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준경가옥 배치도

성준경가옥 전경
성준경가옥(중요민속자료 194호)
집이 고즈넉하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고즈넉한 집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성준경가옥은 바로 이러한 고즈넉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들어맞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완만한 경사지에 깊은 숲을 배경으로 사뿐히 앉아 있는 성준경가옥은 그리 크지도 않고 아담한 한옥이다. 성준경가옥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안내판이 없다면 마을 어귀에서도 집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옛날 마을의 지배계층이었던 가문의 집은 대부분 멀리서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그 집들이 대부분 권위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위치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준경가옥을 찾아드는 길은 마치 산 속에 있는 별장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지금 주로 사용하는 입구가 원래의 입구는 아니지만 원래의 입구였던 곳에서도 사랑채까지 이르는 길은 깊은 숲으로 우거져 있어 좀처럼 집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집을 지을 때부터 어느 정도 형성되었던 것 같다. 입구에 좌우로 나란히 서있어 이 집의 대문역할을 하고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 중 하나는 수령이 400년이 넘어 시보호수로 지정되어있을 정도이고 주변의 소나무를 보아도 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풍광이 이 집터를 잡게 된 연유가 아닌가 한다. 성준경가옥은 현재 주인의 8대조께서 지어 아버님을 모신 집이라고 한다. 1989년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825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성준경가옥 사랑채 측면
성준경가옥은 일반적으로 꺼리는 북향을 하고 있다. 북향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형을 따르다 보면 북향집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에 대해 창령 성씨 27대 손인 종손의 말씀으로는 임금이 살고 계신 쪽으로 향함으로서 임금을 생각한다는 마음을 바탕으로 풍수를 고려하여 집을 배치한 듯 하다고 말씀하신다. 어쨌든 풍수의 영향은 확실한 것 같다. 뒤의 도고산을 배산하여 앞에 조그마한 동산을 안산으로 하여 집터를 잡았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은행나무를 고려한 듯 하다. 이 집은 솟을대문이 없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을 하기에는 집을 지을 당시 가문의 위세가 그리 크지 않아 자제한 듯하다. 이는 집의 규모와도 상관이 있는 것 같다.
이 집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다른 대가에 비하여 오히려 아담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사랑채도 4칸 규모이고 안채도 마당이 3칸 규모이어서 좁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렇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에 대하여 종손께서는 중시조인 우계 성혼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집안의 가훈인 근검소이勤儉素履의 이행과 집 지을 당시 8대조가 높은 직책에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회여건상 재산이 있다고 마음대로 큰집을 지을 수 없는 사회여건상 자신의 분수에 맞는 소박한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준경가옥은 전면에 사랑채를 일자형으로 배치하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샛마당 설치한 후 그 뒤에 안채를 두었다.

성준경가옥 사랑채
사랑채는 전면 4칸 규모로서 좌측으로부터 방 두 칸, 대청한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역시 집의 규모에 걸맞게 크지 않고 아담한 규모이다. 사랑채는 전면 전체에 퇴를 둔 전퇴집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맨 왼쪽 방은 뒤로 한 칸을 더 늘여 두 칸 규모로 꾸며졌는데 이러한 구성 때문에 사랑채는 ㄴ자 형태를 하고 있다.
성준경가옥의 안채는 중부지방에서 보기 드문 폐쇄형 구조를 하고 있다.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은 사랑채 우측에 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중문을 지나서도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와 안채사이의 샛마당에 있는 또 하나의 문을 지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시 사랑채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처럼 이 집은 안채로 가는 문조차도 2중으로 되어 있고 집 전체가 담으로 둘러 있어 쉽게 안채로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있다. 다른 충청도의 집에서 이렇게 폐쇄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잇마당(오른쪽이 안채로 가는 중문)
이러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폐쇄형의 집은 충청도 지역에서 몇 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이처럼 사랑채를 독립시키면서도 안채를 ㅁ자 형으로 만든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집을 짓게 된 것은 이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이 집을 지으신 8대조 할아버지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시 내외법이 더 심화되어 집의 폐쇄성을 예전보다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9대 조부와 집을 지으신 8대 조부는 모두 경상도 지방에서 현감을 하셨기 때문에 폐쇄성이 강조된 경상도의 집을 참고하여 지었을 것이다.
안채는 ㄷ자 형 몸체에 일자형의 문간채를 붙여 ㅁ자 형태를 만들었다. 경상북도 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ㅁ자 집처럼 전체가 한 몸체로 구성된 ㅁ자형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튼 ㅁ자 집인데 건물간의 간격을 좁게 만들고 담으로 막아 ㅁ자 형태로 느껴지는 것뿐이다. 안채의 구성을 보면 가운데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건물을 붙여 안채를 ㄷ자형으로 구성하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대지가 매우 넓은 편이므로 한 칸만 더 양옆으로 넓혔더라면 안채가 넓고 시원하게 구성되었을 터인데 마당을 3칸 폭으로 한정하여 안마당이 좁게 만든 것이 아쉽다.

