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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溪 金長生 선생의 生涯와 思想♣
*순서*
-출생(出生)과 가문(家門)
-수학과정(修學過程)
-시대적 배경(時代的背景)
-스승과 제자(弟子)
-학문(學問)과 사상(思想)
-결어(結語)
-스승을 말하는 적전(嫡傳)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出生과 家門
사계(沙溪) 선생이 태어나신 곳은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현 법원청사가 있는 곳이다. 대사헌(大司憲) 황강(黃岡) 계휘(繼輝)공의 사자(嗣子)로 1548년(명종3)무신(戊申)7월8일에 태어나시니 시조(始祖)왕자공의 27대손이요 예종조의 좌의정(左議政) 국광(國光)공의 5대손이 된다.
이때 대헌공의 나이 23세로 대과(大科)에 급제한바로 그해여서 경사(慶事)가 겹치게 되었던 것이다. 모부인(母夫人)은 평산신씨로 참찬(參贊)을 지낸 영(瑛)의 딸이니 고려 개국공신 숭겸(崇謙: 시호 壯節公)의 후손이다.
어렸을 때부터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장중(莊重)하고 헛된말을 하지 않았으며 희롱을 하거나 천박스러운 웃음을 웃지 않아 선생을 아는 사람은 그릇의 큼과 덕(德)이 높아 장차 크게 대성(大成)할 것이라 했다.
13세 때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 선생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성학(聖學)의 종지(宗旨)와 예학(禮學)을 전수(傳受)받아 양문(兩門)의 적전(嫡傳)이 되었다.
19세때 창령조씨(昌寧曺氏)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대건(大乾)공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명종(명종22) 정묘6월에 장자 은(隱)을 낳았다.
중자(仲子)인 신독제(愼獨齊) 집(集)은 선생이 27세 되던 선조(宣祖)7년 갑술 6월에 나시어 아버지와 스승으로 50여년간을 시봉(侍奉)하였으며 정훈(庭訓)을 준수(遵守)하고 동방(東方)도학의 도를 밝혀 한국 유학(儒學)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부자(父子)가 함께 문묘에 배향(配享)되는 영광(榮光)을 누렸다.
1580년(선조13) 경진(庚辰)에 계자(季子) 허주(虛舟) 반(槃)이 출생 하였으며 뒤에 대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당상관(堂上官)에 오르는 등 후손에서 3명의 정승(政丞)과 7명의 대제학(大提學), 그 외 수십명의 판서(判書)급 인물이 배출 되었다.
평생을 학문 연구와 수신(修身) 제가(齊家)로 유도(儒道)의 기풍(氣風)을 진작(振作) 시켰고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있을때는 어버이와 같이 백성을 사랑하고 가르치는등 고락(苦樂)을 함께하다가 1631년(광해군6년) 신미(辛未) 8월3일에 만인(萬人)의 애도(哀悼)속에 고종(考終)하시니 수(壽)가 84세였다.
손자(孫子) 창주(凔洲) 익희(益熙:文貞公)가 현종조(顯宗朝)에서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으며 증손(曾孫) 서석(瑞石) 만기(萬基:文忠公)와 서포(西浦) 만중(萬重:文孝公) 형제가 숙종(肅宗)때 대제학에 올랐고 현손(玄孫) 죽천(竹泉) 진규(鎭圭:文淸公) 오대손(五代孫) 건암(健菴:文簡公) 역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건암(健菴)은 영의정(領議政)에 오르니 가문(家門)의 융성(隆盛)함이 타문(他門)에 비유할 바가 아니었다.
2)수학과정(修學過程)
사계(사계)선생은 13세 때부터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선생에게 성학(聖學)의 종지(宗旨)와 예학(禮學)을 전수(傳受)받았다.
귀봉(龜峰) 선생은 비록출신가문(出身家門)이 우뚝하지 못했으나 학문(學問)의 경지에는 고명통달(高明通達)한 율곡(栗谷)선생도 항시 흠모(欽慕)하였으며 기상(氣像)과 용모(容貌)가 출중(出衆)하여 중인(衆人)을 압도했던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율곡(栗谷)선생은 성학(聖學)의 종지(宗旨)와 제가(諸家)의 중설(衆說)에 통달(通達)하여 진지실천(眞知實踐)하고 성인(聖人)의 본의(本義)를 알아서 언행(言行)에 실증(實證)하여 허물이 없고 사업(事業)에 시행(施行)함이 시이(時이)에 합(合)하면 나아가고 들어옴을 정(正)으로서 하며 나아가고 물러섬을 의(義)로서 하여 만인(萬人)의 사표(師表)가 되었기로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대학자(大學者)요 대정치가(大政治家)로 퇴계(退溪)선생과 함께 한국(韓國)유학계(儒學界)에 양대정상(兩大頂相)이다.
