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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4 - 한국불교의 현재적 성찰과 나아갈 방향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
[황지우, ‘마음의 지도 속 별자리’ 중에서]
I. 들어가는 말
새로운 출발점에 선 사람은 뒤도 돌아보고 앞도 바라본다. 걸어온 길은 뒤에 있지만 가야할 길은 앞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없다. 우리는 흔히 ‘길을 간다’고 하지만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에게 길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면 뒤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을 어떤 이들은 정각(正覺)의 순간이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왕자의 길’을 버리고 ‘사문의 길’로 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수행자 싯다르타가 고행을 그만두었을 때가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왕자의 길을 버리고 선택한 사문의 길은 이미 있던 길이었다. 스승으로부터 명상을 배웠지만 그 길이 찾던 길이 아님을 알고 고행의 길을 갔다. 그러나 이 고행의 길마저 버렸을 때 싯다르타 앞에 길은 없었다. 왕자의 길, 그리고 사문으로서 명상과 고행의 길마저 다 버린 싯다르타 앞에 길은 없었다. 이 결단의 순간이 위대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고행의 극점에 가 본 자만이 미련 없이 그 길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비구가 몰랐던 것은 바로 이 사실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결단이 ‘존재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각(正覺) 후 돌아보면 그 길이 제3의 길이요, 중도요, 새로운 진리의 길이 되겠지만 기왕의 모든 길을 다 버리고 고행의 길마저 버린 그 순간, 그 앞에 한 뼘의 길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전인미답의 의미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왕의 모든 길을 모두 다 버린 그 결단의 순간,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없는 길 앞에 서 있는 그 순간을 부처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자도 위대한 분이지만, 그의 앞에는 주공(周公)의 길이 있었다. 예수도 위대한 분이지만, 그의 앞에는 야훼의 길이 있었다. 역사상 성인이 많았지만, 부처님처럼 기왕의 길을 다 버리고 ‘없던 길’을 간 성인은 없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길’의 의미를 얘기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변화와 쇄신”이라는 새로운 출발점에 선 우리의 상황을 비유를 통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변화와 쇄신을 하고자 하는 이 앞에 ‘길’은 없다. 기왕의 길을 가는 것은 진정한 쇄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척간두 진일보. ‘백척간두’란 내 앞에 길이 없음을 아는 것이요 ‘진일보’란 없는 길을 만드는 첫 걸음이다. 한국불교의 변화와 쇄신은 바로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학술적으로 얘기하자면 지금 우리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불교를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교사의 여러 전통들, 즉 상좌부, 대승, 금강승, 최상승 등은 佛說의 연속적 발전이라기보다 패러다임의 전환에 의한 불연속적 발전들이었다. 그렇게 불교사를 바라볼 때 21세기 한국불교는 기왕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불교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하에서 다음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현재적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민족불교’라는 조계종의 자기정체성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불교 수행문화에 있어 감성의 복권에 관한 문제이다.
