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웨일즈 카디프 출신의 전도 유망한 젊은 내과의사였던 그는 1927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목회를 시작했다. 인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적인 공허감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처방전으로 들고 나선 것이다. 물론 왕립 의사인 토마스하더 경의 조교로 일하면서 세상에 대한 매력 때문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역시 십대 시절부터 삶의 불확실성과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깨달은 바가 컸다. 열살 때 화재로 집을 잃는 고통을 겪었고, 절친했던 형 헤롤드와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불과 몇년 사이에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의 실재에 대해 서서히 눈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직 의사의 소질을 살려 훗날 사람의 영적인 정황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능력을 갖게 된 그는 죄의 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설교자의 첫째 임무로 삼았다.
그런데 그의 첫 사역지인 샌드필드 아벨라불의 B.F.M 교회에는 기도와 인내로써 옮겨야 할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샌드필드는 당시 경제 공황으로 인해 가난해진 사람들이 교회마저 멀리하는 분위기였고, 목회자들 사이에도 역사적인 칼빈주의가 퇴조하고 낙천적인 자유주의가 득세할 때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많은 책들을 읽으며 칼빈주의 감리교도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그는 능력 있는 전도 설교를 통해 교회 부흥을 일으켰다.
그의 2차 목회 사역은 1938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시작되어 은퇴하기까지 3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약 500명의 성도로 다시 시작된 교회는 1951년 어느덧 주일 예배에 2,500여 명이 참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이후 로이드 존스는 런던뿐 아니라 유럽 전역과 미국까지 다니며 순회 설교를 했는데, 캠벨 몰간과는 또 다른 그만의 독특한 강해설교 방식을 발전시켰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준비하거나 강단에 설때 세 가지 원리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첫째,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잘 파악하고 조직신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라고 권한다. 둘째, 설교문은 반드시 강해적이어야 한다. "강해설교"란 한 구절 또는 몇 구절에 대한 강해가 아니며, 그에 대한 연속적인 주해도 아니고, 단지 본문 에 대한 탁월한 설명을 모은 것도 아니다. 그는 설교문은 마치 교향곡과 같이 특정한 형태를 가져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셋째, 설교는 성령의 통제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 그는 이것을 설교의 전달 행위를 지배하는 핵심원리로 파악했다. 탁월한 복음주의자인 로이드 존스는 학문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대중적 강해설교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베드로후서 강해설교"를 시작으로 성경의 한 책에 대한 연속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 21년 동안 줄곧 연속 설교를 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은 "산상수훈 강해설교"와 5년에 걸쳐 끝마친 "에베소서 강해설교", 그리고 장장 12년이나 걸린 "로마서 강해설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60여 권이 넘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또한 한국 강단에서 강해설교의 물결을 일으킨 설교자들을 살펴보면 모두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저술들을 통해 그를 만날 때에는 설교관과 해석학적 원리나 방법 등을 연구하는 일 외에 그가 지닌 영적 능력의 비결을 먼저 발견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로이드 존스는 ‘마지막 청교도’, ‘마지막 웨일즈 칼빈주의 메도디스트’,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한사람’, ‘20세기 복음주의 지도자 5인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팩커, 존 스토트, 프란시스 쉐퍼, 빌리 그레이엄)가운데 한사람’ 등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마다 로이드 존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로이드 존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우리로 하여금 로이드 존스를 연구하고,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우고자하는 충분한 동기를 부여해준다.
로이드존스가 미친 영향력의 핵심
로이드존스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로이드 존스는 이레네우스와 오리겐 같은 교부도 아니요. 루터와 낙스처럼 위대한 개혁자도 아니요, 존 웨슬리나 도슨 트로트맨처럼 어떤 교파나 선교단체를 창설한 사람도 아니다. 또한 어거스틴이나 칼빈같은 뛰어난 신학자도 아니었으며, 윌리암 케리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위대한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림들은 로이드 존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일까? 물론 로이드 존스가 당대의 영국복음주의 교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는 1950년부터 시작되어 매해 크리스마스전인 화, 수 이틀간 6개의 강의 토론을 하는 모임인 웨스트민스터 대회를 통해서 개혁신학, 특히 청교도신학에 대한 관심을 영국에 새롭게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한달에 한번 모이는 웨스트민스터 목회자 모임을 통해 영국의 400여 목사들에게 목사로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또한 IVF로 많이 알려진 국제 복음주의 학생단체의 설립과 기초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젊은 목회자들이 “우리는 진리의 깃발사(Banner of truth)의 자식들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며, 청교도 신학의 원전들을 수 없이 많이 복간해낸 영국의 유명한 출판사 Banner of truth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런던신학교와 청교도 신학의 많은 자료를소장하고 있는 복음주의 도서관 설립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사실 이러한 많은 공헌은 이 중 한 가지만 하더라도 훌륭한 업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로이드 존스가 미친 영향력은 근본적으로 그의 설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설교자로서의 로이드 존스와 또한 그의 설교만이 아니다. 우리는 로이든 존스에게서 더 많은 것들을 교훈 받을 수 있다.
어떻게 로이드 존스를 접근할 것인가?
로이드 존스를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1,600개 이상 남아 있는 그의 설교테이프를 통해서 그를 이해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병행 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간적, 금전적, 언어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인해 그의 테이프를 듣고 그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다. 그래서 본고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그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한다. 필자는 아직까지 로이드 존스를 접해보지 못한 독자나 로이드 존스를 체계적으로 알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다음의 순서를 제안한다.
(1) 로이드 존스에 대한 전기를 읽어라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자서전이나 전기 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전기를 통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되고, 그의 삶과 사역을 이해하는 배경을 알게 되며, 그의 신앙과 신학의 성장 과정과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의 전기에는 그의 외손자인 캐서우드(Catherwood)가 쓴 전기와 로이드 존스 밑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후에 Banner of truth출판사를 이끌며 전기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이안 머레이(Iain H. Murray)가 쓴 전기가 있다. 캐서우드의 전기는 간략한 것이 특징이고,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친밀성을 가졌던 경험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장점이 있다. 이에 반해 머레이의 전기는 두 권으로 된 아주 방대한 분량이 특징이며, 로이드 존스 신학과 사역을 아주 상세하고도 밀도 있게 그려낸다는 장점이 있다.
(2) 책을 통해 만나보는 로이드 존스
다음에 소개되는 4권의 책들은 로이드 존스의 중심사상을 바로 이해하고, 그의 다양한 면모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입문서라 할 수 있다.
「목사와 설교」4
「목사와 설교」는 설교에 관한 수많은 책들 가운데 이미 고전에 속한다. 이 책은 로이드 존스가 1968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설교 사역을 마감한 후 1969년에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에서 6주 동안 강의했던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20세기 최고설교자의 44년간의 설교사역의 진수가 들어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온 설교에 관한 다른 책들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도움을 주고 있다. 먼저 그는 목회자들에게 설교의 기법과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목회자들로 하여금 참된 설교가 무엇이며, 목회사역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돌아보도록 한다. 그리고 나아가 설교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에서 무엇보다 성령의 역사, 즉 인간의 준비와 노력이상의 신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20세기 교회에, 설교가 무엇인가를 산증인으로서 보여주었던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고, 그의 설교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부흥」5
로이드 존스의 사상과 사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의 성령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이해하는 비결은 그의 부흥관을 이해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열망은 웨일즈의 에버라본에서의 초기사역(1927~1938)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의 후기사역(l939~1968)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학과 목회사역에 있어 일관된 그의 가장 중요한 관점이자 관심사였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부흥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격이 된다. 반대로 로이드 존스 부흥관을 파악하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로이드 존스는 당대 교회 문제의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부흥”이라고 믿었다. 즉 부흥이 교회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부흥을 교회사에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부흥의 핵심을 “동시에 많은 사람(교회, 지역, 국가 전체)위에 성령이 임하심, 찾아오심, 부어주심” 으로 정의하고 있다.
「부흥」은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부흥관을 1959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설교 시간에 약 6 개월 동안 연속적으로 설교한 것을 모은책 이다. 이 부흥에 대한 연속설교가 행해지게 된 배경은 1859년, 즉 이 설교들이 선포되기 100여년 전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미국 등 영어권 사용의 전 지역에서 대규모 부흥이 있었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이드 존스는 이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100년 뒤에 돌아보는 시점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영국교회와 전 세계 교회의 상황이, 1859년에 일어났던 부흥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임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고, 이에 대한 부담으로 부흥에 대한 연속설교를 토해놓게 되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부흥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과 부흥신학에 대한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로이드 존스의「부흥」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흥을 갈망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부흥 역사에 대해서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로이드 존스의 가슴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부흥에 대한 열망의 불씨”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옮겨 붙게 될 것이다.
「성령세례」6
로이드 존스의「성령세례」는「부흥」과 함께 짝을 이루고 있는 책이다. 부흥이 교회적 인 문맥에서의 성령의 부으심을 다루고 있다면, 성령세례는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성령의 부으심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이 두 권의 책을 자매편으로 생각해서 함께 보는 것이 좋다.
「성령세례」는 1964~5년 사이에 행해진 요한복음 강해설교의 한 부분을 모아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존스는 이 책에서 크게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세례의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존스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성령의 부으심’. 성령 충만, 성령의 능력을 옷 입음’, ‘성령의 임하심’, ‘성령의 내리심’. ‘성령을 받음’ 등을 달리 표현하는 동의어라고 이해하면서, 기본적으로 성령세례를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또한 체험적, 의식적인 면에서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명백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세례의 증거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이해 등의 주관적인 증거와 얼굴의 표정이나 전도나 설교의 능력 등으로 나타나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임을 강하게 역설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러한 성령세례를 주실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성령세례관은 오순절교단의 성령세례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관은 20세기 오순절 교단의 성령세례관이 나오기 훨씬 이전의 교회의 부흥의 역사에 그 뿌리를 박고 있으며, 부흥관과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관을 제대로 추적하기 위해서는 16세기 개혁자인 칼빈, 17세기 청교도였던 리차드 백스터, 토마스 구드윈, 존 오웬 그리고 18세기 부흥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의 성령관을 참고로 해야하고, 넓게는 부흥역사 자체를 고려해야 한다.7
「청교도 신앙」8
로이드 존스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그와 청교도와의 관련성을 아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부흥에 대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었다면 로이드 존스의 머리 속은 청교도 신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 설교와 목회는 청교도적인 색채를 짙게 띠고 있다. 그래서 그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부르기도한다. 그만큼 그는 청교도를 사랑했고, 청교도를 잘 이해했고, 청교도 정신을 20세기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복원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청교도에 대한 연구와 적용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해마다 청교도대회의 주강사로서 후배들에게 청교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했고, 청교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접근하게 하기 위해 Banner of Truth사를 통해 청교도원전 들이 복간되는 것을 도왔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청교도에 대한 박식한 이해와 청교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 바로 이「청교도 신앙」이다.
이 책은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청교도연구회에서 행한 19회분의 강의를 모아놓은 것이다. 즉 한해에 1회씩 강의한 것으로, 그때그때의 영국교회의 상황과 교회역사에 비추어 청교도가 그들에게 주는 실제적 도움을 받고자 의도 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체제와 내용은 통일성이 없고 산만하다. 따라서 이 책은 학위논문이나 연구 논문처럼 학문적으로 체계 있게 청교도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청교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청교도를 사랑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청교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보다 좋은책이 없다. 이 책은 비단 청교도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존 낙스, 휘트필드, 하월 해리스, 조나단 에드워드 등 교회사의 중요한 영적 거장들에 대한 전기적 관심과 좀더 넓게는 부흥사와 교회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촉발시켜준다.
(3) 로이드 존스의 방대한 설교집들을 보라
지금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들은 50여 권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이미 발간된 그의 설교집들은 거의 다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로이드 존스의 셜교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내용에 따라 설교를 생활체험설교와 교리설교 그리고 전도설교로 구분한다. 또한 이러한 구분에 따라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시절 주일 오전에는 주로 성도들의 삶의 체험을 다루는 설교를, 주일 오후에는 전도 설교를 그리고 주중에는 교리 설교를 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파악하려면, 이 세 가지 유형의 설교를 모두 고려해야 그를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출판된 그의 설교집들은 자연히 위의 세 가지 유형의 설교 가운데 하나에 속하며, 그의 설교집을 읽을 때는 이 설교가 어떤 유형의 설교인가를 알고 읽는 것이 유익하다. 만일 이러한 유형을 이해하지 않고 그의 설교 중 어느 한 부류의 설교집만으로 그를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로마서 강해」는 교리 설교의 대표적인 예이고, 「에베소서 강해」는 생활설교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초기 웨일즈 사역기간 동안 행해진 설교를 모아놓은「전도설교」를 통해서 그의 전도설교의 특징을 잘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로이드 존스의 설교 진면목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의 전도설교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로이드 존스와의 만남
나는 로이드 존스를 만나본적도, 그의 설교를 직접 들어본 적도 없다. 그가 활동했던 무대는 영국이었고, 그의 생존연대(1899~ 1981)는 거의 20세기와 더불어 시작되어 20세기의 끝 무렵에 마감되었으니 나와는 두세대의 차이가나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나는 막 대학 생활을 시작한 때였으므로 그때 나는 로이드 존스 이름을 듣지도 못했다.
내가 처음 로이드 존스를 접하게 된 것은 신학대학원 3학년 시절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였다. 「로마서 강해」를 몇 장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너무 논리적이고 딱딱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짧은 본문을 가지고 너무나 길게 설교해 간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학생으로서 설교집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그렇게 많이 느끼지 못했던 나는 곧 그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이드 존스의「부흥」을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때까지 내가 경험해왔던 교회의 모습과는 다른 교회의 모습이 그 책에 그려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부흥된 교회의 모습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 새로운 신앙세계였고, 너무나 놀라운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 때 이후로 로이드 존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변했다. ‘이런 설교를 한사람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 단순히 지적인 놀음만 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로마서 강해」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때부터 나는 하루에 2권씩 로마서 강해 8권과 에베소서 강해 8권을 독파해 나갔다. 하나님의 복음이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통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감동, 감격, 희열, 감사…, 나에게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후에 로이드 존스가 쓴 모든 책을 구해서 읽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복음과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당연히 나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목회와 설교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신학대학원 3년간 배운 것보다 더 크고 심오한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들은 대략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목회자인 우리 모두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1) 설교에 목회자로서의 목숨을 걸라
우리가 로이드 존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설교의 중요성과 우선성에 대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런던에서 제일 큰 개혁주의 교회 가운데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약 30여년 간행한 설교를 통하여, 20세기 교회에 설교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목회사역 가운데 설교는 다른 것과는 대체할 수 없는 목사의 고유한 직무이며, 가장 최우선적인 직무가 되어야함을 보여준 것이다. 로이드 존스 이래 20세기 후반의 교회는 성경의 한 책을 연속 강해하는 설교 붐이 일어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목회설교의 가장 중요한 형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론 설교가 목회의 전부는 아니다. 목회는 분명 설교하는 것 이상의 많은 영역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최우선 순위는 무엇보다도 설교사역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확인시켜준다. 또한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교회를 변화시켜 오셨는지에 대한 확신을, 교회역사를 통해서 또한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설교를 하는 사람도, 설교를 듣는 사람도 설교를 통해서는 아무 것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배에 임하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오늘날 설교에 대한 불신과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설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설교자로 부름 받은 자신의 소명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또한 설교의 중요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대의 수많은 방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설교사역에 자신을 전력투구하도록 격려한다.
(2)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
로이드 존스를 통해 우리는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게 된다. 에버라본 시절 로이드 존스는 목회현장에서 작게나마 부흥을 경험했고, 평생토록 부흥이 다시금 자기 시대의 교회 위에 임하기를 기도했다. 그는 자기를 18세기의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8세기는 그에게 있어 부흥과 각성의 시대로서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영광스러운 경험을 한 시대였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휘트필드, 하월 해리스, 다니엘 로랜드,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대였다.
존스가 말하는 부흥이란 소위 ‘부흥회’나 ‘전도 집회’, 혹은 ‘교회성장’이나 ‘교회 개혁’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부흥은 한마디로 초대교회의 오순절성령 부으심의 반복이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이 볼 수 있는 증거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하심이기도 했다. 우리는 로이드존스가 강조하고 있는 부흥에 대한 시각을 통해 그 동안 한국교회에 유행처럼 번졌던 여러 가지 운동들, 즉 제자훈련, 귀납적 성경공부, 강해설교, 전도폭발, 경배와 찬양, 은사집회 등등 끝없는 각종 프로그램과 방법과 수단들을 통해서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했던 우리의 노력들을 정직하게 재평가하고,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 또한 교회의 문제에 대한 피상적인 진단과 해결 방안이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책에 대한 시사를 받게 된다.
인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이 난무하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 속에서, 부흥이야말로 참든 교회를 깨우고, 죽은 교회를 살리며, 무기력한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수단이라는 로이드 존스의 외침은 오늘 우리가 충분히 귀담아들어야할 교훈이다.
(3) 교회사를 읽어라
로이드존스의 교회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특히 청교도나 부흥사 그리고 신앙위인들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압도하고 놀라게 한다. 많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사는 신학교 다닐 때 배웠던 과목의 하나거나 교회사 교수만이 독점적으로 공부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목회일선에 있는 목회자는 누구보다도 교회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한다. 그래야만 현재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형편을 다른 시대의 교회와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 현실의 장 단점을 깨닫게 되고 무엇이 성경적인지, 또한 무엇이 전통적인 것인지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역사하신 시대의 교회 모습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 교회가 나가야할 목표와 방향감각을 가지게 된다. 이런 면에서 로이드 존스가 강조하고 있는 교회사의 중요성, 특히 모든 시대의 교회의 모범이 되는 청교도 시대와 부흥시대의 교회 모습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통하여 오늘의 현실을 해석하고, 나아가서 내일의 한국교회를 만들어가는 가장 좋은 자원이자 이정표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4) 조직신학의 기초를 닦아라
우리는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목회자와 설교자에게 조직신학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된다. 로이드 존스가「로마서 강해」와 같은 엄청난 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직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기능한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의「로마서 강해」는 로마서 본문을 통해서 조직 신학을 가르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조직 신학은 성경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켜 주고,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교리는 사실 성경해석의 열쇠요, 우리 경험의 지표가 된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교회를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실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조직신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교리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서 너무나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교리는 지루하고 딱딱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말고, 성도들의 생활에 관련된 흥미 있는 주제를 설교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이 결과 성도들의 신앙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편협하게 흐르는 한편 교리와 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문제점을 낳기도 했다.
성도들에게는 피부에 직접 느껴지는 현실적인 생활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또 한편 인류 역사 전체를 주관해가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일하심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성경론, 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주제들은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어야하며,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야 할 필수적인 내용들이다. 이러한 교리적 내용들은 사실 성경이해와 함께 성도들의 생활에 있어서 기본이요 뼈대라 할 수 있다. 모든 분야에 있어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이, 신앙과 삶에 있어서도 기본기와 같은 그리고 뼈대와 같은 교리적 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사역들을 통해서 이러한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전통적인 교리 교육의 필요성을 배우게 된다.
(5) 균형 잡힌 독서를 하라
만약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신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분이라면 어떻겠는가? 바로 이 20세기 최고의 목사요. 설교자로 일컬어지는 로이드 존스는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목회자였다. 그는 영국의 제일 촉망받는 의사로서 인정받고 있던 중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고 곧바로 목회 일선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정식으로 신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그에게 목사 안수를 하는 것에 그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장로교계통의 한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된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일반적인 과정을 초월한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어떻게 신학교의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기독교의 유산과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영국교회의 가장 탁월한 목회자요, 설교자요, 신학자로 우뚝 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가? 이 비밀은 로이드 존스의 독서 생활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은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신학교나 마찬가지였고, 책의 저자들은 그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로이드 존스는 신학교에서 살아있는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었으나, 책을 통해서 2,000년 교회사의 가장 훌륭한 신학 스승들로부터 신학과 목회를 배웠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독서는 분량과 분야에 있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 그 중에서도 교회의 부흥사와 부흥 시대의 중심인물들 그리고 청교도 신학,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 전집 등은 로이드 존스가 가장 애독한 책의 목록들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딸이 자기 아버지를 회상할 때, 독서에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로이드존스는 독서를 많이 했다. “부친하면 우리는 독서를 연상합니다. 물론 저의 부친은 설교를 하는 분이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는데 보냈습니다. 읽어도 애독을 하였고, 정규적으로 읽었으며, 많이 읽었습니다.” 9
책이란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느냐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목회자들에게 균형 잡힌 독서를 권한다. 그가 말하는 균형 있는 독서가 무엇인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균형 있는 독서를 하십시오. 균형이 깨진 독서처럼 거짓된 지식을 낳는 것도 없습니다. 만일 신학서적만 읽는다면 이러한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균형 있는 식사를 하듯이 독서에서도 언제나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겸손하게 말씀드린다면 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신학서적과 전기 읽는 것을 서로 균형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그렇게 했습니다. 휴일이면 항상 그랬고, 휴일뿐만 아니라 매일 그렇게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휴일에는, 아침에는 신학책을 읽고 밤에는 전기를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10
목회자로서 독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자신의 목회사역에 정말 유익이 되도록 독서를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편식하는 사람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만을 골라 읽기 쉽고, 실제로 자신의 신학과 목회에 뿌리와 뼈대가 되는 책을 꾸준히 읽기보다는 당장 급하게 써먹을 수 있는 책들만을 읽기가 얼마나 쉬운가? 목회자에게 필요한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가슴을 위해서 우리는 로이드 존스가 제시하는 경건서적과 신학서적을 균형 있게 읽는 지혜가 필요함을 배우게 된다.
나의 멘토, 나의 평생 스승 로이드 존스
우리 시대에는 참된 영적인 스승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는 영적인 스승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목회에 있어 스승을 꼭 살아있는 사람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 동시대의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전 시대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우리의 멘토요. 우리의 평생 스승으로 삼고 그들에게서부터 진정한 목회와 신학을 배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로이드 존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나 스승 가운데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며, 또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중의 하나이다. 로이드 존스를 알게 되면서 나는 목사로서 나의 신앙과 신학, 설교와 목회에 전환점을 맞이했고, 평생 공부와 목회에 목표와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를 만나고 난 후 나는 그를 길잡이로 해서 더 많은 스승들을 알게 되었다. 어거스틴(5세기), 칼빈(16세기), 존 오웬(17 세기), 조나단 에드워드(18세기), 스펄전(19세기) 등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지금 나는 그들을 나의 멘토요. 나의 평생 스승으로 삼고 있다. 이들 중에서도 로이드 존스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평생 배울 수 있는 영적 거인이요, 스승이 되어줄 것 이다. 로이드 존스를 만나 그에게서 배워보라. 그는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백금산 / 고려대와 총신대신대원(M.Div, Th.M)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서울 신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를 다시 생각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의 후예”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 리전트칼리지 조직신학 교수
“때로 보면 그는 청교도 같아요.” 판단의 근거는 전혀 잘못된 것이지만, 세익피스피어의 글에서 마리아가 심술 꽃은 익살광대 말볼리오를 가리켜 했던 말이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 마틴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도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청교도’ 라고 부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의미의 청교도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청교도들이 남의 흥이나 깨고 항상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청교도들은 쾌락이 경건을 배제하거나 역(遊)으로 경건이 쾌락을 배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처럼 청교도들은 오히려 이런 자세를 정죄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도 그들과 같은 노선을 걸었다. 금욕주의를 가장하는 것은 미신적인 어리석음 아니면 어린애처럼 미숙 한 것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 존스는 순수한 청교도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청교도 목사들은 언제나, 건전한 경건은 명랑하고기쁨이 충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이드존스박사는. 공적인 자리에서 엄숙해 보이고 카메라 앞에서도 보기 좋은 미소를 지은적은 없지만, 확실히 매우 명랑하고 상냥하며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즐거움이라는 하나님의 선물, 즉 피조물을 즐기는데서오는 기쁨과 구원의 즐거움, 이것 은 로이드존스가 늘 강조하던 바이다.
청교도의 노선을 따라
로이드 존스 박사는 역사적인 실제의 청교도 사상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사상의 대부분에 진심으로 공감하였다. 그는 자신이 17세기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18세기 사람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이 말은, 복음 전도와 부흥신학에 있어서 조지 횟필드 및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스타일이 교회를 위한 로이드 존스 자신의 최고 이상이자 자기 삶의 최고 목표라는 의미였다 .
그러나 그가 17세기의 청교도 자료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설교 시에 그가 청교도 저술가들의 글을 여러 차례 언급한점, 목회 초년병들과 심신이 지친 목회자들에게 청교도의 서적들을 읽으라고 끊임없이 권한 점, 그자신이 이 저술들을 탐독했다는 사실 (그의 결혼예물 가운데는 오웬과 백스터의 작품들도 있었다), 1950년부터 1979년까지 연례의 청교도와 개혁주의 연구모임(Puritan and Reformed Studies Conference, 나중에는 주관자가 바뀌고 Westminster Conference로 개칭됨) 을 주관했다는 사실, 출판사Banner of Truth Trust의 청교도 서적 복간 프로그램을 후원한 사실, 청교도들의 저술과 청교도에 관한 서적들을 주로 다룬 복음주의 문고 (Evangelical Library)의 사역을 뒷받침한 점 퉁이 그런 사례들이다 . 또한 1971년의 "청교도사상과 그 기원” (Puritanism and its Origins)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도 했다. 1925년부터 “청교도들과 그들의 작품들에 관한 살아있는 진정한 관심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사역 전체가 지금까지 이것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그가 일생 동안거의 언제나 청교도사상에 의존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놀랄 만큼 독자성이 강한 사상가였으나 자신이 받은 유산(웨일즈인, 비국교도, 개혁주의)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 유산에 대단한 매력을 느끼고 이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리고 이 유산들 중에서도 역사적 청교도들이 대단히 영예로운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내가 로이드 존스 박사를 처음만난 것은, 레이몬드 존스톤과 내가 둘 다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서 , 연례 청교도 연구모임에 관한 우리의 비전을 박사님 앞에 펼쳐 보이고 이를 실현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그의 교회 집무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당시 이 아이디어를 환영하면서 그가 보여준 침착한 모습 속의 상기된 표정에, 그리고 극도로 친절한 그의 태도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 그는 우리를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손님으로 환대하면서 우리 모임의 영구의장직을 수락하고, 교회의 여성도들을 통해 점심식사와 차까지 대접하였다. 그 후 해마다 그는 이틀간의 이 모임을 어길 수 없는 중대한 약속으로 간주하였다. 어느 해에는 내가 하루 밖에 참석하지 못하자 나의 우선순위가 잘못됐다며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책망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 회의의 참석 인원이 1950년의 20 명에서 200명 이상으로 늘어났을 때 박사님은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즉 그때까지 박사님은, 레이몬드와 내가 청교도 신앙과 경건의 표준을 세상에 알리고자 애쓰면서 보여준 이러한 열성(熱誠)을, 하나님께서 영국에서 영적 사역을 부흥시키고 있다는 일련의 징후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왔으므로, 그 자신도 이 회의에 할 수 있는한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
청교도사상연구모임에서 그는 탁월한 기억력으로 연사가 발표한 내용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모임의 참석자 대부분은 목사들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토론문제들은 목회 지향적이었다. 1959년부터 1978년까지 그가 폐회강연을 맡았는데, 이때 발표한 주제들이 대단히 흥미롭고 다양하다. 그 중에는 “부흥 : 역사적, 신학적 조망” (1959), “존 칼빈과 조지 휫필드” (1964), “프랑스혁명과 그 후” (1975) 등 도 있다. 이런 것들과 기타 많은 주제들은 사건과 인물, 역사에 대한 그의 놀라운 식견과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폐회강연을 통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적 건덕을 위한 열정적인 지혜와 비전, 정신적 지극과 도전을 주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여러 면모들
우선, 그는 웨일즈인이었다. 웨일즈인답게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민감하고 따스하며 매력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전형적인 웨일즈인처럼 감상적이지는 않았다. 또 전형적인 웨일즈 설교가처럼 설교에서 제멋대로 상상의 비약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법정의 변호사처럼 말하며 사고했다.
