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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몸속에 흐르는 아리안족의 피
현재의 영국인과 유사한 유전인자를 가진 약 3,000년 전의 인골이 국내 청동기 고인돌에서 발굴돼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강원문화재단 강원문화재연구소는 4일 “강원 정선군 북면 여량 2리 아우라지 유적에서 지난해 출토된 인골을 1차 분석한 결과 영국인 유전자와 유사하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강원문화재연구소측은 “서울대 해부학교실 신동훈 교수팀이 DNA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유럽계통의 백인, 특히 현재의 영국인 유전자와 유사하다는 1차 분석결과를 내놓았다”며 “국제적으로도 구체적인 확인을 위해 영국과 일본에 이 인골의 분석을 의뢰했다”고 말했다.
이 인골은 지난해 아우라지 유적내 4기의 고인돌 중 한 곳에서 토기 조각들과 출토됐다.
지현병 발굴조사단장은 “당시 두개골, 골반, 턱뼈, 대퇴골, 갈비뼈 등의 일부가 발굴됐다”며 “인골과 함께 출토된 부장품의 양이 적어 인골 출토 유적의 정확한 연대확인은 힘들다”고 전했다. 지단장은 “다만 인근의 유적·유물들과 비교할 때 조사단의 입장은 약 기원전 970년 정도의 유적으로 본다”며 “국내에선 아직 선사시대 유럽계 인골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 성과가 없어 향후 고고학계의 연구가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김병모 문화재위원(한양대 명예교수)은 “아우라지 인골은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라며 “개인적으로 볼 때 유럽계 유전인자를 가진 이 인골의 주인공은 벼농사 전래 경로를 따라 인도~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국내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서양인으로 보이는 인골이 출토되기는 1965년 충북 제천 황석리 유적 이후 두번째다.
‘황석리 인골’은 해부학적으로는 서양인으로 추정되지만, DNA염기서열 분석 등의 더 정확한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아직까지 없어 학계에서는 서양인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유골 DNA분석-
오래된 유골의 경우 뼈에 있는 DNA 염기서열을 분석한다. 일단 뼈를 모두 갈아서 용액에 넣은 후 DNA를 추출한다. 이후 DNA증폭기기(PCR)를 이용해 미토콘드리아 DNA에서 특정부위(D-루프)를 증폭해 사용한다. 염기분석 결과를 표준염기서열과 비교해 변이된 정도를 보고 인종을 구분할 수 있다. 동양인끼리의 구분은 쉽지 않지만 동양인과 서양인의 구분은 명확한 편이다. 다만 과거의 유골을 현재의 사람 유전자와 분석하는 것이므로 오차가 있을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한반도에 서양인이 살고 있었다?”
41년전 발견된 황석리 13호 인골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발굴 당시 발굴단은 서울대 의대(나세진·장신요 박사팀)에 인골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는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분석팀은 당시 “인골의 신장이 1m74 정도”라면서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두개장폭(頭蓋長幅)지수가 66.3”이라면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인 점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김병모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은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
내는 두개장폭지수는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라면서 “황석리 인골의 지수(66.3)로 보아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BC 1700년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BC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놀라운 것은 ‘얼굴 복원 전문가’인 조용진 한서대 교수가 이 인골의 두개골을 복원한 결과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고, 이가 큰 북방계통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또 “이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난다”면서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일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서양인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유태용 경기대 강사는 “지금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고 전제하며 고개를 내젓고 있다. 그는 최근 발간한 ‘한국 지석묘 연구’(주류성 간)에서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정도에 따라 골격이 다르다”고 전제하고 “지석묘에서 나온 뼈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은 튼튼한 것들임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평민들은 과도한 노동력으로 어깨뼈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의 현상을 보인다는 것.
결국 족장급이 분명한 황석리 인골은 잘 먹고 계급도 높은 사람의 것이지 ‘서양인’의 것으로 보기는 무리라는 게 유씨의 주장이다. 자, 지금이라도 최근 서울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온 황석리 인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논쟁의 결론이 나지 않을까.
1965년에 발굴된 충북 제천 황석리의 13호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신장이 170cm인 40代 남자였다. 사망연대는 기원전 410년경이었다. 발견지의 이름을 따서 황석리人이라고 부른다. 그의 두개골을 계측한 결과 한국 사람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서양사람처럼 코가 크고 두개골이 앞뒤로 뾰족한 사람이었다 학술용어로 超長頭型(초장두형)인 사람이었다.
