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진(解鎭)은 고대에 해량(解梁)이라고 불리웠었는데 해현지(解縣:解州誌)에는
"原解梁亦稱?鹿" 이라는 기록이 있고, 안읍현지(安邑縣誌)에는
"他是安邑"蚩尤村"(今改爲從善村)人" 이라는 기록이 있다.
안읍에 치우촌이 있었는데 개명된 이름은 종선촌이라 한다.
당나라 시인 왕한(王翰)이 지은 解州<鹽池曉望>의 시(詩) 중에는
"?鹿城頭分曙色,素池如練?無塵"
이라는 귀절이 있어 탁록이 해주에 있고 탁록성도 있음을 말한다.
<河東鹽法備覽、鹽池門勝跡>이라는 소금과 염지 관련 고서에는
"軒轅氏誅蚩尤于탁?鹿之野,血入池化鹵,今池南有蚩尤城,相傳是其喪處"
라는 기록이 있어 해주,안읍 지역에 위치한 염지가 전투지이고
염지의 남쪽에 치우성(蚩尤城)이 있음도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 羅必이 지은 <路史>에는
"黃帝與蚩尤轉戰到中冀,才活捉了蚩尤,?立?就地處死,故殺蚩尤處稱做"解" 라 기술하고 있다.
산서성 남부는 고대의 기주(冀州)지역인데 기주의 중심인 "解" 즉, 해주(解州)에서 치우가 죽었음을 뜻한다. 로사에는 일설, 헌원의 성(姓)이 "公孫"이라는 기록도 있다.
송나라 문인 宋沈括의 <夢溪筆談>에는
"解州鹽池的?水呈紅色,俗話稱爲"蚩尤血"
라 하여 해주의 염지는 붉어서 간수가 들어간 듯 한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치우의 피"라 한다고 적고 있다.
<孔子三朝記>에는
"黃帝殺之(蚩尤)于中冀,蚩尤股體身首異處,而其血化爲鹵,則解之鹽池也"라 하여
절단되어 죽은 치우의 피가 간수처럼 변하여 해주의 염지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雲?七簽、軒轅本紀>의
"黃帝殺蚩尤于"黎山之丘",其實"黎山"正是中條山的別名,距解鎭十五里,其是黃帝殺蚩尤于"解"的又一證據"라는 기록은, 치우가 죽은 곳을 "여산언덕"이라 하는데 여산은 중조산(中條山)의 다른 이름으로
해진(解鎭)에서 십오리에 있어, 치우가 해주에서 죽은 하나의 증거가 된다.
중조산은 백이숙제의 묘(墓)가 있는 수양산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그 고봉은 "湯山"이다.
이상 대략으로 산서성 해주(解州:今運城縣) 일대를 치우가 헌원과 전투를 벌리다 죽음을 당한 지역임을 주장하는 근거 자료를 살펴보았다.
탁록전투가 하북성 북부에서 일어 난 것과 산서성 남단에서 일어 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북성 북부에서의 사건이라면 현재의 북경을 중심으로한 하북성 북부일대,홍산지역 까지 모두 헌원의 강역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산서성 남단에서의 사건이라면 태행산맥 이동지역은 모두 치우의 강역이었다는 재야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역판도는 치우 이전이나 이후시대의 우리역사를 풀어 가는데도 수월한 길잡이 일 수가 있다.
현재 우리 사학의 입장에서 치우시대를 논하고 연구 한다는 것이 힘겨운 일이긴 하지만, "동이족수령" 이라고 치우를 말하면서도 헌원과 함께 중화민족의 위대한 선조로 만들어 가고 있는 저들의 행태를 봐야 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상)

12세기 제작된 우적도 탁본. 해주와 치우의 무덤이 있다는곳과 동일 지역에는 雷首라 표기되어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대청광여도에는 해주, 염지,백이숙제묘라 표기 되어 있다.
운영자 심제 씀.
첫댓글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 또한 우리의 묷이겠지요. 우리 세대에선 요원하지만 다음 또 다음 세대에서 다시 그 역사를 펼칠 날이 있겠지요. 지금은 잃어버린 역사를 추스려 그 흔적을 찾아 내는 일일겁니다. 감사히 보고 갑니다.
내용 좇아다니기가 바뻐 하루 이틀 미뤘더니 이젠 블로그 항목분류를 어찌해야 할지도 모를만큼 새로운 내용들이 쌓여 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