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교사의 사명이다.>
기본적으로 교육의 문제는 결국 교사의 문제입니다.
물론 교육의 현실, 학생과 사회와 학부모, 그리고 교육환경이라는 것들이 물론 중요하고 교육의 틀을 형성해서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행동주의적 입장에서 인과율의 틀을 어떻게든 이용해서 교육의 효율을 높이려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만약 이것이 교육의 전부라면 백번 양보해서 교육은 기계적인 작업에 불과하게 됩니다. 컴퓨터가 교사를 완전히 대신할 날이 곧 오겠지요.
이런 것이 교육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교사는 적어도 다른 환경을 탓하면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런 교육운동을 하는 분들에 대해서 무얼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교사라면 교육의 문제는 결국 자신의 문제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거기서 교육의 한계성을 인정해야 비로소 교육의 할 수 있는 일이 바르게 드러나게 됩니다. 교육은 전지전능한 것이 아닙니다. 인본주의 교육의 맹점은 바로 이점에 있습니다. 교육을 인류 구원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공개적으로 그렇게 주장하기도 하고, 은밀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육은 교육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교육의 내재적 정당화를 주장하는 합리주의적 교육철학자들에게는 이 말이 귀에 들리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육의 목표가 적어도 인간을 인간답게 양육하는 데 있다면 교육이 어느 정도 만큼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델피 신전의 신탁을 그의 모토로 삼았지만, 인간이 인간 자신을 스스로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엇을 안다’는 인식론의 문제도 아직 그 신비가 풀어지지 않은 것이고. 그런 미궁에 있는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합리주의자들은 인간 개체를 벗어나서 인류 전체가 합해서 만들어놓은 이성의 집산물을 총체적으로 [세계]라고 이해하고 그래서 결국 인간은 세계로서 영생불사한다고 말하며 교육은 이러한 세계로 인간을 입문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개인이 나뭇잎처럼 떨어지고 죽더라도 그것이 인류라는 나무의 양분이 되어서 세계를 확산시키고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식으로 합리화 시킵니다.
참으로 바벨의 후예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끝까지 발버둥을 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의의이니까, 그 노력은 과연 필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벨의 후예가 아닌 다른 인간은 없습니까?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어떠한가?
바벨탑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해서 그를 도회 문명을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정으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으로의 행보가 바로 그것이었지요.
아브람은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보이신 점점 더 풍성하게 열어서 보여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서 인생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무슨 찬란한 인간의 광채를 나타낸 적이 있었던가요? 그들은 오히려 더 비참하게 그 역사를 장식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역사 속에서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칠 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할 때, 히스기야의 기도로 태양의 움직임을 뒤로 돌려 놓던 때,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이 바벨론에서 사자굴과 풀무불에 있을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은 차라리 왕궁이 아닌, 마굿간으로 강생하셨고, 목수로서 노동자의 삶을 살았으며, 십자가에 달리셔서 아무런 항거없이 주검이 되셨습니다. 그 후 오순절이후 교회사도 결코 무슨 자랑을 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어디 있느냐? 고 물음을 던질 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 하나님은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 나라를 이 역사세계 위에서 나타내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원한 안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교육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교사 역시 사람이고 무능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사이므로 무능과 무지를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인식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도구로 드릴 수 있겠습니다.
교사는 교육이 무엇인지를 정말 알아야만 합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 전체를 알아야 아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것은 알고 다른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도 아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교사는 정말 교육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기독교 교사는 더욱 그렇겠지. 그런데 교육이 무엇인지를 정말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교사의 딜레마입니다. 그냥 해보는 것으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교사라는 표찰을 내리면 안 될까? 차라리 견습생정도라도 되어야 할 텐데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그래도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지식의 전수가 잘 이루어지고, 멋진 예술이 향유되고, 정치 경제, 사회문화, 체육, 온갖 영역이 그렇게 잘 돌아가고 있는지. 정말 훌륭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훌륭한 교사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교육은 교사가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교사가 문제입니다.
저의 작은 교실에서 제가 정말 훌륭한 교사라면 40명이 되는 아이들의 영혼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교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지요. 그러니까 교사가 그런 것을 바르게 알고 정말 영혼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know-how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교육이 교사만의 문제가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육은 교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교육은 누가 무어라해도 교사의 과제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교사는 다른 주체들에 대해서 언급하기보다 -그런 문제는 그런 주체들에게 남겨두고- 그럴 시간이 있다면 오히려 교사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점점 깨달아 가면서 자신의 사명을 점차 원만하게 수행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교사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