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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관 24살의 추사 김정희는 순조 8년 1809년 을사년 10월28일 아버지 김노경을 진주사로 하는 사신일행과 함께 연경(북경)을 향해 출발 한다. 조선 제일의 거상 임상옥과 함께 한양을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지인 산해관의 천하제일문을 지나 54일을 걸어서 그해 12월22일 그야말로 북풍한설 몰아치는 연경의 전문대가에 도착 한다.
204년후 달서기는 마눌님,딸 하나,아들 둘과 함께 연경이 아닌 북경을 향해 출발한다. 김포에서 북경의 서두우 공항 까지는 비행기 항로로 1052Km로 추사가 54일을 걸어서간 길을 단 1시간30분만에 도착 하였다. 2013년 7월25일 05시에 차를 가지고 온양을 출발하여 김포공항 지하주차장에 06시30분에 도착한다. 지하 주차장은 아주 잘 정비되어 있었다. 주차비용도 1일에 1만원 밖에 안한다. 09시48분 KE 2851편 비행기는 김포공항을 이륙 하였다. 게이트에서 대기 하던중 우리 게이트에 비행기가 들어오는데 보잉중에서 제일큰 비행기인 747-400짜리 비행기가 들어 오는거다. 북경까지 1시간 반 밖에 안걸리는 곳인데 무슨 747-400이 들어오나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어마나 ! 전좌석이 만석이다. 북경은 시차가 -1시간이다. 로칼타임 10시19분에 북경의 서두우 국제공항에 안착했다. 기온이 섭씨 35 란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에어컨 없이는 못사는 동네란다. 서두우공항에서 입국심사 하다가 옛날에 온천동 우리집에서 쐬주도 한잔씩했던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를 우연히 만났다. 조선일보로 옮기고 나서 자주 못만나다가 북경에서 우연히 만나니까 반가웠다. 워디 죄짖고 살것어? 워디를 가도 숨을 곳은 업당께? 다른 학자들하고 답사를 간다고 해서 차한잔도 못나누고 헤어졌다.
12시 好百年 이라는 사천요리 식당에서 맵고 짜고 기름기 많은 요리 에다가 칭따오맥주 만은 못하지만 연경맥주롤 반주 삼아서 맛있는 식사를 한다. 세상에 맛이 없는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번 여행에서도 체중조절은 아예 포기해야 할듯하다. 13시30분 식당에서 30분 거리에있는전문대가 에 도착한다. 광화문의 약3배는 커보이는 성같은 정양문 남쪽으로 약1.5Km 길이의 명나라 청나라때의 번화가 거리이다. 24살의 젊은 청년 김정희가 좁디좁은 조선 그중에서도 충남 예산에서 살다가 54일을 두발로 걸어서 그 넓고 번화한 전문대가를 보았을때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 문득 추사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잘 정비된 전문대가의 메인도로를 거닐다가 문득 뒷골목의 여인숙 회동관을 찿아보고 싶어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지금부터 204년전 조선 제일의 부자 의주상인 임상옥이 박종일과 함께 조선 제일의 홍삼 5천근을 가지고 연경에 와서 동인당을 비롯한 연경 한약방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박종일이가 묵었던 전문대가의 숙소 회동관. 200여년전 조선과 중국의 상인들간에 불꽃튀기는 전쟁의 숨결이 들려 오는듯 했다. 뒷골목은 앞의 대로보다 훨씬 복잡하고 번거로왔다. 아 ! 204년전의 인삼의 전쟁..... 역사의 파노라마가 지나가는 듯했다. 언감생심 회동관은 찿지 못하고 뒷골목을 빠져나와 미 제국주의의 산물인 스타벅스에서 맛있고 시원한 냉커피 한잔을 마시고 철도박물관을 지나서 천안문광장에 붙어있는 국가박물관에 도착 하였다.