여기서 체질인류학 이야기를 조금하겠다. 사람의 두개골 형태를 계측할 때 앞이마와 뒤통수의 거리를 頭長(두장), 귀와 귀 사이를 頭幅이라고 한다. 두장을 100으로 계산하여 두폭을 비교하는 수치를 頭蓋指數(두개지수·Cephalic Index)라고 하는데 이를 기초로 인종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한국인의 평균 두개지수는 80 전후로 短頭型(단두형)이라 하고 서양인의 두개지수는 70 전후로 長頭型(장두형)이라 한다.
장두형은 머리가 앞뒤로 긴 모습이고 단두형은 얼굴이 넓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황석리人은 두개지수가 70 미만이었다. 얼굴이 좁고 뒤통수가 유달리 뒤로 빠진 北유럽인의 모습이다.
이건 심각한 내용이었다. 이 사람이 한국사람과 다른 인종이었다면 큰 문제가 시작되는 사건이었다. 한국인은 단일 민족이라는 정서를 감안했었는지 보고서를 담당한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의 두 교수는 이 사람의 생긴 모양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에서 발견된 고인돌 사회의 주인공이 서양인의 체질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발표하면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 때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으로는 어려운 해부학 용어로 쓰인 황석리人의 체질적 특징이 서양사람에 가깝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만일 수많은 고인돌에 묻혀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현대의 한국사람과 다른 인종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나 고인돌에서 발견된 사람들이 모두 그런 체질적 특징을 갖고 있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에 남아 있는 고인돌의 수가 3만 개나 되니까 분명히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의 조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때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세월이 지나 조용진 교수가 컴퓨터로 복원한 황석리人의 모습은 완전한 서양인의 모습이다. 황석리에서 발견된 서양인 모습의 남자는 누구인가. 古代 아시아에서 고인돌 풍속이 있고 벼농사를 경제기반으로 하면서 서양인의 두개골 모습을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인도인밖에는 없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한반도에 올 수가 있었느냐 하는 소박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황석리人의 생존기간은 BC 450~410년이다. 한국사에서는 그 때가 선사시대이지만 유라시아에서 그 기간은 황금의 역사 기간이었다. 중국은 공자 이후 諸子百家(제자백가)의 시대이고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涅槃(열반)한 이후이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히포크라테스가 생존하던 시기이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관개기술을 성공적으로 실험하고도 한참 후의 일이다. 역사시대에 일어난 일을 경악의 수준으로만 생각하면 판단이 어렵다. 황석리人의 한반도 도착을, 그 때까지 인류가 발전시켜 온 누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조감하면 아무런 경이도 아닐 수 있다.
고대사에 대한 나의 知的 호기심은 황석리人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호기심은 지난 30년간 고고학 주변의 여러 인접과학에 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게 하였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여러 과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히게 되었다. 인접과학 중 하나가 ATL이란 병이었다.
성인 T세포 백혈병(Adult T-Cell Leukemia)은 20세 전후에 나타나는데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父系遺傳(부계유전)이고 발병지역은 亞熱帶(아열대)지방이다. 중국으로 말하면 양자강 이남 지역이고 한국에서는 남부 해안지방에서 발병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이와 비슷한 통계로서 象皮病(상피병·Elephant Skin)이라는 것이 있다. 모기류에 물려서 다리가 코끼리의 다리(脚)처럼 붓고 피부가 거칠어지는 질병인데 조선시대까지 도서지방에서 자주 관찰되던 풍토병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더운 환경에서 나타나는 공통성이 있는데 혹시 南아시아에서 한반도 쪽으로 흐르는 黑潮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벼농사를 도입한 사람들과 함께 지역성이 강한 풍토병도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고인돌의 주인공들은 기마 민족들보다 한반도의 先주민이고 그들의 농경사회는 잉여생산물 때문에 기마 민족들보다 인구도 많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기존의 농경사회에 뒤늦게 뛰어든 기마 민족들은 농경밖에 할 수 없는 땅에 와서 고생한 이야기가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辰韓 사람들이 이주해 오니까 馬韓 사람들이 동쪽에 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다.