사계(沙溪)선생은 귀봉과 율곡의 학통을 추존(推尊)하고 계승하여 양문(兩門)의 적저(嫡傳)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율곡(栗谷)에서 연원(淵源)을 둔 학통(學統)은 사계(沙溪), 신독제(身讀齊)를 거쳐 송우암(宋尤庵), 송동춘(宋同春)으로 이어졌고 계속하여 윤명제(尹明齊), 권수암(權遂菴), 한남당(韓南塘)으로 줄기차게 뻗어 내려갔다.
3)시대적 배경(時代的背景)
사계(沙溪) 선생이 생존하던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은 사회가 극도로 피폐되어 국내외(國內外)가 다사다난(多事多難) 했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1498년(燕山君4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비롯하여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中宗14)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仁宗1년)을사사화(乙巳死禍)등으로 정쟁(政爭)이 끊일 날이 없었고 동서(東西)의 분당(分黨)과 남북(南北)의 분파(分派)가 대립(對立)하여 정국(政局)은 혼미를 거듭하였으며 1506년(丙寅) 중종반정에 이어 1623년(癸亥) 인조반정이 있었고, 1624년(仁祖2) 이괄(李适)의 난(亂)등이 있었으며 북(北)으로 부터는 1627년(仁祖5)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등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혼란이 극심했고 경제적(經濟的)으로 곤고(困苦)하여 사회적으로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하여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고 사회의 부조리(不條理)와 가치관(價値觀)이 부재(不在)로 혼미를 거듭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를 몸소 목격한 사계선생은 귀봉, 율곡, 양문에서 익힌 학문을 바탕으로 현실을 조명(照明)하여 구체적(具體的)인 윤리강령(倫理綱領)과 행동규범(行動規範)인 예학(禮學)으로 발전 시켰던 것이다. 당시 사회적 혼란상과 도착(倒錯)된 인심(人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아 왕도(王道)를 행(行)하고 투속(牏俗)을 교정(矯正)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비(是非)의 준칙(準則)을 구명(究明)하는 예론(禮論)을 정립하여 현실화(現實化)해야 했던 것이다.
4)스승과 제자(弟子)
전술(前術)한 바와 같이 사계선생의 스승은 유학의 종지를 밝히고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의 조종(祖宗)이라 말하는 율곡과 귀봉 양(兩)선생이다.
兩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학문과 행동규범(德行)은 만인을 공감 시켰기로 문하(門下)에는 각지(各地)에서 많은 유생(儒生)들이 구름처럼 모여 유학(儒學)을 크게 진작(振作)시켰다.
문이(門人) 가운데 중자(仲子)인 신독제(愼獨齊) 집(集:文敬公)은 반세기가 가깝도록 부사(父師)를 시봉(侍奉)하여 추호(秋毫)도 어김 없었기 때문에 세인(世人)이 호(號)를 신독(愼獨)이라 했으며 적전 우암 송시열(宋時烈:文正公)은 조선왕조 후기 성리학을 집대성 하였으며 이를 토착화 시키고 민족정기를 바로잡기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정치가요 사상가(思想家)였다.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文正公)은 사계선생의 종생질(傱甥姪)로 예학으 제이인자(第二人者)라 일컬을 정도로 예학에 밝았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거유(巨儒)로 송우암(宋尤庵)과 함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또한 조선왕조 사대석학(四大碩學) 가운데 상촌(象村) 신 흠(申欽)은 인조때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계곡(谿谷) 장 유(張維) 역시 인조조(仁祖祖)에서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는데 모두 사계선생 문인(門人)이다.
그 외 월당(月塘) 강석기(姜碩期)는 사계선생 종생질(傱甥姪)로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은 대제학(大提學)을 신경진(申景禛), 최명길(崔鳴吉),이경석(李景奭)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구인후(具仁垕), 이후원(李厚源)은 우의정(右議政)에 오르는 등 많은 현인(賢人)과 인재(人材)와 양상(良相)을 배출 시켰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인도(人道)와 정의(正義)를 옳게 여기고 세력(勢力)과 금력(金力)을 천(賤)히 여기는 가치관(價値觀)을 가진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인 전통에서 연유(緣由)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5)학문(學問)과 사상(思想)
사계선생은 단순한 산림학자(山林學者)도 아니오 관인(官人)이나 정치인(政治人)도 아니었다.
