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형 전 부산지방경찰청장이자 서원대 교수를 만난 곳은 용산에 위치한 청소년수련관이다. 경찰 생활을 끝내고 ‘자유인’이 된 이후 재능기부 차원에서 고문을 역임하고 있는 곳이다. 학교폭력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으로, 경찰 역임 당시 아동과 여성 문제에 집중했던 그녀가 은퇴 후에 적을 두고 있다.
“재임시절에 인연이 있었던 곳이라 기쁜 마음으로 찾고 있어요. 제가 학교폭력 방지 일도 했었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고향인 충북 청원에 위치한 서원대학교에서 강의를 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데,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내가 경찰을 했음에도 ‘아, 이런 부분이 있구나’ 할 때가 많아서 보람이 있어요. 실무 경험을 전수해주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딱딱한 제복을 벗고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근황을 전했다. 평생 경찰 생활을 하면서 축적된 피로가 사라져서 더 건강해진 것 같다고 한다.
고졸 출신 여경에서 치안정감까지 경찰계의 살아 있는 여경 신화
“경찰 문화는, 지금은 ‘소폭 문화’가 많이 사라졌어요. 제가 일할 때는 술을 먹어야 자질이 있는 것으로 알아줬거든요. 소주 한 잔 마셔본 적이 없는데,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지방간이 생겼었어요.(웃음) ‘여경들은 소통과 스킨십이 부족해!’ 그런 식의 말을 저에게는 아무도 못 했죠.”(웃음)
직업군에 따른 일반적인 성향이라는 게 있다면, 경찰은 분명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일반인들에 비해서 강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금형 교수는 경찰이라는 집단 안에서도 조금 더 강한 강철 여성이었다. 남성 중심의 조직인 경찰 세계에서 그들과 대등하게 경쟁했다. 업무는 기본이고, 심지어 폭탄주 회식에 임하는 횟수까지 남자와 비교해도 지지 않았다.
1977년 고졸 출신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그리고 경찰청장을 뺀 경찰이 할 수 있는 모든 계급을 모두 지나왔다. 국민적인 굵직한 사건으로 주목도 많이 받았다. 마포경찰서장 때는 연쇄성폭행 사건의 일명 ‘마포 발바리’를 검거했고, 광주지방경찰청장 시절에는 ‘도가니’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일을 벌이고 이슈가 됐다. 경찰에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여성, 성폭력, 청소년 분야를 개척하기도 했다.
“경찰병원에 성폭력 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를 만든 것이 보람 있어요. 여경이 24시간 병원에 근무하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응급진료와 증거채취 등을 돕는 제도예요. 이 센터는 전국 종합병원으로 규모가 늘어났어요. 굉장히 보람을 느낀 제도입니다. 성폭행을 당한 아이가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해서 절규하는 아버지와 통화한 뒤 곧바로 착수한 일이에요.”
지금은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지만, 남성적인 경찰 조직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은 없지 않았다. 그녀를 두고 ‘설친다’, ‘튀려고 한다’면서 뒷담화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 여자로서, 고졸 출신으로서의 편견이 힘든 경찰 생활이었다.
‘외과 의사는 개복 수술도 하는데 뭐!’
임신 중에도 토막 변사체 지문 채취한 열혈 경찰
“둘째를 임신했을 때 토막 변사체의 지문을 채취해야 했어요. 물론 저도 여자니까 고민이 됐죠.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고요. 그런데 어떡해요. 사건을 해결해야 피해자의 억울함이 풀리잖아요. ‘외과 여의사는 개복 수술도 하는데, 이건 좋은 일이다’ 하면서 긍정적인 최면을 걸었죠. ‘태교도 마음먹기 나름이지’ 하면서요. 그런데 엄마 뱃속에서의 기억이 있는지, 둘째는 암을 연구하는 아이가 됐어요.”(웃음)
열혈 경찰 엄마는 강인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범인들의 몽타주 업무를 했다. 강도범의 얼굴과 시신의 얼굴을 많이 봤다. 예쁘고 좋은 것을 많이 봐야 하는 시기에, 그녀에게 주어진 환경은 그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힘들 때도 많았다.
“저는 책에서 힘을 많이 얻어요. 안병욱 에세이집은 교과서와 같은 존재예요. 좋은 문구가 있으면 따라서 쓰기도 하고, 저만의 스크랩북을 만들기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철학가들이 한 말들은 참 좋아요. ‘고기는 얼음 밑에서도 헤엄을 친다.’ ‘매화는 눈보라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이런 말을 보면 마음이 뭉클하고 힘이 나요.”