천안문 광장 주변은 주차할 곳이 없어서 계속 걸어서 관광을 해야한다. 덥기도 무척 덥고 세상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인도 뉴델리에 있는 챤드니촉 시장에서 어머나 세상에 사람이 저렇게 많다니 했는데 이곳 북경도 정말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박물관에 가는걸 매우 좋아한다. 그나라 역사의 숨결을 직접 보고 교감 할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5천년의 유구한 동양문화의 원류를 볼수 있을것 같아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건물이 무지하게 컷다. 브라질의 리오 디 자네이로에 있는 세계에서 제일큰 말라까낭 축구장을 보고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홈구장을 갔을때가 생각난다. 크기만 제일컷지 시멘트 덩어리인 말라까낭과 크기는 작았지만 규모있는 시설과 자본주의의 극치를 이룰만큼 상업적인 올드 트래포트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몸수색을 당해가며 입장한 국가박물관은 그야말로 앙꼬없는 찐빵 이었다. 정말 보물같은 국보와 문화재는 모두 장개석이가 대만의 고궁박물관에다가 옮겨놓고 온양 민속박물관 만도 못한 전시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관게자에게 물어보니까 국공내전 이후에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단다. 이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정말 실망 이었다. 입구에 있던 최근에 만든 죽림칠현 청동 조각품 하나가 마음에 남을듯.... 아이고....
왕푸징거리. 16시30분에 왕푸징거리에 도착했다. 명나라,청나라때 왕족이 살던지역이 상가로 발전된 중국의 명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王府井의 이름에서 보듯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먹었던 우물이 있던 지역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를 보여주듯 세계적인 명품 가게들이 즐비했다. 왕푸징 거리 옆골목에 길이 약 250m 정도의 먹자골목이 있었다. 역시 중국다운 곳이었다. 불결하고 복잡하고 소란스럽고... 중국 초장 볶는 그 특유의 냄새부터 전갈 ,양꼬치,거미,불가사리등 온갖 희귀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정말 전혀 먹고 싶지 않은 음식들.... 전갈튀김만 조금사서 아이들한테 먹여 보았다. 칭따오 에서는 고급식당에서 살아있는 전갈을 방금 튀겨서 먹어 보았는데 게튀김과 거의 같은 맛이었다. 먹자골목에 붙어있는 2층에서 완전 부실한 오리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북경에 오면 반듯이 먹어 보아야 한다는 베이징카오야(베이징덕)라는 오리구이를 먹어 보아야 하는데 단체행동을 하는 바람에 그식당에 가보지 못해 미련이 남는다. 다시 북경에 가게 되면 반듯이 먹어 보아야겠다. 식사를 마치고 경성구 소년궁 극장으로 서커스 관람을 갔다. 단원들은 4~5세 때부터 식초를 먹으며 혹독한 훈련을 하기 때문에 수명이 일반인들 보다 짧다고 한다. 서커스 전문 학교에서 기예를 익힌다고 한다. 그저그런 공연 이었다.문학성 이나 예술성이 떨어지는 그런 공연 이었다. 21시에 홍유밍 호텔에 도착 하였다. 이번 여행상품이 너무 값싼 상품 이어서 인지 호텔방에 냉장고도 없다. 그러면 다른 시설상태는 물어서 무엇하랴. 어런 값싼여행을 처음 와 보았는데 역시나 나의 체질에는 아닌듯 싶다. 같이온 아이들 한테도 미안 스럽고.... 다음 부터는 이런 여행은 없다.
만리장성.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후 30만의 군사와 수백만명의 죄없는 농민들을 징발하여 만든 성벽이다. 진시왕은 통일을 이룬지 겨우 15년 밖에 못 살았는데 뭐가 그리도 두려워서 장벽을 쌓았고 얼마나 더 살고 싶어서 불로초를 구하려 했을까... 얼마나 많은 무고한 징발 농민들이 죽어서 장성 기초밑에 뭍혔으면 만리장성이 아니라 만리무덤 이라고 부를까... 추사 김정희가 지나간 발해만 의 산해관 부터 시작하여 서쪽의 실크로드 입구인 자위관까지 12700리(1리=500m), 6350Km를 높이 약 7~8m ,폭이 5~6m를 흙으로 만든 벽돌을 구어서 쌓은 성벽이다. 만리장성을 걸어서 완주 할려면 약 3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번에 확인한 사실인데 그 무지막지한 성벽을 빠따링지역에는 3겹으로 쌓아 놓아서 1개의 성벽을 넘어와도 다시 방어 할수 있도록 건설해 놓았다. 통신수단으로 500m에 하나씩 봉화대를 만들었는데 태우는 연료를 늑대똥을 사용 했다고 한다. 늑대똥은 기름기가 많아서 바람이 불어도 잘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1554년 명나라 7대황제인 경태황제때 드디어 만리장성 축성이 끝났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갑자기 케이블카가 서는거다. 어머머 고장난거 아녀 이거? 놀라서 있는데 다시 옴직인다.그렇게 2번을 선다. 나중에 알고보니 고장이 아니라 옛날에 설치된 케이블카라서 그렇다고 안내문이 붙어있다.