Ⅱ. 조계종의 ‘민족불교’ 정체성에 관하여
조계종의 ‘민족불교’라는 자기정체성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불교가 처했던 딜레마적 상황의 부산물이다. 이는 파행적이었던 한국 근현대불교사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연적’인 것으로, 불교 초전(初傳) 이래 한국불교의 연속적이며 본질적인 정체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정체성 형성의 역사적 과정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초 조선조 오백년의 질곡에서 벗어나 비로소 활동공간을 얻게 된 한국의 불교인들은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불교의 근대화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신라 혹은 고려의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당시 국권상실의 위기상황 속에서 한국 사회의 주류 담론 또한 ‘문명개화’를 통한 근대사회로의 진입이었다. 따라서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전통적 종교인 불교가 근대적 유용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선행 과제였다. 불교는 과학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철학’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당시 막 시작된 승려들의 교육 커리큘럼에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 종교학, 역사학 등 근대의 여러 분과 학문들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던 기독교의 사회복지 활동에 자극을 받아 불교계 또한 병원 설립과 교도소 교화 등 여러 근대적 개념의 복지사업을 시행해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새로운 사회에서도 전통적 종교인 불교가 유용할 수 있으며 근대와 공존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이런 모색과 실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통을 스스로 부정하는 과감한 개혁적 제안들도 등장하였다. 만해의 대처육식, 염불당 폐지, 근대적 승려교육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시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고 불교는 그 급변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자 하였다. 근대의 후발주자인 한국 불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와 일본불교는 경쟁과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종교의 근대화란 측면에서 볼 때 일종의 선진적 모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일본불교는 메이지 정부의 ‘폐불훼석’이라는 정치적 박해를 겪으면서 천황에 충성하고 국가 이념에 봉사하는 국가주의 불교로 변모하였다. 한국불교인들은 이러한 일본불교의 정체성을 바라보면서 일본불교를 단순히 한국불교의 우호적 세력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1919년 3.1운동을 통해 첨예하게 드러난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더 이상 일본불교를 단순히 근대불교의 한 선진적 모델로서만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한국 근대불교의 두 가지 과제 즉 ‘근대화’와 ‘정체성 확립’은 양립하기 어려운 상호 모순적 관계로 인식되게 된다. 당시 선진적 근대불교의 모델로 인식되었던 일본불교를 따르자니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잃게 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다보면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유용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실제 실천의 현장에서 두 과제에 대한 절충과 조화의 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지속적 형태의 운동으로 이어지기에는 내적 추동력이나 구체적 방향성이 부족하였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근대적 유용성을 추구하면서도 일본의 국가주의적 불교와 구별되는 한국적 근대불교의 모델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한계적 상황에서 그러한 제3의 모델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리라 생각된다. 조선조 오백 년의 질곡이 너무 깊었으며 당시 불교계의 인재와 재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식민자인 일본의 종교가 불교라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 한국불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매우 복잡한 함수의 정치적ㆍ사회적 역학구도 속에 한국불교가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 식민지의 경우처럼 식민자의 종교와 피식민자의 종교가 다를 경우 피식민지의 전통종교는 ‘저항’과 새로운 민족담론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러한 역할을 불교가 아닌 기독교가 맡게 되었다. 일본의 반기독교적 정서 그리고 일본 총독부의 기독교에 대한 견제 정책 속에서 기독교는 조선민족과 마찬가지의 ‘억압받는’ 처지에 있다는 연민과 공감을 얻기 쉬운 위치에 있었으며, 이러한 정서 가운데 기독교는 외래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민족담론의 주요한 발신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외래종교이지만 ‘문명개화’의 이름으로 민족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소위 민족종교론은 당시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당시로서 문명개화, 신교육과 여성교육, 그리고 민족담론의 주 생산지였다. 근대 초기 그리고 식민지 기간 동안 기독교는 잠재적으로는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민족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독교가 일제의 탄압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민족종교로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는 달랐다. 식민자인 일본의 종교가 불교였으며, 당시 일본불교는 아시아의 전통적 불교국가에서 가장 성공적인 불교의 근대적 모델이었다. 재가지식인들이 불교의 중요 구성원으로 등장하였고 대학에서 불교를 근대학문의 하나로서 가르치고 있었으며, 포교의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도 사회복지를 포함하는 등 ‘전통불교’와는 확연히 구별 되는 근대화 된 불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의 근대화’와 ‘일본불교’를 떼어 놓는 것도, 그렇다고 민족주의와 근대를 함께 결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에 있어서 ‘근대’란 곧 일본불교를 매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처’의 문제가 핵심적 사안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이다. 