성학(聖學)의 종지(傱旨)를 바로 알고 실천하여 위기(爲己)와 무실로 도하(道學)의 정신을 생애를 통하여 구현(具現)한 도학자(道學者)라 할 것이다.
학문하는 태도와 평소의 생활이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문인(門人) 장계곡(張谿谷)은 선생의 학문하는 태도를 칭송하여 세상에서 글 읽는 이는 많지만 능(能)히 의문점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서 능히 생가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한 연후(然後)에 의심이 있고 의심이 있어야 문변(問辨)이 있는 것이다.
문변하여 자득함이 있은 연후에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그와같이 하는 이는 오직 사계(沙溪)선생 뿐이라고 하였다.
사계선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가묘(家廟)에 나가 인사(人事)하고 단정히 앉아 사물(事物)에 유혹(誘惑)되지 않도록 수도(修道)를 철저히 하였다.
사계선생의 행장(行狀)을 보면 선생은 평소에 저술(著述)에 종사하거나 즐겨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서(讀書)를 하면서 의심나는 바를 기록한 것이 쌓여서 책이 되고 질(秩)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명(冊名)의 다수가 경서변의(經書辨疑),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의례문해(疑禮問解)등으로 표기(表記) 되어있다.
공부자(孔夫子)께서도 일찍이 술이불작(術而不作)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주자(朱子)또한 유성지모(惟聖之謀)요 비아지모(非我之謀)라 했듯이 학문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 하는 바가 대현(大賢)의 풍도(風道)라 할 것이다.
사계선생은 평생을 통하여 예학(禮學)을 궁구(窮究)했음이 저술목록(著述目錄)을보아 짐작이 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계선생을 일러 동방예학(東方禮學)의 종장(宗長)이라 한다. 이는 다만 저술에 나타난 해박(該博)한 지식만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오 평소의 마음가짐 과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예법(禮法)에 맞아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예학(禮學)은 유학(儒學)의 입문이요 맺음이라 할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일찍이 공부자 께서도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며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사계선생은 사람이 사람 노릇하는 까닭은 자기의 고유(固有)한 본성(本性)을 잃어버리지 않는데 있다고 하였으며 신독제(愼獨齊) 또한 나라를 경륜(經綸)하는 도리는 반드시 먼저 시(是)와 비(非)를 밝히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禮)에는 내용(內容)과 형식(形式)이 있으니 형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變)하여도 예의 정신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제(禮制)의 가변성(可變性)과 예(禮)의 본원(本源)으로서의 강상(綱常)의 불변성(不變性)을 십분 고려(考慮)하지 않으면 예를 논(論)하고 제정(制定)할 수 없다고 했으며 비록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준칙(準則)으로 삼는다 할지라도 우리 풍속에 맞지 않는 것은 고쳐야 한다는 것도 아울러 주장 하였으니 사계선생은 남달리 주장하는 바가 분명하였으며 허례허식(虛禮虛飾)은 단연코 배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一部) 학자가 사계선생은 연골가례(軟骨家禮) 한 개의 이념적(理念的) 발휘(發揮)로서 예를 집대성(集大成)했으며 그의 대표작(代表作)이 상례비요(喪禮備要)였다는 터무니없는 우견(愚見)을 말하고 있어 뜻 있는 사람들의 실소(失笑)를 면(免)치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세간(世間) 에서는 예라하면 의식(儀式)에 관한 것만이 예로 알고 있으며 예송(禮訟)이라 하면 무가치(無價値)하고 무의미(無意味)한 정쟁의 도구(道具)요 학구열을 침체시킨 것이라 하여 일고(一顧)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당파간의 감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와 내용은 학구적인 것이요 정연(整然)한 논리가 들어 잇는 학설이며 그 원천을 살펴보면 인성(人性) 보편성(普遍性)과 상황에 알맞은 가치의 체계와 합리성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니 이를 과소평가 할 것이 아니라 동양의 인도정신(人道精神)을 규명하고 윤리의식의 구현방법(具現方法)을 이해하는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전술(前述) 한 바와 같이 사계(沙溪)선생은 율곡(栗谷), 귀봉(龜峰) 양(兩)선생 문하에서 십칠년 동안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전수(傳受)받아 비록 먼 지방이나 시골집에 사는 서민(庶民) 이라도 이르 준용(遵用)하여 충효(忠孝)의 정신을 투철히 하도록 했던 것이다.