둘째로, 로이드 존스는 훈련을 잘 받은 유능한 의사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과거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신학적 영적으로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 하고서, 여기에 근거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조직적으로 분석하며 고장난 것과 결여된 것을 찾아내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남이 말하지 않은 것이 실제적인 죄나 오류 못지않게 중요한 영적, 신학적 허약의 표정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바트 병원(Bart's Hospital)과 할리가(Harley Street) 시절에 도 의학적인 면에서 명석한 진단자였듯이 그는 신학적, 영적으로도 명민한 진단자였다. 그의 마음을 끌었던 청교도 저술가들의 뛰어난 장점 가운데 한 가지도 이것이었다. 그들 역시 영혼의 의사로서 성경에 따라 신학적, 영적으로 바른 것을 깊이 이해하고 , 이틀 속에서 영혼의 문제를 철저히 진단하며 분석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 로이드 존스 박사는 걸출한 은사와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성경적, 합리적, 실천적, 목회적신학자였다. 그는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지만 뜻을 다해 독학하며 끊임없이 독서하고 이슈들을 철저히 사고, 묵상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와 만난 이후를 보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보수주의적 개혁주의를 견지하며, 어느 신학적 모임에서든 탁월한 식견으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였다. 그는 책을 속독하지 않고 천천히 읽었다고 하나 각 주제에 관한 주요한 서적들을 정기적으로 탐독 하고 그들의 견해가 자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검토하였다.
넷째 , 그의 목회사역에는 선지자적특질(quality)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내가 그와 만난 이후 그는 종교적 제도권으로부터, 그리고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종교적 주류문화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는 웨일즈 교회들의 모호한 감상주의와 잉글랜드 복음주의자들의 반지성주의 및 성경과 복음에 대한 양쪽의 불신앙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물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가운데 그에게 경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기독교계안의 그의 동배들은 그를 유능하지만 매우 유별난 괴짜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진보주의적인’ 입장에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로이드 존스를, 오래 전에 그 생존력을 상실한 사역 형태로 후퇴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그의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도 없었다. 주류를 거스려 헤엄치며, 인기 없는 진리를 옹호하고, 제도권의 인습적인 만족을 비판하며, 세상과 교회 안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재촉하며, 현대주의의 파산을 선포하고, 현대주의의 교만한 대표자들에게 옛 길을 지적한다는 것은, 권력의 회랑에서 한번도 인기 있는 처방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
하지만 분명 그에게는 이런 고립에 대처할 역량이 있었다. 스펄전이 세속화논쟁(Downgrade controversy)에서 패배하고, 케직대회의 가르침이 국교회의 칼빈주의를 침몰시키며,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이 웨일즈의 강단들을 점령한 이후 개혁주의 신학의 실(絲)은 사실상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2차 세계대전 후에 개혁주의 신학의 실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복음주의를 엮음으로써 이것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의 사역이 이런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데는 기독학생회 (Inter-Varsity Fellowship)의 초대 회장 더글라스 존슨(Douglas Johnson)의 공헌이 컸다. 로이드 존스 박사를 후학 양성 사역에 끌어들인 이가 그였다. 이를 통해 로이드존스는, 부상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식견을 갖추어 줄 수 있었다. 또한 로이드 존스를 설득해 로이드존스 유력한 목회자 친교단체, 웨스트민스터 펠로우집을 만들게 한 이도 존슨이었다. 이 단체를 통해 로이드 존스는 사실상 초교파적으로 수백 명의 성직자들에게 주교와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사는 일생 동안 교계의 동배들 대다수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살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때문에 그가 유달리 청교도들에게 친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청교도들은 종교개혁 이후 국교회가 설립될 당시 따돌림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가 아는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성경적인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떤 형태의 비인기나 거부당함도 사양하지 않는 결단력 있는 사람들 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골수 개혁파, 교회 중심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교회 중심주의자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진작시키는 핵심기관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항상 교회의 상태였다. 전반적으로 그의 설교는 시종일관 두 가지 분야에서 출발하고, 그 분야에서 맴돌며, 그 분야에 안착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두 가지 분야는 이것이다. 그 하나는 교회의 상황이었다. 교회의 상황에 대한 그의 최종적 처방은 교회가 옛날의 신앙과 실천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성령의 부흥이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최종적 처방은 3R(Ruin 멸망. Redemption 구속, Regeneration 중생)의 성경적 복음이 성령의 권능으로 선포되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박사는 일차적으로 스스로를 전도자로 생각했으나 사실 교회의 상태는 잃어버린 자들의 상태 못지않게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떤 국교도도, 심지어 국교파 청교도도 그 자신처럼 교회에 대해 진지하게 염려하지 않았으며 염려할수도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1960년대에 그는 이에 관해 나에게 자주이야기 했었다.
그의 교회론은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 하였다. 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고 죽는 날까지 공식적으로 장로교인이었지만 그는 교회정치체제와 관련해 ‘확신 있는 독립교회주의자’ (그가 나에게 말할 때 사용한 표현임)가 되었다. 그리고 성인 세례방식과 관련해, 침례 아닌 관수식(뿌리거나 적시기)세례를 끝까지 견지하였지만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유아세례는 중단하였다. 신조와 의식 절차의 이러한 혼용은 그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흔하지 않은 행위였다. 그러나 그는결코 교회정치 체제를 이슈로 삼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서로 간에 다양한 조직과 관습을 성경에 직접 반하지 않는 이상 이의 없이 용납하고, 힘을 한데 결집해,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지도와 권위 아래 교리적 순결, 영적 깊이, 선교적 생명력을 공동으로 추구하자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하면 기독교의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교회의 실질적 건강이 촉진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처음에 그는 교파에 관한 문제를 한 켠에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주요개신 교단들이 성경적 개혁신앙과 삶을 받아들이고 영적 부흥을 함께 도모할 가망이 보이지 않자, 그리고 그들과 WCC의 연계가 그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리라는 판단이 들자,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이들 교파에서 탈퇴해 옛날식 독립교회 형태의 새로운 ‘무교파’ 연합회를 결성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고 그는 생각하게 되었다. 1960년대 에, 2천명의 청교도 목사에 대한 1662년도의 추방사건을 기념하는 집회 이후 로이드 존스 박사는 자신의 이런 견해를 공표하고 복음주의 내의 교단 동료들에게 분리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제스처는 양면으로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66년 런던에서 열린 비분리주의적 복음주의 동맹의 대규모 집회에서 박사는 힘을 다해 이를 호소하였으나 존 스토트가 이를 논박하고 나섰다.
본질적으로, 이 분리에 관한 로이드 존스 박사의 논증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주류 교단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에큐메니칼의 곱지 않은 친선 정책에 비추어볼 때 이 분리가 지혜로운 처사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이 분리가 복음주의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효과적이고 영광스러우며 그리고 필수적이기까지 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하나됨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종파분립적인 행위라고 보았다. 셋째는 복음주의자들이 현재 자 교단 내의 온갖 악과 연합해 죄를 짓고 있으므로 분리야 말로 당연한 임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복음주의 목사들의 대부분은 자 교단 안에 머물며, 그 안에서 계속 투쟁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결론을 내렸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생애의 마지막 15년간 이 이슈를 역설하고 이에 대해 특히 국교도들에게 압력을 넣게 되자 개인들 간에 소원(陳遠)현상이 발생하였다. 필자도 이를 면하지 못했다. 박사의 그런 주장은 복음주의 공동체를 분열시켰다. 박사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은 분리하지 않는 형제들과 협력하는 것이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그의 전반적인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해하기에는 이것이 성경적이고 청교도적인 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이것은, 미봉책을 거부하는 거룩한 열심, 그리고 교회의 사태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체 없는 개혁’을 역설하는 거룩한 갈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이런 정신이 청교도 사상의 실질적인 핵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로이드존스박사의 분리운동은교회의 순결에 대한 청교도적 이상을 따르고자 한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분리운동과 관련해 그가 현실주의적 태도를 결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해 볼만하다. 박사는 원칙적인 이슈에 관해서 공적으로 강력히 설파하였으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유사교단(‘비교파적인’ 교파)의 청사진을 만들어 자기 비전을 구체화 시킨 적이 없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요구된다는 점을 제외하고 대안이라 할만한 것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조직하는 일을 싫어하였으며, 어떤 모험적 사업이 지나치게 고도로 조직화될수록 영성이 저하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는 점을 언제나 잊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확실히 유능한 경영자였다. 그 리고 분명 새로운 집단을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솔직히 고백하고 싶은 점이 있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분리 주장의 성공적 결실을 바랐다기보다 분리 요구의 제스처만을 보이고, 이에 따라 복음주의적 국교도들 과 침례교 연맹안의 침례교도들,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하는 일 그 자체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남에게 거부당할 것을 얘기하면서, 당대에는 망각된다 하더라도 후대에는 알아줄지도 모를 어떤 의의 깊은 증언을 남기는데 지신의 주된 목적을 두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나에게는 있다. 계획 없는 말만의 이 분리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아마도 옳은 판단 일 것이다. 즉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고 광범위한 행동 욕구를 일으키기 위해 그 자신이 말했던 내용을, 성령께서 과연 사용하실 것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는 직접 현장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교파의 우두머리가 되려 하는 듯한 어떤 모습을 비침으로써 자신의 선지자적 역할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 그를 비난 할 수 있겠는가?
로이드존스가 본 청교도 사상의 본질
로이드 존스 박사의 강연 “청교도와 그 기원”, “청교도 사상의 창시자 존 낙스”에서 청교도 사상의 본질에 관한 그의 견해가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는 청교도 사상을 하나의 ‘정신적 성향’으로 보았다. 이것은 독자적인 성경연구에서 출발하고, 연구결과를 교회생활에 적용할 것을 강조하며, 교회에 대한 행정당국의 통제에 도전하고, 개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때는 언제나교회 제도권과 결별하는 그러한 정신이다. 성경 진리의 적용에 언제나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었 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청교도가 없다.… 적용은 진정한 청교도의 특정이다.” 요컨대 “청교도는 주로 순수한 교회,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청교도들이 가르친 것들과 은혜의 교리를 강조한 점, 그리고 목회신학을 강조한점 등을 좋아하고, 이런 면들에 아무리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더라도 순수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에 일차적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확실히 청교도임을 지칭할 자격이 없다.… 교회론을 핵심에 두지 않는다면 진정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견해, 청교도 정신, 청교도의 이해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이런 견해는 백번 타당하디만 여기에 추가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극히 현대적이었던 선대의 사람 칼빈처럼 중세의 유산을 물려받은 청교도들도 교회의 신앙고백, 질서, 권징, 예배 및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경건과 정직, 그리고 인간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와 중용, 이 모두를 단일한 완전체의 구성 요소로 보았다는 점이다. 청교도들의 마음에서는 개인과 사회와 교회 공동체의 모든 요소가 상호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모두가 ‘여호와께 성결’ 해야 했다. 두 번째는, 특정의 정책적 문제나 기타 많은 문제들에 관해 청교도사상 내에서도 견해가 다양했다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박사 자신이 말한 대로, “대략 1640년 무렵에는 본질적으로 국교도적인, 원래의 청교도가 나타났다. 물론 이들은(영국국교회로부터) 비분리주의적이었다. 다음에는 역시 비분리주의적인 장로교 형태의 청교도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다른 극단에서는 아주 명백하고 뚜렷하고 공공연한 분리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그 외에도 국교회에 ‘수시로 순응하는’ 반(半)분리주의자라 할 만한 이들도 있었다.
교회정치 체제와 정책에 대해 로이드 존스 박사와 나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청교도정신이 본질적으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기독교이며, 우리가 오늘날 공감해야 할 대상이라는데 우리는 생각을 같이 했다.
로이드존스의 사역에 나타난 청교도적 요소들
그렇다면 그 자신의 사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청교도적 요소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학을 합리적, 실천적 학문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신학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한 학문, 이라고 말한 윌리엄 퍼킨스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신학의 원천으로(즉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로), 그리고 기타 성경적 사상체계의 근원으로 본점은 청교도신학의 고전,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둘째로, 그의 설교 행위는 스타일과 언어 형태가 완전히 20세기 적이었으나 그 철학과 방법, 내용면에서는 전적으로 청교도 적이었다. 교리와 추론 그리고 ‘사용’ (본문에서 진리를 끌어내어 다른 성경 구절과 합리적 고찰로 이를 확증한 다음 이를 적용하는 일), 이 삼단계가 그의 일반적인 설교패턴이었다.
그는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행위로서, 찬양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행위로서, 양식이다. 설교는 공적 예배의 정점이며,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혜가 설교의 핵심 이어야한다. 적용에서 (그는 서론도 사실적용의 일부로 사용했다) 설교자는 이 시대를 향해 말해야하며, 청중의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가 하나님 앞에 놓인 그들의 죄와 그들의 근심을 직접 다루어야한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상상의 나래가 없는, 단순하고 진지하며 직설적인 언어가 이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다. (리차드 백스터의 저술을 가리켜 처음 사용 되었던 ‘고상한 무관심’ 이라는 표현이 로이드 존스 박사의 문자화된 설교와 강연에도 몹시 잘 어울린다. 설득력 있는 1대1식의 명료한 언어, 청교도적 의미에서의 ‘친숙한’ 언어를 그는 언제나 추구하였다. 말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설교자에게 자유와 직설, 감정이입과 에너지, 열정과 긍휼을 주며 청중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 갈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기름 부으심을, 설교자는 설교 전과 설교 중에 매번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백스터의 말처럼 설교자는 ‘두 번 다시 설교하지 못할 자처럼 ,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설교했노라“ 말할 수 있어야한다. 각 본문에 대한 설교와 함께 성경의 장들과 책들을 계속하여,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강해하는 것이 훌륭한 설교방식이다.
셋째,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적인 경험을 청교도적인 관점에서 풀이하였다. 이에 관한 그의 이해는 두 가지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는 인간 지성의 지고성이다. 그에 의하면, 지성은 의지의 안내자이며 감정의 판단자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간접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고 움직일 때 먼저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배우게 하고, 우리를 지극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신다. 성령이 역사하여 지식을 주실 때 지성과 감정을 함께 자극해 신적인 실상들 즉 하나님, 그리스도, 은혜, 용서, 양자삼기, 새 창조, 안식 등을 효과적으로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청교도의 단어인 ‘체험적’이라는 말을 자체의 본질적 용어로 사용해야 한다. 또 최소한의 감정만이 개입되는 기독교가 최상의 기독교라는 관념은, 강력한 감정들에 대한 불합리한 잉글랜드 중류층의 반발일 뿐이다. 그러한 관념은 어리석기 때문에 조소거리에 불과하며, 성령을 소멸하기 때문에 참으로 서글픈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에 의하면, 회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항해 언제나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 이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는 회개(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심) 와 믿음(죄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심) 이 포함된다. 설교자들은 청중에게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지적해 주어야 하며, 그리스도께 오는 자들이 얻게 될 평화 와 기쁨, 마음의 변화, 삶의 새 자원을 찬양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틀에 박힌 20세기식 복음 전도는 세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지성적 설득을 대신하는 조작적인 감정주의는 거짓 회심을 격려하는 일종의 세뇌이다. 둘째로, 설교자가 마치 성령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결산의 촉구 (일반적인 형태는, “이제 여러분에게 결단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믿기 원하시는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도 역시 그와 동일한 좋지 못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회심과 관련해 언제나 철저하고 근본적인 회개를 역설하지 못하므로 진정한 회심자들이 믿은 후에도 영적 성장을 하지 못하고 얕고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문다. 이러한 약점들 때문에 로이드 존스 박사는 현대의 제도화된 복음 전도 방식을 멀리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 즉 성결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 박사는 정적주의적(靜寂主義的) 수동 상태를 복음주의적 지성의 현대적인 귀신들림으로 보고, 여기에는 분명한 축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놓아드림으로써 하나님이 하시게 하라”, “노력하기를 멈추고 신뢰하기 시작하라’ 등과 같은 표어들은 이런 견지에서 그가 볼 때에 수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성결에 대한 판에 박힌 말들은 ‘이것을 하 라’, ‘그것을 다시는 하지 말라, ’먼저 기도한 다음 행동하라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청교도들처럼, 영육간의 갈등이 일생동안 지속됨을 강조하면서, 이를 초월 할 수 있다는 완전 주의적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다.
영적 침체도 로이드 존스 박사가 주의를 기울인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의사들과 정신병 의사들이 다루는 정신적 우울증과 종종 관련되면서도 그와 다른 상태이다. 이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에 대한 불신이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불신앙에서 오는 감정들과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때 당사자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연단시키면서도 자신의 약속에 언제나 신실하다는 사실에 영적인 눈을 고정하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리라는 사실을 시편 42편 같은 형태로 고백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 박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량에 대한 확신과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은 그의 삶의 최고 축복이었다. 또한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후사임을 직접 증언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최고의 위안이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서 8장 15~17절이 말하는 이 증언을, 성령의 인침(엡 1:13, 4:30)과 동일시하고 또 사도행전의 몇 구절에서 말하는 성령을 받는 것과 동일시하면서, 언제나 이를 어떤 특정한 체험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파스칼로부터 에드워즈, 무디, 특히 존 플레벨 같은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확신과 변화의 순간에 관해 기록한 여러 성도들의 체험을 실례로 들었다.
그 자신도 천국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런 체험을 한 번 했다고 한다. 이것은 30년 전 내가 그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제 1차 청교도 연구 모임에서도 이 주제에 관해 강연하면서 직접적 확신에 관한 청교도 교리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간과된 진리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의 런던사역 후반기에는 로마서, 에베소서, 요한복음에 대한 정교한 강해에서(지금은 모두 책으로 출간됨) 이 문제를 길게 다루었다. 청교도들도 로마서 8장 16절과 에베소서 1장 13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였지만, 혹자들은 성령의 증언이 단일순간의 체험이라기보다 끊 임 없는 질적 체험을 가리킨다고 보고, 에베소서 1장 13절은 믿은 후와 어느 시기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믿을 때에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모든 청교도들은 양자됨에 대한 지극히 분명한 체험적 확신을 구하고 남에게도 이를 구하도록 촉구하였다. 이점에서 로이드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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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청교도들은 금세기를 포함해 여느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경건한 삶의 면류관으로 보았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종종 설교 시에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으며, 한 동료에게 자기 삶의 종말은 유종의 미를 거둘, 자기 사역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면에서는 그도 영적인 체험에 관한 17세기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초월하였다. 즉 주기적인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하시는 주요 수단이라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소신을 수용한 점이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부흥이란 영적인 체험이 매우 깊은 교회에 내리시는 성령의 쏟아부어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 쏟아부어짐이 일어날 때를 결정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하지만 그 때를 앞당길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대로 일하신다. 이상이 로이드 존스 박사의 견해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서는 이런 사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청교도들 모두가 종교개혁을 참된 신앙의 부흥으로 인식하였지만, 청교도들은 어느 시기에도 자신들의 사역과 당대의 역사(歷史)를 주기적 부흥의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에서 1931년의 남부 웨일즈 목회에서는 그가 이런 부흥을 어느 정도 맛 보았으나,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는 이 부흥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 에게 슬픔의 한 근원이었다. 하나님이 부흥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그의 신념과, 개개교회들이 연합하면 특이한 영적 생명력과 권능을 얻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 (그는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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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 그가 설명한 적이 없다. 어쨌든 에드워즈의 부흥교리가 일생 동안 그의 가슴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영적 거인들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며
‘청교도 같은 사람?’ 그렇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일생의 대부분을 그렇게 살았다. 스펄전은 자기시대에 마지막 청교도라고 일컬어 졌거니와, 이 칭호는 로이드 존스 박사의 생전에도 그에게 붙여졌다. 아마 지금도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칭호는 다른 사림들에게도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 가운데는, 그의 청교도 사상을 이어받은 젊은 목사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성적으로, 영적으로 로이드 존스 박사가 우리에 전해준 청교도 사역의 찬연한 횃불을 이어받을 위대한 거인들을 일으키시리라고 우리가 기대해보는 것은 백 번 합당하다. 지극히 위대했던 청교도들, 예를 들어 오웬, 백스터, 굳윈, 십스, 퍼킨스, 하우 그리고 3세기에 걸친 그들의 지극히 위대한 추종자들, 예컨대 에드워즈, 스펄전, 라일 그리고 로이드 존스 등과 똑같은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의 교회에 성숙, 원리, 지혜, 은사, 경건 등에 있어서 그들과 유사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옹호한 기독교의 본질을 충실히 유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기념비적 인물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위대한 인물들이 곧 나타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 오늘날의 교회에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패커 / 캐나다 뱅쿠버에 있는 리전트칼리지 (Regent College)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교수로 있다. 많은 저술을 낸 바 있는 그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로이드존스 박사의 장녀 엘리자 벳과 옥스퍼드 동기생이기도 한 패커 박사는 로이드 존스 박사와 함께 다년간 청교도 연구모임을 주재하기도 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를 다시 생각한다
“로이드 존스 박사와의 어떤 우정”
워렌 위어스비 (Warren Wiersbe) / 전 시카고 무디교회 담임목사
내가 데이빗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와 처음 만난 것은, 질 모건이 쓴 캠벨 모건(자기 시아버지)의 전기, 「캠벨모건 : 말씀의 사람」의 지면을 통해서다. 당시는 내가 첫 교회를 목회하고 있던 50년대 중반으로서, 캠벨 모건을 사도바울 근처 어딘가에 있는 인물로 생각하던 풋내기 신학도 시절이었다. - 모건은 나의 16번째 생일날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더욱더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 모건이 동역 목사로 택한 사람. 그의 후계자가 된 사람 -로이드존스박사 - 이라면 분명 놀라운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훑어본 게 아니라 무릎 꿇어 읽었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도 역시 한권의 책을 통해서였는데, 이번에는 로이드 존스 박사 그 자신이 쓴 책이었다. 당시 나는 ‘유스 포 크라이스트 인터내셔널’ (Youth for Christ International)에 몸담고 있으면서, 자체 간행물의 편집일을 보며 미국곳곳의 교회와 청소년 집회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주말 사역을 떠나면서 박사님의 저서「산상수훈 강해」의 제 1 권을 가방에 챙기게 되었다. 대충 훑어보고, 우리 간행물에 이에 관한 서평을 실을 수 있을까 하 는 생각에서였다.
“대충 훑어보고!” 그것은 신성 모독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이 명설교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박사님의 논리에 맞서 논쟁을 벌일수록 더욱 강한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는 하나님 앞에 깨어져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내용의 대부분을 나는 무릎 꿇은 채로 읽었다. 나에게 전해오는 메시지가 그만큼 폐부를 깊숙이 찔렀던 것이다. 이「산상수훈강해」1권은 내가 소장한 로이드 존스 박사의 책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에게 요청해서 직접 친필 서명을 받은 책이다. 지금도 나는 이 책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 박사를 직접 만나 뵌 것은 1969년 6월이다. 당시는 내가 켄터키주 커빙턴의 갈보리 침례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을 때였다. 이곳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시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 로이드 존스 박사 내외분은 두 분의 친구들인 키니(A. M. Kinney)씨 내외분의 초청을 받고 신시내티에 와 있었다. 그리고 박사님은 로마서 주석시리즈의 원고작업을 하고 계셨다.
아내와 나도 키니씨 부처(夫妻)와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로이드 존스 박사내외분과 만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박사님의 저서를 이미 여러 권 읽은 후였으므로 그를 직접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였다. 키니씨가 나에게, 로이드 존스 박사를 우리 교회 강단에 한번 모시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나는 즉각 ‘그래’라고 답변하고 6월 어느 주일의 오전 예배 시간을 박사님이 설교하시는 시간으로 잡았다.
결코 ‘접근하기 어려운’ 분은 아니었다
박사님은, 자신이 설교하기로 되어있던 바로 그 전 주간 수요일에 키니 씨의 인도를 받아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다. 당신이 직접 우리교회의 ‘강단과 설교하는 상황을 친숙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두 분이 도착했을 때 나는 서재에 있다가, 다소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급히 나가영접하였다. 나의 손에는「산상수훈 강해」제 1권이 들려있었다.
당시 박사님은 ‘최후의 청교도’ 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 존 오웬이나 존 맨튼 같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상상하고 있었다. 엄숙하고 준엄하며 꿰뚫어보듯 날카롭고, 아마도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사람일거라고 말이다.
‘꿰뚫어 보듯 날카로운’ 분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접근하기 어려운’ 분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인사와 악수는 따스하고 진실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만나는 처음순간부터 의기가 상통했다. 그는 나의 그 소중한 책에 사인을 해준 다음, 예배실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당시는 우리가 새 예배당의 건축을 막 완성했을 때였는데, 이 예배당은 좌석이 2천석 가까이 되는 대 예배실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이 건물 안팎을 둘러보면서 로이드존스 박사는 몇 가지 흥미 있는 논평을 하였다. “대부분 예배당들은 설교하기 위한 장소로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건축가나 위원회든지 불후의 기념물로 만들려고 하지요. 제가 보니 이 건물은 설교를 위해 지어졌군요.” 설교는 그의 가슴의 위대한 정열이자 그의 사역의 목적이었다는 것을, 그때 나는 미처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가 했던 말의 의미를 보다 잘 알 것 같다.
그는 강단에 서서 비어있는 회중석을 둘러보며 음향 시스템을 시험해 보았다. 이 건물의 회중석은, 회중이 설교자와 정면으로 대면 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중앙의 빈 통로를 향해 설교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말로 좋군요!” 박사님의 말씀이었다. “목사님은 회중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설교 하실 수 있겠어요!”
명료하고 권위있는 설교가 인상적이었다
그가 건물의 다른 방들도 둘러보기 원하였으므로 그를 이방 저방으로 안내하고, 마지막으로 침례실을 그분께 보여드렸다. 이 건물의 침례실은 매우 컸다. 그 안의 물탱크에는 항상 물이 차있었으며, 이 물은 펌프시스템으로 순환하게 되어있었다. 물탱크가 갓 나온 새 것인데다 물이 아주 맑았으므로, 육안으로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물탱크 안은 투명하였다.