辰韓 사람, 즉 후의 신라인들은 마한 땅의 토착인에게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기마 민족이 오곡을 기르는 농경인이 되면서 육식에서 채식으로 입맛을 바꾸어야 했을 것을 생각해 본다. 한민족도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多端한 뿌리를 기초로 이루어진 백성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과연 민족이라는 말에서 民(민)은 百가지의 姓(성-氏族)이 합쳐진다는 뜻이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기원전 2천년경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아 인들 중의 일부가 고조선을 건국했습니다. 황하 유역으로 이주하여 살던 아리아 인들은 기원전 2세기경 한반도로 이동해 고구려·백제·신라를 건국했습니다.
아리아 인이 한반도로 이동했다면 우리말에는 아리아 어의 자취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아리아 어의 원형은 없지만 영어는 아리아 어에서 기원한 언어이므로, 우리말에는 영어와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는 어휘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상외로 우리말의 기초 어휘들 중에는 영어와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고대사에 나오는 국명·지명·인명 등에는 아리아 인의 언어와 신화의 자취가 담겨 있습니다.
기원전 2000년경 고조선 시대에서부터 기원전 1세기경 삼국 시대 초기까지의 국명·지명·인명 등에 쓰인 한자는 한자의 뜻보다 소리를 더 차용하여 원래의 소리에 가깝게 표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표기된 한자의 뜻은 원래의 뜻을 찾는 데 참고는 되지만,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표기된 한자의 소리에 담긴 말의 뿌리를 찾아야 한국의 고대사를 바르게 볼 수 있고, 전통 어휘들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펌] 신라왕들은 대개 아리안(스키타이-백인종) 계통이었다!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 이 이름들은 신라 초기에 사용된, 왕의 칭호다. 깊은 뜻들이 담겨 있었겠지만, 잊혀진지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이 어휘들이 아리아 어에서 기원했다고 보면, 원래의 뜻을 알 수가 있다.
『삼국유사』'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제1대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의 칭호는 거슬감(居瑟邯) 또는 거서간(居西干)이었는데, 이 칭호는 알지거서(閼智居西干)에서 유래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시조'조에 "거서간(居西干)은 진(辰)나라 말로 왕(王)이다.[혹은 귀인 (貴人)을 부르는 칭호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두 기록으로 볼 때, '알지거서간'이란 말은 '알스 그레이스 칸(Ar's Grace Kan)'과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아리아 인의 위대한 임금'이라는 뜻이다. 왜냐 하면, '거서'의 어원 은 영어로 '각하(閣下)'라는 말인 '그레이스(Grace)'와 같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각하'의 어원이 '거서[Grace]'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리스 알파벳이 한국어로 해석되는 것으로 볼 때, '그리스(Greece)'란 국도 '그레이스(Grace)'·'거서'와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혁거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영웅 '헤라클레스(Heracles)', 로마 신화에 나오는 '허큐리스(Hercules)'와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혁거세'·'헤라클레스'·'허큐리스'란 이름들은 '위대한 태양신'이라는 말인 '헤라(Hera)'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혁거세왕 : 아마도 향언(鄕言)일 것이다. 불구내왕 (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라고 혁거세의 어원을 해석한 기록이 있다. '불구내(弗矩內)'의 어원은, '광명'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그레하다'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혁거세'에는 '불그레하다'란 뜻이 있으므로, '혁거세'는 '위대한 태양신' 즉 '헤라(Hera)'와 뜻이 통한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헤라클레스'를 '혁거세(赫居世)'로 표기 하고, '불구내왕(弗矩內王)'·'불그레 왕'이라 훈독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제2대 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다. '차차웅(次次雄)'과 '자충(慈充)'의 어원은 영어로 '재판관·재판하다'라는 말의 진행형인 '저징(judging)'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차차웅과 자충은 심판관·재판관이라는 뜻이다.
제3대부터 제16대까지(『삼국사기』에 는 제18대) 사용된 왕의 명칭은 이사금[尼師今, 齒叱今, 尼叱今]이다. 한자의 표기가 여러 가지였다는 것은 원래의 소리와 뜻을 둘 다 살려 한자로 표기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이사금'의 '이사'는 'Israel, Islam, Isaiah' 등의 'is'와 어원이 같고, '금'은 '임금'으로 볼 수 있다.