사계선생의 평생 용력(用力)함이 예학에 치중 했으므로 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소홀히 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계선생은 예설에 앞서 진리(眞理)의 근원을 밝히고자 하였으니 행장(행장)에 보면 진리를 구하는 뜻을 두어 마침내 오로지 성리학 에 전심(專心) 하였다.
학문 하는 자는 독서하여 이치를 탐구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전(經典)을 읽다가 해득(解得)되지 않는 바가 많고 비록 제노선생(諸老先生)의 설이라 하더라도 의심나는 바가 있을 때는 억지로 쫓지 않고 그때마다 적어 놓고 공부하는 자료로 삼았다.
어떤 이가 이를 보고 묻기를 선생의 가르침을 후학(後學)으로서 존신(尊信)해야 하겠거늘 감히 논의 하는 것은 불가(불가)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사계선생께서 이르기를 의리(의리)를 강론(강론)함은 천하의 공공(공공)한 일이요 선현(선현)도 또한 허락(허락)한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제고(제공)과 더불어 논난(論難)하고 토론하여 그 시(是)와 비(非)를 바르게 하고자 할 뿐이니 무엇이 해(害)롭겠는가 라고 하였다.
비록 선생의 말이라 하더라도 강종(强從)하지 않고 차록(箚錄)해두었다가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료해(了解)된 후에 확신하는 태도는 학문 연찬(硏鑽)에 있어서 남다른 점이었으며 반드시 심신(心身)에 체득(體得)하고 사위(事爲)에 증험(證驗)하여 확실성을 탐구(探究)했던 것이다.
또한 사계선생은 성현(聖賢)의 말씀을 이론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증험하여 확실한 지식으로 행위의 근본(근본)을 삼았다.
사계(沙溪)선생의 학문(學問)과 사상(思想)은 이토록 철저 했으며 인도정신(人道精神)에 기초를 두고 시대의 변천(變遷)과정에 따라 적의(適宜)하는 원리와 방법이 내재(內在)해 있었다.
6)결 어(結語)
사계(沙溪)선생은 우리나라 유학자 가운데 오복(五福)을 고루 갖춘 가장 행복한 어르신이었다.
가정적(家庭的)으로는
경사(經史)에 관통하고 정사(政事)에 밝았던 황강(黃岡) 계휘(繼輝) 대헌공(大憲公)이 아버지였고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좌참찬(左參贊) 신영(申瑛)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갖추었으며 슬하에 9형제(九兄弟)를 두셨는데 중자(仲子) 신독제(愼獨齊) 집(集)은 현인군자(賢人君子)였고, 손자(孫子), 증손(曾孫), 현손(玄孫), 오대손(五代孫)에 이르기까지 게속 하여 대제학(大提學) 정승(政丞)에 올랐다.
학문적(學問的)으로는
귀봉(龜峰), 율곡(栗谷) 양선생(兩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송우암(宋尤庵), 송동춘(宋同春), 신상촌(申象村), 장계곡(張谿谷), 최치천(崔穉川)등 거유(巨儒)와 석학(碩學), 명상(名相)등이 배출 되었으며 권수암(權遂庵), 한남당(韓南塘)으로 이어지는 유학(儒學)의 정통사상(正統思想)은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에 새로운 장(章)을 이루었다.
개인적(個人的)으로는
학문(學問)은 고명(高名)하고 덕(德)은 순무(純茂)하였으며 만년(晩年)에 이르러 숭심광박(崇深廣博)하여 언소(言笑)에 넘쳐 신정모장(神定貌莊)함이 타인이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팔순(八旬)이 넘어서도 항상 완색(玩索)하는 공(功)은 더하여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며 수(壽) 84세에 고종(考終)하였다.
7)스승을 말하는 적전(嫡傳)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이 글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고(遺稿) 송자대전(宋子大全) 가운데 1685년(숙종11)을축(乙丑)에 임금에게 올리는 소장(疏章)으로 그 내용이 간략 하면서도 명문으로 스승을 받드는 지극한 정성(精誠)은 만세(萬世)에 귀감(龜鑑)이 될 것으로 확신(確信)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양문(兩門)으 후손(後孫)들과 지성인(知性人)에게 일독(一讀)을 권유(勸誘)코자 삼가 전재(轉載)하는 바이다.
