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己亥年)에 태어나서 '기득'(己得)이라고 불렸으며
'활란'(活蘭)이라는 이름은 세례명인 헬렌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호는 우월(又月). 기독교적 가풍에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인천 출생으로 3남 5녀 중 막내였다.
1907년 제물포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근무하였으며,
이화학당 재직중에 3·1운동을 맞았다.
이화학당 대학부 시절 제3대 메이퀸으로 뽑혔고, 졸업식에서는
자신의 논문 〈여자의 고등교육과 가정〉을 주제로 한국어와 영어로 강연을 하였다.
이화학당 대학부를 1918년 제1회로 졸업하고 이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20년 6월 7일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감리교회 를 전파했다
1922년 7월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 편입하였다.
1924년 6월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10월 보스턴대학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2년 전도대 활동을 중단하게 되자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대회에 참가했다가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곧장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3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우수 졸업생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925년 6월 보스턴 대학교에서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6년 컬럼비아 대학교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가 일시 귀국하여
모교인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일하였고, 농촌 활동을 다녔다.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 선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사이공에 당도했을 때 **트레머리(아래 참조)를 단발머리로 바꾸었다.
여성 머리모양의 하나로,
가르마를 타서 뒤로 넘겨 뒤에다 넓적하게 틀어 붙이는 형태이다.
크고 탐스럽게 보이도록 다른 머리로 심을 만들어 뒷머리 속에 넣기도 한다.
예루살렘에서 귀국한 뒤에는 단발머리 위에 남바위를 쓰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채
구두를 신고 다녔으며, 사람들이 킥킥거려도 아랑곳않고 돌아다녀 화제를 뿌렸다.
1930년 여름 컬럼비아 대학교로 돌아가서 1년 3개월 동안 박사 논문을 준비하였다.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는 한국의 농촌 교육에 대한 것이었다.
김활란은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의 박사가 된 사람(1931년)으로,
‘여성 박사 1호’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1925년 여름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에,
1927년 역시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2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였고,
1928년 미국 캔자스 시에서 열린 감리교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는 등
종교·사회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회의에 신흥우·홍병선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대표와 논쟁을 벌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30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 10월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부터 이화여대 교수 및 학감 직을 맡고 있었는데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해서는 부교장직도 겸했다.
1939년 4월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45년 문리과대학을 한림원으로, 음악·미술대학을 예림원으로,
의예과·간호과·약학과를 종합한 예과대학을 행림원으로 편성하였고,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61년 9월 30일 김옥길에게 총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총장과 이사장직을 맡아
이화여대에 대한 자체조사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이화 10년 발전계획을 추진하였다.
해방 후 구성된 교육심의회 위원으로 교육이념 분과에 참여하였고,
교육심의회보다 먼저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에서
여자교육 부문을 맡아 여성교육 이념 확립에 힘썼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UN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서 적십자사 일을 보았고
이어서 공보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가 관련을 맺었던 단체는 50여 개에 달했는데
1922년에 창설된 기독교청년회연맹(YMCA), 1950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여학사협회,
1959년에 조직된 여성단체협회에서의 활동이 대표적인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김활란 전도협회를 조직하여 교파를 초월한 범기독교적 운동을 전개하였고,
1964년 10월 16일 한국복음화운동의 기틀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어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년 동안 추진했다.
이것은 1968년의 새시대 복음운동으로 퍼져나갔다.
1963년 교육 부문 대한민국상,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공익 부문),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 5월 미국 웨스팅 하우스의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편찬의 교육 부문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5년 9월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활동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저서로 자서전 《그 빛속의 작은 생명》(1965)이 있다.
1970년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