그런데 아뿔싸, 로이드 존스 박사가 물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는 것 이었다! 얼마나 황송했던지 바로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이 물 속으로 들어가 익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사님은 너털웃음으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신 다음 미소를 띤 채 이렇게 말씀하셨다. “괜찮아요. 속 태우지 마세요. 옷이 곧 마를 겁니다.” (지금이니까 한마디를 더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 다음 주간에 그는 나에게 멋진 감사의 펀지를 보내왔는데, 거기에는 이런 추신이 적혀있었다. 언젠가 제가 다시 갈 터이니 제 몸의 나머지 부분에도 침례를 주십시오!”).
다음 주일 오전 로이드 존스 박사는 설교 할 채비를 하고 내 집무실에 도착하였다. 강대상용 성경이 있습니까?“ 그가 물으면서 덧붙였다. “제 성경을 미처 가져오지 못했군요.” 강대상용 성경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재에 가서 성경을 한권 가져오겠노라고 말했다. “아, 목사님의 책상 위에도 성경이 한권 있군요! 그걸 사용하죠.” “박사님, 그건 스코필드성경인데요 .” 내가 다소 망설이는 어조로 말했다(스코필드 성경은 C. I. Scofield가 자신의 세대주의적 관점에 따라 편집한 주석성경이다. - 역자 주).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 그 성경이 제 설교를 해칠수록 좋지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자체에 물들수록 좋다는 뜻 - 역자 주).
이어서 나는 우리 교회의 예배스타일이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예배와 아마 다를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 교회의 예배는 분위기가 아마 더 ‘자유스러울’ 것이라는 사실, 내가 공중기도를 20 분 동안 하지 않는다는 점, 우리는 언제나 화답송으로 예배를 마친다는 점도 말씀드렸다.
그리고 ‘초청’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가급적 회피하였다(결신자 등에게 앞으로 나오라는 초청,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런 형식을 싫어하였다. - 역자 주). “형제여, 이곳은 당신의 교회입니다!” 그가 말했다. 저는 손님일 뿐이에요. 항상 하시던 대로 하세요. 저는 설교만 하고 자리에 앉겠습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놀라웠던가! 그 이전에 여러 해 동안 갈보리 침례교회는 영국과 미국에서 세계의 위대한 설교가들을 초빙해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새로운 목소리였다.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하고 권위있게 선포하였다. 우리는 즉각 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대한 그의 설교는, 내가 그 부분에 관해 지금까지 들어보거나 읽어 본 중 가장감동적인 강해였다. 우리 교인들은 깊이 몰입해 그의 설교를 경청하였다.
그가 메시지를 마치자 나는 회중에게 화답송을 부르자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영적인 결단을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였다. 여러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런 공개적 초청이 로이드존스박사의 신학 및 행위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사실에 대해 그는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겸손하게 나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아내와 나는 로이드 존스 박사 부처, 키니 부처와 함께 근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젊은 설교자에게 부족하기 쉬운 갖가지 요소들이 화제거리로 올랐다. 로이드 존스박사는 캠벨 모건에 대해서도 말하며, 지금까지 지면에 실린 적이 없는 일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우리는 여러 기지 서적(그는 내가 언급한 서적들을 모두 읽어본 듯 하였다), 설교자와 교회, 목회사역 일반에 대해 논하였다. 박사님은 한편으로 식사를 하시면서, 나에게 대단한 인내심을 보이며 나의 질문하나하나 꽤 친절한 답변을 해주셨다.
개인적으로 그는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실토하였다. “담즙이 과다하게 분비하는 것 같군요. 키니 씨가 대접한 커피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키니 씨는 커피를 너무 독하게 탑니다. 당밀( 橋密,treacle)처럼 진해요!” (나는 아내에게 영국어 treacle이 미국어 molasses를 뜻하는 말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당시 아내는 영미 두 나라 말에 능하지 못하였다).
로이드 존스 부처와의 이 첫 만남은 아주 유쾌했었다. 그러나 두세 주간 후 나는 박사님으로 인해 그처럼 유쾌하지는 못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날도 주일이었다. 오전 예배시간에 설교를 하기 위해 일어나 회중석을 보니 거기에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앞좌석에 앉아있는 여인 뒤에 몸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고 있었지만, 나에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 계신 분 혹시 로이드 존스 박사님 내외분 아니신가요?” 나는 준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인자하신 박사님은 나를 쳐다보며 손을 들어 흔든 다음, 나의 설교를 듣기 위해 다시 제자리에 앉으셨다. 설교의 대가인 그가 회중 가운데 자리 잡고 앉아있다는 것이 여간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주일 오전 나는 감히, 박사님이 정통하고 계신 로마서의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말았다.
“박사님이 오실거라고 미리 연락 좀 해주시지 않고요?” 예배 후에 나는 박사님께 푸념을 늘어놓았다. 연락을 주셨더라면 적어도 로마서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요.” 예의 그 따스한 미소와 충심어린 악수가 있었다. 나의 메시지에 대해 몇 마디 고마운 말씀도 해주셨다. 나는 설교로 퓰리처상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얼마나 고무적이었던가!
영국에서도 세밀하게 배려해주었다
박사님 내외분이 영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키니 부처를 포함해, 우리 여섯 사람은 여러 차례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그때마다 참으로 풍요로운 경험을 하였다. “영국을 방문하시게 되면 꼭 연락을 주세요.” 헤어질 때 박사님은 이 말씀을 하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1971년 초여름 아내와 나는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하였다(그 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우리 부부의 친구인 호워드 서그든 박사 부처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었다. 호워드와 나는 둘 다 영국 역사에 대해, 그리고 특별히 영국의 설교자들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대로 많은 역사적 명소를 방문하기 위해 3주간의 순회 일정을 빡빡하게 잡았다. 일단 런던의 호텔방에 안착하자 우리는 로이드 존스 박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영국에 잘 오셨어요!” 그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면서 덧붙였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만나야합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 부부가 호텔에 도착하자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한 다음, 우리 부부가 묶고 있는 호텔방으로 가서 환담을 나누었다. 박사님은 특히나 유쾌한듯하였다. 많은 웃음이 오고 갔다. 그는 우리에게 웨일즈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수많은 예를 들어가며 일장 강연을 하였다. “웨일즈어는 설교하기에 아주 좋은 언어입니다.” 그가 말하자 나는 박사님이 영어도 아주 잘하시는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당시 우리를 만나기 얼마 전에, 어느 크리스천 의사 모임에서 강연을 했다. 그리고 우리와 만나서는 그 강연의 내용을 대략 말해주면서, ‘신앙의 치유’와, ‘마음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몇 가지 유익한 통찰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서, “런던의 어디를 둘러 볼 계획이십니까?” 라고 물었다.
우리가 순회여행의 대략적인 스케줄을 말하자(그것은 실상 관광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몇 가지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번힐 필드(Bunhill Field)에 꼭 들러보세요. 거기는 위대한 청교도들이 모두 묻혀있는 곳 입니다. 그리고 바로 길 건너에는 웨슬리의 채플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가보아야 합니다. 물론 파운드리 채플과 웨슬리의 생가도 반드시 둘러보세요.” 그 외에도 그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흥미를 끌만한 역사적 명소를 몇 군데 더 거명하였다. 우리는 후회가 없도록 이런 곳을 모두 탐방하였다.
그의 삶 전체에 청교도적인 데가 많았다
1976년, 서그든씨 내외와 우리 부부는 다시 영국을방문하였다. 이번에는 우리가 캠브리지 암스 호텔에서 로이드 존스 박사 부처와 상봉하였다.
두 분은 캠브리지 근처에서 사는 딸집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우리를 자동차에 태우고 나가 점심식사를 대접한 다음, 이 유명한 대학도시로 ‘복음주의 일주여행’을 시켜주었다. 당시 나는 시카고 무디교회의 담임목사였는데, 박사님은 나의 사역이 어떤지 매우 궁금해 하셨다.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음에도 로이드 존스 박사는 17세기 청교도 성직자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 검은 넥타이에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적어도 이 군중 속에서 그를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군요” 호워드 서그든이 내게 속삭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우리를 킹스대학으로 인도한 다음 찰스 시므온의 교회로 안내 하였다. 찰스시므온의 제자 헨리 마틴이 선교 사역에 헌신했던 장소를 무척이나 보여주고 싶어하였다.
박사님은 시므온의 생애와 청교도 설교, 그리고 우리의 복음주의 지식을 풍요롭게 할만하다고 친히 생각하는 것을 모두 연달아 설명해주셨다. 홀리 트리니티 교회를 나와, 그는 우리를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점 가운데 하나’인 헤퍼스서점으로 데리고 갔다. 책을 좋아하는 호워드와 나는 수백만 권의 도서에 파묻혀 보는 체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부인들은 우리 뒤에 떨어져서 목사의 아내로서 나눌 수 있는 갖가지 화제를 가지고 서로 잡담을 나누었다. 한번은 로이드 존스 박사의 부인이 나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저, 사모님, 부군께서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돼요.” “사모님은 이럴 땐 어떤 방법으로 하시나요?” 나의 아내가 물었다. 로이드 존스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실은 저도 잘 몰라요.”
솔직하게 의견을 표현할 줄 아는 분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우리 부부는 로이드 존스 박사 부처와 접촉을 하지 못하다가, 1980년 6월에 딸 주디. 그리고 소중한 친구인 베벌리 스미스와 함께 영국을 방문했을 때 다시 그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박사님은 베이커가의 우리 숙소에서 가까운 패딩턴 스테이션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제안하셨다(그 말은 코난(Conan Doyle)이 종종사용한 문장과 흡사하였다).
누가 보기에도 그 날 저녁은 박사님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적어도 예전에 늘 보던 모습과는 달라보였다. 고맙게도 그는 목사인 우리 아들을 위해 설교자와 설교 한권에 서명을 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나의 최근저서「거장의 소리를 듣다」를 드렸다. 이전에 나온 나의 책「거장과의 통행」에 대해 로이드 존스 박사가 몇 마디 훌륭한 논평을 쓴 바 있으므로, 그 속편도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존 헨리 뉴먼으로부터 조지 모리슨에 이르기까지 설교자들을 논하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모리슨의 설교를 좋아한다고 하자, 그는 당혹감을 보이며 말했다. “그건 시문(詩文)에 불과합니다. 교리적인 알맹이가 없어요.”
만일 그날 저녁의 만남이 박사님과 지상에서 가지는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우리 모두는 박사님 내외분을 기차역까지 바래다 드리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헤어지지 않고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작별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두세 주간 후 런던으로돌아왔을 때 박사님의 자택으로 전화를 해보니, 박사님은 셰퍼드 부쉬의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기다리고 계셨다. 분명 이것은, 마침내 그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그 병의 시작이었다.
그는 젊은 사람과의 우정도 소중히 여겼다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와의 우정을 회고하면서 그것이 나 자신의 삶과 사역에 미친 영향을 평가해 보건대, 얼마 되지 않은 개인적 만남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영적 부요를 낳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추측하건대, 나 자신의 이런 평가는 박사님과 보다 오랜동안, 보다 깊은 친교를 나눌 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젊은 설교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 와서 기꺼이 설교를 한 데 대한 놀라움, 이것이 그분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었다. 더구나 그는 내가 설교하는 것을 직접 듣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내외분이 우리와 식사하는 것에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가 ‘짐짓 겸손한 체 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젊은 설교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가능한 한 온갖 수단을 다해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 한편에선 마치 꼬마가 거인과 교제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다.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다. ‘위어스비야. 너는 기회가 생기면 다른 목사들에게 위로자가 되도록 하여라. 이제 갓 출발하는 친구들에게 시간을 내줄 수 없을만큼 “크지” 말아라.’
나에게 감명을 준 또 하나의 요소는 그의 놀랄만큼 해박한 지식이었다. 내가 언급하는 책마다 그는 다 읽어본 듯 하였다. 책마다 내용의 개요를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 을 말씀의 빛 아래 두었다. 나도 많은 책을 두루 읽고자 애쓰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성경으로 시험해 보는 그의 본을 따르려 힘쓰고 있다.
말씀에 항상 엎드리는 자세를 배우게 된다
박사님은 우선 무엇보다도, 성경의 학도였으며 말씀의 설교자였다. “오로지 이 한가지만을 나는 하노라!” 이 말이 확실히 그의 생애와 사역에 적용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일들에 지나치게 많이 관여하면서, 정작 가장 좋은 것은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의 놀라운 강해를 읽노라면 다시금 ‘설교에 대한 전율’을 느낀다.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 그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대한 설교를 높이 존중하고 찬양하도록 가르쳐 준 분이다. 그의 모범과 그의 가르침은 설교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지금껏 나에게 자극을 주었다. 확실히 그는 스펄전이 그의 생도들에게 주었던 권면에 전적으로 동의하였을 것이다. “형제들이여, 설교 작성에서 경박한 태도는 절대 피하라.” 옛 청교도의 그 말에도 동의했을 것이다. ”그대는 말씀의 설교자이니, 그대의 직무에 집중하라!”
그렇다고 하여 내가 언제나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한 가지 주요한 정기 기독교 간행물에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논평의 글을 투고하면서, 나는 그와 다른 견해를 피력한 적도 있다. 젊은 목회자들이 로이드 존스의 능력을 결여한 채 로이드 존스의 방법만을 모방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성경의 책 한권 전체를 한 구절씩(거의 한 단어씩) 낱낱이 설교하면서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는다는 것은 은사와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일이다. 모든 설교자가 다 그렇게 설교 할 필요는 없다. 강해설교가 최선의 설교방식이라는 박사님의 견해에 나도 동의하지만, 또한 각자는 자신의 은사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박사님은 하나님 말씀의 권능과 권위를 신뢰하고 그 말씀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기 원하시는 메시지를 얻으라고 격려하셨다. 그의 도움으로, 어떤 본문의 개요를 반드시 메시지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메시지의 전개가 본문 자체로부터 나와야지, 없는 의미를 억지로 집어넣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주지하게 되었다.
‘말의 은사’를 가진 설교자는 거의 모든 본문에서 하나의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있는 메시지가 될 것인가? 이 점이 문제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와의 교제를 통해 나 자신의 설교 표준이 한 층 더 높아졌음을 느끼게 된다.
시대를 이해하는 폭이 있는 분이었다
한때 박사님은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인 교단을 떠나 한 곳으로 연합해야 한다고 선언하셨다. 나도 이를 알고 있거니와, 이 문제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이들도 많다.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그들에게 넘기고자한다. 하지만 내가 분명하게 아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하나님의 백성 각자가 어떤 ‘상표’(교단)의 옷을 입고 있든지 간에 그들 모두를 포용할 만한 넓은 가슴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 바로 이 교훈을 내가 박사님의 도움으로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지금도 우리 두 사람이 존 헨리 뉴먼에 대해 논하였던 한 가지 내용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뉴먼을 ‘당대 옥스포드에서 가장 재기가 뛰어난 설교가’라고 불렀다. 확실히 박사님은 뉴먼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았지만(그는 뉴먼의 칭의 강의를 ‘혐오스런’ 것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서 훌륭했던 점이 무엇인가를 볼 줄 알았다.
박사님과의 여러가지 교제(간헐적인 개인적 방문, 그의 설교 듣기, 그의 저서 읽기)를 통해 내가 발견한 한 가지 두드러진 요소는 주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그의 야망과 욕구이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지식이나 능력을 과시하는 기회가 아니라 엄숙한 예배행위였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종종 나를 압도할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의 일부가 로이드 존스 박사와의 교제를 통해 왔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결단코 이 교훈을 잊지 않으리라 소망해본다.
박사님 생전에 감히 나의 저서 중 한권을 그에게 증정했다면, 여러 해전 존 허튼이 캠벨 모건을 위해 쓴 헌사를 차용했을 것이다.
워렌 위어스비 / 미국에서 다년간 목회를 하였으며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였다. 지금은 라디오방송 프로그램인〈백 투 더 바이블 〉(Back to the Bible)의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출처 :문화와 설교연구원 | 글쓴이 : 홍정석 원글보기
왜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실까?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1.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부정적인 대답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그와같은 일을 하실수 없다거나 전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불평하는 2가지 전제를 보겠습니다.
1> 이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 때때로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내기를 위해 성경을 읽는 수고도 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제멋대로 가르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성경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사람들이 점점 더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상을 만들어낸 다음, 나중에 그 상이 잘못되었다것을 깨닫고 놀라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시는 이유에 대한 문제 때문에 걱정하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가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들은 성경이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약속한 적이 결코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오기 전에, 특히 마지막 완성의 때가 점점 다가오면, 난리와 난리 소문“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악한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지고 이미 활동하고 있는 불법의 신비가 후에는 자유롭게 구속받지 않고 활동하게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 부분적으로는 그 자체의 내적인 타성 때문에, 또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획과 바람 때문에 점진적으로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렇지만 이 생각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식인들에게 교육을 받아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게 될 날이 임할 것이라는 말이 자주 들어왔습니다. 또한 학식이 높은 사람이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무서운 일인지를 깨닫고 전쟁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전쟁은 몹시 싫어하시는 하나님도 틀림없이 전쟁을 막으려 하실 것이라고들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쟁이 없는 완전한 세상을 만들려 애를 쓴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보다 더더욱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실 것이라는 말이다. 즉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실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러식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것은 순전히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생각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세계관은 철저히 비관론적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희망과 욕망과 소망을 하나님의 계획에 투사시켜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놀라고 낙심하고 슬퍼하는 대신, 성경을 연구하여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무슨 약속을 하셨는지를 밝혀내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첫 번째 대답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전쟁을 막거나 금지하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어야 한다.
2>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지하시리라고 기대하는가? 혹은 왜 하나님은 전쟁을 금지하셔야만 하는가? 전쟁은 죄이므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론적인 이유를 제외한다면 하나님께서 전쟁을 금하시기를 바라는 진짜이유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상태를 원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라 바로 뒤이어 또 다른 질문이 제기 됩니다. 이 질문은 이 주제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우리는 무슨 권리로 평화를 요구하는가?” “ 왜 우리는 평화를 바라는가?” 그동안 우리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 권리가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또 우리는 평화의 참된 가치와 목적, 그리고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을 자져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성경에는 우리가 평화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구절이 적어도 두 개 이상 나온다. “ 사도행전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구절은 무시무시한 박해의 시기가 끝난 후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원하는 이유도 바로 이점에 있어야 합니다.
딤전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전쟁에 대한 공포와 전쟁의 고통 그리고 전쟁으로 말미암는 온갖 혼란과 곤경과 정상적인 생활이 방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평화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할 충분한 기회를 갖고 믿음에 최대한 시간을 투여하기 위해 평화를 갈구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이루도록 인간에게 생명이 부여된 것입니다. 또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 곧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과 기쁨들은 이 일을 위해 이용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주된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를 갈구해야 하는 이유는 전쟁 상태보다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이 목적을 더 자유롭고 더 완벽하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평화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평화를 갈구한 이유도 이것이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한 참된 동기가 이것이었습니까?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로 인해서, 즉 전쟁의 결과들을 피하기 위해 평화의 기도를 드린 경우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습니까? 단지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삶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평화를 간구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적인 생활만을 추구할 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게으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종교가 타락했고 도적은 그보다 더 무섭게 타락했으며 마침내 정치와 사회 의식까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욕되게 하는 생활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 하나님께 평화로운 상태를 계속 유지시켜 달라고 요구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2. 이제는 하나님이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고찰해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실까요? 이것은 구체적인 진술들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떤 기본 원리들을 이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켜는 것에 관한 질문입니다.
1> 먼저 전쟁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다루어 보기로 합시다. 전쟁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 전쟁은 죄의 표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정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식의 구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죄인지 아니면 죄의 결과인지를 주제로 삼아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전재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원인까지 파헤칩니다. 성경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 여러 가지 정치, 사회, 경제, 심리적 요인들을 무시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요인들은 직접적인 이유들, 곧 전쟁이 발발하게 된 실질적인 원인들에 불과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바와 같이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쾌락과 욕망, 죄의 결과인 불안, 금지되고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강렬한 요구들입니다. 이것들은 개인적인 생활에서나 국가의 생활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들은 도둑질과 질투와 자랑과 미움, 그리고 부정과 이혼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개인간의 분쟁과 싸움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전쟁도 유발시킵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치 전쟁이 다른 것과 분리된 독특한 것처럼 전쟁을 따로 떼어놓고 다루지 않습니다. 전쟁은 죄의 표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좀더 크게 보면 전쟁은 다른 모든 죄의 결과들과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목숨까지도 앗아간다는 이유를 들어 전쟁과 죄의 다른 결과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며 단지 욕망이나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명을 취하지 말 것과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영이 몸의 생명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오래도록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시간과 수명 연장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 즉 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삶의 질임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와같이 전쟁은 다른 모든 죄의 결과들과 똑같이 죄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금지시켜 달라거나 막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의 특별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를 금지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또 만일 우리가 전쟁 그 자체가 죄라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전쟁을 금지시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가지 특수한 죄를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 가지 특수한 죄를 금지시켜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이기적인 것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즉 특수한 형태의 죄 혹은 죄의 결과가 우리에게 특히 고통스럽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것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우리의 죄에 관심이 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죄를 금지시켜주시고 모든 불의한 일을 억제시켜달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하고 영원한 지혜를 지닌 하나님은 죄를 금하지 않고 죄의 결과들을 모두 억제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전쟁은 다른 것과 분리된 영적이고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은 죄라는 중대한 근본 문제의 일부이자 표현입니다.
2> 성경은 전쟁이나 죄나 그 죄의 결과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시는 실질적인 이유들도 제시해 줍니다,
전쟁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로 표현된 기본 법칙입니다. 죄에 대한 징벌은 후대로 연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에 대한 징벌을 받습니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얼마나 자주 나타났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와 첫 번째 범죄에서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모든 고통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 것입니다. 그러나 “왜 무고한 자가 고난을 당하는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첫째는 무고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죄 뿐만 아니라, 넓게는 인류의 죄, 좁게는 우리나라나 사회나 가족의 죄의 결과들도 떠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일원이자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구원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국가의 일원이나 인류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지 않은 무고한 사람도 타인의 죄에 대한 징벌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전쟁을 통해서 죄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로울 때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본성속에 들어 있는 악의 가능성들을 보게됩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이기심과 미움과 질투와 시기 그리고 매정함과 악의입니다. 이것들은 개인적인 생활 관계나 사회적인 생활 관계에서도 나타나며 민족적인 혹은 세계적인 규모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 자비롭고 사랑스런 하나님에 대해 복음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자신이 하나님 없이도 완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쟁을 통하여 그에게 보여줍니다. 죄의 본질과 그 결과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똑같은 것도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베푸실 때에는 반기를 거부하다가도, 고통을 매개로 하여 떠넘길 때에는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극심한 고통을 당해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면 탕자가 아버지와 집을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을 통탄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신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죄악에 물든 세상을 전멸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은 왜 무한한 은혜를 베풀어 이 세상의 악과 죄에 한계를 정하여 그것들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시는 것일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도록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우리를 벌하고 우리를 가르치며, 무엇보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전쟁과 같은 일들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회 개
1. 회개의 정의
회개란 단어는 ‘다시 생각하다’, ‘한 번 더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종교 전체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면, 회개란 여러분들이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 원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는 단순히 다시 생각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의 변화의 결과들을 다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더해지는 생명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28-32).
둘째 아들은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태도로 말하고서는 나갔을 때에 아마도 분노하셨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그의 계획을 바꾸게 하였을 것이며, 그는 돌아가서 다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단계를 뜻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잊어버렸던 것으로 다시 돌아가 그것을 다시 음미합니다. 여러분들은 다시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만 그가 다르게 생각했다는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는 지금 나갔고 이제 포도원앞에서 하기를 거절했던 그 일을 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마음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했던 것을 후회했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런 비유 속에서 자신이 사용하시는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하십니다.
회개에 있어서 생명과 같은 본질적인 다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태도의 변화입니다. “후에 그는 회개하였고 그리고 갔다.” 이 행위가 바로 회개의 한 부분입니다. 만약 그 아들이 단순히 관점만 변하고 자신이 아버지께 말씀 드렸던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만 가지고 있었으며, 앉아 해변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오후 내내를 소비하고 있었다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후회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거절했던 그것을 하는 것이 참된 회개의 한 과정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소명을 효과적으로 듣고 그것에 반응할 때에는 이런 조건과 이런 태도라는 본질적인 요소들이 새롭게 오게 됩니다.
2. 회개의 발생
☄ 무엇이 회개에 이르게 합니까?
우리 안에서 회개는 어떻게 나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복된 단어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로 남녀가 행동으로 옮기도록 합니다. 스가랴12:10절을 보면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은혜와 공급하심이 없이는 회개란 불가능합니다.
사도행전 11:18절에서 고넬료 가정의 돌이킴에 대하여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자신들에게 하신 것과 동일하게 임하셨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란 말씀을 듣습니다. 회개는 은혜의 선물, 즉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한 것을 살펴봅시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2:25절).
회개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행위를 유발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선포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이것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요청하면서 복음은 설교되고 말씀은 선포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절).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말씀을 설교함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요나서에서 이런 한 위대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요나의 설교는 니느웨인들에게 회개를 유발시켰습니다. 다른 곳은 사도행전 2장인데, 그곳에서 성령에 충만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설교하였습니다. 그가 설교했던 것처럼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적용하심으로 사람들은 이처럼 외쳤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이것이 바로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회개가 바로 그렇게 하라고 선포된 말씀이었습니다. 회개의 이런 조건을 유발시킨 것은 바로 진리를 전함입니다.
3. 회개의 요소
☄ 회개가 포함하고 있는 것들.
회개에서 사람들에게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매우 자주 사람들은 회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결정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회개의 그 높이와 깊이와 그 넓이와 길이를 알지 못해 왔습니다.
그러면 회개라는 행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대답은 전 인격입니다. 회개는 전 인격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6:17절). 여기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가자아 먼저 마음과 지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부르는 길을 단지 그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의지에만 호소합니다. 그러나 의지는 처음이 아니라 가장 나중에 올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필요가 있으며, 자신들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언급받아야 하며 밝혀질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에 관한 설교는 지적인 면과 이해의 면으로 시작합니다. 설교가 여러분들에게 지적인 면과 생각의 면을 제외 시킨다면, 그것은 또한 여러분들이 율법을 제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분께서 그것을 이런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1) 회개는 마음과 감정을 포함합니다.
욥은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리가 “자신의 가슴을 쳤다”(눅18:13)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하여 볼 수 없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여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나아가 자신의 가슴을 쳤습니다. 로마서 7:24절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7:11절에서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참된 회개에 포함된 감정들을 특별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된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친히 주신 자신의 복들 중 하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절). 복된 그들은 단순히 영만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슬퍼합니다. 지금 이것은 우리들에 의해서 간과되어 왔던 것은 아닌지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을 여러분들은 얼마나 자주 보았습니까? 우리 개종자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고통에 관하여 알고 있을까요? 오늘날 살마들이 자신들의 죄를 슬퍼함으로 얼마나 자주 눈물을 흘립니까? 자신들의 죄됨 때문에 그리도 괴로워하는 자들을 여러분들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발견합니다.
