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1894년 3월)
★ 1894년 이전의 농민층 상황
- 시대적 배경 : 열강의 침략적 대립, 정부는 재정의 악화 해결을 위해 농민에 대한 압제와 수탈 심화
- 농민층의 동요 : 삼정의 문란, 탐관오리의 수탈, 외국 공산품 수입에 따른 국내 공업의 위축,
일본으로의 쌀 수출 (쌀값 앙등, 식량 부족 현상)
- 동학의 창시 : 최제우가 서학(=洋學)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창시
→ 교세 확장과 정부의 탄압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
[동학농민혁명 전의 농민 봉기 지역]
★ 요약
- 배경 : 정부와 지배층의 한계, 농민 수탈 심화, 일본의 경제적 침투, 농민층 의식 급성장, 사회변혁 욕구 중대, 동학 조직을 통한
대규모 세력 규합
- 전개 : 고부 봉기 (전봉준, 보국 안민, 제폭구민) → 전주 점령 (폐정 개혁 12개조 건의 집강소 설치)
→ 정부 개혁 부진,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 강화 → 재봉기 (외세 축출 목적) → 우금치전투 패배 → 동학농민혁명좌절
- 평가 :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운동
- 영향 : 갑오개혁에 부분적 반영, 잔여 세력의 의병 운동 가담 (→항일 무장 투쟁 활성화)
전봉준 장군
전봉준 장군의 유일한 사진 - 서울로 압송되는 모습으로 알려져있다
김개남
동학의 태인(전북 정읍) 대접주, 전봉준 다음 가는 남접의 실력자
일본으로 갈 양곡
주요 봉기 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도
1. 교조신원운동
1) 삼례 집회 (1892) : 순수한 교조 신원운동 (종교운동)
2) 보은 집회 (1893) : 정치적 구호의 제창 (탐관오리 숙청, 일본 및 서양 세력의 축출 요구 - 정치적 성격)
2.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
1) 고부봉기 (1894. 1.) :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 / 10여일만에 해산
2) 제 1차 봉기 (1894. 3.) :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주도, 보국안민 (반외세), 제폭 구민(반봉건)을 제창, 황토현(정읍)에서
관군 격파 - 전주 점령
[황토현]
★ 전봉준의 창의문
우리가 의(義)를 두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전면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목을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 앞에 고통 받은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 4대 행동 강령
첫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백성의 가축을 손상하지 않는다.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
셋째, 일본놈을 쫓아내고 성인의 도를 깨끗이 한다.
넷째, 서울로 진격하여 나라를 망치는 간신배를 처단한다.
3) 전주 화약 체결 (1894. 5. 8)
- 배경 : 정부의 청군 파병 요청과 톈진 조약을 근거로 청군, 일본군 아산만 상륙
→ 조선정부는 청, 일 양군 철병 요구, 농민군과 타협 모색
- 내용 : 농민 요구 개혁안 일부 수용, 집강소 (동학농민군 행정기관, 전라도 일대) 설치
→ 폐정개혁안을 실천
※ 집강소 :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호남 지방 각 군현에 설치하였던 농민 자치기구
◆ 폐정 개혁안 12조
- 농민군이 전주를 점량한 후 정부에서 제시한 12갸의 강화 조건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탐관오리, 불량한 양반, 횡포한 토호의 탄압과 경제적 수탈 시정, 신분상의 모든 차별 철폐, 일본과 내통하는 자
처벌, 토지의 균등 분배 등이다. 이는 당시 농민들이 부패 관리들의 착취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의해 고통 받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4. 제 2차 봉기 : 일본의 내정 간섭에 반발 (일본 - 경복궁 점령 1894. 6.)
남북접 합세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 지도부 체포
/ 포접제 (동학의 조직) ; 동학의 교도 일단(一團)을 包-포주-접주, 대접주, 도주, 대도주
※ 동학농민혁명의 성격
- 반봉건 : 봉건적 지배 체제 반대 (노비문서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주장)
→ 갑오 개혁에 영향
- 반침략 (반외세) 적 민족 운동 : 외세 침략 격퇴 주장
- 한계 : 근대 사회 건설을 위한 구체적 방안 제시 못함, 농민층 이외의 지지 기반 미약
◆ 전라도 민요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창포장수 울고간다
-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전봉준 장군은 체구가 5척 단구이어서 녹두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하였다. 파랑새는 청병을 의미하며 녹두장군이 죽으면 백성들이 낭패를 당한다는 뜻이다. 뒷노래는 혁명이 갑오년(1894)에 성공해야지 을미년(1895), 병신년(1896)까지 가면 백셩들이 낭패를 당한다는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다.
정부가 동학을 사교로 규정하여 교조인 최제우를 처형하였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여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동학의 포교에 힘썼다.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학은 농촌 사회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으며, 교단 조직도 갖추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아 온 동학교도들은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삼례집회 후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으며, 곧이어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 명이 모여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는 동학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외세의 배척과 부패한 관리의 처벌도 주장하였다. [우리역사넷]
[동학 농민군의 사발통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