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신화의 미학 1
좋은 수필 작품(<운동화>)에 감사드립니다. 과거 대학과 직장인 시절에는, 서정수필(혹은 경수필)을 무척 좋아하다가, 최근에는 연구방향이 이동하는 환경 때문에, 주로 독서하는 경향들이 소설문학과 철학과 심리학과 신화학에 대한 사색으로 바빠져서, 약간 외도하는 기분입니다. 다만 인간이란 약해서인지, 과거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현실의 힘든 생활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세상을 모르고 부모님께 의지하던 때가 좋았던 시절이었고, 오늘을 견디는 힘을 비축하던 때라고 봅니다. 행복 어릴 때 신던 (짚신은 잘 모릅니다만) 검정 고무신과 나막신(일본의 게다와 비슷함)과 흰 고무신을 거쳐서, 운동화 시대로 넘어가면서, 중고등학교 때 분필로 희게 만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수필문학도 다른 문학처럼 하나의 신화에 속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문학과 예술도 신화학에서는 신화에 속합니다. 문학에 대한 해석으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1976)는 「진리란 무엇인가」 중에서, 제2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p.102)에서, “...‘인간은 아름다운 감정으로 졸렬(拙劣)한 문학을 창조한다.’...고한 <앙드레 지이드>의 말은 비단 문학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도 철학에 더 타당한 것이다. 감정은 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고 철학에는 들어 있지 않다...”(사회과학연구회편, 서울: 신조문화사, 1958.)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트 수피겔만(Art Spiegelman. 1948- )은 「쥐 MAUS」(만화소설로서, 제 7의 예술이라고도 함)에서, <제2부 여기서 나의 고난은 시작됐다>에서, “...아, 사무엘 베케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모든 말은 침묵과 무(無) 위에 묻은 불필요한 얼룩이다’...”(권희섭외 역, 경기도: 아름드리미디어, 2015. p.209)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신화학자 조셉 켐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신의 가면Ⅱ: 동양 신화」에서 근동(or 중동)신화적 사고의 발전을 4시기로 구분하여, 먼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하여, 히브리의 유대교로 다시 기독교의 예수로 발전하였다가, 이슬람의 무하마드로 나아갔다고 하였다. 한편 이란의 서쪽 팔레스타인 지역(히브리 포함)의 현자들과 인도와 극동의 현자 사이의 신화에는 차이(이분법과 단분법)가 있다. 서쪽은 이분법으로써 선과 악의 과실 신화로 발전하였고, 이란과 극동은 하나로 엮은 단분법으로써 영생의 과실 신화의 차이가 있다.
즉 “...이렇게 하여 인간의 운명과 덕에 관한 2개의 완전히 대립하는 신화가 현대 세계에 함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날씨가 선선할 때 신이 산책하는 동산에 한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란의 서쪽에 있는 현자들은 그 나무로부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 먹었다. 그 문화적 경계선의 반대편에 있는 인도와 극동의 현자들은 단지 영생의과실만을 맛보았다... 이처럼 두 신화는 근동에 있는 하나의 뿌리(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보편적 메시지를 담은 신화적 사고임. 특히 키로스 BC529사망과 다리우스Ⅰ세 제위 BC 521-486)로부터 나온 것이다. 만일 사람이 두 과실(선악과실과 영생과실 모두 다를)을 다 맛보면 신 자신처럼 된다(「창세기」3: 22). 이것이 바로 오늘날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우리 모두에게 제공하는 축복인 것이다.”(조지프 켐벨, 신의 가면: 동양 신화(이진구역), 서울: 까치글방, 2005. p.17)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