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종외가 평면도

철종외가 전경
강화 철종 외가 (문화재 자료 제 8호)
강화에는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 외에도 철종과 관련된 집이 한 채 더 있다. 강화읍에서 전등사로 가는 84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우측에 철종외가 있다. 철종외가는 철종 4년(1853년)에 지어졌다고 하며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이 시기는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이 지어진 시기와 일치한다. 이런 시기를 고려하여 볼 때 철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강화유수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철종의 외가가 철종아버지와 같이 서울에서 옮겨왔는지 또는 강화도 토박이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심한 감시 속에 살았던 철종 집안이었기 때문에 철종이 왕에 등극하기 전까지도 염씨 집안 역시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후 철종이 왕에 등극하자 왕의 외척으로서 걸 맞는 대우를 하기 위하여 이 집도 새로이 짓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철종이 서울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14살 때인 1844년 이원덕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로 유배를 왔으므로 아마도 염보길도 그때 같이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외부 전경
철종외가는 앞에 넓은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완만한 대지에 지어졌다. 집 뒤는 아주 완만한 경사지여서 배산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고 차분하게 앉아있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권위적이라는 느낌은 없다. 이러한 느낌에 일조를 하는 것은 대문이 솟을대문이 아닌 평대문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염씨 집안 따님의 증언에 의하면 철종외가의 대문도 원래는 용흥궁과 같은 솟을대문이었다고 한다. 이전처럼 솟을대문이 있었던 집이었다면 지금처럼 고즈넉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의 구조와 배치는 다른 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철종외가의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채 누마루가 보이고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붙어 있다. 문에서 바로 바라다 보이는 4칸이 사랑채이고, 연이어 한 칸 부엌이 붙어있고 그 좌측에 4칸이 붙어 안채를 이룬다. 즉 건물 가운데 있는 부엌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는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건물은 전면 9칸 규모의 단일건물로서 이렇게 마당을 공유하면서 연이어 한 건물로 지어진 경우를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지 못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중간에 내외담은 없어졌음)
또한 사랑채 쪽의 좌측은 누마루가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고 안채의 우측은 부엌과 방들이 역시 돌출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ㄷ자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건물이 매우 크고 일반 사가로는 장대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집을 길게 지은 것은 집을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 전후로 배치할 경우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하고 주변이 넓은 곳이므로 자칫 집이 왜소해 보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 아닌가 한다. 명색이 왕의 외척의 집인데 작게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평지에서 집이 크게 보이도록 하려면 전면을 넓게 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집을 보다 크게 보이기 위하여 전면을 넓게 하여 집을 배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구분이 없어 안채와 사랑채가 내외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염씨 집안 따님의 말씀에 의하면 안채와 사랑채사이에는 담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중문도 한 칸 더 안채 쪽으로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지금처럼 개방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내외담에는 협문이 있어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채에서의 호출은 설렁줄로 하였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바라본 누마루와 대문
사랑채는 ㄱ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2칸 규모의 방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채 누마루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 누마루 앞의 연못은 적절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사랑채 누마루는 바로 행랑채에 가려 전망이 그리 좋지 않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망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연못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누마루 선자의 짜임새
누마루는 연등천정으로 되어 있다. 지붕이 팔작지붕일 경우 선자서까래마구리가 모이는 부분은 합각을 처리하는 구조와 얽혀 구조가 매우 복잡해진다. 그리고 선자서까래를 정확히 짜지 못하면 흉하기 때문에 대부분 눈썹천장을 설치하여 가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대로 노출시켰다. 합각부분의 목구조를 간결하게 처리하고 선자서까래도 잘 짜놓아 모양새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선자서까래가 매우 가지런한 것이 솜씨 좋은 목수가 하였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가지런하다보니 굳이 가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대목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중문 전경
안채는 대문의 우측에 있는 중문을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중문칸은 현재 ㅗ자 형태로 되어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원래는 안채 마당 쪽으로 광이 한 칸이 더 있었다고 한다. 건물의 배치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중문의 위치가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별도의 사당을 두지 않고 안채의 건넌방을 즉 사랑채와 가까운 방을 사당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안채 대청의 일부 부재에는 붉은 계열의 색이 칠해져 있다.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는 부분은 최근 수리를 할 때 수리되지 않은 부분이다. 이 집도 근대에 들어 전체적으로 도색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붉은 칠을 하는 것은 일제시대 이후 근대에 들어 한때 유행했던 것으로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따님의 말씀에 의하면 안채 대청 전면기둥에도 원래는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안채 대청
따님의 말씀에 의하면 근대에 들어 집의 일부가 개조되었다고 한다. 한때 집안에 우환이 계속될 때 집 때문에 우환이 계속된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당신의 어머님이 집을 개조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부엌 아래쪽에 방 3칸이 나란히 있었는데 한 칸을 줄였고, 기단도 지금보다는 훨씬 높았는데 낮추었다고 한다. 기단을 낮추는 것은 원래 있던 기단의 돌을 누여놓아 낮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의 기단이 전반적으로 낮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행랑채는 지금과 같이 중간에 잘려나간 것이 아니고 중문채와 연결되어 있어 밖에서 보면 행랑채가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다고 하며 행랑채 하부도 사고석으로 쌓아 방화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모습이 되어야 제대로 된 행랑채의 모습이다. 대문 옆에 있는 방들도 예전에는 헛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한쪽은 헛간이고 한쪽은 마구간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행랑채가 끝나는 부분에는 사랑채를 거치지 않고 안채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협문도 있었는데 수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안채와 사랑채 뒤쪽으로 쪽마루가 쭉 연결되어 있었는데 수리하면서 지금처럼 분절하여 설치하였다고 한다. 예전 쪽마루가 연결된 것은 내부의 동선을 원활하게 함일 것이다. 이렇게 쪽마루로 방간을 연결하는 예는 가끔 찾아볼 수 있다.

중문쪽에서본 안채
마지막으로 이 집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부엌 바닥에 묻혀져 있는 항아리이다. 주인의 말씀으로는 물을 퍼내기 위해 항아리를 묻었다고 한다.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주인의 말씀으로는 이 곳이 물이 많은 곳인데 많을 때는 아궁이에까지 물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자주 불이 꺼지기도 하여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한 물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기 위하여 항아리를 묻어두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물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다. 수맥이 지나가는 곳은 집을 짓지 않고 물이 들어 올 수 있다고 하면 기단을 높여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러한 처리가 잘 되지 못한 것 같다. 대지가 집 앞으로 완만하게 경사져 있어 조금만 신경을 쓰면 이러한 일은 없었을 터인데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첫댓글 눈썹천장 속에는 그런 사연(?)이 있군요. 눈가림도 이런 품격이라면....
감동입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