당시 한국불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혹자들은 ‘대처’의 문제를 일본불교의 정체성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불교의 한 근대적 모습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대처’가 일본불교의 핵심적 정체성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일본불교의 근대적 모습에서 ‘대처’만 제외한다면 일본을 모델로 불교를 근대화하면서도 일본불교와 스스로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백학명(1867-1929)이나 백용성(1864-1940)과 같은 ‘보수적 개혁운동가’들의 입장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처의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문제들 특히 도심포교, 승려 교육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불교의 근대적 모습을 굳이 배척하지 않았다. 한편 ‘대처’의 문제를 일본불교의 정체성으로 보기보다 근대화된 불교의 한 모습이라고 보는, 보다 유연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대처’는 근대화를 위하여 필요한 변화이며, 굳이 일본적 정체성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만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만해는 대처가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변화이며 그것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해치는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만해는 오히려 일본불교의 문제가 그 국가주의적 성격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더 긴요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의 끊임없는 정교분리에 대한 주장은 바로 이러한 데서 출발 한 것이었다. 만해의 민중불교론 혹은 불교대중화론은 한편으로는 협의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불교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승려중심의 불교에서 대중 즉 대처 중심의 불교로 전환함으로써 불교의 근대적 모습을 갖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만해의 입장에서는 대처가 곧 일본불교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교분리를 통해 정치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움을 획득하여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대처라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해 근대적 유용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통찰력이 있는 관점이었지만 대처불교를 곧 일본불교라고 보는 당시 조선 승려들의 통념을 깨고 불교계의 일반적 동의를 구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대처의 문제를 두고 근대한국불교의 대표적 개혁주의자들의 의견이 양분되었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근대불교사를 통해서 ‘근대화’와 ‘정체성 확립’의 두 가지 과제는 양립하기 어려운 상호 모순적 관계로 인식되었지만,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일 수도 없었다. 당시 선진적 근대불교의 모델로 인식되었던 일본불교를 따르자니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잃게 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다보면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유용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식민지라는 상황 하에서 대립적 관계로 설정된 ‘근대화’와 ‘한국적 정체성’의 문제가 해방 이후 1960년대에 들어와서 ‘왜색불교’ 대 ‘민족불교’의 문제로 단순화되는 과정이 곧 현 조계종단의 성격과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흔히 비구-대처의 갈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소수파와 다수파의 갈등이었다. 해방 후 한국불교계의 주류는 대처제도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처와 비구를 함께 종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자는 입장이었다. 그 다수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포교(대처)와 수행(비구)의 제도화를 통해 20세기 초 이래 한국불교의 두 과제인 ‘근대적 유용성’과 ‘한국적 정체성’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비구승만으로 구성 된 소수파에서는 당시의 ‘반일정서’를 등에 업고 왜색불교 추방이라는 미명하에 다수파를 종단에서 몰아내었던 것이다. 대처불교가 곧 일본불교이며 非佛法이요 佛法을 훼손하는 불교라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당시 소수파 비구승들의 신념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일본불교로부터 구별되는 한국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곧 석존 이래의 정통 불법을 유지하는 것이며 1600년 '민족불교'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불교의 또 다른 주요 과제인 불교근대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계종단의 공식명칭이 “대한불교조계종”이라 하여 불교 종단의 이름에 국호(國號)가 부가된 것도 이러한 역사적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교적 근자에 이르기까지 조계종단이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근대화보다는 ‘정통 불법의 수호’라는 다소 초역사적인(어쩌면 몰역사적인) 자기정체성에 집착하는 것 또한 조계종단 성립의 역사적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적 정체성’과 ‘근대적 유용성’의 두 과제가 민족불교 대 왜색불교의 구도로 왜곡·변질되는 과정에서 조계종은 전통복고의 길을 택함으로써 일본불교와 구별되는, ‘정통 불법의 수호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근대적 유용성을 모색하던 한국 근대불교의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은 친일과 민족, 혹은 파계 대처와 청정 비구의 대립적 구도 하에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역사기술’에 따르면 조계종단은 근대한국불교의 ‘완성’이며 ‘결론’이다. 일제의 억압적인 동화정책에 맞서 전통불교와 민족불교적 정체성을 지켜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기술은 근대한국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항일-친일’의 이분법적 구도로 단순화함으로써 ‘이분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근대한국불교의 다양하며 복잡한 전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고 있으며, 근대기 제기 되었던 다양한 불교 개혁프로그램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조계종단의 형성과정을 ‘민족불교’의 이름으로 근대불교사의 중심축에 놓음으로써 20세기 초 만해를 비롯한 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제안하였던 개혁프로그램들을 역사적 돌출 사건으로 처리할 뿐 ‘현재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한다.