11시30분에 용경협에 도착했다. 산속의 협곡을 댐처럼 막아서 유원지 처럼 만들어 놓은 곳이다. 1992년 강택민 주석이 와서 썼다는 글씨가 산능선에 새겨져있었다. 협곡을 유람선타고 약 30분 다녀오는 곳이다. 내가 보기에는 별것도 아니더구만 요즘 중일 감정이 나빠서 일본인들은 못들어오게 한단다. 별일도 다있어 증말....
16시20분에 이화원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북서쪽으로 16Km떨어진곳에 있는 공원이다. 1750년 30만명을 동원하여 인공적으로 호수를 파고(곤명호) 그 판 흙을 쌍아서 산을 만든(만수산) 곳이다. 금나라때부터 여름 행궁으로 사용하다가 1960년 베이징 조약때 파괴되고 소실되어 8년뒤 재건축 했다. 당시의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 체결로 많은 어려움을 격고 있었다. 어린 아들을 황제로 추대하고 72세에 사망 할때까지 48년간이나 수렴청정한 서태후는 이화원 재건축을 위해서 해군력 증강을 위해 모아둔 3000만냥의 돈을 이화원 재건축 비용으로 유용 하므로서 해군력의 약체와 그로인해 결국은 청나라가 망하게 되는 한의 요인을 제공한다. 이 얼마나 한심스런 얘기인가....
이화원을 나와서 18시에 아시안 게임이 치루어졌고 지금은 스포츠센터로 활용되는 곳에서 맛사지를 받고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 21시에 호텔에 들어왔다.
동인당. 호텔에서 아침을 먹는데 참으로 중국다운 경험을 한다. 울딸래미가 조촐한 부페식 식사를 떠오다가 호텔 종업원과 부딪쳐서 중국집에서 나오는 사기숫가락을 떨어트려 깨졌다. 그런 상황이면 오히려 호텔종업원이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데 적반하장으로 수푼값을 변상 하란다. 그것도 밥도 안먹었는데 도망갈까봐 옆에서 지키면서.... 헐 ! 얼른 3위안(600원) 주어서 보내고나니까 밥맛이 뚝 ! 역시 차이가나는 차이나인것 같다.
동인당은 34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내 최고의 한의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까지된 중의의 최고봉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있는 한의원이다. 동인당 하면 장미령 이라는 여인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지금으로 말하면 조선최고의 재벌 이었던 임상옥이 어렵게 장사를 하던 시절에 이희저와 함께 연경의 전문대가에서 사창가에 갔을때 집에서 팔려와 처음으로 사창가에 나온 시골처녀 장미령을 만나게 된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미령을 밤새워 지켜만보다가 장미령이진 빛을 모두 갚아주고 떠나오는 임상옥에게 장미령은 말한다. 어르신 함자라도 알려달라고.....임상옥은 붓을들어 장미령의 흰속치마에 의주상인 임상옥 이라는 7글자를 써주고 귀국한다. 그후 어찌어찌하여 장미령은 청나라 고위대작의 부인이 되고 동인당의 실제 주인이 장미령의 남편이 된다. 그뒤 임상옥은 장미령을 살려준 은인으로 장미령의 도움을 받게된다. 여기서 그사정을 다 말할수는 없고 더 자세한 얘기는 최인호의 장편소설 상도를 참조 하기 바란다. 부슬비가 내리는 동인당 앞에서 장미령과 임상옥의 애뜻한 숨결을 느껴보았다. 역사가 이런 것이고 여행이란 바로 이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동의병원 이라는 2동의 병원도 운영 하고 있었다. 많은 한의사들이 진맥도 해주고 건강 상담도 해주는데 약장수 비슷한 냄새가 풍기는걸 느낄수 있었다.
천안문광장. 천안문 광장은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10주년을 계기로 50만명이 집회를 할수있도록 만들어놓은 광장이다. 광장 북쪽으로 자금성의 남문인 천안문이 있고 국가박물관, 인민대회당등 국가기관이 밀집되어있는 곳이다. 그날 날씨가 약간 비가 왔기에 망정이지 땡볕에 여기를 관광하면 더위에 죽을것 같았다. 광장 중앙에 커다란 2개의 전광판에서 중국 소개화면이 나오는데 곤명 갔을때 보았던 월광무의 대가 양우의 사진이 나오는게 보여서 반가웠다. 천안문은 중국 민주화운동의 산실 이기도 하다. 1989년6월4일 맨손의 대학생이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탱크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곳이다. 결국 인민해방군의 발포로 시민운동은 사그라 들었지만 지금도 중국당국은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곳이다.