신(臣)은 늙고 병들어 죽을 무렵이 되어서 만사(萬事)를 휴폐(休廢)하였아온데, 듣자오니 성명(聖明)께서 일찍이 옥당(玉堂)에 명(命)하시어 망사(亡師) 문원공(文元公) 신(臣) 김장생(金長生)의 유고(遺稿)를 취하여 올리라 하시었다 합니다.
윤음(陯音)이 한번 나오메 사류(士類)들이 기뻐하고 경사스럽게 여기어 말하기를, 우리 성상(聖上)께서 장차 표장(表章)하여 그 말을 시행(施行)할 것이라 합니다.
만일 과연 이와 같이 한다면 참으로 천재일시(千載一時)입니다. 무릇 선비를 높이고 도(道)를 중(重)하게 여기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盛)한 절조(節操)인데 요요한 고금(古今)에 전연 볼 수 없더니 어찌 다행히도 천신(賤臣)이 늙도록 죽지 않아서 친(親)히 볼 줄을 알았겠습니까.
신(臣)의 스승은 평생 경전(經傳)에 침잠(沈潛)하고 천리(天理)에 독실(篤實)하여 저술(著述)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세교(世敎)에 관계되고 경전의 뜻을 발명할 것이 있으면 대강 편록(編錄)에 기록하였는데 이미 성서(成書)가 되어 공관(公館)에 인쇄되어 있는 것은 벌써 어람(御覽) 하셨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오직 가례집람(家禮輯覽) 6책(6冊)은 신(臣)이 교정 한 것인데 새로 간판(刊板)에 들어갔으니 이것은 도신(道臣)이 마땅히 인쇄하여 바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소장(疏章)과 단편적(斷片的)이고 자질구레 하여도 그대로 묻어 둘 수 없는 글 들이 또한 더러 있습니다 신(臣)이 명령을 들은 이래로 수집(蒐集) 편찬하여 와오(訛誤)된 것은 정정(訂定)하고 중복 된 것은 깎았는데 모두 몇 만언(萬言)입니다.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까지 삼가 잘못된 곳을 바로 잡아 다시 베껴서 신(臣)의 손자(孫子) 검열(檢閱) 신(臣) 주석(鑄錫)을 시켜 합문(閤門)에 바칩니다.
아! 오늘날 어느 곳에서 찾겠습니까. 오늘 뿐만 아니라 전고(前古)에서 찾더라도 또한 짝할 이가 드물 것입니다.
선사(先師)께서는 학문(學問)을 함에 있어 사서(四書), 육경(六經) 외(外)에 염락관민(염洛關閩)의 여러 글을 한결같이 주장하여 한갓 읽고 설명하는 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쌓으면 덕행(德行)이 되고 행(行)하면 사업이 되도록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우직 그 행실에 법이 있고 그 말에 이치(理致)가 있어서 비록 단편적이고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모두 수연(粹然)하여 한결같이 바른(正)데서 나왔다 할 수 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좌명(佐命)한 여러 신하 중 선사(先師)의 지구(知舊)와 문생(門生)이 많아 글 수천언(數千言)을 지어 서로 가르치고 훈계 하였는데 여러 신하가 어람(御覽)에 올리었더니 인조(仁祖)께서 극(極)히 칭찬하시고 거듭 소명(소명)을 내리셨으니 이 한글을 보면 선사(先師)의 포부와 학문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폐주(廢主:광해군)를 보전(保全)하라는 한 항목은 더욱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자고(自古)로 개혁하여 폐(廢)한 임금으로서 이가 없는데 광해주(光海主)는 폐(廢)한 후에 인조(인조)께서 대접한 은혜가 극진 하였습니다. 유효립(유효립)이 반역을 도모 할 때에는 삼일 동안만 복위(復位)하고 높이어 상왕(上王)으로 삼는다는 말이 있었으니 광해주(光海主)의 위대함이 어떠하겠습니까마는 처치하자는 말이 끝내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등 여러 신하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조(仁祖)의 성(盛)한 덕(德)과 지극한 어짊의 소치이오나 또한 선사(先師)께서 여러 신하를 바르게 인도한 효과이니 이렇게 어진 사람이 국가에 유익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여기에 어진(仁) 사람의 일단을 살피소서.