그녀의 남다른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승진을 해서 급여가 많아진 시기가 있었는데, 마침 이 교수가 업무와 승진시험으로 바쁘던 때였다.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남편은 경제적인 상황이 괜찮으니 그만두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했다.
“흔들리긴 했지만, 이후로 집에서 힘든 척을 하지 않았죠.(웃음) 사무실 책상 서랍에 약을 사두고, 힘들고 몸살 기운이 돈다 싶으면 꺼내 먹었어요. 집에서는 감기에 걸려도 아닌 척하고요.”(웃음)
이 교수는 본인이 고졸 출신의 마이너였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치열함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순경이라서 치열해야 했고, 고졸이라서 공부해야 했다. 하루하루 정말 치열하고 눈물겹게 살아왔지만, 그런 것들이 슬프고 힘들지만은 않았다. 열심히 사는 거니까 잘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한다.
“제 친정엄마는 강한 분이셨어요. 가난한 종갓집 맏며느리로 조부모와 남편의 병수발을 다 드셨어요. 어느 추운 겨울, 빨래터에서 꽁꽁 언 얼음을 깨서 빨래를 하시던 모습은 평생 제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에요. 그런 엄마를 떠올리면서 강인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38년의 경찰 생활을 끝내고 돌아보니,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고 한다. 처음 순경이라는 직함을 달았을 때 본인이 치안정감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루하루의 꿈에 성실한 삶을 살다 보니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최연소 행정고시 합격, 아이비리그 출신, 치과의사
딸 셋을 엄친딸로 키운 비결은?
슬하에 세 딸을 둔 그녀는 소위 ‘엄마’다. 첫째는 22세 때 최연소로 행정고시에 합격해 방송통신위원회 서기관으로 근무 중이고, 둘째는 미국 하버드대를 거쳐 현재 코넬대에서 암을 연구하고 있는 인재인 데다 막내는 국내에서 치의학전문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한 명도 아니고 셋씩이나,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교육을 잘 시켰느냐는 귀에 못이 박일 만큼 많이 듣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간단하고 평범하다.
“아이를 키울 때 저 혼자 세워둔 원칙이 하나 있긴 해요. 사막에서도 혼자 살 수 있을 정도로 자립심을 키워주겠다는 것이요. 현실적으로 제가 다른 엄마들처럼 꼼꼼하게 챙겨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실제로 제가 살아보니 그 어떤 것보다 자립심이 중요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 ‘영국 귀족들은 세 살만 되면 귀족학교로 보낸다. 잘 사는 귀족들도 그렇게 교육을 하는데, 우리도 스스로 해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어릴 때부터 주입시켰죠. 덕분에 숙제나 준비물은 아이들이 스스로 잘 챙겼어요.”(웃음)
특별할 것이 없다지만 서른다섯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대에 입학해서, 또 매번 승진시험에 대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엄마의 삶이 딸들에게 본보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방통대를 졸업한 뒤 석사와 박사 학위도 땄다. 자투리 시간에 녹음기를 듣고,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는 모습에 아이들도 절로 동화가 됐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경찰 업무에 시달리는 엄마에게 “공부는 알아서 할 테니까, 엄마는 나쁜 놈 잡으세요”라는 말을 건넨 딸들이라니, 가족 간의 신뢰와 믿음도 대단한 것 같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4~5학년일 때는, 그때까지는 제가 바쁜 계급이 아니었어요. 주말에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어줬어요. 목욕하고 집에 와서는 서로 제 옆에 눕겠다고 하고, 다 같이 노래도 부르고 좋았죠. 주말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사무실에도 가면서 스킨십을 많이 했어요. 그런 기억이 있어서 오랜 시간을 같이하지 않아도 늘 신뢰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 같아요.”
이 교수의 가족에겐 일 년에 한 번씩 여는 의식이 있다. 연말이나 연초에 다 같이 시간을 내서, 산에 오르거나 가까운 곳에 산책을 가서 가족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때 1년, 3년, 5년 단위의 계획을 세우고 가족 앞에서 각자 발표를 해요. 가족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서로 응원을 하고 칭찬을 해주면 또 1년을 각자 열심히 사는 거예요.”
현명한 부모들은 서두르지 않고 아이들을 믿는다. 이 교수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인정받고 격려 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거밖에 못 하느냐는 질책보다는 일단 믿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