이런 영광을 주시니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By profession I am a soldier and take pride in that fact,"
직업상 저는 군인이며, 그 점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But I am prouder ? infinitely prouder ? to be a father."
그러나 그보다 더 자랑스러운 것은 제가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A soldier destroys in order to build, the father only builds, never destroys.
군인은 세우기 위해 허뭅니다. 아버지는 허물지 않고 세울 뿐입니다.
The one has the potentiality of death the other embodies creation and life.
전자는 죽음의 잠재력을 안고 있지만, 후자는 창조와 생명을 구현합니다.
And while the hordes of death are mighty, the battalions of life are mightier still.
많은 적군을 죽이는 것도 강하지만, 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은 더 강합니다.
It is my hope that my son, when I am gone, will remember me not from the battlefield but in the home,
repeating with him our simple daily prayer,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나는 소망합니다. 언젠가 내가 죽고 없을 때 내 아들이, 전쟁터의 내가 아니라 집에서 매일같이 아들과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도하던 나를 기억해주길..
이후 맥아더 장군은 1944년 원수(元帥)가되고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하였으며,
1945년 9월2일 USS미주리의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며 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1950년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이 기도문은 맥아더 장군이 1951년 4월11일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된 후 본국으로 소환된 직후인
1952년5월 당시 14살이었던 아들 아서 맥아더4세를 위해 쓴 역사적 명문입니다.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il.
원하옵건데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자녀에게 유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그리하여 어느 날 나 아버지는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한 아서 맥아더 4세는 군인의 길을 가지않고 컬럼비아대학교에 진학했으며,
음악,문학,예술,연극등에 관심을 가지고있던 그는 작곡과 집필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1964년4월5일 84세로 타계한후 이름을 바꾸고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져 보통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1940년대 부터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아서 맥아더 4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고 전해 집니다.
아서 맥아더 4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예술활동을 하면서, 그의 부모가
안치되어있는 버지니아주 노포크시에 위치한 맥아더 기념관에 관련된 일을 하고있다고 합니다.
"American Caesar"의 저자 윌리엄 맨체스터는 아서 맥아더 4세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서는 끊임없는 사랑의 도망자였다.."
11월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가오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이번글을 바칩니다.
마지막 남은 2013년11월의 한주를 가치있게 보내시고 건승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