신(臣)이 유고(遺稿)를 올리면서 선사(先師)께서 남에게 당한 무망(誣罔)을 씻지 않으면 신(臣)이 선사(先師)를 저버리게 될 뿐 아니라 이것은 실로 덕(德)이 있는 이를 높이고 어진(仁)이를 좋아 하는 전하(殿下)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듣자오니 근자에 헌신(憲臣)이 소(蔬)를 올려 이이(李珥)가 삭발 했다는 말을 제기하고 장생(長生)을 증거로 삼았다합니다.
신(臣)이 역시 일찍이 고(故) 문충공 장유(張維: 호 谿谷)의 문집에 고(故) 지사(知事) 조위한(趙緯漢: 호 玄谷)의 말을 기록한것이 있음을 보았는데 거기에 과연 신(臣)의 스승계서 하신 말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臣)은 여기에 항상 의아(疑訝)함을 금(禁)치 못 합니다. 유(維)는 장생(長生)의 고제자(高弟子)인데 위한(緯漢)의 말을 듣고서 어째서 장생(長生)을 위하여 무함(誣陷)을 통절히 분변하지 않고 이이(李珥)만을 위하여 변명하였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이(李珥)를 위해 변명한 말도 또한 명쾌하지 않습니다. 신(臣)의 생각에는 원두(源頭)에서 먼저 이이(李珥)의 실적을 진술하면 장생(長生)에 대한 무함은 변명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문성공(文成公) 신(臣) 이이(李珥)는 천품(天稟)이 심히 높아서 나이가 겨우 5~6세 때에 이미 학문을 하는 방법을 알았으며 10세가 되어서는 경서(經書)를 모조리 통하고 “성인(聖人)의 도가 겨우 이거뿐이냐”고 말 하였습니다. 이에 불씨(佛氏). 노씨(老氏)의 여러 글을 널리 보았는데 그 중에서 능엄경을 가장 좋아 하였습니다. 능엄경은 안으로 심성(心性)을 십분 정미(精微)하게 설명하였고, 밖으로는 하늘과 땅을 경미(輕微)하게 말하여 지극히 굉활한데 이이(李珥)의 재주가 고명(高名)하지 않다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흥미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자신을 책(責)한 상소(上疏)에 이른바 어린 나이에 도(道)를 구하다가 석교(釋敎-불교)를 좋아 하였다는 것입니다. 입산(入山) 할 때에는 또 유도(儒道)를 선(禪)에 합하였습니다.
이이(李珥)가 친구들과 작별할 때 남긴 편지에 이르기를 기(氣)라는 것은 사람이 함께 얻는 것인데 기르면(養) 마음에 사역(使役)을 당하고 기르지 못하면 마음이 기(氣)에게 사역(使役)을 당한다.
기가 마음에 사역을 당하면 일신(一身)이 주장이 있어서 성현(聖賢)을 기(期)할 수 있고 마음이 기(氣)에 게 사역을 당하면 칠정(七情)이 통속이 없어서 어리석고 미친것을 면하기 어렵다.
예전에 기를 잘 기른 이가 있으니 맹자(孟子)가 그 사람이다.
궁리(窮理) 진성(盡誠)에 뜻이 있는 사람이 이것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지혜(知慧) 있는 자는 물(水)를 좋아하고 어진(仁)자는 산(山)을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산과 물을 좋아하는 것은 물의 흐름과 산의 솟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동(動). 정(靜)의 체(體)를 취하는 것이다. 어질고 지혜 있는 자가 기를 기르는데 있어서 산수(山水)를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이(李珥)가 금강산에 들어가니 여러 중(스님)들이 경(經)을 말하는데 서로 다른 변론이 많았습니다.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이것은 아무의 말이 옳고 이것은 아무의 말이 그르다”하니 중들은 경이(驚異)하여 탄복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깊은 곳에 이르러 조용하게 앉아서 사려(思慮)를 정(靜)하다가 홀연히 선지(禪旨)의 그른 것은 깨닫고 말하기를 “이것은 달리 기묘한 것이 없고 다만 이 마음의 주작(走作) 하는 길을 끊어버리고 정신을 응집 시키어 정(精)하고 극진하고 비(虛)고 밝은 경지에 이르고자 함이니 체(體)와 용(用)이 한 근원이라는 성현(聖賢)의 뜻과 다르다”
하고 드디어 버리고 돌아와서 성학(聖學)에 전심(傳心) 하였습니다. 소위 입산(入山)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에 불과하며 이것은 인행(印行)한 문서에 모두 있으니 상고(詳考)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삭발(削髮) 하였다는 말은 극히 무망(誣罔)한 것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이(李珥)의 문집(文集)에 노숙(老宿)과 더불어 문답(問答)한 것을 서술 하였는데 노숙이 어째서
“조대(措大:청렴 결백한 선비)는 속유(俗儒)가 아닌가”
하고 말 하였으며 임억령(林億齡)의 시집에 또한 어째서
“이생(李生) 이(珥)와 산에서 놀았다” 고 말 하였겠습니까.