한국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민족불교’라는 조계종의 자기정체성에 관해 심각하게 재고해봐야 한다. 항일적 민족의식에 기반을 둔 전통불교수호가 근대불교의 귀결점이라면 근대기에 제기되었던 다양한 근대불교 개혁프로그램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근거에서 현재의 조계종단이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그 ‘전통’이 고대 인도로부터의 전통이 아니라면 조계종이 수호하고 있다고 말하는 전통은 도대체 어떤 전통인가? 흔히 말하듯 그것이 임제종이라면 그것이 어째서 ‘민족불교’ 인가 등등의 문제는 우리는 몹시 곤혹스럽게 한다.
최근 들어 기독교에 대응하는 한 포교전략으로 ‘민족불교’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반도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길게는 200년 짧게는 100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 기독교는 외래종교 혹은 서구의 종교이고 불교는 전통 혹은 민족종교라 자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옹색하다. 그렇다면 불교는 ‘오래된’ 외래종교 아닌가? 우리는 1920-30년대 일본의 관학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 조선의 민족주의적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조선학의 범주에서 불교가 외래종교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가 ‘민족종교’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은 불법(佛法)의 보편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민족’ 담론은 맥락에 따라서는 민족이 아닌 다른 상대를 타자화하기 위한 또 다른 저급한 ‘범주론적 사고’(categorical thinking)의 한 유형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처한 다인종, 다종교라는 다문화적 현실인식과도 어긋난다. 서구사회에서 불교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불교가 가지고 있는 다원적 사고의 유연성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민족종교’라는 틀을 넘어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과 모든 생명을 위한 보편종교로서 자기정체성을 확립할 때 비로소 조계종은 1600여년의 한국불교사를 너머 2천5백년 부처님 본래 가르침의 정통을 잇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정통 불법(佛法)’의 수호자로 자처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수행의 일상성과 감성의 복권
수행의 문제를 살펴볼 때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깨달음 지상주의(至上主義)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불교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교리화 혹은 일종의 원리화가 되어 있어 일상적 가르침이나 실천지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얼핏 보아 그 문제의 연원이 서로 다른 별개의 사안 같지만 실은 내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같은 병인(病因)의 서로 다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병폐의 원인으로 대략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하나는 수행의 목적을 ‘깨달음’에만 두고 있는 잘못된 수행관이며, 두 번째는 깨달음을 일상적 수행경험과 구별되는 어떤 신비적 체험으로 간주하고 있는 출가전통의 책임이며, 끝으로 불교를 ‘생활세계’와 분리하여 ‘텍스트’(경전)로 환원하고 ‘현재’가 아닌 ‘과거전통’으로 박제화한 유럽의 근대불교학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근대 동아시아 불교지식인들의 책임이다. 전형적인 식민주의이며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인 것이다. ‘깨달음 지상주의’의 문제는 다른 발표를 통해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가 있기 때문에 오늘 토론을 위해서는 불교의 교리화/원리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인들을 보면 승속을 막론하고 교리를 불교이해와 수행의 척도로 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소위 삼계허망, 일체유심, 불이법, 자타불이, 오온, 무아, 연기법, 업설 등 관념적․추상적이며 어려운 개념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곧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또 불교 입문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대부분이 교리를 가르치고 해설하는 것으로 교육과정이 짜여있다. 큰 스님들의 법문 또한 특정 교리를 중심으로 시설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며 수행이란 전인격적인 변화를 뜻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리가 아닌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르침은 교리나 원리와는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불교인들은 업설이나 연기법과 같은 교리를 일종의 우주적 원리나 철학적 사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통한 인격의 변화이다. 다시 말해 관념적 세계 이해를 위한 교리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일상적 생활세계에서의 실천을 위한 가르침으로서의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전인적 교육’이란 말로 표현되고 있듯이 지(知)․정(情)․의(意) 세 가지가 인격의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知)란 인지(cognition) 기능으로 외부 대상세계를 마음에 표상하는 것이며, 정(情)이란 감성(emotion, sensibility, sensitivity)기능으로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이며 의(意)란 의지, 동기(motivation)로서 세상을 작동하는 방식을 말한다.