회개는 마음과 감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것은 단지 지나치는 후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바람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의 표현의 강도는 사람 각자의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다른 면에서 다른 것처럼 감정의 면에서도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여 관심을 두고 싶은 것은 이런 감정의 강한 요소가 항상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없다면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감정을 느낍니다. 괴로움과 경외와 두려움과 같은 그런 종류의 감정이어야만 합니다. 감정들은 항상 회개에 포함됩니다. 바울이 “경건한 근심”(개역성경: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7:10)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그런 감정입니다.
2) 회개는 의지를 포함합니다.
회개는 또한 의지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생명적입니다.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회개자는 그것을 반드시 버려야만 합니다. 그는 후회의 감정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반드시 떠나야만 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3).
세례요한의 설교가 있는 누가복음 3장에 가면,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망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8). 여러분들은 그것에 관하여 무엇이나 해야 한다고 요한은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태복음 21장에 있는 두 아들의 비유 속에서 동일한 가르침을 발견합니다.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에는 전환점이 있습니다. 의지가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전의 잘못된 곳으로부터(from) 바른 곳으로(to) 전환하게 합니다.
행동은 회개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킵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1:9).
이것은 회개에 포함되는 이런 행동의 위대함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측량할 수 있게 하는데, 즉 회개는 전 인격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4. 회개의 주체
회개의 주체의 첫 번째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변화된 관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들을 잘못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관점들을 소유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서도 전혀 다른 관점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다른 주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남녀가 회개할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삶 자세와 삶의 목표 나아가 살아야만 할 방법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관점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죽음과 영원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달리 말하면 회개는 전인격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세상에서 가치와 관여된 모든 것에 관한 인격적인 전체 관점 또한 포함합니다.
5. 우리가 회개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관점의 변화
제일 먼저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과 생각에 있어서 변화를 포함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회개할 때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전적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우리는 신약성경에 의해서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히12:28절)을 명령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위대하며 그분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그분을 경외함 속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경외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소유한(두려워하는)“(요일4:18) 그런 경외가 아닙니다. 그것은 겁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확실하게 더욱 더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더욱더 형상화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압니다. 공의와 자비는 함께 만납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두개를 동시에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들 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혹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분법으로 나뉠 수 없습니다. 또는 한 편만 강조되어 하나님을 자신들의 요구에 짜맞추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2) 죄인됨을 철저히 인식함.
보다 더 큰 변화는 이전의 이기적인 자신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죄책감과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죄를 범해 왔다는 감정을 소유합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시편51편에서 다윗이 놀랍게 토로했던 것처럼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오염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여러분들은 오염을 느낌 적이 있었습니까? “저는 비천하고 죄에 가득합니다”라고 챨스 웨슬리는 썼습니다. 성도가 위대해지면 질수록 이것을 더욱 더 알게됩니다. 달리말하자면, 그들의 회개는 더 깊어집니다. 그들은 타락과 원죄의 결과로 자신들 속에 있는 비천함과 자신의 마음의 부패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 중에서도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기력함을 깨닫습니다.
3) 죄를 미워하고 대적함.
또 다른 변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생명과 삶에 대한 관점의 변화입니다. 그들은 이제 죄를 미워하는 감정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된 행위와 죄된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죄를 죄로 여기고 미워합니다. 그들은 이런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적이 없었을 때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졌던 것처럼 이제는 죄를 그렇게 미워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은 거룩의 아름다움과 의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대한 감각을 소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아름다움의 영광을 봅니다. 이런 것들(죄를 미워하고 슬퍼함과 거룩을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더 이상 자신들과 상극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니의 법이 완전하며 순수하며 거룩하며 공평하여 의롭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은 더 이상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6. 회개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결과들.
이런 모든 것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제가 요약해 보겠습니다.
회개는 죄 때문에 일어나는 비통과 슬픔의 감정으로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자기 혐오-죄된 본성을 미워함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우리 잣니을 미워합니까? 로마서 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바울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또한 경외감으로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의로우시며 공평하신 분이며, 또한 우주와 영원한 심판의 주님 되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범죄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의 빛 안에서 우리의 자기 혐오는 우리를 구원을 위한 갈망으로 인도하며, 그리고 또한 그런 구원이 가능할 수 있도록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을 함에 있어서 잠시 동안 잘못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자신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선하나 표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한 열망 또한 계속됩니다. 그들이 영으로 가난하여 애통해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하나남께서 자비를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맡길 뿐입니다. 그들은 어느 것도 변호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변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이 바로 회개의 정의입니다.
7. 회개와 후회의 차이.
참된 회개는 후회와는 달리 이런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항하여 그분을 슬프게 만들었고 그분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그런 감정을 가지게 합니다. 제가 반복하지만 회개는 우리에게 오염과 전적 무가치의 감정을 갖게 합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죄를 제거하고 싶은 갈망과 결단을 줍니다. 이런 격렬한 갈망, 이런 행위, 이런 열정, 이런 복수심이 바로 바울이 말한 것들인데, 이것이 바로 경건한 슬픔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팔복의 하나로 다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궁극적인 시금석이며 후회와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입니다. 즉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 싶고, 더욱더 그분과 같이 의롭고 거룩하며 청결하게 되기를 원하는 그런 열망을 갖게 합니다. 회개하는 자는 단순히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했고, 그 후에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낙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후회가 소극적이라면 회개는 적극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로이드 죤즈의 설교 연구
김재윤, 광야교회
1장 연구의 필요성
신학자와 목회자를 막론하고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설교자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는 정근두 목사가 포체프스트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인 '로이드 죤즈의 설교론'이라는 책과 토니 사전트 박사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인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죤즈'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다. 정근두 목사의 책에서는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을 그의 설교를 통해 고찰하고 있다. 또한 토니 사전트 박사의 책은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성령론에 주시하여, 그의 설교를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두 논문 다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징들에 대하여 별 언급이 없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징이라 함은 다른 설교자들과 비교할 때 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설교의 특성을 두고 한 말이다. 정근두 목사의 논문은 좋은 논문이지만, 주로 그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에 주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토니 사전트 박사의 논문도 훌륭한 논문으로서, 그는 이 논문에서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진단적 설교면에 두 장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는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를 이루는 진단적 설교의 면은 다루지 않겠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로이드 죤즈의 설교의 주된 특성으로서 전도적 설교, 교리적 설교, 복음적 설교, 현미경적 설교, 송영적 설교, 균형적 설교, 전체적 설교 등의 측면이 실제 그의 설교들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고찰함으로써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의 주된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논문의 초두에서 필자는 로이드 죤즈 자신이 설교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와 로이드 죤즈 설교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해-정근두 목사, 토니 사전트 박사 두 분다 로이드 죤즈 이해에 있어서 그의 성령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1)-를 직접 그 자신의 말을 통하여 들어봄으로써 유익을 얻고자 한다.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하여 지난 세기의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설교의 방향성과 특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설교보다 더 중요한 설교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설교자 자신의 신빙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로이드 죤즈의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로이드 죤즈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많은 지면을 이에 할애할 것이다.
2장 로이드 죤즈의 생애
1. 의사에서 설교자로
그는 호더 경 밑에서 지도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황실 주치의였다. 그러나 그는 목회에로의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소명을 받고 이러한 모든 세상부귀의 길을 버리고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확실한 소명없이 목회의 길로 들어서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그는 어려서 집의 화재와 형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덧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또 어린 시절의 그의 학교 선생님이나 교회의 설교자들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직해야 할 것을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그는 정규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신학교의 풍토는 자유주의 신학이 활계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존 칼빈이나 챨스 스펄젼 등 걸출한 설교가들이 다같이 신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은 점은 즐거운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 구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의 책들을 독파해 여느 신학자 못지 않은, 다양하고 해박한 신학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설교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그는 헌 책방에서 구입한 죠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2권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죠나단 에드워즈는 멘토요 스승이었다.
그는 의사 시절에 배운 치밀하고 세밀한 진단 방식을 그의 설교에서도 활용하였다. 그래서 본문을 주의깊게 파헤치는 그의 설교 방식은 특별한데가 있다. 또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듯 그의 설교는 철저히 회중을 간파하고 진단한 설교이다. 그의 설교가 그처럼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을 고치려는 의사에서 영혼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병석에서 그리스도를 믿기를 맹세하다가도 건강해지면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영적인 죄의 본성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그의 27세의 나이로 이미 3개의 학위를 갖고 있는 의학박사였다. 평생 그는 박사라는 애칭으로 불리워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생활을 하고 주일학교 부장까지 지냈으나 자신이 회심하지 않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진로의 변화는 주위 사람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주위 사람들은 바울에게처럼 그를 미쳤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는 평생 의학 서적들을 읽었고, 의학 협회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의학계는 그와같은 인재를 잃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2. 샌드필즈의 특이한 설교자
그는 가난한 광부촌인 샌드필즈의 설교자로 부임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사역을 통해 그 지역사회가 바뀌게 된다. 그의 교회에는 술 끊기를 결심하고 갖다 논 술병도 있었다. 가장들은 가정적이게 되었다. 기도회는 사람들이 모였고, 기이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옛 방식을 굳게 믿었고, 세속적인 방식을 교회에서 제거하고, 설교와 기도에만 힘썼다. 그는 샌드필즈에서 전도 설교를 하였고, 그 지역에서 그는 그의 회중들에게 성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는 작은 키에 이마가 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처럼 검은색옷을 즐겨 입었다. 강단에서 내려오면 그는 친절과 유머와 따뜻한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있었던 웨일즈에서의 부흥을 다시금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의 설교에 심지어 취재 차 왔던 기자조차도 녹아 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회심자는 늘어가게 되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기도 했으나, 그것이 습관성이라는 것을 알고는 곧 끊었다. 그의 부인도 그와 결혼 후 그의 도움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3. 런던의 탁월한 설교자
그는 늘어나는 직무로 런던으로 그의 임지를 옮기게 된다. 그가 떠날 때 그의 회중들은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의 한 회중은 그가 떠나는 이유에 대해 그가 떠나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자기의 사익을 좇아 떠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그의 회중들에게 신뢰를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그는 뛰어난 강해 설교자 캠벨 몰간과 동사 목회를 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의 회중들은 계속해서 늘어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기념비적인 산상설교와 로마서, 에베소서 설교를 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조직신학 교수였던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도 그의 로마서와 에베소서 설교를 수없이 읽었노라고 간증하였다. 또한 그는 그와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사람과도 우의적으로 토론하였고, 신참내기 설교자들에게 늘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잊지 않았다. 워런 워어스비도 그의 사역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와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던 존 스토트나 제임스 패커도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런던에 있을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설교에 대해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영국의 버너 오브 트루스 출판사의 창립 멤버로 일하였고, IVF 총재로도 일하였고, 런던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버너 오브 트루스 출판사는 지금 개혁주의적인 책들과 청교도 작품들을 출판하는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출판사로 성장하였다. 그의 사역의 열매인 것이다.
그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는 수많은 신학자들과 신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게중에는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걷던 신학 교수가 그의 설교를 듣고 자유주의 신학을 버리게 된 일도 있었다. 제임스 패터도 그의 설교를 통해 설교를 배웠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채플 사임후에는 그의 저술을 정리하는 지혜를 통하여 지금까지도 설교집을 통하여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세계 2차 대전을 겪었고, 이후에도 교회를 강건하게 결속시켜 목회해 나갔다. 그는 전쟁을 통하여 인생의 허상과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성을 고발하였다.
4. 그의 사상
그는 로버트 멕체인의 성경 읽기표를 통하여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주로 오전에는 신학적인 책을 읽었고, 오후에는 전기를 읽었다. 그는 힘들때마다 청교도 리챠드 십스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읽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비판했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했으며,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의 연합을 호소하였다. 그는 종말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고별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속적이고도 집중적인 연구를 쉬지 않았다.
그는 칼빈주의적 감리교도였다. 칼빈주의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강조했다. 그는 죽은 정통을 혐오했다. 형식주의를 싫어했으며 설교를 굳게 믿었다. 그는 복음적인 설교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사역을 통해 이를 증명하였다.워런 워어스비는 그와 대화하노라면 위대한 사상가 앞에 있는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쉽게 설교한다고 주장했다. 어린 소녀도 그의 설교를 이해했다. 또 무식한 사람도 그의 설교를 좋아했다.
그는 부흥에 대해 중요시 생각했고, 제임스 패커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청교도들에 대한 컨퍼런스를 열어 직접 연설하기도 했다. 그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자신 부인의 말처럼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의 사역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는 그가 기도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로 판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회심을 중요시 생각했고, 회심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5. 그의 설교
그는 조직적이고도 성경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성경 전체를 설교하였다. 그는 구약도 신약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현대 교회의 설교에서 천대받는 구약 본문으로도 많이 설교했다. 윌버 스미스 교수는 그의 한 구약 본문 설교를 듣고 그 본문을 처음 대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일 오전에는 주로 체험적인 설교를 하였고, 주일저녁에는 전도설교를, 금요일 밤에는 연속 강해를 하였다.
그는 반드시 설교라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설교는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아무나 설교해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설교자는 지상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소명으로 여겼다. 그는 설교는 구분되어야만 한다고 말했고, 설교에서 의도적인 예화와 유머를 피했다. 그가 유머를 피한 이유는 천국이야 지옥이냐를 결정짓는 심각한 강단에서 행여 가볍게 보이는 인상을 줄까 우려했던 이유였다.
그는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 강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통제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강조했다. 그래서 제아무리 철저히 잘 준비한다 해도 강단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설교자는 무익하게 된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성령관은 개혁주의 성령관과 조금 다른데 그렇지만 오순절의 성령관은 아니다. 다만 그는 성령의 사역을 축소하는 것을 우려하고 늘 성령의 사역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령의 주권적이 사역을 중요시여겼다. 그는 설교에 대해서 철저히 준비하고 강단에 올라가되, 올라가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고 설교했으며 그가 큰 소리를 발할 때는 뇌성이 울리는듯했고, 실감나는 제스처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설교는 웅변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편당이 없는 지도자였으며 가정과 같은 교회로 만들었다. 집에서는 규칙적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고,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그의 독서의 양은 엄청나다. 그의 설교는 무언가 다른 설교였다. 그는 바울 서신들을 사랑했고, 바울 서신들을 또한 즐겨 설교했다. 그는 경건한 설교자였고, 균형잡힌 설교를 하였다. 그는 말로만 아니라 신실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설교에는 그만의 독툭한 선부정 후긍정이 나타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주일 설교후에는 상담을 했다. 그의 상담을 통하여 많은 이들의 그들의 문제를 해결받았다.
그는 한 설교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교리를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 내용과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구별하였고, 회중들을 초청하는 제도를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십자가와 구속에 대한 일련의 연속 강해를 하기도 했고, 영적 침체에 대해서도 일련의 연속 강해를 했다. 또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연속 강해를 하였고, 부흥에 대해서도 일련의 연속 강해를 했다.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길은 그의 전도 설교를 살펴보는 일이다. 그의 전도 설교는 죄인의 회개를 요청하고, 그의 난제와 곤경, 회심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듣는 이에게 무언가에 영혼이 맞고 있는 듯한 압박을 가한다. 그는 20세기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그는 특히 교회의 상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고,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파헤쳐 전하였다.
6.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설교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면 진정한 설교를 들어보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또 이 시대의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강단의 개혁이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설교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뛰어난 설교자이면서도 겸손하고 소탈했다. 또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는 목회 지망생들에게 개인적인 소명이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그에게 소명에 대해 묻는 한 학생에게 그는 헬라어를 공부할 것을 종용하고, 그것이 그 학생의 소명의 강도를 측정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뛰어난 헬라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진정 하나님께서 낳은 걸출한 설교가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설교자의 생애와 그의 설교를 시간을 두고 읽으며 주의깊게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익한 보고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서재에 꽂힌 많은 그의 설교집들을 보며, 한국 교회가 그래도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받은 것을 감사하게 된다. 그의 책은 세계 곳곳의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도 읽혀지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설교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배워야 할 것이다. 진정 로이드 죤스는 혼탁한 오늘날의 이 교계에 진정한 영적 표상이 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 복음을 알게되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또한 그가 스승으로 두었던 훌륭한 청교도들에게서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거룩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고 그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못박고 있다. 또 그리스도인을 세 부류로 나누는-이러한 가르침은 스코필드 주석성경의 영향으로 유입된 것으로 조국 교회에는 C.C.C의 사영리 교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광포되었고, 한국 교회의 강단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이 교리에서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 모두 사람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두 부류로 나누고 있으며, 보좌에 그리스도가 앉아있지 않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이 진리에 대해서는 양무리서원에서 나온 제프리 윌슨의 '뒤틀려진 복음'이라는 책에 수록된 어네스트 롸이씽거의 '거짓 신자'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을 보면, A.A. 핫지, 스펄젼, 매튜 헨리 모두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또한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2)-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신 이 설교자와 같은 이가 다시금 한국 교회 가운데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팔을 불어주기를 소망한다.
3장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로이드 죤즈의 생각
그의 설교 이해에 선행하여 그렇다면 과연 그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 동시에,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이유는 그가 설교와 설교자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상이 필연적으로 그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더 나아가 그의 설교를 이해하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로이드 죤즈 목사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직접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설교하는 일이 이제는 크게 직업적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심리학 강해를 전해 듣고 있는 셈입니다. 설교자들은 회중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설교자들이나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인 무서움입니까! 다니엘 로우랜드는 랭게이토에서 목회할 때에 지옥을 설교하곤 하였었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에 그의 설교와 같은 효과를 얻은 설교가 있었습니까? 그 이후에 그러한 설교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이 우리 중에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상태는 개선되기는커녕 더욱더 가속적으로 침륜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강단은 무능하게 되어 효력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의 웨일즈의 비극에 있어서 가장 기막힌 문제입니다3)!
이 문제는 어렵습니다. 흥미없어 보이지만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목사는 목자이지 하나의 귀여운 어린 양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도적인 개념이어야 합니다. 그는 멋져 보이고, 인기를 얻고 싶고, 농담을 잘 할려고 노력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목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가 교회 안에 있거나 어떤 예배를 집례하고 있을 때만이 목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기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목사는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게 하는 자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의 최고의 목적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정신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목사가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만 그의 직위를 얻을 수 있고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4).
나는 하나님의 미소를 느끼지 못하고 홀로 강단에 서는 것보다 설교자에게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5).
세상에 설교다운 설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 볼 때, 또한 하나님의 대의를 전파할 사역자라고 자인하는 많은 사람의 자질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대의가 이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신비스러운 은혜요, 신성한 능력이다. 이 점에서 내 활동은 나를 역겹게 한다. 나는 내 생애 동안 설교를 한 것은 고사하고 설교문을 만들어 본 적도 없으며, 내가 과연 그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있을 지에 대해서도 절망하기 시작한다6).
나는 이 말에 덧붙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약간이라도 이해한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자기는 한 번도 설교한 적이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언젠가는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7).
…오! 바울이 고린도전서 2:1-5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내 사역 속에서 경험하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나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 지쳤다네, 휫필드의 설교를 읽을 때 나는 일생 동안 진정으로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느낀다네8).
나는 내 생애에서 단 두 번 진정한 설교를 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꿈 속에서였습니다. 나는 꿈속에서 그 두 번의 설교를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무서운 실망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내가 깨어 있을 때 강단에서 그렇게 설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9)?
나는 이전에 하나님에게 쓰임 받았던 어떤 목사들을 계속해서 인용합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강단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생길 때까지 감히 강단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도달한 곳은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 능력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10).
제가 설교를 하게 된 것이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만약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부르심을 거부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그 분의 길이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구별하시며, 그들에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들에게 임재하여 진리를 조명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 교회를 먹이시는 본질적인 방식입니다11).
우리가 일꾼을 밀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그들을 보내 달라고 주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육신적인 열심과 정열을 가지고 사람들을 불러내어 교회의 어떤 과업을 맡기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을 동원하여 그 일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역해야 한다든지 복음을 전파하거나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12)!
바로 여기에 교회가 개입됩니다. 이것은 전파와 가르침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 다양한 직책과도 관련된 신약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따라서 어떤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 받았음을 당신이 명확하게 확신하려면, 먼저 교회가 그 부르심을 확증하고 검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13).
목사들은 하나님이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이며, 교회에 필요한 모든 은사와 도움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참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유창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설교가 아니며 그것은 아무 결과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언제나 성령을 통한 능력의 '역사' 곧 하나님의 '힘있는 역사' 때문입니다14).
만약 어떤 설교자가 나에게 하나님을 느끼게 해준다면, 만약 그가 내 영혼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제공한다면, 만약 그가 자신은 부적합하지만 매우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만약 그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구주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복음의 위대함에 대해 희미한 빛이라고 던져 준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다른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15).
설교자는 사로잡힌 사람이며 그는 이것을 의식합니다. 나는 주저 없이 이것을 단언합니다. 내가 방관하고 있는 때에 비로소 나는 설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말하고 있지만 실은 구경꾼입니다. 나는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놀랍니다. 나는 아주 깜짝 놀라며 듣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참된 설교가 행해질 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처럼 구경꾼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 밖에 있을지라도 내가 그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단지 이 모든 것의 도구요 그릇이며 통로입니다16).
우리가 경험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설교자에게, 설교 도중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느끼며, 영혼들이 죄를 깨닫고 그 결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 듣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17).
나에게 가장 큰 위험, 가장 큰 시험은 지난 주일에 내가 이번 주일에 두 번 강단에 올라갈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에 이번 주일에 두 번 강단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가 맺은 계약을 위반하지 않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은 바른 일입니다.…그렇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주일이 다가왔고 내가 두 번 설교를 한다고 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은 외적인 봉사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심령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 어떤 사람이 심령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 일을 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그의 존재 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18).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바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을 느끼지 못하고 설교한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첼텐함에서 있었던 일은 너무나 예외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내려오셨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와 복을 누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19).
나는 어떤 특정한 본문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시는 대로 자유롭게 설교하였다. 설교 주제는 미리 별나게 생각해 둔 것이 없어도 기이한 방식으로 나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내 기억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영혼 속에 느껴진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충동의 결과였다20).
나아가서, 나는 프로그램을 미리 밝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언제 공부가 끝나게 될지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는, 우리가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믿는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성령은 갑자기 우리 위에 임하신다는 것-그 분은 지성에 빛을 비추시고 마음을 움직이십니다-을 압니다. 나는 성경을 강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21).
만약 성령께서 갑자기 설교자에게 임하여 그를 사로잡으신다면 당신의 프로그램에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신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내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의 대답은 설교자가 화면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22)?
바울은 자기가 설교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으며, 성령께서 자기의 말하는 것을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깊이 들어 박히게 역사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켰던 그 능력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자기야말로 대언자요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긍휼하심 속에서 오늘 밤에도 그 일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성령의 능력과 그 복되고 은혜로운 감동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어느 목사라도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역사하고 잇는 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임을 확신하게 될 때처럼 기쁜 일이 없습니다23).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했던 사람들은 가장 많이 연구하고,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준비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였던 자들이었음을 여러분은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24).
이상의 그의 말에서 보듯이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매우 높은 기준의 사람이 감당하기 벅찬 놀라운 일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그는 설교자의 중요성에 대하여 너무나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사후 어떠한 모임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던 것을 듣던 그의 아내가 나의 남편의 사역에 있어서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영역의 거룩한 일이었으며,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실존적인 존재였다.
4장 로이드 죤즈 설교의 특징
1. 전도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그의 전도 설교적 측면이다. 그는 아예 주일 저녁에는 전도 설교를 작정하고 계속하여 하였다. 그 이유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파가 반드시 교회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도 설교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교회는 한 영혼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장소일수 있다고 보았다25).
요한복음 5:44절을 강해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의 죽음이 여러분의 속죄를 위한 것임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의로움과 공의로움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와 영광스러운 인격을 의뢰하십시오. 여러분의 생활을 그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유일하시며 진실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찬사와 영예를 받을 것입니다26)."
그는 매우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전도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구약을 사용해서도 전도 설교를 하였다. 그의 창세기 32:24절 강해에서 그는 이렇게 전도하고 있다.
"복음은 단순히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끌어내어 보다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본성을 여러분 안에 넣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제가 지금까지 미력하나마 이렇게 애써 설명드린 그 지복의 상속자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망이 더 이상 여러분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 못할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영화롭게 될 그날을 즐거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 우리 인생은 실패라는 것, 우리 영혼이 위험하다는 것, 이런 것들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27)."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인생의 오직 유일한 해결책임을 역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태복음 11:20-24절을 강해하며 임박한 심판을 피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적하는 핵심적인 요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독교 이론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이것 저것에 대한 기독교관이 있으며, 그런 견해가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러 일들에 대한 기독교관에 관심이 쏠리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부터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와의 개인적인 만남이며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촉구하는 초청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맺는 이 관계의 문제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바로 이 문제에 관해서 내가 마지막 심판 때에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당신에게 간단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어떤 분입니까? 만약 그분이 역사에서 삭제된다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있을 것 같습니까? 그분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형성해 갑니까? 이것은 당신이 숙고해야 할 중대한 질문입니다28)."
그렇다면 왜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전도 설교가 필요한가? 사실상 오늘날의 현실은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고, 회개나 복음의 핵심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강단에서 다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에 노출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도 설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정근두 목사는 로이드 죤즈에 대한 한국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정기 세미나의 강연에서 한국 교회에서는 주일 오전에 전도 설교를 매주 하는 것이 너무나도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촉구했었다. 조국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명목상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도적인 메시지가 요청되고 있다.
2. 교리적인 설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리적인 설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조국 교회 안에는 깊은 교리 설교가 사라져 가고 있다. 또한 교리 교육이 등한시 되고 있다. 또 교리가 혐오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교리라 하면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며, 교리를 따지지 말고 같은 믿음인데, 연합에 앞장서자고 주장한다. 일찍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였던 에드워드 영은 자신의 이사야 53장 주석에서 이렇게 교리 설교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교리적이라고 불리울만한 설교를 듣는 경우가 매우 희귀하다. 그리고 그토록 가치있는 제도인 요리문답 공부반은 교회들로부터 거의 완전히 추방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교리에 대해 무엇인가를 좀 알았다면, 그들은 교리란 것이 메마르고 흥미롭지 못하고 그들의 생활과 별로 연관성이 없는 것이기는커녕 모든 주제들 가운데서 가장 흥미롭고 연관성을 지닌 것이라는 놀랄만한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29)."
그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이 세대에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은 교리적 가르침과 교리적 설교의 부흥이다30)."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 교수로 봉직했던 존 머레이 교수도 '기독교 교리와 삶'이라는 글에서 교리와 생활의 연관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 관심사와 관련된 위대한 교훈은 우리 신앙의 가장 신성한 진리들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중심적일 수 없는, 속죄의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겸손하고 헌신되고 자기 희생적인 섬김에 대한 자극이 된다31)."