안채 전경
안채는 중문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 즉 동쪽은 아래로부터 부엌 두 칸, 안방 두 칸, 머릿방 두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윗방의 한 칸은 마루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따라서 마루는 6칸 통이 아닌 5칸으로 되어있고 대청의 측면 간살이 안방이 나 건넌방의 측면 간살보다 작게 잡혀 대청이 조금 협소해보이는 것이 흠이다. 서쪽 부분은 조금 더 길어서 방과 부엌 한 칸 그리고 건넌방 두 칸 마지막으로 사당으로 쓰던 마루 두 칸이 배치되어 있다. 이 집도 별도로 사당을 두지 않고 안채 대청을 확장시켜 사당으로 쓰고 있었다. 사당은 남쪽 즉 뒷마당 쪽으로 위패를 모신 것이 아니라 서쪽 방향 벽에 나란히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현재 새로 복원해놓은 바깥채와 같이 하인이 거처하거나 곳간으로 쓰이던 초가가 주변에 6-7채가 더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이 많았던 것은 이 집안의 재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 종손의 아버님때 이르러서는 5000석의 큰 부를 쌓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변에 이처럼 많은 가랍집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큰 부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이신 성준경선생의 생활은 매우 검박하셨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오실 때에도 늘 버스만을 이용할 정도로 생전에 검박한 생활이 몸에 배어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검박함이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에 5000석의 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집을 새로 늘려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복원된 바깥채
현재 복원되어있는 바깥채는 복원전 집의 모습을 따라 원형기둥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복원상태를 보면 매우 아쉽기만 하다. 나의 기억으로는 예전 바깥채는 자연 상태의 나무를 적당히 다듬어 기둥으로 사용한 것이므로 현재와 같이 완전한 원형은 아니다. 또한 가공한 원형기둥이 건물의 규모에 비하여 너무 가늘고 길게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 등 때문에 지금의 집은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복원의 핵심은 옛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새로 복원된 바깥채는 엄밀히 말해 복원된 것이 할 수 없다.
집주인과의 대화에서 고택의 관리가 만만치 않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집주인은 집관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살펴보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집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에도 한계는 있다. 집주인은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기 때문에 다른 고택을 관리하는 분에 비하여 여러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큰 불만은 자신의 소유임에도 개보수를 할 때 어느 정도 재량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고, 또한 국가에서 해주는 것은 건물을 최소한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보수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수준의 지원으로는 건물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 최소한 대 여섯 명이 관리하던 집을 한사람에게 그 의무를 지운다는 것은 집의 관리를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집이란 사람이 살면서 생활을 하여야 제대로 된 관리가 된다. 그러한 수준의 관리가 되도록 문화재청은 적극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간 문화재청이 집을 현 수준에서 유지만을 하는 정도로 관리하였다면 이제 국가는 살 수 있는 집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문화재를 관리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재청은 적극적인 발상의 전환을 하여 문화재 관리에 나서야 할 것이다.
첫댓글 이 곳에서 사용한 기둥은 설명에 있듯이 자연상태의 나무를 적당히 다듬어 사용한 것 입니다. 고급 건물에서 쓰고 있는 원기둥과는 그 개념이 다릅니다. 제대로 만든 원기둥을 사용하기 힘든 것은 원기둥을 가공하려면 우선 4각 기둥을 만들고 다음에 8각 그 다음 16각, 32각, 64각 이런 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원형기둥을 만드는 것이 재료의 손실도 많고 곧게 잘 뻗은 나무도 최소한 지름의 1.4배 이상의 나무가 필요하기 때문에 원기둥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