자금성.
중국에서는 고궁박물원 이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의 경복궁 같은 곳이다. 동서로 750M.남북으로 960M 인 자금성은 나무 한구루 없는 대리석의 건물 이었다. 방의 칸수가 9999.5칸으로 하루씩만 잘려고 해도 27년이 소요 된다고 한다.적의 침입이 두려워서 해자가 설치 되어 있고 적이 숨을 곳을 없애기 위해 나무를 한구루도 안심은 대리석 덩어리 자금성. 그안의 정말 보물들은 몽땅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있고 앙꼬빠진 찐빵껍대기만 남아있는 자금성 이었다. 역사는 있지만 유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역사의 깊이를 느낄수 없는 자금성 이었다. 자금성 남문으로 밀려 들어오는 사람.사람.사람들....정말로 인간 쓰나미가 밀려오는것 같았다. 그 사람들의 70%이상이 내국인 이라는 설명을 듣고 또 한번 놀랐다. 그러니까 세계 어디를 가도 그 시끄러운 중국말이 들렸었나보다. 하도 인간들이 많으니까 기를 빼았기는 기분이 들었다.
십찰해. 점심식사후에 십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연개소문 한테 패배한 수양제 시절에 삽으로 땅을 파서 만든 인공호수 십찰해에 갔다. 주변에는 명,청나라때 대신들이 살았던 주택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 옛날에는 호수 주위에 사찰이 10개있고 호수가 바다같이 넓다고 해서 십찰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도 옛날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곳이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약30분간 주위를 둘러 보았다.
차박사가라는 전통의 찻집에 들렸다. 규모가 꽤큰 찻집 이었다. 요즘 중국차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인기있고 좋은 차라면 보이차를 들수가 있다. 나도 보이차의 원산지인 운남에서 보이차를 사와서 몇 년째 보이차를 마시고 있는 애호가 이다. 이곳에서 권하는 보이차는 세작으로 고급품 이었다. 그런데 10뭉치에 일백만원을 호가하는 제품이었다. 설명과 시음이 끝나고 조용히 직원을 불러서 보이차 얘기를 했드니 차 많이 드셨네요 하고 금방 알아본다. 그러드니 금새 가격이 내려간다. 그 제품을 구입하니까 70%정도 보이차를 서비스로 준다. 역시 중국에서는 말을 잘해서 깍아야 하나보다.ㅎㅎㅎ
금면왕조. 저녁식사후 북경에서 제일로 멋있다는 금면왕조라는 공연을 보러 갔다. 극장은 규모와 시설이 잘되어 있었다. 공연의 줄거리는 평범했지만 무대시설은 잘 되어있었다. 다이나믹한 무대변화와 조명등은 상당한 수준 이었다. 특히 홍수장면에서의 무대에 쏟아지는 물은 압권 이었다. 약200t정도의 홍수물이 무대가득 쏟아졌다가 말끔하게 처리되는 장면은 장관 이었다.배우들이 실제로 물속에서 하는 연기도 실감 있었다. 중국에서 몇 번의 공연을 보았었는데 내용과 무대의 짜임새등에서 너무 크게만 하는것 같아서 좀더 실질적 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장예모 감독은 무대의 규모를 크게하고 조명의 색상을 강렬하게 표현 하는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오는길에 The Place라는 곳을 들렸다. 라스베가스의 긴천장에 LED화면을 설치해 놓고 음악과 영상을 보여주는것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어 놓은 곳이다. 한국의 파리빠게트와 삼성전시장이 있었다.
7월28일 호텔에서 출발하여 서두우공항에서 11시50분에 출발하는 KE 2852편을 타고 한국시간 14시40분에 김포공항에 도착 하였다. 3박4일간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이라서 즐거웠고 말로만 듣던 북경의 풍경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된것 같다. 앞으로 중국이 주변국가들과 분쟁없이 더불어 함께 잘사는 그런 국가가 되기를 기원한다. 한국도 With China해서 중국과 동반성장하고 동북아와 세계평화 발전에 이바지 하는 양국이 되었으면 한다. 긴시간 거친글 읽으시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위 내용은 나의 개인적 이고 주관적인 시각으로 본중국에 관한 글 입니다. 다소 현실과 다르더라도 이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환절기 입니다. 건강 유의 하시고 풍성한 결실 준비 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2013년 8월 29일.
碧 圓 윤 달 석.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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