'is'는 알이 많다는 뜻이자 아랄 지역을 뜻하는 말인 '알스(ars)'와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영어로 섬이라는 말인 아일런드(island)의 'is'는 '알스(ars)'와 어원이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알스(ars)'는 '위대한'이란 뜻으로도 쓰였다. 따라서 '이사금'은 '아랄의 임금'·'위대한 임금'이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제17대(『삼국사기』에는 19대)부터 제22대까지 사용한 왕의 칭호는 마립간(麻立干)이다. 『삼국유사』'제2 남해왕'조에 "혹왈마립간 립일작수(或曰麻立干 立一作袖)"란 기록이 있다. 이 글은 "혹은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하였는데, 립(立) 대신 수(袖)를 쓰기도 한다."라는 뜻 이다.
즉, '마립간(麻立干)'을 '마수간(麻袖干)'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뜻이다. '마립간(麻立干)' 의 '립(立)'은 '설립'이므로 '마립간(麻立干)'을 이두로 읽으면 '마설간'이 된다. '마설[麻立]'은 영어로 원수(元帥)라는 말인 '마셜(Marshal)'과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마수(麻袖)'는 로마 신화의 군신(軍神)인 '마르스(Mars)'와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신라 국왕의 호칭인 '마수간'의 '마수'가 로마 신화의 군신 '마르스(Mars)'와 어원이 같다는 주장은 너무 지나친 것 같지만, 증거가 될 어휘들이 있다. (1) 한국어에 '첫 번째로 물건을 파는 일'이라는 뜻인 '마수걸이'란 말이 있다. '마수걸이'의 '마수'는 군신 '마르스'와 어원이 같고, '걸이'는 재료·소재를 뜻하는 말인 '거리'와 같다고 보면, '마수걸이'의 원 뜻을 알 수가 있다.
'마수걸이를 했다'라는 말은, 지금은 '개시를 했다'라는 뜻이지만, 지난날에는 '군신 마수에게 바칠 세금을 준비하다'란 뜻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려면 그날그날 세금을 내야 했다는 뜻이다. (2) 일본 신화 속 신들의 이름에 '마사'라는 표기가 있다. (235쪽 스사노오노 미코토, 237쪽 마사카 … 참고) 일본 신화의 신들은 일본으로 이주한 고대 한국인이므로, 일본 신화에 군신 '마사'란 말의 자취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마사', 신라의 '마수', 로마의 '마르스'는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어휘들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아랄 에서 세계로 이동한 아리아 인들이 이주지로 가지고 간 알알 문명의 신화에 나오는 군신의 이름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
로마 신화의 신들은, 로마 신화에만 있는 두 얼굴의 문지기 신 야누스(Janus)만 빼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로마 신화는 그리스 신화의 모방이다."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지중해 문명의 중심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의 '마수간'과 '혁거세'는 이러한 주장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리스 신화의 군신은 아레스(Ares)고, 로마 신화의 군신은 마르스(Mars)다. '마르스는 아레스를 모방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신라의 '마수'가 그리스의 '아레스'보다 로마의 '마르스'와 소리가 더 유사하다는 것은 로마 신화가 그리스 신화보다 아랄 신화의 원형을 더 잘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 신화는 그리스 신화의 모방이 아니고, 그리스 인과 로마 인은 비슷한 시기에 이주하여 고유의 원주지 전통을 각각 유지하고 있었다."라는 증거다. 아마도『삼국유사』에 '마립간 립일작수(麻立干 立一作袖)' 라는 기록이 없었다면, 로마 신화는 그리스 신화의 모방이라는 누명을 영원히 벗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 신화의 '허큐리스(Hercules)'도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Heracles)'를 모방한 것이 아니다. 신라의 '혁거세'가 둘 가운데 어느 하나의 모방일 수 없는 것과 같이, 각각은 아랄 신화의 전통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Zeus)'신과 테베 출신의 여인 '알크메네(Alcmene)'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헤라클레스는 신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인들은 헤라클레스와 같은 반신 반인의 영웅들을 좋아했다.