로이드 죤즈도 자신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행한 일련의 설교에 대한 강의에서 본문에서 교리를 도출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설교의 제목과 그 안에 있는 교리는 본문과 그 문맥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과 문맥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잇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그 교리는 본문의 특정한 배경 가운데서 다루어져야 합니다32)".
그러면, 이제 직접 그의 설교속에 나타난 교리적인 설교의 면모를 살펴보자.
"본문에서 나타나는 대답은 이것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행해진 어떤 일의 결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의 결과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라고 합니다. 그 나무는 누군가가 거기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곧, 자연발생적으로 그 자리에 돋아나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33)."
로이드 죤즈 목사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를 통하여 중생의 교리를 도출해내고 있다.
그의 교리적인 설교의 면모는 산상설교 강해에 있어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산상설교 강해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만심의 완전한 결여, 자신과 자기 의존의 완전한 결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낳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에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이 엄청난 인식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34)."
그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구절을 강해하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의 교리를 끄집어 내고 있다.
왜 우리에게 교리 설교가 필요한가? 교리에 대한 가르침 없이는 기독교는 하나의 도덕 종교로 전락해버리기 십상이다. 또한 교리가 뒷받침 되지 않는 신앙은 사상누각과 같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많다.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 교인이면서도 장로교의 근본 교리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 즉 교회에서 성경에 담겨 있는 핵심적인 교리들을 가르치는 일에 등한시하고, 성경을 이야기 중심으로, 또는 도덕적 강화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교리가 한국 교회를 핍절시킨 것이 아니가, 교리의 결핍이 무지한 교인들을 산출했다는 것을 목회자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3. 복음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 목사의 설교는 철저히 복음적이다. 이것은 그의 설교에 나타난 복음의 깊이와 일관성과 전체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복음을 가감하여 전하지 아니하였고, 철저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로로 사용되기에 힘썼다. 그의 설교에서는 매우 두드러지게 그 설교의 복음적인 요소가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 기독교 메시지요 기독교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복락들을 받아 누리기 시작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35)."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다. 그는 유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원색적인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아니하셨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전해야 할 복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구원 사건입니다. 바로 그것은 우리 구원이 성취되는 행위였습니다36)."
그는 갈라디아서 6장 4절 한 구절을 가지고 일련의 연속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26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강단을 지켜오는 동안 참으로 어리석게도 여러 번 모든 것을 설교했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빠지곤 했었습니다. 마귀는 내게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시작에 불과하다느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십자가에 대한 영광스러운 메시지에는 끝이 없습니다.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하고 황홀하고 감동적이고 심령을 높여주는 어떤 것이 항상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37)."
그는 자신이 복음의 기초로 돌아가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지적, 영적 교만의 모습도 없다. 오히려 겸손히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배우는 제자로서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왜 교회에서 복음적인 설교가 필요한가? 교회에는 복음이 실종되었는가? 조국 교회의 강단은 심각한 복음의 불균형의 병폐를 앓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마치 기독교의 복음이 하나의 도덕강령, 또는 기복적인 메시지로 둔갑하고 있다. 죄인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설교 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위안하고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심리학적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4. 현미경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 설교의 강점은 그 깊이와 철저함에 있다. 그는 결코 본문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에베소서 강해나 로마서 강해, 산상설교 강해 등을 보면 그가 한 구절, 한 구절에 매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그는 한 구절을 가지고 여러번 연속 설교를 하기도 했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가 짧은 구절로 설교한 것이나, 한 구절을 가지고 여러번 설교한 것을 배우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처럼 주마간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지 아니하고, 그 본문이 의도하는 바를 철저히 추적하여 본문의 의미를 확연히 드러낸 것을 배우자는 것이다.
"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의 어리석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이것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력의 부재입니다. 참 이해와 명백한 사고력의 부재입니다38)."
그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결코 놓치지 아니한다.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 이 단어가 주로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합니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그리고 항상 우리는 이 의미를 첫 번째에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따로 떼어 둔다는 것입니다39)."
사실상 그의 모든 설교에서 그의 이러한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서도, 세부적인 의미를 놓치지 아니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숲을 보면서도 나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선지자들 자신도 그들 자신이 예언한 모든 것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에서 실제로 베드로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과 이야기를 그런 방법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 자신조차도 자기가 말한 것을 반드시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떠한 예언도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40).'"
그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확신하고 성경을 경외하며 평생을 산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성경 해석이란 문제는 씨름하는 작업이었고, 하나님과의 교통과 기도 없이는 불가능한 중차대한 과업이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는 로이드 죤즈의 이러한 성경을 현미경적으로 세밀히 관찰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는 작업이 참으로 필요하다. 사실상 오늘날 많은 설교들은 본문이 해석되어지지 않고 있다. 늘상 그 말이 그 말인 설교를 하고 있다. 어느 본문이든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내려오지, 그 본문이 담고 있는 복음의 광휘와, 그 풍성함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 로이드 죤즈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철저한 성경학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5. 송영적인 설교
고신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가르치고 있는 유해무 교수의 조직신학 책의 제목은 '송영으로서의 신학'이다. 로이드 죤즈의 설교는 '송영으로서의 설교' 였다. 이 말의 의미는 그는 설교를 통하여 철저히 삼위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드높였다. 그의 모든 설교는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은 그의 설교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인 찬송시의 빈번한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주님, 살고 죽는 것은
제가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만이
제게 할당된 몫이며
이 일을 위해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만일 생명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만큼 순종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비록 생명이 단축된다 하여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감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이전에 통과하셨던 어두운 방보다
더 어두운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오소서 주님!
그리고 저로 하여금 그 은혜를 인해
주님의 복된 얼굴을 대할 수 있게 하소서.
이 땅 위에서 주님의 사역이 참으로 아름다웠을진대
그 곳에서의 영광은 어떠하리오?
그 때에 저의 구차한 불평과 지루한 죄악된 날들이
끝을 고할 것이며
여호와를 송축하는 승리한 성도들과 더불어
주님을 찬양하는 무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생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이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도 흐릿하지만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심에 만족하며
또한 제가 그 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족하게 여길 것입니다41)."
그는 교리적인 로마서 강해에서도 찬송시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내 이름 주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으니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으리
지울 수 없는 은혜의 표
주님 마음에 새겨져 있으니
열심히 생겨난 것처럼
나 끝까지 참아 내리라
하늘에 있는 영화로운 영들보다 더 행복하네42)."
그는 알미니안으로 알려있는 챨스 웨슬리의 찬송시도 자주 언급한다.
"죽음보다 지옥보다 더 크신 주님이 사랑
그 풍성함을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네
빛의 아들들로 태어난 이들이 헛되게 세상을 좇네
그들은 그 신비에 이르지 못하네
그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모르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네
지금 위에서부터 빛이 비추네 가련한 이 마음속에43)!"
비단 이 뿐만 아니라 로이드 죤즈 설교의 내용 자체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영화롭게 하는 데에 깊은 주안점이 놓여져 있다.
왜 우리에게 이러한 로이드 죤즈의 송영적 설교의 태도가 필요한가?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모든 혜택들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설교자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야할 모든 영광과 찬송을 자신이 중간에서 갈취하고 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이 있었기에, 로이드 죤즈라는 설교자는 존재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소요리문답 1문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의 실천 없이는 바른 설교자가 되기는 요원한 일이다.
6. 균형적인 설교
그의 설교의 또 하나의 강점은 복음에 있어서 균형의 문제이다. 그는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균형있게 강조했다.
"오늘날 심판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극히 적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을 분석해 보면, 자기들에게 좋은 몇 가지의 개념들을 구체화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자기들에게 언제나 핑계를 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경배하지 않습니다. 실로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소위 그들의 신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 전혀 신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영원토록 심판하신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지 않아도 영원토록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믿는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 개념입니까! 전적으로 얼마나 비진리이며 얼마나 무가치합니까! 오늘날 존재하는 새로운 이교도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44)."
설교자의 균형에 따라서 회중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적절히 전함으로써 설교의 균형을 이루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7. 전체적인 설교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그가 구약 본문을 사용하여 설교한 것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그의 설교를 통하여 그가 마치 신약 본문을 가지고 대부분 설교한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가 아베라본에서 사역했을 때에 설교 본문중 4분의 3정도가 구약이었다45). 또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도 그가 사용한 구약 본문은 430여 개 정도로 비율은 약간 낮았지만 그 본문들을 구약 전체에서 뽑은 것들이다46). 윌버 스미스는 1955년 어느 주일 저녁 설교를 들은 다음, 그때 로이드 죤즈가 설교한 본문은 자기가 그때까지 그런 구절이 성경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구절이었다고 고백한다47). 그것은 예레미야 17:14-15 말씀이었는데("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그의 주일 저녁 설교가 으레 그렇듯이 그 설교도 복음 전도를 위한 설교였다48). 여기서 스미스가 적어 놓은 글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여러분은 그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삼 분도 지나기 전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인 성경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 그의 말씀은 무오하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진짜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그의 설교는 정말 내가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하던 설교였다. 그의 설교를 들으며 내 영혼 깊숙이 결심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설교를 하되 정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지 않는 설교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49)."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의 문제는 특히나 구약 복음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다. 구약을 예화 자료의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구약 본문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일을 등한시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 그리고 스펄젼 같은 지난 세기 설교자들은 성경 전체를 아주 폭넓게 사용했다50). 스펄젼이 설교한 성경 본문에 대한 색인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것을 보면 그의 설교 본문 중 약 반 가량이 구약에서 뽑은 것들임을 알 수 있다51). 우리 모두는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일에 칼빈과 로이드 죤즈처럼 균형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5장 결론
이 부족한 논문에서 필자한 의도한 것은 로이드 죤즈 설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더 깊은 연구에로의 동기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상의 로이드 죤즈 설교에 대한 부족한 연구를 마치면서 필자가 내리고 싶은 결론은 설교자 이전의 성도로서의 로이드 죤즈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훌륭한 신앙 인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포용력이 있었고, 그들과 친분관계를 맺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편당이 없는 지도자였고, 연합을 위해 진리를 양보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성도의 연약함과 영적 침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죽은 정통의 위험성을 인식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오해되고 있는 그의 성령론에 대한 문제도 그의 일생을 걸친 하나님과의 매우 깊고도 친밀한 교제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죽어가는 조국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받은 이같은 설교자를 일으키셔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과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본 논문을 맺고자 한다.
1) "로이드 죤즈의 성령론을 고려하지 않고는 그의 설교학에 대한 어떤 책도 나올 수 없음이 분명해진 것이다.", 토니 사전트,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죤즈, 10면, 정근두 목사의 한국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12기 정기 세미나 강연 중에서.
2) 이 진리는 한국 교회 강단의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사활적인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지면을 할애하여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을 두 개의 그룹이나 또는 등급으로 구분 짓는 것이 비성경적임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매튜 풀, 존 길, 챨스 핫지, 제임스 보이스, 로버트 답니, 제임스 손웰, 존 번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89년의 침례교도 신앙고백, 남침례교 신앙 선언문등에서 나타나 있다. 어네스트 롸이씽거, 거짓된 신자, 1993, 11-12면, 매튜 헨리는 그의 마태복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모든 은혜는 우리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구주로서 그분으로부터 받을 혜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같은책, 30면, 스펄젼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 '만일 공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고 공언하면서 그 뜻을 전혀 따를 의사가 없다면 그의 주제넘은 말을 그냥 받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확지시키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사람이 우상들에게 붙잡혀 있고 아직도 마음이 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확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약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같은책, 31면,
다음은 A.A.핫지의 말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를 성화를 위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칭의를 위한 분으로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죄인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거룩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지금 성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나 지금 저를 의롭게 해주십시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혈액 순환과 공기의 흡입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칭의를 성화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호흡과 혈액의 순환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어느 한쪽이 빠지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동시적이며 하나의 생명체를 이끌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칭의와 성화를 다 같이 가져야 합니다. 이 둘은 함께 공전하면서 하나의 삶을 이룹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성화가 없는 칭의만을 위해 영접하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성화되지 않은 것처럼 의롭게 되지도 않습니다.', 같은책, 32면. 스펄젼은 그의 설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그것은 사실상 구원의 결과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이 아니라, 우리의 나쁜 습관, 악한 심성, 더러운 마음, 습관적인 죄악으로부터 구출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죠나단 에드워즈나 청교도들도 이러한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를 배격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로이드 죤즈를 오해한 나머지, 로이드 죤즈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죄의 심각성, 율법의 필요성, 심판의 엄중성을 간과한채, 죄에 뒤따르는 건전한 죄의식을 영적 우울 증상으로 매도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을 행위론자(신자의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사람)와 알미니안(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통탈할 노릇이다. 아더 핑크는 회개 없는 복음은 복음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로이드 죤즈는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떼어내는 것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같이 성경을 완전하게 오해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언제나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에 거룩하여지기로 결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를 비논리적으로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서 시작이 되고 거룩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원의 시작이자 끝인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로 우리들을 인도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거룩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관하여 아주 다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전도자는 거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야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입니다. 복음전도의 전체적인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죄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째서 그들이 현재 이러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어째서인가 하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빛이시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점,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성화를 분리하여 놓는 것은 제가 볼 때는 성경의 진수와 같은 교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택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을 우리들이 가입하려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은 전적으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거룩하지 아니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결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기업이 될 것을 정하는 우선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곧 그리스도 전체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거룩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필연적으로 진리입니다. 바울에 의하여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이 거룩의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선택함을 받은 것은 거룩을 실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거룩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들을 선택하여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룩의 가능성이 아니라, 거룩의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서 어떤 거룩의 표증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택"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교리를 말하고, 그가 선택을 받았고 예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거룩의 요소가 없다면, 그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정통적이면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 그는 선택함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그가 선택함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엄숙한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이러한 것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죤즈, 에베소서강해 1권, 기독교문서선교회
죤 머레이 교수도 그의 조직신학 선집에서 확정적 성화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 따라서, 죄 안에 또는 죄에 대하여 산 사람은 죄의 영역 안에서 살며 활동한다-그것은 그의 삶과 활동의 장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영역에서 살지 않는다. 그것과의 연계는 끊어졌으며, 그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죄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심각한 어조로 '나는 그를 찾았으니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간격이다. 그것은 신자의 삶에 대한 전 관념이 근거하는 토대이고, 일상적인 죽음의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진정으로, 결정적으로, 참인 간격이요 옮김이다. 죄가 죽음 안에서 또는 죽음으로 지배하는 영역과의 단번에 확정된 바꿀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대비는 이 변화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간격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롬 6: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한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진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 아래 있다(14절). 죄에 대하여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10, 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12, 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안에 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한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른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22절). 이러한 대비는 결정적인 변화를 증거한다. 대비를 약화시킬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삶과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난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을 평가하는 모든 척도에 절대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이것은 은혜의 규정들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능력과 죄에의 종사와의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죤 머레이, 죤 머레이 조직신학 Ⅱ,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필자가 어찌보면 이 논문과는 그리 상관 없어 보이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처럼 인용하며 강조하는 이유는, 조국 교회의 강단의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면서도, 성도의 윤리적 책임, 복음에 합당한 생활, 하나님의 심판과 임박한 진노, 구원받는 사람의 상대적 소수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쩌면 이 논문의 내용보다도 더 중요한 이 문제를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장시간 다룬 것이다.
3) 이얀 머레이, 마틴 로이드 죤즈의 초기 40년, 청교도 신앙서, 137면.
4) 같은책, 438면.
5) 토니 사전트, 같은책, 15면.
6) 같은책, 15-16면.
7) 같은책, 16면.
8) 같은면.
9) 같은책, 17면.
10) 같은책, 23면.
11) 같은책, 27면.
12) 같은책, 28면.
13) 같은책, 29면.
14) 같은책, 30면.
15) 같은책, 31면.
16) 같은책, 33-34면.
17) 같은책, 35면.
18) 같은책, 37면.
19) 같은책, 39-40면.
20) 같은책, 42면.
21) 같은책, 44-45면.
22) 같은책, 45면.
23) 이얀 머레이, 같은책, 314면.
24) 같은책, 244면.
25) 이얀 머레이, 같은책, 203면.
26) 마틴 로이드 죤즈, 전도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58면.
27) 마틴 로이드 죤즈, 구약을 사용한 복음 설교, 생명의 말씀사, 101면.
28) 마틴 로이드 죤즈, 복음의 핵심, 양무리서원, 109면.
29) 에드워드 영, 이사야 53장 주석, 성광문화사, 74면.
30) 같은면.
31) 존 머레이, 존 머레이 조직신학Ⅰ,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68면.
32) 마틴 로이즈 죤즈, 목사와 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93면.
33) 마틴 로이드 죤즈, 죄인의 길 의인의 길, 청교도 신앙사, 90면.
34) 마틴 로이드 죤즈, 산상설교 上, 정경사, 63-64면.
35) 로이드 죤즈, 내가 자랑하는 복음, 새순출판사, 49면.
36) 로이드 죤즈, 십자가와 구속, 기독교문서선교회, 29면.
37) 같은책, 10면.
38) 로이드 죤즈,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 생명의 말씀사, 29면.
39) 로이드 죤즈, 요한복음 17장 강해 3, 여수룬, 9면.
40) 로이드 죤즈, 베드로후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117면.
41) 로이드 죤즈, 요한일서 강해 3, 33-34면.
42) 로이드 죤즈, 로마서 강해 3권, 기독교문서선교회, 193면.
43) 로이드 죤즈, 하나님 나라, 기독교문서선교회, 128면.
44) 이얀 머레이, 마틴 로이드 죤즈의 초기 40년, 청교도신앙사, 327면.
45) 로이드 죤즈, 구약을 사용한 복음설교, 19면.
46) 같은면.
47) 같은책, 20면.
48) 같은면.
49) 같은면.
50) 같은책, 21면.
51) 같은면.
로이드 죤즈의 로마 카톨릭 평가
by Martyn Lloyd Jones
Originally Printed in Great Britain at The Burlington Press, Foxton, Near Cambridge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며 앞 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로·마·카·톨·릭·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단체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진리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正統)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處女誕生)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復活)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통이며 ---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敎理)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靈感)과 권위(權威)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離婚)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除名)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게 하나 없습니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 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特徵)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세기 동안 간간이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구절은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發興)한’,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로·마·카·톨·릭·의·중·대·한·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1.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偶像崇拜)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形象)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聖職者)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照明)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거(根據)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蹂躪)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絶對權威)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敎皇)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樞機卿) 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絶對無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敬意)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司祭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의 왕국(王國)’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에 임하도록 세례(洗禮)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奇蹟)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役事)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聖餐式)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司祭職)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 없는 궤변(詭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聖人)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功德)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餘分)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補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3. 계속해서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稱義) ---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 프로테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動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成功)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洗禮)를 통해 의롭게 된 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 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意識)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抹殺)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단(異端)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洗禮)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仲保者)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聖化)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告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着念)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規律)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 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III·결·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한다 해서 놀랄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改革者)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양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危機)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을 수용(受容)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좋은 논쟁(論爭)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라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序頭)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敎理)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 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模造品)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 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역사(役事)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熱情)과 확신(確信)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너희가 마귀의 속임수를 능히 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에베소서 6장 11절).
*청교도 클럽 puritan,hanmom.com 자료이며, 개혁신학연구소에서 퍼온 글입니다.
통달의 경지에 달한 성경 지식과 정연하기 이를 데 없는 논리가 낳는 그의 설교와 저서의 고품질과 방대한 양은 그가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 성령 충만한 말씀의 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화론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앞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하고자 하는 이 글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Great Doctrines of the Bible 중의 18 Sanctification ?the Different Views 및 19 Sanctification ?God뭩 Work and Ours 20 The mighty Process of the Holy Spirit 21 Sanctification in Romans 6 To 8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서적이 한국어로 이미 번역되어 있다면, 그 번역본을 올려 주시면 저의 수고가 절감됨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 영어 본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는 번역에 동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어 본이 없더라도 번역에 동참하실 의향이 있으신 분이 연락 주시면 영문을 팩스로 보내 드리겠습니다.(byungkukim@hotmail.com)젨
영어 원본이 약 44 페이지의 분량(30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됨)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8 성화 ?상이한 견해들
여기서 다시 주의를 환기 시키지만, 교리에 관한 이 강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상이한 국면들 간의 연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교리와 관련하여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 이기 때문에 이 강의에서 크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성화의 교리에 이르렀다. 우리가 얻게 된 신분을 이렇다: 우리는 새 품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거듭 태어났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 받았다;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렇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는 어떻게 된 것 인가? 우리들은 별안간에 온전하게 만들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신자의 생활 속에 죄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성화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에 대하여 무엇을 하시는가를 다루는 교리이다.
이 교리에 대해서는 수 많은 상이한 견해와 이론들이 있기 때문에 매우 논쟁이 많으며, 성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보다 성화가 정확하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련하여 쟁론이 많다, 성화는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특히 지난 200여 년 동안 많은 쟁론이 있어왔는데 그 주된 원인 제공자는 다름이 아니라 위대한 존 웨슬레 이다. 존 웨슬레는 그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성화 및 거룩함에 관한 이론을 발의하였다; 그는 자신이 나서서 이를 가르쳤으며 그의 설교자들이 그것을 설교하도록 가르쳤다. 그것은 위대한 토론을 낳았는데 나는 똑같이 선량하고 똑같이 복음주의적인 크리스천들 간의 표독스런 토론을 낳는 것은 두려워한다.
신학과 이 일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편의 존 웨슬레와 그의 보좌인 이며 조력자인 마델레이의 존 훌레처, 그리고 다른 한편의 조지 휘트휠드, 아우구스투스 톱레디 그리고 기타 신학자들 간의 위대한 토론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크리스천 신앙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중요하다. 그 때 시작된 토론은 그 후로도 다소간에 지속되어 오고 있는데, 이는 존 웨슬레가 여러 가지로 그 이래로 주장되어오고 있는 성화에 관한 여러 인기 높은 견해들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세군의 교리도 존 웨슬레로부터 직접 도입한 것이다. 윌리암 부스는 감리교인 이었는데 그는 감리교회의 교리를 인수하여 그 교리를 수정하였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 중에 생긴 여러 가지 성화 운동들 모두가 존 웨슬레의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들을 때, 어떤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어떻게 믿든 뭐가 중요한 일인가? 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음을 잘 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당신은 존 웨슬레가 조지 휘트휠드 만큼 크리스천이었다고 믿는가??#45208;의 대답은 ?#44536;렇게 믿는다?#51060;다. 나는 나아가서 조지 휘트휠드가 한 유명한 행사에서 받은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을 인용하고자 한다. 어느 날 오후 조지 휘트필드의 매우 힘있고 적극적인 지원자가 물었다, ?#55064;트휠드 선생님, 우리가 조지 웨슬레를 천국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에 대하여 조지 휘트휠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50500;마 그렇지 않을 것이요, 그는 매우 높고 고상한 신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나 나는 거기서 그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44536;러한 태도가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젨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화론(II)
그 견해가 어떤 것이 던 간에 성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의하여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화에 대하여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신자인 크리스천은 항상 성경을 연구하여 교리라는 진리의 가장 성서적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연구를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귀찮다면, 그러한 일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진리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주장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47932;론 우리는 그런 사람의 신학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군중들을 모우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대려 온다면 그의 신학이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사실상 진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은 오직 결과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당신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단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그럴듯한 교리가 당신 앞에 제시되면 당신은 그것을 평가할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그것을 믿게 될 위험한 지경에 자신을 집어 넣고 있는 것이다. 인기 좋은 여러 가지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성공하는 것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올바른 논거를 공부하는 고통스러움을 회피하는 데 있다. 우리의 문전에 그들의 서적과 그들의 이론을 가져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논거를 알고 그것에 관하여 연습하고 훈련을 받았으며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교리를 모른다면 크리스천으로서 창피한 일이다. 우리가 ?#49324;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상관할게 무어냐??#54616;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러한 결과를 피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려는 성화론은 사람들이 성화에 관한 생각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오류가 종국적으로 그들의 성화를 막지는 못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이 강의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성화에 접근함에 있어서, 정의(definition)를 내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자. 성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구 약 성경에서 성화라는 단어를 매우 많이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의미를 간략하게 요약하자. 신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완전하게 동의하지를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밝은 광선처럼 ?#48731;난다?를 의미한다고 하고 다른 이들을 그것은 ?#51096;라 낸다? ?#44396;별한다?#47484;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의미 모두가 성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련이 된다고 생각되므로 나는 두 가지 의미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라 내는 것이다. 구별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진정한 성화는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산에 있었던 후에 모세의 얼굴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빛남을 수반한다. 거룩함에는 빛남, 영광 그 자체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 둘 다가 구약 성경에는 있다. 신약에서도 성화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단어가 구별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음에 유념해야 한다.
성화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위한 구별함이다. 이는 신구 약 모두에 걸쳐서 성화의 중대한 의미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만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에도 사용됨은 참 흥미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은 ?#49457;산?또는 성화된 산으로 불린다. 그것이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거룩한 산이 되었다. 성전 건물은 거룩한 것으로 불리며, 그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다. 성전의 즙기, 도구 등은 모두 성화된 것으로 구별되어 거룩하게 만들었다.
구별됨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세속적이거나 불결하거나 부정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다. 그러한 즙기는 일반적인 용도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일단 성화가 되면, 일반적인 용도로부터 구별되었다. 그러나 둘째로 그것은 또한 적극적인 의미로 성화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용도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에게만 헌신되고, 받쳐지고, 제공되었다. 그런 의미에 관련하여 ?#49457;화시키다?#46972;는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련하여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요한복음에서 두 번에 걸쳐 그것이 발견된다. 첫째로 요한 10:36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정체에 대하여 주님에게 묻고 있는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시는 가운데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아버지께서 나를 성화시키셨다,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50500;버지가 사용하시기 위하여 구별하였다?#47484;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 17:19, 주님은 말씀하신다. ?#46608;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기 위하여 필수적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용하심에 맡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구별함과 하나님에게만 쓰여짐 이라는 이중 의미 속에서, 이 성화라는 단어는 움직이지 못하는 물건과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까지 사용된다.
신분적 성화와 윤리적 성화(로이드 존스 성화론 III)
또한, 당신은 ?#49457;화시키다?#45716; 단어가 신자들에 대한 의미로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약간의 예를 들어보자.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큰 사명을 주셨다. 사도행전 26장 중 특히 18절에서.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44536;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말씀 중의 거룩케된 무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무리를 의미한다.
가장 흥미 있고 중요한 절인 고전 6:11을 보자. 우리들은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성화가 칭의를 뒤따르는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고전 6:11은 ?#45320;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44256; 말씀한다. 여기서 거룩함이 의롭다 하심을 선행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고린도 크리스천들을 세상 밖으로 취하여, 타락한 고린도 사회로부터 끄집어 내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씻고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소용으로 구별된 것이다.