설사 이이(李珥)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장생(長生)을 증거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절대로 이런 일이 없지 않습니까.
옛 적에 엽공(葉公)이 말하기를 “우리 당(黨)에 궁(窮)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아주 정직하여 남의 양(洋)을 훔친 아비를 관가(官家)에 고발 하였습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당(黨)의 정직(正直)함은 이것과 달라서 아비는 자식(子息)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니 정직함이 그 가운데 있다” 하였습니다.
장생(長生)이 과연 그런 말을 하였다면 아비가 양을 훔쳤다고 고발 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헌신(憲臣)이 말하기를 장생(長生)은 학식(學識)이 고명(高名)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관연 말이 됩니까 그리고 의리(義理)가 됩니까 위한(緯韓)이 전한 것이 또한 이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또 엄하여서 감히 묻지 못하였다는 장유(張維)의 말은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신(臣)이 고(故) 참찬(參贊) 신(臣) 송준길(宋浚吉: 호 同春)과 함께 장생(長生)의 말을 들었는데 “일찍이 변형(變形)한 여부를 슬쩍 율곡(栗谷)께 품하였더니 대답하시기를 변형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 마음이 빠졌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시었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율곡(栗谷)은 곧 이이(李珥)의 별호 입니다. 비록 절절히 변명을 하지 않았으나 삭발을 하지 않은 실상은 자연히 나타났으니 참으로 이이(李珥)의 기상입니다.
또 헌신(憲臣)이 장유(張維)의 말을 이끌어서 말하기를 삭발한 것은 좋지 않은 자취여서 족히 변명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장생(長生)도 또한 말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또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삭발하지 않은 실상을 갖추어 진달하였다면서 오직 장생(長生) 혼자서 말하였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심리(心理)입니까. 신은 장생을 위하여 원통하게 여깁니다. 고명(高明)한 제자로서 증거를 하였으면 이이가 삭발한 것은 끝내 변명할 수 가 없으니 이이(李珥)가 당한 것이 어지 그리 심합니까. 또 좋지 않은 형적이어서 말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주자(朱子)는 젊어서 도겸(道謙)을 스승으로 섬기기는 하였으나 그의 친구가 삭발을 하려고 하자 심히 엄하게 책하고 아울러 그의 친구들 중 금(禁)하지 않은 자까지 배척 하였으니 돠연 고명한 장생(長生) 으로서 오히려 그런 말을 하였다면 주문의 죄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적전(嫡傳)이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옛 적에 벼슬을 잃으면 빨리 가난해져야 하고 죽으면 빨리 썩어야 한다는 말을 증자(曾子)가 친히 공자(孔子)께 들었는데 유자(有子)가 오히려 믿지 않으니 증자가 또 말하기를 내가 자유(子游)와 함께 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공자께서 까닭이 있어서 하신 말씀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저 말을 듣는 도리는 오직 의리가 어떠한가를 보는 것뿐입니다. 증자와 자유가 친히 공자께 들었어도 이치에 부당하니까 유자가 믿지 않았는데, 지금 장유(장유)가 갑자기 위한의 한 마디 말을 듣고 문자로 나타내어 오늘날 구실의 자료를 만들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닙니까?
1575년(선조8) 을해년 이래로 한쪽 편 사람들이 장소(章蔬)로 극심하게 헐뜯고 무함하여 왔으나 이이(李珥)가 삭발 하였다는 말은 끝내 감히 방자하게 하지 못 하였는데 어찌 이이(李珥)를 성묘(聖廟)에 숭보(崇報)한 뒤에 다시 제기하여 무망(誣罔)하고 흉패(凶悖)한 것을 더 하리라고 생각 하였겠습니까?
대저 망상으로 슬픔을 막는 것은 선가(선가)에서 좋지 않은 자취라 하여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이이(李珥)가 이것을 끌어서 자신을 논핵한 것은 고명한 것으로 인하여 들어갔다고 스스로 말하기에 거리끼고 또한 감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이것은 바로 인신(人臣)이 죄를 자책하려면 지나치게 심한 것을 꺼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헌신(憲臣)이 한말이 추켜 올리는것 같기도 하여 진상을 포착할 수가 없는데 그 널리 끌어댄 말들이 모두 허황(虛荒)한 것입니다.