교리만 가지고 불교를 이해할 때 불교는 ‘철학적 측면’ 즉 인지적 변화만이 부각 될 수 있다. 그러나 교리의 이해가 불교적 실천을 보장 해주지 못한다. 앞 서 언급한대로 현재 한국불교의 수행론이나 수행문화를 보면 거의 전적으로 인지적 변화에 경도되어 있다. 이를테면 ‘心生卽 種種法生 心滅卽 種種法滅’과 같은 구절은 이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를 인지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해골바가지의 물’을 직접 경험한 원효에게 있어 ‘心生卽 種種法生’이란 표현은 인지적 변화만이 아니라 지(知)ㆍ정(情)ㆍ의(意)에 걸친 전인격적 변화의 경험을 의미하게 된다. 굳이 어느 한 요소를 강조하자면 ‘감성적’ 변화의 경험이라 해야 할 것이다. 초기불교 이래 ‘감성’은, 어쩌면 종교체험의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사문유관’이 보여주는바 부처님의 출가동기가 그랬고,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라는 유마거사의 언급 또한 일차적으로는 감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유마의 이러한 표현을 이성적 혹은 인지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흔히 不二法이라는 교리를 언급하지만 그러한 개념적 이해가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현대 심리학에서 감성은 이성(理性)과 대비되는 인간의 정의적(情意的) 측면을 의미할 뿐 아니라 종합적이며 균형적인 지적 능력으로 인정되고 있다. 요즘 흔히 사용되고 있는 ‘인간경영’이란 말 또한 이성과 감정을 통합하고 종합하는 능력으로서의 감성을 재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도덕성의 기초로서 감성을 중요시하는 것은 비단 동아시아 유교전통만의 통찰이 아니다. 초기불교 이래 거의 모든 불교전통이 도덕성의 근본 토대로서 ‘부끄러워’ 하고 ‘뉘우치는‘ 마음의 감성적 측면을 강조해 왔다. 수행자의 마음가짐으로 강조되어 온 사무량심(四無量心)과 대승 보살도의 사섭법(四攝法) 등은 전형적인 감성의 발로이며 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는 이제 “萬法歸一 一歸何處”와 같은 추상적 법문이나 이제 관념적인 교리를 통한 수행에서 벗어나 자비와 봉사와 같은 감성적 측면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이는 초기불교이래 강조되어 온 감성의 복권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수행의 일상성을 확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를 환경 친화적인 삶으로 이끄는 것은 연기법이라는 교리가 아니라 자연과 미래에 대한 직관적인 감성이다. 사성제(四聖諦)라는 교리 때문에 삶을 苦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민한 내면의 감수성이 보다 우선적일 것이며, 업설(業說) 때문에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겪을 고통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타행(利他行)이나 하심(下心)의 실천 또한 공덕과 관련한 교리 때문이 아니라 친절과 겸손이라는 일상적 실천과 같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겸손에서 출발 하는 것이다.
법정스님과 틱낱한 스님의 글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우리의 감성에 호소하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종교는 특히 불교는 철학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철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종교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갖는 것은 그 가르침과 실천의 감동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종교와 철학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한국불교에는 감동이 없다. 앞 서 언급한대로 오늘날 한국불교의 수행문화는 지나치게 교리를 강조하고 있으며, 감성이 들어 설 여지를 많이 남겨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입으로만 보살’ ‘입으로만 부처’인 불교인이 너무 많은 것은 단지 실천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로만 불교를 이해하는 수행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감성의 계발이 수행의 차원이 될 때 불교는 비로소 ‘심오한 철학’이 아니라 일상적 실천을 위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
감성의 복권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불교가 해야 할 일은 승가 및 재가 교육과정에서의 종교적 감성의 계발 문제만이 아니다. 사찰 건물과 법당의 건축 양식, 불상, 불교의례 심지어 승복과 같은 스님들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거의 모든 것이 관하여 현대적인 그리고 미적 예술적 감성의 차원에서 그 ‘변화와 쇄신’을 고려해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의 새로운 중흥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단의 재정 확충이나 포교전략의 수립과 같은 시스템적인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행의 일상성과 감성의 복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진정으로 움직이는 것은 교리나 조직이 아니라 감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불교에는 감동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