히브리서 10:10에서도 거룩함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51060;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여기서 거룩함은 구별됨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히브리서 10: 14을 보자. ?#51200;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제물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여기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님께서는 구별된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 중의 거룩하게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것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예를 찾아보자: 베드로 전서 1:2,?#44263;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이 말씀 중에서도 거룩하게 하심은 세상으로부터 취하여 구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베전 2:9,?#50724;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뀉?베드로는 여기서 출애급기 19장에서 사용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 사용한 단어를 적용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성화된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구별하셨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사역으로 이미 단번에 영원히 거룩하게 성화되었다.
그러나 성화는 신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인 두 번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걸 맞는 우리들을 만드는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윤리적 의미,?#44144;룩하게 만든다?#47484; 의미한다. 하나님을 위한 구별이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거룩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의미는 우리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어 지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들을 더욱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우리들을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우리 속에서 진행되는 순결케 함과 정결케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이 성화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이다. 사람들이 ?#49457;화에 관하여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 어떤 사람이 성화되었음을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라고 물을 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내부 청결화와 내부 순결화를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만들어 짐을 의미한다.
역자 주: 칭의 ?#50689;화라는 값싼 은혜론의 근저에는 신분적 성화를 윤리적 성화로 생각하는 오류가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의화와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로이드 존스 성화론IV)
그리하여,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이 성화를 정의한다: 성화란 그 분께서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가 선한 일을 하도록 그의 모든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는 성령님의 은혜스럽고 지속적인 일하심이다. 분명하게 해두자: 그것은 그분이 칭의된 죄인 ?이미 의롭다고 여김 받은 자 ?을 ?#51396;의 오염으로부터??이미 이루어진 바, 더 이상 죄로부터가 아니라 - 구하는 성령님에 의한 은혜롭고 지속적인 일하심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칭의가 해결하였다. 그는 의롭다고 선언되었다. 죄는 처리되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세력과 오염에 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44536;가 선한 일을 하도록 그의 모든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칭의란 간편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칭의를 통하여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된다. 우리가 번 것이 아닌데 우리 구좌에 입금시켜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자들을 용서하고 받아드리신다. 그분은 온전히 성화될 때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드리신다. 카톨릭은 의화와 성화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번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역자주. 하나님께서는 죄 중에 빠져있는 남녀를 보시면서도, 그들이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다. 그것은 전가된(imputed) 의로움이다. 그러나 성화는 나눠진(imparted) 의로움을 이야기 한다. 성화는 우리의 구좌에 입금되어진 의로움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생산된 의로움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명백한 구분이다. 교부들은 전가된 의로움과 나눠진 의로움 간의 차이에 대하여 거의 습관적으로 많이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이 우리들에게 친숙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저속해 졌는가를 말해준다. 그 용어들은 17세기, 18세기, 그리고 19세기 까지도 매우 중요한 용어들이었다. 금세기의 우리들은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 우리들은 왜 위대한 용어들과 그들의 위대한 의미들을 상실하였는가?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들의 거듭남과 칭의 이후 죄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님의 도이다. 성화에 관한 정의의 문제를 떠나기 전에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다. 우리들은 항상 성화를 정의함에 있어서 우리의 윤리적 상태와 상황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우리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 우리의 윤리적 상태와 상황의 관점에서 성화를 정의하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그들이 성화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성화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의 개념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화란 도덕성과 순결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도덕성과 순결이다. 그래서, 내세울 수 있는 최고로 도덕적인 사람과 성화 되어 가고 있는 크리스천간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3가지 다른 견해 (로이드 존스 성화론 V)
성화의 정의에 대해선 이 정도로 끝내고 다음으로 가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성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청결하게 하고 순결하게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차적으로 일치시켜가는 과정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상이한 견해들의 핵심이 있으며 세가지 주된 그룹으로 분류되는 사상이 있다.
첫째로 내가 온전주의자(perfectionist) 견해라고 묘사하는, 어떤 형태로든지 이 세상 속에서 온전한 크리스천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견해가 있다. 나는 정확을 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언어로 묘사함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이 순간에 여러분은 무엇이 온전함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상이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에 무관하게,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의 온전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이 첫 번째 그룹이 갖는 사상의 내용과 분파들을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을 시도해보자. 그들 중에는 크리스천으로부터는 죄가 온전하게 제거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의 정원에 들어가서 잡초를 보고 잡초의 보이는 부문만이 아니라 삽으로 잡초를 뿌리까지 파 내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화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항상 온전하게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들은 한 해 또는 십 년의 기간 동안에 훨씬 많이 할 수 있으나, 온전함이란 당신이 이 순간에 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온전함의 슬라이딩 스케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예를 들면 유명한 Charles G. Finney과 그의 동료, Ezra Mayhem과 같은 소위 미국의 Oberlin School에 속하는 이들에 의하여 주장된다. 그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 웨슬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란 크리스천 남녀가 주어진 순간에 죄로 알고 있는 죄를 고의로 짓지 않는 것이다. 존 웨슬레에 따르면,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죄를 범할 수 있으나, 이미 죄라고 일고 있는 죄는 고의로 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간과 순간의 상태이다라고 웨슬레는 말한다; 당신은 다음 순간에 범죄할 수 있으나 당신은 이 순간에는 온전하다. 그리고 그것은 죄라고 알고 있는 죄에만 해당된다. 웨슬레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모르고 죄를 짓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나중에 당신에게 알려 질 것이고, 그리고 당신이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순간에 그 죄를 당신은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온전하다. 그러므로 성화는 온전함을 의미하지만 절대적인 온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들은 죄로부터 온전하게 씻김을 받은 정결한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성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도 죄라고 알고 있는 죄 그리고 마음 먹고 짐짓 지은 죄로부터의 씻김을 받은 마음을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달리 표현한다. 여기서 나는 다시 성화를 ?#50728;전한 사랑?#51004;로 묘사하기를 좋아하는 존 웨슬레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크리스천들은 죄인지 모르고 범죄할 수가 있다. 그들은 아직 연약하며 많은 면에서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온전하다 할 수 있는가?뮔?#44536;는 만일 그들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생활과 행실에서 비록 온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다. 그들은 그 순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다 들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웨슬레는 말한다. 나중에 더욱 큰 사랑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에 있어서는 그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웨슬레는 순간 순간에 있어서 온전함과 성화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온전주의자들의 견해의 특징은 성화는 순간적으로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화를 열망하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화를 간구하면, 그분께서 성화를 우리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화를 순간에 눈깜짝하는 사이에 받을 수 있다. 온전주의자들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를 즐긴다: ?#45817;신이 칭의를 받을 때에 당신의 성화도 받아야 한다.?#44536;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전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경험적인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소위 반작용의 법칙(the principle of counter-action)에 의하여 성화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17 및 18세기에 널리 퍼졌으며, 이직도 인기가 있다. 이 견해는 죄의 제거는 믿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하게 죄의 제거를 가르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패배하기 위하여 일생을 통한 투쟁을 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법칙이 있다. 이들의 가르침은 로마서 8:2를 기초로 한다. ?#51060;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44536;들은 말한다. 그렇다 ?#51396;는 신자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리고 믿음으로 그분에게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죄지음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다. 크리스천 속에는 죄의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것을 없에는 반작용을 하고 남을 정도로 더 크다. 그리고 많은 예화들이 사용되었다.
Evan Hopkins 목사가 그러한 예화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 유명한 두 개를 소개한다: 첫째는 부지깽이 예화이다. 부지깽이는 차갑고, 까맣고 단단하다. 그러나 이 부지깽이를 불 속에 넣으면 어떻게 변하는가? 빨갛게 되고, 뜨겁고 말랑 말랑해 진다. 그것을 불에서 꺼내면 다시 차갑고, 까맣고 단단해 진다. 이것이 이 학파의 성화에 관련한 가르침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당신은 빨갛고, 뜨겁고 말랑 말랑하다; 당신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전과 똑 같은 상태로 되돌아 간다.
다른 하나의 예화는 구명대에 관한 것이다. 중력의 법칙은 무거운 몸을 물 속으로 가라 앉힌다, 한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수영할 줄을 모르면 가라 앉는다. 그런데 반작용의 법칙이 있다. 공기로 부풀린 구명대를 그 사람에게 입히면 어떻게 되는가? 그를 가라 앉게 한 법칙에 반작용이 일어난다. 그 사람이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명대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옛 법칙이 작용하여 그는 가라 앉게 된다! 그는 구명대안에 있어야만 한다. 그는 계속 바라보고 신뢰해야 한다. 그것이 전체적인 영적 상태이던, 특정의 죄이건 간에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 안에 거하며, 그분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가 항상 승리하도록 지켜주실 것이다. 온전주의자들의 견해와 같이 이 가르침은 그것은 정상적인 경우, 경험으로 시작하여 과정으로 계속된다. 다시 말하면, 성화란 수령해야 하는 것이며, 순간에 받을 수 있고, 그리고 나서는 그 경험 속에 거하는 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이다.
세 번째 가르침은 성화란 우리의 거듭남의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이며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지속되며 죽음을 지나서만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견해가 앞의 두 견해와 크게 다른 점은 이 견해는 성화를 칭의에 뒤이어 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생각하지 않는 점이다; 이 견해는 성화는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에 시작되어 우리의 육신이 최종적으로 영화를 입어 타락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로마서 8:22-23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는 것은 우리의 몸이 종국적으로 구속될 때인 것이다.
이 가르침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Holiness by Bishop Rile를 읽을 것을 권면한다. 이 책은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한 여러 가지 다른 아이디어와 이론들을 다루고 있다. 내가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다시 말하거니와, 이런 가르침들을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들을 분파 의식을 가지고 검토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방위하며 다른 가르침을 비난 하는 자세로 읽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자주 말하지만, 나는 존 웨슬레에게 크게 빚진 자이다. 나는 그의 성화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빚진 자이다. 나는 그의 가르침 전부를 받아드리지는 않는다. 이것은 반드시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 중에는 있다. 그러나 나는 온전주의자들의 성화 및 거룩함에 관한 서적들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강조점들을 믿지 않고 거절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그들의 저서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내 속에서의 성화가 진척되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간증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게 한 것을 감사 드린다.
그러므로 온통 성경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저서들을 읽자. 그리고 성경으로 가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냉정하게 그들의 가르침을 검토하여 이 문제에 관한 진리에 도달하도록 애쓰자. 우리들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복을 받아 풍부해지며, 우리들은 성화의 교리를 공부하는 데 시간을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질문 1 :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 가운데서도 마틴 로이드존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로이드존스는 어떤 인물입니까?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설교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의 권위가 훼손되고 피상성에 머물러 있는 현대 교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온전하게 설교하는 것과 교회의 진정한 부흥이 항상 맞물려 있음을 강단에서 역설하고 실천한 설교자였습니다. 특히 성경의 각 권을 처음부터 차례로 살펴 가는 강해 설교를 중시하여 말씀에 천착하는 설교자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저서는 대부분 현장 설교를 책으로 엮은 것이며, 이 책들은 세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적 위로와 도전을 주었습니다. "오직 설교라야만 한다"고 믿고 실천한 그는 "죽어서도 설교하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였습니다.
질문 2 : 로이드존스는 젊은 시절에 의사로 활동하던 중 목회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이드존스의 생애를 잠시 나눠주시지요.
1899년 영국의 웨일즈에서 태어난 로이드존스는 본래 의학을 공부하여 영국 왕실의 주치의로서 장래가 보장된 청년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더 고귀한 부르심" 곧 "영혼의 의사"로 부르심을 받고 1927년 심각한 고민 끝에 신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이 고향인 남 웨일즈 샌드필즈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첫 목회를 시작한 샌드필즈는 빈민 지역이었고, 사역을 시작한 1920년대는 더 이상 역사적 칼빈주의가 아니라 낙천적 자유주의가 만연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임하자 곧 끊임없는 회심을 통해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저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역에는 처음부터 성령의 예외적인 기름 부으심이 따랐습니다. 11년 반 동안의 첫 목회 사역을 통해 등록 교인 93명에 출석 교인 50명이던 교회가 등록 교인 530명에 평균 출석 교인 850명인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1938년부터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동역 목사로 사역하다가 1943년부터는 단독 사역을 시작해 1968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 했습니다. 부임 초기 제2차 세계대전으로 150명 정도로까지 교인이 줄어 있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5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1951년에는 2,500명이 출석하여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고 로이드존스는 가장 영향력 있고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강해 설교에 능했던 그는 베드로후서 강해 설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성경의 한 책을 연속 설교하기 시작했고 이후 21년 동안 계속해서 그와 같이 연속 설교를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12년에 걸친 로마서 강해, 5년에 걸친 에베소서 강해, 사도행전 강해 등이 있습니다.
질문 3 :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라 일컬어지는 로이드존스는 '설교론'에 관한 책을 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설교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설교와 설교자'가 나오게 된 배경이 궁금해지네요.
'설교와 설교자'는 1969년 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에서 6주 동안 16번에 걸쳐 강의한 원고를 엮은 것입니다. 한두 번의 강의로는 그 주제를 충분히 다룰 수 없다며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강의 요청을 번번이 거절하던 그에게 열 여섯 번에 걸쳐 충분히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40여 년간 설교해 온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접근을 피하고 신학생과 목회자에게 실용적인 책이 되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설교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설교를 믿는 설교자들'을 구체적으로 도와줄 실용적인 고찰과 권면으로 나아갑니다. 그 결과, 우리 시대 최고의 설교자에 의한 설교 교과서라 불러도 손색없는 책이 되었던 것입니다.
질문 4 : 마틴 로이드존스는 목회자들에게 누구보다 친숙한 저자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에게서 목회와 성경 강해에 대해 도전 받고 도움을 입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로이드존스에게서 도움을 받을 만한 영역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무엇보다 '설교라야만 한다'는 그의 확신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 역시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의문시되고 설교의 위치와 가치와 목적이 의문시되던 시대였습니다. 이제 설교의 시대는 끝났고 강단 설교에는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설교가 교회의 고유하며 기본적인 임무이고 목사의 본질적인 직무라 믿었습니다. 상담, 심방, 제자 훈련 등이 설교를 보충할 수는 있겠지만, 설교는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핵심적이고 영광스런 직무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설교란 기교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심어주며 진리의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측면을 전달해 주는 일입니다. 설교란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하게 진리의 충격을 주어 그 진리를 살아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방법에 의존하려는 목회자들에게, 말씀과 설교(preaching)에 대한 그의 강한 확신은 오늘날에도 큰 도전과 격려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다음 주일 설교 작성을 위해 즉석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싶고 설교자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질문하는 목회자들은 이 책에서 큰 도움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5 : 설교라면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무척 관심을 갖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사실 예배를 찾는 신자들은 모두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 말씀에 목말라 있지 않습니까. 설교의 수용자는 결국 평신도들이지요 그렇다면 로이드존스가 제시하는 설교의 필수 원리가 있는지요?
우선,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단일체이기에 성경의 메시지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반을 살피는 조직 신학에 대한 건전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본문이라도 전체 성경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으며 개별 본문에 담긴 메시지는 보다 큰 전체의 한 부분임을 항상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설교문은 반드시 강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해 설교란 성경의 한 구절이나 몇 구절에 대한 강해도 아니고, 그것에 대한 연속적인 주해도 아니며, 그 본문에 대한 탁월한 설명들의 모음도 아닙니다. 본문의 강해에서 출발해 개별 본문의 핵심 사상 혹은 교리에 도달해야 하며 이것은 다시 중심 교리가 분명하게 보이도록 점진적으로 배열되어 절정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적용과 권면으로 끝나도록 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셋째, 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과 통제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는 설교의 전달 행위를 지배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요약하자면, 로이드존스는 독자로 하여금 마음과 지성 모두를 붙드는 '불붙는 논리'를 회복시켜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열정적으로 전하도록 도와줍니다. 그 때 설교는 그 설교를 듣는 회중뿐 아니라 설교자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을 할 것입니다.
질문 6 : 마지막으로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왜 로이드존스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로이드존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설교에 헌신했고,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시종일관 초점을 맞췄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인간의 메시지가 아닌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의 확신과 헌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상대화되고 헌신의 가치가 다원화되고 있는 오늘날, 로이드존스의 삶과 메시지는 복음적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확신시켜 줄 것입니다.
1. 부친이 우리들에게 항상 강조해서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서가 마약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남편 프레데릭은 항상 코를 책 속에 박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제 자신이나 혹은 앤, 아니면 우리 둘다를 가리켜 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이지 한때 저는 옷을 벗거나 입으면서도 계속 책을 볼 정도였습니다! 이런 것이 저의 부친을 다소 염려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독서는 쉽게 마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친은 소설에 대해 다소 주저했다고 봅니다. 독서가 독자를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 독자는 다른 일들에서처럼 자신의 독서를 지배해야한다는 것이 부친이 남겨준 교훈입니다.
2. 책 읽기와 관련해서 부친이 분명히 지적해주었던 또 하나의 충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독서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독서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그러나 너희 독서 동기가 네 지식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면 분명히 그릇된 일이다."
즉 부친은 누가 어떤 분야에서 유명해졌을 때, 교인들이 급히 그 사람에 대한 서적들을 읽고서는 '나도 아무 아무개를 읽었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독서는 남 앞에서 잘 읽고 잘 안다는 것을 뽐내려고 하는 자기 선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심원한 이유에서 독서해야 합니다.
3. 부친은 '앵무새가 되기 위해서 책 읽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우리는 축음기나 녹음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친은 여러 강사들이 17,18,19세기의 저술가들에게 도취되어 그들의 사상을 옛 표현 그대로 가져다 옮기는 것을 염려하곤 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사람을 보고 "야, 참 말씀 잘 하신다"라고 감탄하면 부친은 가끔 이렇게 대꾸하셨습니다. "그렇긴 해, 그러나 그저 좋은 학생일 뿐이야."
물론 부친은 우리들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을 나쁘다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싫어한 것은 우리들의 다른 사람들의 것을 그대로 베껴내는 복사 행위였습니다. 독서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4. 또 부친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이디어를 찾아내기 위해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 책들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야 한다. 독서의 기능은 우리들의 생각을 자극시켜서 스스로 사고하게 하는 데 있다. 그래서 책은 읽으면서도 철저하게 소화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베이컨은 어떤 책은 맛만 보고 어떤 책은 삼키고 또 어떤 책은 씹어서 소화시켜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마지막의 경우가 부친께서 인정하는 독서였습니다. "책을 잘 씹고 소화해야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나의 사고력이 자극을 받고 그 결과 내가 읽은 독서의 진액들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이 진액은 내 사고의 결정체이다."
부친의 말뜻은 우리가 각 시대의 지혜를 독서를 통해 습득하고 우리의 일부가 되게 하면, 우리가 자극을 받아 더 낫게 사고하고 그 결과 더 낫게 말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부친의독서 속도는 어떠하였을까요? 아마 들으면 실망할는지 몰라도 부친은 책을 매우 더디게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친의 독서량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굉장한 속독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의 모친에게 부친이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여보,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도 많아요. 내가 좀 빨리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부친은 한때 어떤 속독법 광고를 보고 그 책을 주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속독법 책들은 대개, 페이지의 중간을 읽으면 다른 부분들이 저절로 둥둥 떠오른다는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부친은 자신의 독서 방법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많이 읽었지만 빨리 읽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친의 놀라운 기억력입니다. 그는 읽은 것은 다 기억하였습니다. 그가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던 것은 아마도 위에서 지적했었던 것처럼 책의 내용에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책을 꼭꼭 씹어가면서 읽었으므로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또한 부친은 신약성경을 잘 아셨지만 결코 암기식으로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부친은 외우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누가 부친에게 가만히 앉아서 성경 구절 4개 정도를 외워보라고 하면 그는 분명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동안에 가령 바울 서신의 본문에서 설교를 시작했다면 항 성경 구절이 그의 생각을 자극시켜 15개 정도의 관련 구절들이 정확하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철저히 알았고 그것들을 씹으면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천히 읽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독을 했으므로 자신이 읽은 모든 내용을 다 기억하였습니다.
5. 부친의 일반 서적 분야에 관한 독서는 분량과 분야에 있어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분야의 책을 다 감당하는지 알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부친은 실로 광범위하게 읽었습니다. 부친은 독서의 기능을 정신적 자극으로 보았는데,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정보 제공의 기능이었습니다. 그는 관련 분야의 책들을 통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웨스트민트서 집회(Westminster Conferences)때에 강사들의 말을 모두 염두에 두고 끝맺음을 할 수 있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강사들이 주제에서 빠뜨린 부분까지 보충시켜줄 정도로 사실과 정보에 밝았습니다.
6. 부친은 특히 '기본적인 사실들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분야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장남인 크리스토퍼가 눈앓이를 하여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친이 출타중인 때에 크리스토퍼의 증세가 매우 좋지 않아 안과 의사들을 당황케 했습니다. 의사들은 모여서 숙의해보았지만 그것이 심리적인 이유 때문인지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인지 도무지 원인을 아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문의들에게 크리스토퍼를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저의 부친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부친은 환자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다음 번 병원에 크리스토퍼를 데리고 갈 때에 나도 같이 가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함께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의사들끼리는 서로 잘 통하는 곳이 병원입니다. "나도 의사지요"하고 한마디만 하면 쉽게 담당 의사를 만나고 처방전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인이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은 절대 허락될 수 없지만 선임 의사인 경우는 달라서 부친은 크리스토퍼에게 내린 처방 노트를 받아 자세히 읽었습니다.
무엇인가 읽을 때 항상 노트와 연필을 준비하고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메모하는 여느 때의 습관처럼 부친은 그것을 읽으며 메모하였습니다. 부친은 담당 의사와의 협의가 끝난 후 자신의 노트를 만드시고 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친은 귀가하자마자 자신이 메모한 노트를 옆에 놓고, 매년 나오는 모든 약품들에 대한 방대한 의학 책을 펼쳤습니다. 부친은 늘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이 약품 의약서에서 크리스토퍼에게 투약된 약을 찾아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 약의 부작용을 모두 읽고서 크리스토퍼의 문제점을 찾아냈습니다. 이론만 앞세우고 번지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것은 실제적인 도움이 안 됩니다. 부친은 하나의 단순한 사실을 놓고서 거창한 이론들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사실'들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그 약품에 대한 정보를 관련 의사들에게 전달했는데, 모두들 그것이 크리스토퍼의 증상 원인이라는 데에 동의하였습니다. 크리스토퍼의 증상은 결국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부친은 사실들을 얻기 위해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가족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우리 둘째 아들은 십대였을 때 초월명상(T.M.)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초월 명상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며 진지하게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15세의 소년이 본 관점에서 이 초월 명상은 세상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부친은 손자가 자랑하는 그 놀라운 책들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들의 훌륭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손자들과 이야기할 시간을 넉넉히 내어줍니다. 내 아들 요나단은 롭상 람파라는 사람이 쓴 책을 할아버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부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 책을 가져가서 읽으마". 그 책을 받은 날 부친은 맨체스터로 설교하기 위해 떠나셨습니다.
그날 저녁 집회에는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부친은 귀가하는 기차 안에서 요나단의 책을 한 장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제3의 눈'이라는 제목이 달린 소책자였는데, 표지에는 이마 중앙에 눈이 박힌 중국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괴상한 표지를 단 책을 읽으면서 부친은 기분이 좀 언짢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책을 세심히 끝까지 읽으면서 메모를 해두었다가 집에 와서 요나단과 하나식 짚어 나갔습니다.
우리들은 아직 어린아이들을 대할 때에 자주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어. 철이 들면 다 잊어버릴거야." 그러나 저의 부친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요나단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읽은 책을 세밀히 검토한 후, 무엇이 좋은 점이고 무엇이 위험한지를 지적하였습니다. 부친은 그 책을 읽었기에 요나단보다 그 내용을 훨씬 더 잘 알았습니다. 그 결과 부친이 얻은 정보를 가지고 요나단의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7. 부친에게 있어서 정보를 위한 책 읽기는 독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넓게 읽고 많이 일었습니다. 그는 각종 전기도 읽었는데, 상세하게 서술한 두꺼운 전기들을 탐독하였습니다. 그는 저 위대하고 탁월하며 비극적인 인물이었던 19세기 Newman 주교의 전기를 매우 즐겨 읽었습니다.
뉴만의이야기는 온통 흥미거리였습니다. 뉴만이 어디서 잘못되었고 어떻게 그런 잘못이 발생되었으며 그가 얼마나 우수한 두뇌를 가졌었는지, 또 어떻게 머리를 썼으며 카톨릭 신자의 정신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 등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가 부친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남편과 함께 오찬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옆자리에는 영광스럽게도 캠브리지의 Owen Chadwick 교수가 앉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친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저는 귀가한 후 오웬 채드윅 교수와 나란히 앉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채드윅 교수가 쓴 '빅토리아 시대의 교회'란 책을 읽었을 뿐이었는데, 저의 부친은 채드윅 교수의 모든 저서들을 다 독파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채드윅 교수의 '19세기 유럽인들의 세속 정신'이란 책이 대단히 흥미있고 중요한 역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유명한 사상가들의 글을 다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정신을 위해서 좋은 일이지, 독서를 넓게하며 정신에 원기가 돈단다. 그래서 나는 일반 주제들에 관한 출판물들과 다른 잡지들을 꾸준히 받아보면서 잘 쓰여진 글들이나 양서 서평들을 즐기고 있단다."
저의 부친은 서평란을 꼭 읽고서 세이어씨에게 "여기 좋은 서평이 나왔는데 이 책을 우리 도서관에 비치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제의하곤 하였습니다. 서평은 부친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독서를 돕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저는 부친을 아쉬워합니다.
그는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휴가의 끝이나 시작에 책을 선물했었습니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책을 선물로 주는 일을 퍽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친께서 주시는 책은 언제나 우리가 갖고 싶어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책들을 좋아하는지를 잘 알고서 서평을 볼 때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구입해서 선물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는 앤을 위해서 현대 문학에도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는 제가 빅토리아 시대의 서적들과 기독교 소책자 협회(Religious Tract Society)에서 나오는 서적들, 그리고 헤스바 스트레톤(Hesba Stretton)과 같이 기독교에 근거한 책을 쓰는 작가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언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엘리자베스 제이가 쓴 '마음의종교'라는 책을 받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이 책은 제가 좋아하는 저자들을 모두 다루면서 그들의책들을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제 친구 중의 한 사람이 박사 논문을 쓰려고 주제를 잡았습니다. 제 부친은 그에게 필요한 서적들의 긴 목록을 만들어 제시해 주었습니다. 부친은 서평란을 늘 읽었기 때문에 그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제안한 독서 목록의 절반을 읽었었고 제 친구의 논문 주제 분야에 대해서도 철저히 알고 있었습니다.