헤라클레스와 같은 반신 반인의 영웅들이 그리스 인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이주민과 원주민의 혼혈 동화가 성행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군 신화에서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 왕검을 낳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삼국 시대 초기까지는 아리아 어의 전통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 행사를 주관하던 제사장들이 아리아 어를 전승하면서 이름들을 지었기 때문에 전통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알알 문명의 종교를 주관하던 제사장들의 설자리가 없어지게 되자, 이들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던 아리아 어의 전통은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8세기경 신라의 석학인 김대문(金大問)이 차차웅·이사금·마립간의 어원을 바르게 밝히지 못했고, 최치원(崔致遠)은『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편찬하며 이러한 칭호들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왕(王)으로 기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 '제2 남해왕'조 참고)
[2] "신라의 왕족은 만주와 중국을 지나 천산 너머에서 살던 사람들과 관련성이 있다. 그들은 오래전에 알타이 지역과 천산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며, 천산의 동쪽과 알타이 지역은 유사이래 동서 인종의 충돌 지역이었다. 신석기 시대 이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사람과 문화가 넘어 오다가 기원후에는 동쪽의 사람과 문화가 서쪽으로 넘어 가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신라 왕족의 조상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산 동쪽으로 넘어온 유럽인종 중 일부가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르도스를 지나 한동안 중국 동북 지역에 살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최종적으로 평양과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들어온다." -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정형진 지음, 일빛, 2005)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천착하게 된 의문이었다. 사실일까?
▲ 문무왕비
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조가 한(漢) 무제를 가장 측근에서 보필했던 '투후(秺侯)' 김일제(BC134~86)의 7세손 성한왕(星漢王)이라 적혀 있다. 김일제란 인물은 한 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로 후에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았고 무제 사후에 '투후'라는 후작을 받은 이니 신라왕족이 흉노의 일파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 기록은 모화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과 연관시키려한 공작이었을까? 아니면 진실을 기록해 놓은 것일까?
모화사상에 젖은 공작으로 보기엔 비의 주인공이 당나라와 대결하였던 문무왕이라는 점에서 납득이 안 되고 사실이라고 보기엔 내용이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다. 천산 언저리의 흉노 일파가 동으로의 이주를 거듭해 결국 신라왕족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니….
▲ 경주 박물관 마당의 서역 문양석. 경주 소재의 사찰에서 발견
그러나 신라 김씨 왕족이 집권했던 2~6세기 사이 신라가 채용한 적석목곽묘는 우리나라 삼국 중 유일한 양식으로 북방 스키타이와 관련이 있는 묘제라는 점. 이 시기 황금유물을 비롯한 북방초원문화의 상품들도 다량 유입되었고 서역의 문물들이 대거 발굴된다는 점이 문무왕비 내용을 무시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으로 남는다.
이외에도 고깔모자, 무덤에서 발굴되는 늑대 관식, 사슴뿔 모양의 왕관, 계림 김알지 설화를 반영하는 것 같은 페르시아의 구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주변문화를 차용한 것인지 주민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인지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 경주 괘릉. 그 앞을 지키는 서역 무인상의 존재가 흥미롭다
중국의 풍수지리가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왕릉도 평지에 조성했다.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괘릉은 연못을 메워 조성했기에 무덤방에 물이 차, 관을 천정에 매달았다고 해서 괘릉이다. 중국의 장묘문화와 비교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괘릉에 무인 석상은 왜 서역인일까? 단순히 신라에 들어와 있던 용감무쌍한 서역 용병의 모습을 형상화했을 뿐인가?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깨지니 위 학설은 말이 안 된다고?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도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에서 온 아리안족 여인이니 김해 김씨와 허씨는 아리안족인가?
<삼국유사> 황룡사 9층탑 조에 신라의 지장스님이 중국 유학 때 문수보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한다.
"너희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 왕인데 이미 불기(記:약속)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 공공의 족속과 같지 않다.(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預受佛記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바로 여기에 나온 찰리(刹利) 종족이 바로 사카족인데 바로 이들이 한 무제에게 패한 휴도왕의 '흉노'족이다.
여기서 '사카족'이란 석가모니의 세속 인연 종족인 석가족을 의미하며 이들은 애초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인 중 사카라고 불린 사람들이 남하하여 인도에 정착한 사람들이라는 것. 이 사카족이 남하하여 인도로 들어가기도 하고 천산을 넘어 동쪽으로도 진출하였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종족이 바로 이들 천산 진출 사카족이라는 것. 그런데 문무왕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많으니 이에 따르면 신라 이사금 이후 마립간 대부터의 신라왕족은 이들의 후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