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33:8-11
본문은 모세가 레위에 대해 한 예언이면서
주의 종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잘 밝혀 주고 있다.
1. 레위는 어떤 사람인가?
“레위에 대하여는”.
목사는, 주의 종은, 레위라는 것이지요. 레위인.
대제사장도, 장로도, 서기관도, 바래새인도, 사두개인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분배받을 땅도 없고, 기업이 없고, 오직 여호와가 기업인 사람이 레위다.
떡만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사람.
언약궤를 매고 요단 강물에 맨먼저 뛰어드는 사람.
오직 성막과 기구들을 매고 이동하고 설치하고 해체하는 것이 업(業)인 사람.
오직 기도와 말씀사역에만 힘쓰기 위해 구제와 봉사 따위는 집사들에게 맡기는 사람이 레위다.
돈 떨어지면, 아니 돈 떨어질까봐, 어디가서 사정하고 구걸하고, 해서,
돈 없으면 못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공사판 가서 일하고, 파출부하고, 대리운전하고, 운전하고, 알바하고,
월급 없으면 못 살고, 아무것도 못하고, 개척은 겁나서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레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하나님만 보고, 말씀만 붙들고 가는 사람이 레위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진리를, 믿고 체험하며, 사는 사람이 레위다.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에게는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구하는 사람이 레위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을 더해 받는 사람이 레위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생수와 옷과 신발로만 사는 사람이 레위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궁핍에도 어떤 형편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이 레위다.
요즘은 목사들이 돌맹이처럼 흔해서 그런지, 레위라는 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학력 교단 소유 소속, 큰 문과 넓은 길만을 자랑하는 군상들만 보일 뿐이다.
안전하고 편한 월급쟁이들만 보일 뿐이다.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앉고 낙심하고 돈돈돈! 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이다.
여호와가 기업이 아니고, 돈과 빽과 소속과 사람이 기업인 사람들만 보일 뿐이다.
2. 레위는 주의 둠밈과 우림이 있는 주의 경건한 자이다.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우림과 둠밈의 일상적인 순서가 여기서만 바뀌었다.
우림은 빛이요, 둠밈은 순전, 완전이다. 완전한 빛, 순전한 빛이다.
포로시대까지, 느혜미야서까지 언급이 있고 제2성전시대 이후에는 언급이 없다.
기구는 사라졌으니까, 그 뜻만 본다면, 완전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요, 사도와 선지자들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순전한 빛, 둠밈과 우림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라 할 수 있다.
레위라면, 주의 경건한 자들이라면, 이 둠밈과 우림이,
사역과 삶의 기준으로, 중심으로, 분명하게 있어야 할 것이다.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을 완성한 이들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중세 천년의 타락을 돌이켰고, 사도와 선지자의 터에로, 교회를 돌이켰다.
그들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순전한 말씀으로 살고 사역한 이들의 대표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처럼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법도를, 바로 해석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시대가 끝난 후 이후 500년 동안, 교회는, 중세교회를 그대로 회복하고, 닮아가고 있다.
레위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되어가고 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이 유명 신학교와 대교단들의 신학과 설교를 지배하고 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영광으로 돌이켜야 한다.
3. 레위는 광야의 시험과 연단을 통과한 자이다.
“주께서 맛사(시험)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다툼)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맛사 또는 므리바는 한 지역의 명칭이다(출17:7),
이스라엘이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고 여호와를 시험할 때 레위는 합격한 것으로 본다.
4. 레위의 (삶의) 우선순위는 다르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부모도, 형제도, 자녀도, 보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알지 않는 길이 레위가 가는 길이다.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 그보다 더 우선이기 때문이다.
주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
오늘날 가정의 행복이 가장 우선이라고 가르치는 상담학은 이 말씀에 기절할 것이다.
레위가 가는 길, 주의 경건한 자가 가는 길은, 혈연 가정에 대하여 그러할진대,
재물도 어떤 기득권도, 다 보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알지 않아야 하는 길이다.
레위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결코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심을 믿어야 가능하다.
기득권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면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하나도 고치지 않으면서,
청교도를 한다고, 개혁주의를 한다고 하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천국은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자의 것이다.
진주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하나도 팔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
오늘날 목사들은 뭘 버렸는가? 배설물처럼 버린 것이 무엇이 있는가?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기존의 신앙과 신학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청교도 신앙과 신학으로 채워야 한다.
어디를 건드려도 청교도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알고도 살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요 죽은 신학이다.
신학과 삶이 다르다면, 철저하게 이중생활하는 것이고, 이중인격으로 사는 것이다.
5. 주의 말씀을 준행하는 자라야, 주의 법도를 가르칠 수 있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부모 형제 자녀의 혈연도, 재물과 학력과 교단의, 기득권과 특권을 배설물처럼 버린 자만이
주의 법도와 율법을 야곱에게, 이스라엘에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참 백성, 참 성도들에게)
주 앞에 제대로 기도(분향)하고, 온전한 예배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릴 수 있다.
혈연에, 기득권에 매여 있는 자가, 주의 법을 제대로 가르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자기 몸을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주의 법은 말로 가르치면서도, 믿음의 실천을 보여주지 못하면, 감동과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생명을 걸고 개혁의 길을 갔다.
1662년에 교구를 버린 청교도들의 실천이, 1688년(명예혁명)의 신앙의 자유를 가져왔다.
개혁을 부르짖으면서도, 한걸음도 진전이 없는 것은, 기득권을 하나도 버린 적도 없고,
목숨 걸고 개혁을 산 적도 없고, 피를 흘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6. 주의 경건한 자, 레위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다.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축복은, 순종의 결과이고 열매다.
축복은 그 자체가 구하는 목적이 될 때, 죄악과 타락에 빠진다.
기복신앙, 형통신학, 믿음신학 따위들이 그 일들을 하고 있고, 많은 교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우리가 개혁자의 길, 청교도의 길을 갈 때,
재물도 채워주실 것이고, 손으로 하는 사역도 견고하게 해주실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시작하여, 나사렛 목수 생활로, 갈릴리로, 십자가로 나아가셨다.
그리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으로 나아가셨다.
주의 경건한 자 레위는, 주의 종들은, 주님이 고난의 본을 보이신 그 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것이 청교도의 길이고, 개혁자의 길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 대적자들이 강한 것 같지만, 결국 허리가 꺽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경건한 사역을 한 레위를 위해서 갚아 주시는 일이다.
우리가 할 일은, 청교도들처럼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으로 살고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학과 삶이, 우리의 신학과 삶의, 둠밈과 우림, 순전한 빛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사고방식과 가치관 속에 숨어있는 세상과 우상을 뿌리채 뽑아내야 할 것이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인 개혁을 위해, 일어서고, 저항하고, 희생하고, 전제와 같이, 생명을 부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아멘!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