부친이 우리 딸인 베단(Bethan)에게 준 여러 가지 조언들은 더욱 놀랍습니다. 베단은 에드워드 토마스의 초기 웨일즈 음영시인들이 관련된 특수 시어(詩語)에 관한 난해한 논문을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부친은 베단에게 이렇게 조언하였습니다. "네가 논의하는 이 분야에 대해 현재 캠브리지 대학에서 꽤 흥미있는 연구가 일어나고 있단다." 이것은 약 3,4년 전 일이었습니다. 그는 캠브리지의 구조주의자들에 대해 읽고서 "내 생각에는 그들에게 문제가 있을 듯하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과연 2,3년 후에 캠브리지의 구조주의 풍선은 모두 터지고 말았습니다. 부친은 베단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였습니다. "너의 전공 분야에 꼭 맞는 책이 하나 있지. 프랭크 케모드가 쓴 것이야." "나는 너의 지도 교수 중 한 사람인 톰 폴린이 쓴 시를 금주의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에서 읽었지." 부친은 아주 세세한 연구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우리들이 독서를 즐기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8. 부친은 대단히 열정적인 분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열심을 함께 나누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는 아담과 레슬링 시합 점수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엘리자베스와 리아논의 학교 문제, 또는 요나단과 미국 정치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며 즐겼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담배 카드를 모으는 것이 취미었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담배 카드를 수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버라본의 교인들 가운데 흡연자는 극소수여서 영화 배우들이 찍힌 담배 카드를 모으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들을 조르거나 학교 친구들의 아버지들에게 빌리거나 하면서 담배 카드를 순서대로 모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노마 시어러의 담배 카드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 주일 동안 노마 시어러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에롤 폴린과 같은 보통 배우들의 카드는 계속 입수 했는데, 노마 시어러는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배우가 몇 번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만 우울증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나이 아마 7,8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 담배 카드는 지금 시가로 100파운드가 넘습니다!). 아무튼 저는 노마 시어러를 손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탁의 제 접시 위에 노마 시어러가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사연인즉 저의 부친이 어떤 동네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부친을 자동차로 모시고 가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초대된 집의 식탁에는 각양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목사님들도 함께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의 부친을 모시고 갔던 사람이 담배갑을 꺼내어 담배 한 까치를 뽑았습니다. 저의 부친은 식탁 건너편에 앉은 그 사람을 보며 "죄송하지만 그 속에 카드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약간 놀란 듯이 그 사람은 "찾아 보지요"하였습니다. 그가 "네,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자 저의 부친은 "좀 볼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시지요?"라고 그 사람이 말하며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노마 시어러였습니다! 부친은 저를 위해 그 카드를 호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하고 집으로 왔던 것입니다.
부친의 이러한 자질이 그를 훌륭한 독서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관심과 열심에 합세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은 부친이 그들을 위해 설교하러 가는 것을 언제나 환영하였습니다. 부친은 그들의 열심에 합세하였습니다. 그 열심히 어떤 것이든 그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방대한 철학 서적을 읽는 일이든 혹은 담배 카드를 수집하는 일이든 부친은 항상 우리들의 열심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는 우리들과 함게 열심을 내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쁨이 곧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9. 부친의 독서에는 긴장 완화의 목적도 있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책을 많이 보아 정신이 피곤해지면 이런식으로 조언합니다. "나가서 산보를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아니면 텔레비젼을 좀 보아요." 그러나 저의 부친은 달랐습니다. "정신은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적 휴식이 독서의 중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종류의 책을 바꾸어 읽도록 해라."
바로 부친 자신이 긴장 완화를 위해 독서를 했는데, 우스운 것은 그럴 때 읽는 책이 의학 전문지였다는 것입니다. 모친은 자주, 저녁 때 의학지에 몰두해 있는 부친의 모습을 보고 웃으셨습니다. 부친은 책을 그냥 대충 읽지 않고 잘 씹어서 삼켰기 때문에 환자에게 꼭 필요한 정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0. 부친은 또한 변증서들도 읽었습니다. 저는 렉섬의 하이웰 존스(Hywel Jones)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에 의하면, 저의 부친은 독서에 있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약 10년은 앞섰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저는 지난주 웨일스어로 나오는 웨일스 복음주의 운동 잡지에 실린 한 서평을 보았는데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로우렌틴이라는 사람이 쓴 가톨릭 성령 운동에 대한 훌륭한 책인데 1982년 6월에 출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친은 1978년초에 이 책에 관한 정보를 우리 몇 사람에게 제공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친은 세상의 일반 사상적 흐름을 늘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스 큉(Hans K ng)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이 전혀 모를 때에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스 큉의 문제를 통찰하였었고, 캠브리지의 영어 교수진에게 일어날 문제도 미리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철학적, 신학적 발전 상황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스 큉을 모르다가 갑자기 그가 두각을 나타내자 그의 책을 사느라고 법석을 떠는 것을 보고 부친은 다소 재미있어 하였습니다. 부친은 한스 큉을 읽고 이해했으며 동시에 그의 생각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과 그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예견하였습니다.
11. 저의 모친에 의하면 부친은 철학 서적과 같은 일반 독서를 할 때에 상대방의 생각을 본인들보다 더 잘 알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저는 위에서 이 점을 요나단과 초월 명상자와의 예시에서 지적했었습니다. 부친은 다른 저술가들을 매우 철저히 읽었기 때문에 우리들을 잘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저자가 ABCDE를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부친은 그 저자가 FGHIH는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곤 했었습니다.
부친은 집에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철학서, 잡지, 신학지를 읽었고, 서평들을 통해 자신의 독서를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부친이 우리부부에게 준 마지막 서적 중 하나는 해리 블래마이어스(Harry Blamires)의 책이었습니다. 그는 이 흥미로운 사람에 대해서 읽고, 그 사람의 위치가 어떠했고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얼마나 그가 가까이 근접했다가 멀어졌는지 등을 생각하며 즐기는 독서를 하였습니다.
12. 한편 부친은 일반 독서의 위험도 언급했는데 한쪽으로 편중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어떤 부분에 빠져서 그쪽 책만 계속 읽느라고 시간을 너무 쓰게 되면 스스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책들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해." 부친 자신이 늘 그렇게 하였습니다.
지난 30여 년을 회고해 볼 때 40년대와 50년대에 문학 공부를 했던 우리들에게 부친이 주었던 도움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로 말하면 예술에 대한 관심이 기독교 세계를 압도하기 전이었고 프란시스 쉐퍼(Dr. Schaeffer)박사가 알려져서 그의 책으로 도움을 주기 이전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쵸서(Chaucer)가 쓴 어떤 이야기에 대해서 공격하며 그를 '추잡한 늙은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저는 쵸서가 그런 지저분한 이야기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도 교수로부터 호통을 당하고는, 집에 와서 부친에게 제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은 "전혀 그렇지 않다. 너는 문학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을 뿐이야"라고 하셨습니다. 부친은 이러한 균형을 믿었습니다.
문학은 문학으로서 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부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문장 스타일과 내용과 집필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는 문학서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저의 지도 교수에게서보다 부친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부친은 적당한 사람에게 적합한 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악한 사람은 부드럽게 대하였습니다. '설교와 설교자들'이란 책에서 부친은, 내성적이고 우울증에 잘 빠지는 이에게는 죄의 확신이나 인간의 전적 타락 등을 외치는 책을 주지 말라고 조언하였습니다. 부친은 자기의 회중을 잘 알았고,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는 문학도의 고민에서부터 성도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항상 격려가 되는 것을 찾아줄 수 있는 자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캐서우드/마틴 로이드존스의 딸의 글에서)
18세기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 역사를 읽을 때 그는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예외없이 청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글을 부지런히 읽은 사실을 관찰했다. 그래서 청교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5년에 새로 출간된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우연히 읽고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때부터 청교도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책들은 로이드존스를 사로잡았다.
이러한 관심을 더욱 분발시킨 요인은 1929년에 두 권으로 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발견하고 부터이다. 그는 이 전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동일한 원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에드워즈에게서 청교도주의의 절정과 극치를 보게 되었다.
"청교도주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역에서 그 꽃을 활짝 피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무언가 건실하고 깊고 참된 것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하곤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표지 뒷면에 보면 다음과 같은 그의 소원이 기록되어 있다. "만약 내게 권위가 주어진다면 나는 이 전집을 모든 목사들의 필독서로 만들고 싶다."
일반적인 청교도뿐만 아니라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즈가 로이드존스에게 끼친 영향은 거의 측량하기 어렵다. "나는 나의 전 목회가 이것에 의해서 통제되어 왔다고 거침없이 고백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로이드존스가 조나단 에드워드에게 보여준 관심은 그의 일상생활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 평상시에나 여행 중에도 늘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서를 읽으라고 추천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서를 읽게되면 반석 위에 굳게 서서 쓰러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런 확신으로 누구에게든지 그의 저서를 읽으라고 권면하기도 했다. 심지어 개혁신앙의 쌍두마차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성경 주석, 그리고 에드워드의 저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이러한 관심을 더욱 부추긴 것은 조나단 에드워드를 발견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책을 읽으면 누구든지 그와 동일한 자료들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청교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볼 때, 어느 설교자라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청교도 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청교도 주의처럼 참된 말씀 사역을 격려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그러한 면에서 뛰어난 모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물 아홉 살쯤에 2권으로 된 에드워드 전집을 발견한 이후 이를 탐독했다. 그후부터 에드워드는 일생 동안 그가 가장 가까이하는 인물이 되었다. 특히 에드워드의 전집은 그의 초기 목회에서 그의 목회와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1927년 목회를 시작하기 직전,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우등을 차지했던 내 친구 중 하나에게 읽을 책에 대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위를 위해서 읽었던 많은 책을 추천했습니다. 그 가운데 맥기퍼트(McGiffert)라는 사람이 쓴 「칸트 이전의 개신교 사상」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내가 받았던 유일한 인상은 조나단 에드워드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장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주로 철학자로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즉시 관심이 생겼습니다. 후에 나는 그 친구를 만나 '이 사람 조나단 에드워드에 대해서 더 읽을 만한 것을 어디서 찾을수 있는지 좀 말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에드워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나단 에드워드나 그가 한 일에 관해서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년 후 아주 우연하게 조나단 에드워드 전집 2권을 만나게 되어 5실링을 주고 샀습니다. 나는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 두 권이 내게 끼친 영향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로이드존스의 목회와 설교 및 신학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이드존스의 신학사상은 철저하게 칼빈주의적이다.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강조하지 않는 적이 없다. 설교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런 칼빈주의적 사상은 조나단 에드워드로부터 받았던 영향이었다. 그런 도움에 대해서 그는 1969년에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나는 내 경험상으로 볼 때, 내 목회 초년기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를 통해 얻었던 도움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설교뿐 아니라 18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대 부흥을 일으킨 그의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저서 「신앙적인 연모」는 내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렇게 가치가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가 영혼의 상태와 조건을 해결하는데 전문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회사역에서 다양한 영적 체험의 단계를 거쳐 나가는 교인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문제들을 아주 실제적인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에게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냉철하게 그의 독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송삼용 목사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
한국교회강해설교연구원
로이드존스는 설교는 항상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의 설교의 첫 번째 근본 원리이며 이 근본 원리는 설교학적인 특성보다는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로이드존스의 설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구조나 형태보다 그 메시지의 내용에 있다'라고 머레이가 지적하는 바는 옳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설교의 내용을 결정짓는 그의 해석학적 원리와 방법을 본문과 설교자라는 제목으로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로이드존스는 '독보적인 학자'(Marshall,1972:282)로 인정받고 그의 설교는 '미래에 어떤 강해 설교자도 무시할 수 없는"(Bruce,1974:125)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해 설교자로서 그의 합법적인 위치가 인정되는데 비해서 그의 설교의 해석학적인 평가는 희귀한 현상이다.
I. 성경 접근법
1. 고백적 접근
로이드존스는 성경의 본성을 기본적으로 칼빈주의이고 개혁주의적인 전통의 빛속에서 이해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계시오, 기록이요, 설명입니다. 성경은 죄악된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의 계시입니다. 그 자체가 그러하다고 주장하며 책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1978 B.82).
다른 곳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또한 말합니다.
이 책에 대한 주장은 절대적으로 독특합니다. 세상에서 그와 같은 책은 달리 없습니다. 모든 다른 책들은 인간의 소산물입니다. 그것들은 인간 의지와 이해와 통찰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한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메시지에 관해서는 계시를 주장하고 그 메시지가 기록된 방법에 대해서는 영감을 주장합니다(1983A:98).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것은 약 1840년 이후로 유럽의 신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학문과 학식이 계시의 위치를 점령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믿는다.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로 여겨지지 않고 현대의 진보된 학문적 지식이 새로운 권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운동에 관련해서 특히 금세기에는 교회가 존경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본다. 그 결과 학자가 최후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로이드존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전적으로 다른 접근방식이 교회 내에 영적 생명의 통로를 막았다고 본다. 따라서 오늘날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기계적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사람들을 붙잡으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영감 하셔서 계시를 주시고 오류 없이 그 계시를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저자이시라는 의미입니다(1977A:327).
다른 경우에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교리는 이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서 전적 통제되어 잘못으로부터 보호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지식에 인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표현에도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들 자신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었지만 성령에 의해서 통제되었기에 궁극적인 결과가 보장됩니다(1983A:99).
그래서 그 기록 자체가 영감된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단순한 인간적 기록이나 말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신 말씀이요 사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설교나 삶에 있어서, 교리나 세계관에 있어서 어떤 측면에서든지 권위를 가진다.
나아가서 다른 부가적인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다 얻을 수 있습니다"(1981:189).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충족하다. 동시에 그들이 기록한 것에는 실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로이드존스는 오늘날 교회의 상황의 주요 요인은 성경의 신적.완전적 영감에 대한 신념과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에 대한 믿음을 지난 세기에 버렸기 때문이라고 다시금 지적한다.
불행히도 기독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더 이상 충족하지 않다. 현대 학자들의 (1981E:186)고 사실상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점차적으로 복음주의 교계 내에서도 소위 학식에 대해서 상당한 양보를 하고 있다. 그럴 때 "문제가 된 것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설에 대한 교리를 상실하는 것이다"(Henry,1980:160).
오늘날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과 함께 성경의 성격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고백적인 접근의 참된 가치를 바로 인식해야만 한다. 불트만 이후에 전제 없는 해석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소망스런 것도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바 있다. 전제는 한 사람의 해석 과정에 있어서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전제는 전 이해가 다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성실한 해석은 성경에 일치한 전 이해로 접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앞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로이드존스의 성경에 관한 전 이해는 개혁주의 고백과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의 신적 성격에 대한 그의 고백적 접근은 성경에 대한 경외적인 접근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2. 경이적인 접근
로이드존스는 성경에 대한 바른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독특하기 때문에,"다른 어떤 책을 접근하듯이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무릎꿇지 않고 성경을 읽어서는 안됩니다"(1981B:22) 한 사람의 성경에 접근하는 태도, 성경을 읽는 마음 가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음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어떤 부분을 접근해도 "정신"을 가져야만 한다. 두려움과 떨림, 겸손함이 없이는 성경을 풀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성경에 접근할 때는 상당한 주의와 듣고 배우려는 마음, 말씀을 받으려는 경건한 기대감을 가져야만 한다.
계시란 그 정의부터 인간의 지성을 넘어선 것이요. 성령의 도움 없는 이성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여기에는 자연적 이성을 가지고 나아갈 수 없습니다."(1983A:174) 성령만이 인간으로 이 계시를 이해토록 한다.
로이즈존스의 외경적 접근을 최소한 두 가지 실제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진지하게 대한다면 우리는 연구와 준비와 기도가 절실히 필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1981C:193).
기독교의 초기부터 이런 호소는 듣기 원하는 자에게 주어져 왔다. 아퀴나스는 어려운 성경구절을 만나면 금식하며 기도하곤 했다. 루터는 열심히 기도하면 반 이상 연구한 것으로 생각했다. 칼빈은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무진장한 부요의 샘물을 성도들의 눈앞에 끌어올리는 두레박이라고 믿었다. 핑크는 바로 이 점이 많은 사람이 실패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판 데르 발트는 동일한 경고를 한다. "전에 성경 기자를 인도하셨던 동일한 성령께서 오늘도 여전히 성경해석자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들을 인도하신다"(Van der Walt,Tj.1973:17,첨가된 강조).
로이드존스가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를 호소하는 것은 열심 있는 연구를 대체하도록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심한 준비와 성령의 기름부음은 양자 택일사항이 아니라 상호보완 사항입니다"(1982C:305).
최근 성경 해석학의 임무는 더 이상 본문 설명에 머물지 않고 본문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과 본문에 표현된 견해가 옳은지를 판단하는데 가지 나아가고 있는 실정이다(Gaffin,1969:133). 이러한 경향에 반대해서 로이드존스는 "우리는 성령의 판단아래 있어야지 성경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된다"(1981B:31)고 주장한다.
로이드존스는 현대 복음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제가 보기에는 현대 복음주의의 허점은 경건 문제에 있습니다. 한때 영성으로 불리우던 것을 상실한데 있습니다. 우리 복음주의는 너무 젠체하고 자만하고 너무 건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아래 겸비해진다는 생각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거짓 지성주의의 영역에 너무 깊이 빠져있습니다(Henry, 1980:161).
우리가 오늘날 메마른 많은 강단들과 대조적인 그의 설교를 생각하면, 그 방대한 양과 그 질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의 설교는 이런 경외적 접근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3. 구원적 접근
로이드존스는 성경에 접근할 때마다 성경의 기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성경의 의도는 인간에게 구원의 지식과 경건한 삶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데 있다(딤후 3:15,16).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개인 구원의 교과서라는 좁은 의미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의 구원의 목적을 염두에 두면 성경 연구에 있어서 몇 가지 실제적인 유익을 가져다준다.
(1) 해석자로 하여금 성경의 사소한 사항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는 위험에서부터 보다 중요한 메시지를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2) 한 구절이나 한 단어의 하나의 가능한 해석만 취하도록 해석자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다.
(3) 성경을 단어 위주보다 교리위주로 연구하도록 해석자를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이 항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자명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자주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실패한다. 그리하여 성경의 구원적인 혹은 실제적인 목적은 개혁주의 학자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지만 동시에 설교자들마다 그 실제적인 해석 과정에 있어서 귀담아 들어야만 할 것이다.
로이드존스의 성경 전반의 방식에 관한 우리의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첫 접근 방법이 정당하지 않으면 어떤 원리와 방법도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적 이해라는 해석적 목표에 도달하는데 도울 수 없다.
로이드존스에 따르면 해석학의 분수령에 속한 문제는 두 접근 방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성경을 종교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의 전집으로 보고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방식과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으로 성경을 보고 경외심을 갖고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 결단으로부터 설교자는 어떤 해석 원리와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해석도 전이해 없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관한 해석자의 신념은 그의 해석 과정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을 로이드존스는 분명해 했다.
II. 본문 접근방법
1. 만족할만한 이해의 필요성
설교자는 반드시 성경의 해석자이다. 그의 임무는 엄밀히 말해서 두 과정을 포함한다. 그는 먼저 본문이 본래적인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파악해야만 한다. 다음 그 본문이 신자들이 실존적 현재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대개 첫 과정을 해석9exegesis), 두번째 과정을 해설(exposition) 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의미에, 후자는 의의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촤일즈(Childs,1970:141)의 말을 빌리면 "본문이 의미했던 것과 그것이 의미하는바는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둘 다 성경 해석학의 임무에 속한다." 불트만과 더불어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원 저자의 정황과 현대 독자의 정황 사이의 차이를 왜 오늘날 해석이 긴급히 필요한지에 대한 기본 이유에 제시한다. 마샬이(Marshall, 1980:9)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일반적인 경향은 두 정황 사이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두 정황사이에 있는 동질적 요소를 과소평가한다.
로이드존스는 두 정황의 문화적, 역사적인 차이에 의해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변하는 영적 정황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우리가 20세기에 살기에 문화적 언어적 차이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해석작업이 더 복잡해 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로이드존스는 두 정황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므로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해석 작업의 출발점을 바른 지평에 두도록 돕고 있다.
로이드존스는 설교자가 설교하기 전에 본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이해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이해'라고 할 때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야말로 현대해석학에서 가장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의 하나이다. 로이드존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 현학적인 대답을 직접 하지 않고 있지만 그의 설교를 통해서 실제적인 대답의 일말을 제시한다.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진리의 지적인 이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으나 만족할만한 이해는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 이상이다. 그에게 있어서 만족할만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표용을 의미한다. 본문의 진리를 참으로 이해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진리는 열정을 산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감정과 느낌이 있습니다"(1980:251). '진리 이해는 나의 열정, 나의 관심, 나의 사랑, 나의 전 존재가 거기에 관련해야 합니다. 나는 그 진리를 내 모든 것으로 사모해야만 합니다"(1978B:193).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자로서 우리는 바울의 서신을 감동하지 않고 읽을 수 없습니다. 감정이 우리를 휩싸고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서신서에 나타난 진리들을 아는지 판별할 수 있습니다"(1978B:288).
요약하면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진리의 이해와 포용은 나눌 수 없는 전체 -하나님의 말씀과 만족할만한 이해-의 두 측면이다. 이렇게 해석의 목표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로이드존스는 그의 스승인 조나단 에드워즈와 일치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본문의 의미는 그 객관적인 내용과 해석자의 개인적인 삶을 위한 의의라는 두 면으로 구성된다(Edwards,1979A:237)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그러나 이 거룩한 열정은 '바르게 조명된 이성과 영적으로 하나님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는데서부터 생겨난다"(Edwards,1979A:281). 그에게 있어서 해석의 목표는 정당하게 조명된 이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거룩한 열정을 획득하는 것이다.(Anon,1977:361).
이 면에 이어서 칼빈 역시 로이드존스와 정확한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독특한 통찰인 경건의 신학(theologia pietatis)이란 해석학적 방법은 자주 망각되고 있다. 그 결과로 진리와 실천,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인식과 구체적인 적용 사이에 괴리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칼빈의 강요, 특히 2장에서는 그와 같은 분리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두려움과 경건을 가르쳐야 하고 다음으로 그 지식을 우리의 안내자로, 교사로 삼아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배우고, 얻은 후에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고마움을 표현하도록 배워야 한다(Calvin 1967A:39-40).
참된 개혁주의 해석학에 있어서 해석의 목표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진리의 만족할만한 이해는 해석자의 전 인격-먼저 그의 지성을, 그리고 그의 감정을 마지막으로 그의 의지를 - 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진리의 바른 이해는 경외심과 두려움, 기쁨과 찬양 속에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로이드존스에 따르면 해석자의 가슴 깊숙한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토록 하기까지는 본문의 진리가 참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주어진 본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석을 위해 지금껏 생각해온 것은 본문의 바른 해석을 위한 필수적 전제 조건이지만 그 자책 바른 해석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만족할만한 이해라는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해석의 실제적인 과정이 요구된다. 로이드존스에 의하면 이 실제해석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하나 있다. 해석자는 반드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바른 해석을 하는데 가장 흔한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자기 이론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여 그것을 본문에 억지로 갖다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최선을 다해 공정함과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대하여만 한다. 마샬은 (Marshall, 1972:282) 로이드즌스 자신이 놀라우리만큼 정직한 해석자인 것을 인정하고 있다. 로이드존스는 문제를 어물거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모두를 대하고 있다. "성경의 어떤 문제는 우리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1983A:216)라고 로이드존스는 정직하게 시인한다. 비록 입장을 달리하기는 주저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본문에 대한 정직성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할 때는 과거의 유명한 해석자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용기를 갖고 있다. 어떤 때는 칼빈, 카이퍼, 하지 등과 입장을 달리 하기도 한다. 그의 정직성의 결과로 전통에 덜 메인 보다 독창적인 해석이 가능했음을 알아챌 수 있다.
2. 분석학적 접근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는 본문을 분석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방법은 없다고 로이드존스는 믿는다. 왜냐하면 예컨대 바울의 편지들에는 항상 특정구조가 내재하고 있으며 팔복에도 특성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우연히 거기에 배치된 것이 아니고 영적, 논리적 귀결에 따라서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분석적 접근의 목적은 본문에 내재한 특정한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며 거기에 따라 본질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한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이고 지적인 의미로서 분석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강해는 반드시 자연적이어야 하고 인위적이어서는 안되며 본문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인위적인 무리한 단계까지 로이드존스는 개략적인 구조에 대한 관찰로 나아간다.
로이드존스는 설교마다 대개 본문 분석을 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 기능은 본문에 대한 배경과 해석적 정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분해하는 과정에 있어서 로이드존스는 일반적인 분석을 개별적인 분석보다 먼저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권하고 있다. 첫째로,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을 하고, 그 다음 문단에 대한 개략적인 분석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해야 한다.
3. 문법적 접근
로이드존스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가장 유서 깊은 방법인 역사적, 문법적, 해석 방법을 충분히 활용한다. 이 방법은 본문을 해석할 때 그 역사적 기원과 문법적 구조를 살피는 것이다.
문법적 접근의 목표는 문법의 규칙에 따라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로이드존스에게는 문법적인 의미란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의 단순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정상적이고 문자적인 뜻을 살피는 것이다. 그는 문자의 의미가 뒷받침되지 않는 의미 부여를 하는 어떤 접근 방식도 그 타당성을 부인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원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찾아야 하며 평범하고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가 실패로 어떻게 문법적인 접근을 하는지 다음과 같은 측면을 살펴보자.
1) 원본과 역본의 고려
그의 문법적 접근은 첫째로 사본에 대한 고려를 포함한다. 사본의 증거는 대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때로는 최선의 사본도 어떤 말들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만약 다른 곳에서 분명히 발견되는 그 말들이 나타내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의 신학적인 입장을 본문으로 읽어 들어간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원본에 대한 고려와 함께 그는 여러 가지 번역본들을 살펴본다. 강단에서는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지만 연구를 할 때는 여러 가지 다른 번역들을 활용한다(70인역,the Revised Version,the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Engligh Revised Version,the New English Bible,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개인역들도 사용한다.The Scofield Bible Moffat,J.N.Darby,J.B.Phillips 등) 원문의 보다 나은 번역을 위해서 이런 역본들을 활용하며 보다 분명한 의미를 밝히는데 사용한다. 때로는 역본에서 생각된 단어들과 부정확한 번역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로이드존스는 새 번역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새 번역들을 사용하지만, 주의해서 그리고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번역은 이미 번역자들의 신학적 편견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번역이라기 보다는 해석이 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2) 문법과 기초 사항 고려
로이드존스는 헬라어의 뉘앙스를 알고 사용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헬라어의 성, 수, 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자주 동사의 시제나 태에 대해서 관심을 쏟는다. 동시에 이런 면만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바로 지적하고 있다.
원어 자신의 가치에 대란 로이드존스의 평가를 들어볼 만하다. 그는 원어 지식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어 지식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어 지식은 정확성을 위해서는 매우 커다란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원어 지식은 정확성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증진시킵니다."(첨가된 강조,1982C:116).
3) 어휘론적 측면의 고려
개별 단어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 로이드존스는 어휘 의미론(lexical semantics)을 활용한다. 그의 설교에는 때때로 안트(andt)의 깅그리히(Gingrich)의 헬라어영어 사전이나 "권위 있는 그림 - 쎄이어(Grimm-Thayer)사전"으로부터 헬라어 단어의 실제적인 어원적 의미의 정의를 인용하기도 한다.
