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집 서재 한 귀퉁이에 두었던 '83년판 한국수필 신작 선집을 다시 읽다가 작가가 쓴 이름모를 차인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복되어 담아두면 좋을 듯하여 여기에 옮겨 두었다. 특히 茶라는 것을 모르고 처음대하는 작가의 아름다운 글과 심성이 茶를 알고 무조건 茶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 茶人의 글보다 더 아름다웠다.
- 本 -
아침에 뜨거운 차(茶)를 마시며 떠오르는 첫 생각을 하루종일 간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습관을 갖는 것은 고향을 가진 것 만큼 좋다.
한때 나는 고향이 없어 어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주 푸념했다. 방학때 내려갈 곳이 없어 가난했고 자유화를 그리는 미술시간에도 떠오르는 고향 마당이 없어 그림도 못 그린다고 빈곤한 상상력을 안타까와 했었다.
그러나 요즘 나에겐 많은 고향이 생겼다. 무엇이든지 좋아지면 깊이 생각하고 애착을 갖고 소중히 빛내는 것이다. 요사이 자주 마음이 가는 곳은 헌책방 「古書集」이다.
「古書集」으로 가는 길은 일부러 시끄러운 차도를 피해 골목길을 택한다. 큰 집 문패를 읽으면서 마냥 한가롭게 걸어가야 잠시 산보 나온 김에 둘러 본다는 쑥스러운 핑계인지 나름대로의 멋인지 높은 담장안 주홍 감나무를 만났을 때 내 잔소리를 듣고 크는 꿈나무 아이들을 생각했고 오늘도 꼭 동화책을 사야지 다짐한다.
골목길은 발길 닿는대로 분위를 달리한다. 소나무 분재 가득한 집, 키작은 울타리가 정다운 집, 모과가 향그러운 집, 목련꽃 집, 아름드리 백일홍 집, 잔디가 고운 집, 그네가 쉬는 집, 마음 풀이 무성한 빈터, 낡은 기와가 옛 그대로인 터주집 마당에 하늘 높이 솟은 느티나무 그 꼭대기 까치집
기분 내키는대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빠져나가도 언덕만 넘으면 「古書集」에 닿는다. 봄 가을 변하는 나무들은 어느새 내마음 뜰에 사랑 받는 친구가 되었다.
땅값이 비싼 지역이라 아무도 헌책방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장사속을 초월한 곳이라 「古書集」 茶선생님이 높이 보인다. 정년퇴직과 더불어 길가 담을 허물고 「서예실」을 내시고 심심풀이로 헌책방도 겸하고 계신다.
붓글씨를 쓰는 연습실에선 묵향이 손을 휘저으면 먹물로 적셔 나올듯 흠뻑 배어 있고 구석구석 쌓여진 책들은 고즈너기 누워있다. 그 옆에 온돌방에서 물을 끓여 고결하게 차를 마시며 글씨를 쓰다 책을 보시다 솔솔 낮잠에 빠져드는 선생님은 그대로 신선이시다.
언제라도 문을 열면 차향기가 그윽한 방은 작은 박물관이다. 이조목기에 담겨진 노리개, 문갑 위에 늘어선 개구리 붕어 연꽃 앙증스런 연적들, 오밀조밀 다기(茶器), 묵은 그림, 평생 푼둔으로 모으셨다는 살림들은 구경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큰아이 방학숙제 「가훈」을 부탁드렸더니 「손자놈도 이런 숙제가 있었지」하시며 쾌히 써 주셨다. 오는 길에 아주머니가 놓고 파는 모과를 떨이로 사서 한아름 갖다드렸을 때 「모과 유자 대추 다 훌륭한 차감이야」하시며 반갑게 잎차를 끓여 주셨다.
매화 그려진 백자주전자에 나무통에서 꺼낸 차 잎을 얄미운 사기수저로 살푼 떠 넣으시고 물이 끓기를 기다려 천천히 부어 잠시 우려내어 나무 잔받침에 술잔보다 조금 큰 흰잔을 올려 놓으시고 노랗게 흐르는 차를 마시라고 건네 주신다.
손끝에는 너무도 조용한 몸짓으로 부드럽게 모아지는 물줄기가 오롯이 피어나는 보석의 강이다. 풍류를 넘어 경지에 이른 감탄이 절로 솟는다. 나는 다도(茶道)를 익히려 온 학생인양 얌전히 여쭈었다.
「이것이 그 까다롭다는 다법(茶法)인가요?」
「법은 무슨, 좋으니까 입에 맞으니까 마시는 거지. 자연스럽게 가벼운 마음으로 마셔야지 격식이 번거로우면 모든게 멀어져요.」말씀하시는 주름살 이랑이 유난히 깨끗한 까닭을 알 것 같다.
「요사이 정부에서도 고유차로 손님 접대를 한다니 반가운 일예요. 주부가 가정에서 부터 전통을 살려야지요. 생활의 윤기를 내는 여성이 현모양처예요.」
남쪽지방 절에서 구해왔다는 녹색잎차, 작은 잔 바닥에 흰 차꽃이 피었다. 빈 잔을 자꾸 들여다 보면 샘처럼 솟아 오를거라고 곁에 다소곳한 사모니께서도 말씀하신다. 「우리는 제사에도 차를 올린답니다.」
「깨끗한 영혼의 만남이겠군요.」 잠지 차 삼매경에 빠져 마지막 한모금을 삼켰다. 혀끝에 쌉쌀함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남아있는 차맛을 배우기 위해 자주 발길을 돌리니 책장엔 책이 쏠쏠히 쌓이고 끊임없이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나에게 밤마다 맑은 물에 잎차 띄우고 석잔 넉잔 마시며 밤을 밝히게 하는 「古書集」 문턱은 어느새 편안함이 어머니 차마폭이다.
추사 茶詩 「靜坐處茶半香初妙用詩水流茶開」 (고요히 앉은 차리 차 반잔 향기는 싱싱하나니 알맞게 쓸때 절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생각하지도 않던 글씨선물을 받은 기쁨에 「어명차」 라는 「현미차」 한봉을 구해 드렸더니 그자리에서 봉을 뜯어 물을 올려 놓으시고 물을 막 부으려는데 잔 밑바닥에서 마른 잎파리들이 물구나무서비로 일어나고 뭔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벌레였다.
「보관을 잘못한 탓이야」 하시며 화선지에 쏟아 벌레를 집어내고 뜰로 내려가 손삽으로 땅을 파고 묻었다. 「차잎이니까 뿌리는 못내리겠지만 비가 오면 마당에 차향을 뿌려주겠지」 하시며 웃으셨다.
감사하고 싶은 정성이 어이없게 무너져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청자주전자와 차잔을 마련하고 무안해서 선뜻 드리지도 못하고 그냥 두었다가 오랜만에 들렀더니 선생님은 다촌(茶村) 여행을 떠나셨다고 사모님께서 붙잡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