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들이 있었겠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창조 때부터 받은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으로 굳건히 이겨왔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어 온 것은, 하느님의 생명 창조능력이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국의 노위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1416)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계시를 책으로 썼습니다.
그 계시의 핵심은 <모든 것이 잘 될 거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 말은 복음 자체가 기쁨으로 가득찬 것이므로 진지하고 심각한 것만으로 복음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 얼마나 가볍고 행복한가!” 라는 구약의 노래를 인용하여 복음의 기쁨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들고 끝없는 산을 넘고 들을 지나도 마냥 즐겁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찾아내야 합니다. 발견하는 자의 능력, 볼 수 있는 자의 능력은 믿는 자의 특권입니다.
동일본대지진 후, 집 잃은 사람들은 5년 동안의 삶에서 억지로 죽지 못해 살아 온 것이겠지만, 그들을 위해 꿈과 희망을 주는 성교회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분들 중에도 수많은 어려움을 굳건히 뚫고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는 생명창조의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안의 하느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통, 심지어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있더라도 생명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완벽한 예배를 위해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너무 완벽하면 모두가 힘들어집니다.
행복이 만들어지는 데는 완벽이 필요하지만, 능력만큼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유머”라고 생각하는데, 이를 찾아내야 합니다.
성경은 필기자체가 어려웠던 환경에서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레 쓰여진 것이기에 상당히 무겁게 쓰여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발견하지 못한 유머 속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순간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난 예수님을 보고 동산지기로 알고 “주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습니다.” 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다!”라고 하십니다.
이에 마리아는 뭐라고 했을까요? 라고 어느 시골 교회에서 할머니 한 분에게 질문하였더니, 바로 “오빠”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라뽀니(선생님이여)"를 잘못 아셨겠지요. 그리고 어떤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사연들을 예수님께 가져오면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보잘 것 없을 수도 있지만, 행복하고 싶은 나의 모습으로 바꾸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의 이야기에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해질 권한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큰 고난과 고통 속에서 만들어내는 행복이 참다운 행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삶들은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것이 아님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도우심으로 이를 극복하여 행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친한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살아있는 예수와 만날 수 있는 부활절이 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사제회장님 제자들 4명이 참가하였습니다.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