통치론적 언어학(diachrinic Lingusitics)에 호소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 의심을 할지 모른다. 특히 1961년 제임스 바아(james Barr)의 획기적인 저서인 [성경 언어의 의미론]의 발간 이후에 의미론에서 어원을 연구하는 것이 타당한 방법인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바아(Barr)든지 소쉬로(Ferdinand de Saussure)든지 아무도 통시론적 언어학을 부당한 것으로 배제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3장25절 "화목"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보면 라더미헤르(Radmacher,1971:24)가 지적하듯이 단순히 한 단어의 가능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살피므로 정당한 통시론적 연구의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서 로이드존스는 통시론적 언어학뿐만 아니라 공시론적 언어학(synchronic liguistics)도 활용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이와 같은 전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설교를 보면 이와 같은 활용을 여러 곳에서 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의 활용의 예를 살펴봄으로서 이 말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1978B:192)."신약의 빛 속에서 이 말은.. 그러한 의미와 함축적인 뜻으로 대개 사용되고 있습니다."(1980:200).
4) 구문론적 측면
로이드존스는 '연결의 문제' 즉 접속사의 특별한 주의를 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는 여러 가지 접속사의 기능들을 계속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해석 실제를 살펴보면 접속사는 때로 중요한 이해의 열쇠로서의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접속사는 단어나 문장이나 문단에 포함된 사상들을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의 접속사에 대한 고려 즉 구문론적 측면에 대한 고려는 해석학에 있어서 합법적이고 유용하다 왜냐하면 접속사는 그들이 연결시키는 사상들의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5) 형태론적 측면
로이드존스는 형태론적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바울의 논증 형태를 설명하면서 나타내고 있다.
영감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다른 저자들이 갖는 문제의 차이를 허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기계적인 구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자들의 지성과 생각, 문제와 그 모든 것들을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완전히 통제하셔서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기계적으로 구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체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저자의 문체의 차이를 특성이 남아있지 않은 번역은 좋지 번역이 아닙니다(1975A:159). 문체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헬라어 어순을 중요하게 파악하고 있다.
4. 문맥적 접근
로이드존스는 문맥적 접근을 '해석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책 설교와 설교자들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한다. "여러분은 본문을 그 문맥에서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정직해야만 합니다"(1982C:201).비록 거기에서 이 문제를 '절대적인 법칙'으로 생각한다. 문맥이라고 할 때 나는 역사적 정황(the historical context) 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적 문맥(the linguistic context)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범위가 겹칠 수밖에 없다.
1) 역사적 정황
(1) 일반적 역사적 정황
로이드존스는 어떤 단어나 구절을 설명할 때 원 청중의 사고세계라는 정황 속에서 한다. 청중의 사고 세계라는 정황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의 정황으로부터 설명한다.
(2) 특수 역사적 정황
본문이 형성된 역사적 정황에 대한 그의 고려는 저자와 원 청중의 상황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로이드존스는 그의 산상보훈 설교에서 첫 설교를 산상보훈 설교에서 첫 설교를 산상보훈 전체에 배경과 서론을 제공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다른 설교마다 로이드존스는 본문을 그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서 설명한다.
동일한 것을 신약 서신서를 고려할 때에도 찾아 볼 수 있다. 로이드존스는 가끔 신약 서신의 가르침이 그 메시지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살펴보는데 실패하므로 잘못 해석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2) 언어적 문맥
성경의 상이한 장르를 인정하는 것이 언어적 문맥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로이드존스는 이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 비유라든지, 예언이라든지, 시라든지 하는 문학적인 장르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로이드존스가 문맥을 언급할 때는 특정한 본문이 나타나는 언어적인 문맥을 주로 의미한다. 여기서는 최소한 네 가지 범위가 다른 언어적 문맥에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살펴보겠다.
(1) 근접한 문맥
(2) 주제별 문맥
때로는 및 구절로서 하나의 주제별 문맥이 형성되기도 하지만(마5:3-10)
대개는 한 장과 일치한다(마6:7). 한문단 속에 있는 중심주체에 의한 해석은 로이드존스의 특징에 속한다.
(3) 특정저서 및 저자 단위의 문맥
로이드존스는 즐겨 특정 저서나 저자 단위의 문맥을 해석학적인 배경으로서 취급한다. 그의 산상설교집에서 마태복음 5장 3-7절은 하나의 단일한 해석학적 단위로서 취급한다. 로이드존스는 자주 산상보훈을 세세한 부분을 다루기 전에 전체로서 고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로이드존스의 해석학의 원리는 뒤에 다시 논의될 것이다.
로마서와 에베소에 대한 그의 설교에서는 동일한 저자의 평행 구절이나 전정경적 문맥을 살피기 전에 특정한 저서 단위의 문맥을 해석학적 단위로서 먼저 살피고 있다. 달리 말해 그는 가까운 문맥에서부터 먼 문맥으로 살피고 있다.
(4) 전 정경적 문맥
최종적이고도 가장 광범위한 언어적 문맥은 전 정경과 그 범위가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는 다루고 있는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그가 전 정경을 언어적 문맥으로 취급하는 것은 신앙의 유비와 성경의 유비에 대한 그의 확신에서부터 나온다.
그리하여 로이드존스는 성경은 반드시 다른 성경으로 풀어야 하고 또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비교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3) 근접 문맥의 기능
로이드존스는 "당면한 여러분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문맥이 가끔 결정합니다. "(1976A:11)라고 분명히 말한다. 만약 한 본문을 해석하는데 두 가지 선택이 있다면 로이드존스는 근접한 문맥에 의해서 근접한 문맥을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어떤 헬라어 단어가 순수히 언어적인 입장에서 두 경우로 번역이 가능할 때 택일하기 위해 근접한 문맥을 활용한다. 그리고 만약 한 단어가 순수히 언어적인 입장에서 두 경우로 번역이 가능할 때 택일하기 위해 근접한 문맥을 활용한다. 그리고 만약 한 단어가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생각하기를 근접한 문맥이 그 의미의 정확한 측면을 보여 준다고 믿는다.
예외가 있지만 그는 대개는 동일한 문맥에서 동일한 단어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때로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라도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을 때는"(1979A:70)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 많은 잘못된 해석은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나 구절에만 집착한 결과라고 로이드존스는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한 구절의 의미는 언제나 근접한 문맥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구절의 근접한 문맥은 바른 이해를 하는데 결정적이라는 것은 해석학의 공리이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맥을 살피는 것은 바로 성경적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본문의 의미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근본적인 접근 방식에 관한 우리의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로이드존스는 결코 본문해석의 기본 방법들을 어느 것도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기실 그는 그 방식들에 성실하게 집착하고 있다. 그는 본문 해석을 하기 위해 먼저 본문을 분석적으로 접근하며 본문의 문법적이고 문맥적인 의미에 우선권을 강조한다.
그러나 로이드존스의 강점은 기본적인 방법들을 나열하는데 있지 않고 설교자로서 그것을 자기 설교에 있어서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로이드존스는 해석에 있어서 기본적인 단계를 신실하게 따랐기에 오늘 우리가 아는 설교자가 되었다.
III. 본문 해설법
1. 영적인 접근
앞에서 우리의 목표는 본문의 의미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특징적인 접근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의 주해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의 임무는 본문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주는 의의에 대한 그의 특징적인 접근 방법을 살피는 것이다.
영적인 접근이라고 부를 때는 그 의미를 결정짓는 방법에 관한 측면을 보다. 강조하는 것으로 영적 직관이나 영적 이해를 통해서 의미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또 교리적 접근이라고 부를 때는 어떻게 그것을 그리스도안의 삶에 적용하느냐 하는 규범을 강조한다.
1)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영적 의미
본문의 의의에 관련한 로이드존스의 첫 째 특징은 영적인 접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확성이 먼저 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영적 의미입니다. 특정 단어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에 정확성을 결정짓는 것은 궁극적으로 학식이 아니고 그 구절의 영적 의미입니다. 권위 있는 학자들이 대개는, 어쩌면 일반적으로 서로 완전히 불일치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발견할 것입니다. 의미는 궁극적으로 정확한 학문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영적인 직관, 영적 이해력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 20,27절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입니다(1982C:201). 로이드존스는 성령의 사역이 성경의 이해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임을 분명히 한다.
동일하게 성령만이 이 말씀을 '해석'하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가지 성령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한 사람이 자연적인 의미에서 얼마나 탁월하든지 그 능력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그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가 천재일 수 있고 학자일 수 있습니다만 이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영적으로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성령 하나님 자신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그리고 어떤 사람도 우리를 도와 줄 수 없습니다(1977A:327-328).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규정한 진리의 어떤 것을 이해하고 섭리할 수 있으며 그것은 문법의 영역이나 지적인 영민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부터 들을 준비를 해야만 하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2)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과 기도
본문의 영적 이해를 위해서 로이드존스는 많은 시간을 기도와 묵상에 보내야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에베소서 1장 18절의 설교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드리고 있는 기도라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원리를 유추해 낸다.
첫째로, 신자들은 이 세상에 사는 한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이 항상 필요하다. 그가 유추한 두 번째의 원리는 영적 지식은 분명히 점진적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원리는 우리의 이해의 눈을 밝혀주시도록 계속적으로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3) 영적 의미와 성령의 동질성
로이드존스는 계시는 단번에 주어진 것이므로 성경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날 설교자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이 조명은 해석자의 영성의 정도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해석자 편에 있어서 성령의 동질성은 주어진 본문의 영적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본문을 기록하게 한 동일한 성령을 소유하지 않는 한 해석자는 결코 본문의 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1976C:79)라고 그는 도전한다.
오늘날 해석학에 관한 너무 많은 논의들이 기교의 문제로 전락되었기에 로이드존스의 영적인 접근법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전 세대와 비교해 볼 때에 우리의 문제는 해석에 있어서 기교의 부족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는 것이 본문을 올바로 해석하는데 실패하게 하는 요인이다.
2. 교리적 접근
1) 주해적 연구의 목표
로이드존스에게 있어서 주해적 연구의 목적은 교리의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자에 관한 단순한 지식"(1978B:106)에 만족하거나 '주해의 기계적 부분'(1983A:64)에 머물거나 하는 위험을 피하고 '본문의 원리와 교리를 발견하는" (1978B:106-107)일에 실패하지 안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로이드존스는 교리라는 용어를 '주제','진리'혹은 '메시지'라는 말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한다.
주해적 접근을 한 다음에 로이드존스는 교리에 강조를 둔다. 이 방법은 설교자에게 본문을 향해 "하나님께서 본문 속에 자신에 관해서 무엇을 계시하시는가"(Van der Walt JJ.1985B:60) 하는 질문을 던지는 판 데르 발트의 하나님의 자아 계시를 강조하는 것과 조화를 이룬다. 이 교리적인 접근 문제에 대해서는 로이드존스는 청교도 설교 방식과 사도 바울을 추종하고 있다. 이 교리적인 접근은 많은 현대학자들에 의해서 해석학의 적법한 절차로서 추천된다.
2) 본문의 핵심
로이드존스의 교리적 접근의 마지막 절차는 특정 본문의 주된 핵심을 발간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본문의 주된 핵심을 붙잡도록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드러나게 하십시오"(1982C:203)라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본문의 주된 핵심, 주된 메시지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인도하게 하시고 그것이 여러분을 가르치게 하십시오. 본문의 핵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설교에 부담이 되게 하십시오(1982C:204).
주어진 본문에 여러 가지 교리가 있을 수 있지만 로이드존스는 항상 어느 것이 본문의 가장 핵심 메시지인지를 묻는다. 만약 본문의 주된 핵심을 발간하면 그의 해석학적 임무는 사실상 완성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3) 질문하는 기술
본문의 주된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자기 본문에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로이드존스는 설교를 준비하는 전 과정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득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십시오. 왜 그는 그렇게 말했을까요? 왜 그는 이런 특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말했을까요? 그가 노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의 목적입니까? 설교자가 배워야 할 기본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그의 본문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여러분 역시 본문에게 말해야만 합니다. 본문을 향해서 질문을 던지십시오. 이것은 가장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절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로 본문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떠오른 생각이 여러분은 만족시키고 감격시켜 이 특성 본문에 억지로 갖다 맞추는 일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마십시오. 본문을 왜곡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좋은 설교를 희생시키십시오 (1982C:201-203).
질문은 던지는 기술은 성경적인 해석학의 전통에 있어서 귀하게 여겨져 왔다. 본문 연구에 있어서 이 방법은 좋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묵상 방법이다. 해석학적 순환이란 개념에 대한 최근의 강조점은 이 전통 있는 기술과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티셀턴(thiselton)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석학적 과정에 있어서 '순화(써클)'은 해석자가 그의 예비적인 질문을 본문에 던질 때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질문이 최선의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본문의 주제 대한 그의 이해가 처음에는 한정될 수도 있고 예비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왜곡시킬 가능성조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다시 해석자에게 되돌려서 말해준다. 그것이 해석자를 해석하기 시작하고 그 자신의 상황과 질문에 대해서 빛을 비춰준다. 그의 처음 질문들을 본문 자체의 빛에 의해서 개정되고 보다 더 적절한 질문을 하게 되어 본문 자체는 보다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제 말하게 된다. 이 과정은 계속되어서 해석자가 점차적으로 본문의 보다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Thiselton,1977:316).
3. 검증 절차
로이드존스는 검증 절차에 두단계에서 주석을 사용한다. 첫째는 해석 과정에 있어서 - 본문에 나오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본문의 주된 핵심을 발견하는데 주석이나 사전을 사용해서 자신의 이해를 확증한다. 둘째로 설교를 구성한 다음 정확성을 위해서 한 번 더 주석에 돌아가서 그가 한 것을 점검한다.
로이드존스는 문법적이나 문맥상으로 아니면 신학 전통상 두 가지 이상 해석이 가능할 때 기독교인의 경험을 타당한 시금석으로 사용한다. 로이드존스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기본적인 시금석으로 사용하지 않고 부가적으로 시금석으로 사용한다. 달리 말해서 그는 이것을 확인하는 시험으로 사용한다. 만약 특정해석이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일치하면 올바른 것으로 그 해석을 간주한다는 것이다.
4. 그의 특정적인 해석 원리
1)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지금껏 로이드존스의 해석의 기본 방법을 연구해 왔다. 이 마지막 부분의 임무는 그의 특징적인 해석 원리를 그려내는 것이다. 최소한 두 가지 특징적인 원리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원리들간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연속내지 상호 중복적이다. 양 원리는 모두 근본적으로는 로이드존스의 문맥에 대한 일관성 있는 강조를 반영한다. 말하자면 전정경적 문맥과 주제적 문맥에 대한 강조이다. 해석학의 척도(the canon of interpretation) 라고 양대 원리를 설명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 원리는 그의 해석학적 실제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정의하면 어떤 성경도 다른 성경과 모순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정의한다면 성경은 성경과 비교해서 해설하고 밝혀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 원리의 배후에는 로이드존스의 설교와 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가 내재하고 있다. 그는 설교자는 단일체인 전 성경적 메시지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달리 말해서 "설교자는 성경신학에 정통해야만 하고 나아가서 조직 신학을 바로 알아야만 한다"(1982C:66),조직 신학에 대한 좋은 기반을 갖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 조직 신학은 설교의 배경과 설교를 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다.
로이드존스는 난해한 구절을 해석하는데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는 것보다 더 좋은 법칙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주어진 본문에서 두개 이상의 상이한 해석이 가능할 때 그 중에 한 해석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고 나머지 해석은 배치될 때 전자가 바른 해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신앙의 유비라는 이 원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라고 하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스푸로울이 지적한 바와 같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면 ,신앙의 유비는 해석에 있어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항목이다"(sproul,1978:48).
하지만 이 원리를 내세우기 전에 대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현대의 설교자들은 과연 얼마나 많이 성경을 통독했는가? 한 부분도 생략하지 않고 매일 성경을 읽지 않고는 이 원리는 한갓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이드존스가 이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한 비결을 그가 끈질기게 매일 성경을 읽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2)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말들은 그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로이드존스의 해석의 두 번째 근본 원리는 이렇게 압축될 수 있다.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말들은 그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1980:242).
앞에 나오는 첫 번째 원리를 배타적으로 강조할 때 설교자는 손쉽게 그가 가진 교리 체계를 특정 본문에 강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첫 원리는 두 번째 원리에 의해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어떤 특정 구절을 해석할 때도 총체적인 진리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설교자는 그 해석이 특정 구절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해야만 한다.
어떤 해석은 성경 전체의 빛속에서는 바를 수 있지만 특정문맥에 있어서는 바른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설교자의 해석은 항상 성경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문맥에 적합해야만 한다.
로이드존스는 이 해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해석학적 과정에 있어서 두 가지 기본적인 해석법칙을 사용한다.
(1) 보다 큰 문맥의 주도적인 주제의 빛 속에서 모든 명제를 해석하라. 로이드존스는 문단 단위의 문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문단의 특정한 본문의 해석의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만약 주어진 본문의 어떤 명제의 해석이 보다 큰 문단의 주도적인 주제와 모순될 때 그것을 올바른 해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로이드존스의 마태복음 7장 주해는 이 경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로이드존스가 지적했듯이 이 장을 서로 내적인 관련이 거의 없는 격언체의 구절들의 집합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로이드존스는 7장을 내리 흐르고 있는 심판이라는 주도적인 주제를 강조하므로서 그러한 견해의 피상성을 설득력 있게 반박한다. 7장의 모든 구절은 이 심판이라고 하는 주도적인 주제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법칙의 또 하나의 예증은 로마서 7장1절에서 8장 4절에 걸친 그의 설교로부터 살펴볼 수 있다. 거기에는 율법 그 기능과 한계라는 주도적인 주제에 의해서 그의 모든 주해가 결정되어 진다. 이 법칙에 의해서 로이드존스는 로마서 7장에 해석 역사에 있어서 무언가를 분명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의 방법의 확실한 이점은 세세한 문제에 빠져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현대 이론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다. 티셀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어의 범위를 이해하는 데는 우리는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어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 단어가 지니는 힘을 이해하는데는 전 문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 원리는 확장되어야만 한다. 문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문단이나 장이나 저자 전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러나 전체에 대한 이해는 다시금 우리의 문장에 대한 이해를 한정하고 교정한다(Thiselton,1977:314).
(2) 세세한 부분을 살피기 전에 전체적으로 구절을 살펴라. 로이드존스는 어떤 가르침을 살필 때에도 전체적인 데서 부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명한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나무로 인해서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산상보훈의 해석과 관련해서 이 법칙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법칙을 또한 성경의 다른 부분을 해석할 때에도 일반적으로 적용한다. 로마서나 에베소서 주해와 관련해서도 동일한 법칙을 적용하고 있다.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갖기 전에 세세한 특정 구절로 뛰어드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자신의 말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속에 전체를 가지는 것은 항상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전체에 대한 개념과 관련이 없이 부분을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1979A:7).
이 방법은 의사로서 그가 받은 훈련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련한 의사는 환자를 대할 때 의사가 해야할 첫째 일이 그를 전체적으로 살피는 것이라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의사는 특별한 불평을 듣기에 신속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인상을 살피고 나서 특정한 부분으로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두고도 마찬가지입니다(1982A:12-13).
결론
로이드존스의 특정적인 해석원리에 관한 우리의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로이드존스는 새로운 해석원리를 소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 원리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1)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2)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은 그 문맥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
그가 따르는 근본적인 해석원리는 각각 성경적 해석학의 공리이다. 아무도 그 타당성을 반박할 자가 없다. 하지만 로이드존스의 경우에 이어서 특정적인 점은 이 원리를 그의 실제 설교에 있어서 해석학적 방식을 적용하는 점에 있다.
로이드존스는 이 해석학적 공리들을 그 자신의 성실한 실천으로부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 그 원리를 적용하는데 대한 방법론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성공했다. 균형 잡힌 두원리의 탁월한 활용은 그로 하여금 '강해설교의 왕자'로 만들었다.
3) 로이드존스의 해석학적 연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해석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명백해졌다.
(1) 로이드존스에게는 성경에 관한 해석자의 신념은 그의 해석 과정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어떤 해석도 전이해 없이 할 수 없다.
(2) 로이드존스에게는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로 근본적으로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인한 영적 무지 때문이다.
(3) 로이드존스에게는 해석의 최후의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영적 이해를 하는 것이며 관여한 해석자의 인격에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
(4)로이드존스는해석과정에있어서 현대 해석학의 "맹점"(Lindsley,1984:487)이라고 정당한 고려를 하고 있다.
(5) 따라서 로이드존스는 기도를 해석 과정에 있어서 불가별한 것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를 통한 겸손한 청취는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조명하는 그 분의 정상적이 통로이다.
(6) 로이드존스가 한 설교를 위한 가장 실제적인 큰 공헌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라고 부른 묵상의 방법이다.
(7) 끝으로 다음과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만약 설교자가 로이드존스의 해석학적 원리와 방법에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현금의 당면한 딜렘마로부터 오늘날 "최대의 신학적인 문제"(Gaffin,1969:129)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경탄과 두려움과 기쁨과 찬양의 느낌"(Poythess,1978:198)을 회복할 것이다.
로이드존스의 공기도
찬송을 부른 후에는 공기도로 넘어간다. 비록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지만, 로이드존스 박사의 기도는 진정한 공기도란 회중이 모두 함께 드리는 기도임을 깨닫고서 하는 기도였던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단수 대명사는 사용하지 않았고, '주의 거룩하신 임재 속에 우리가 나아옵니다. 오 주여, 우리가 주께 예배드리옵니다.' 라는 식으로 언제나 복수형을 사용했다. 그러나 각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의 기도로 여기지 못할 그런 문구나 문장이 하나도 없었다. 기도가 공동의 기도이면서도 그렇게 개개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면서, 예배자들은 주위의 많은 회중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로이드존스 박사의 실제적인 간구에는 두 가지 서로 상이한 듯 보이는 요소들이 뒤섞이는 경우가 많았다. 곧, 죄에 대한 의식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그것이다. 그 중 한 가지 만이 아니라 두 가지가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이다. 목사가 하나님과 담대하게 말씀을 나누는 것으로 보이면, 회중석의 지극히 침체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나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까지도 목사와 똑같이 함께 -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 기도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이름으로 나아옵니다. 그 이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고, 주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가 아옵니다. 오 하나님, 사람의 본래의 불순종과 죄와 타락의 결과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악행과 범죄들로 우리 모두가 얼마나 추하고 죄악되며 악하게 되엇는지를 보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적하여 죄를 범하였나이다. 우리 자신의 뜻을 좇았고, 우리 자신을 자랑하였고, 우리의 모든 것이 주께서 베푸신 은혜로우신 선물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우리가 나아와 이렇게 주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이름과 그 보혈만을 의지하오며, 또한 그의 안에서 우리가 이렇게 주께 나오게 된 것을 주께 감사드리옵니다.
스스로 만족해하는 청중들이 그런 기도를 들으면서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례도 없지 않았고, 무겁고 짓눌린 심령으로 나아온 사람들이 놀랍게 새로운 마음을 얻은 예도 많았다. 기도 시간 동안 하나님의도우시는 역사를 깊이 깨달은 나머지 기도가 끝나고 그냥 집으로 돌아거더라도 흡족했으리 만큼 감격을 체험한 사람들도 자주 있었다.
로이드존스 박사가 기도의 의식을 반대한 한 가지 이유는, 그는 참된 기도란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기도하는 순간에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도록 항상 자유로운 상태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톱 레이디(A.M.Toplday - 웨스트민스터 체플에서 그의 찬송을 많이 불렀다)의 말을 빌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불어넣으시는 분이시오 또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로이드존스는 기도를 준비하는 법이 없었고 (물론 기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가다듬고자 애쓰기는 했으나) 기도의 사상이나 표현이, 물론 전반적으로 비슷한 면이 많았으나, 똑같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 기도는 10분에서 15분 가량 걸렸다.
회중들 편에서는 그 기도의 수려함을 칭송하는 예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너무 길다거나 설교와 같다거나 하는 불평도 없었다. 하나님과 직접 교통한다는 것이 과연 있구나 하는 깊은 감동을 남긴 것이 바로 그의 공기도였던 것이다.
로이드존스 박사가 기도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자연스러웠고, 미사여구가 없었다. 그는 성경과 찬송가에 모두 정통한 지식을갖고 있었지만, 거기서 인용한 내용을 기도에 사용하는 일은 적절치 못하다고 여겼다. 혹시 이따금씩 인용문을 사용할 때면,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나 혹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는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고백할 때에 오스왈드 알렌(Oswald Allen)의 찬송가 가사를 간절하게 되풀이하기도 했다.
모든 일이 어긋나 /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할 때에,
한 문이 열려 있음을 아오며 / 한 귀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리이다.
그는 대개 그 긴 공기도의 절반 정도를 중보 기도에 할애했는데 그 간구의 순서나 사용하는 표현에 있어서 기도 때마다 상당히 비슷한 패턴을 유지하였다. '늙어 병든 자들'이나 '고통의 침상에 누운 자들' 등 여러 가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주마다 똑같은 패턴으로 언급하엿다.그러면서도 로이드존스는 중보기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마틴 로이드존스 중기 / 417)
하나님의 주권 교리
1. 하나님의 주권을 떠나서는 역사의 문제에 대해서도, 세상의 현 상태에 대해서도 해명할 길이 없다. 그는 현대의 철학자들 가운데서 실예를 들면서, 유일한 대안은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믿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믿거나 둘 중의 하나 뿐임을 입증했다.
2.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교회에게 필수적이다. 그 교리는 미래에 관한 허무주의의 질병을 제거해 줄 것이다. 이 진리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침체에 빠지고, 그리하여 공산주의나 유물론이나 시대의 온갖 어려움과 위험 요소들을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서, 이 교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위험스럽고 비성경적인 특정한 전도의 방법들을 취하게 된다.
교회가 사람의손에 놓여 있다고 느끼게 되면, 이런 저런 일들을 행하여야 교회의 성공이 보장된다고 여기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교리의 가장 주된 결과는 바로 알미니안주의요, 또한 그보다 더 나쁜 펠라기안주의다. 교회의 가장 절실한 것은 참된 신학이며, 이것이 설교를 지배하여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참되게 사는 일을 위해서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그런 형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큰 문제다.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삶'은 '경건'의 삶(과거의 복음적 그리스도인의 특징이었던)이 아니고, 피상적이고 그럴싸하며, 느낌과 사고가 결손되어 있으며, 활력과 지속성이 결핍된 그런 삶일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대대로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난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그런 것이 아니고, 종교개혁 시대나 그 이후의 부흥의 시기에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다.
복음주의자들이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목표를 두지 않고,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얻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구원의 목적은 어떤 것들을 얻거나 어떤 체험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있도록 해 주기 위함인데, 이런 것을 다 잊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경건과 영적 강건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사고를 옆으로 제쳐 두고 주권적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4. 다른 모든 교리들이 이 교리에서 파생된다. 이 교리가 올바르지 않으면 다른 교리를 제대로 가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개신교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교리다. 이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칭의의 교리도, 성화의 교리도, 영화의 교리도 모두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