이천(伊川)이 명도(明道)의 행장(行狀)을 짓는데 과연 석씨(釋氏).노씨(老氏)에 심취한 것을 말하였지마는 이내 말하기를 돌이켜 육경(六經)을 탐구하여 만물에 밝고 인륜에 정밀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석씨. 노씨에 심취한 것만 말한 것입니까?
주자(주자)는 횡거(橫渠;장재의호)를 찬(贊)함에 있어서 불씨(佛氏). 노씨에게 도망 하였다가 바른대로 돌아 온것을 밝혔으니, 이것이 과연 지금 사람이 이이(李珥)의 입산한 사실만 말하고 유도(儒道)로 돌아온 실상을 말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까? 또 명도(明道)가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이 설치한 관사(官司)에 벼슬 하였는데 이천(伊川)이 옳지 않게 여기어 행장 가운데서 빼었으니 마음에 옳지않게 여기면 빼고 말하지 않은 것이 친한 사람을 위하여 숨기고 어진 사람을 위하여 숨기는 의리입니다. 그 착하지 못한 잘못을 나타내면서 높인다고 말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헌신(憲臣)이 그 사실을 캐어보지 않고 장황하게 속이고 위협하여 온 세상을 협지 하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헌신(憲臣)이 끌어댄 송시영(宋時瑩)은 신의 종형입니다.
시영이 맨 먼저 종사(從祀)의 논을 발하였는데 그 첫 번째 소에는 다만 이이(李珥)의 학문과 도덕의 순수한 것만 들었습니다. 채진후(蔡振後)등이 이이(李珥)가 입산한 사실을 들어서 추하게 헐뜯을 때 시영 등이 두 번째 소에서 드디어 “이이(李珥)는 젊었을 때 선(禪)에 물든 잘못이 있었으나 곧 그릇된 것을 깨닫고 바른대로 돌아왔다”고 말 하였으니, 어지 시배(時輩)들이 일찍이 그 잘못된 것만 말한 것과 같겠습니까. 지금 소본(疏本)이 인쇄되어 세상에 돌아다니니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석년(昔年:지난해)에 지금의 영의정 신(臣) 김수항(金壽恒)이 제생(諸生)으로 있을 때에 유직(柳禝)의 무망(誣罔)을 변박(辨駁)하려고 신에게 부탁하여 소를 지었는데 신이 조사(措辭)한 것이 한결같이 시영과 같았으나 잘못이 될 것이 없다는 뜻을 변명한 것은 더 자세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태학(太學) 재임(齋任) 통문(通文) 가운데 시영과 신의 소를 가지고 잘못된 것만 말하는 시론(時論)과 같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臣)등의 글이 명백하지 못하고 뜻이 분명하지 못한 소치이겠습니까? 같지 않은 말을 몰아다가 억지로 같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실로 지금 세상의 큰 병폐입니다.
범상한 언어에 있어서도 불가한데 하물며 성조(聖祖)의 신한(宸翰)이겠습니까 성조(聖祖)께서 이이(李珥)의 소에 답한 글에 이른바 “호걸의 선비(豪傑之士)라는 것은 바로 정자(程子)와 장자(莊子) 주자(朱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그 추앙하여 존중히 여긴 것이 이와 같았은즉 과연 직접 지척(指斥)하여 잘못이 있다고 한 것이 헌신의 말과 같습니까? 그 작은 잘못이라는 것은 말에 짐작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까? 지금 임의로 끌어당겨 자기의 말과 같게 하기에 기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이(李珥)의 잘못만 듣고 이이가 바른대로 돌아온 사실은 듣지 않은 것은 채진후 유직 등의 말이요 채진후 유직 등의 말과 같으면서 억지로 신등의 말과 합하려 하는 것은 시배(時輩)의 말이니, 이것은 바로 “나는 같게 하려 하여도 저쪽에서 스스로 달리 하려 한다” 는 주자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만 주장 하여도 족ㅎ 그 말을 과장하여 세상에 떠벌일 수가 있는데도 또 삭발 하였다는 말을 들어서 이이(李珥)를 무함하니, 그들은 반드시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장유(張維)의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장유가 기록한 것은 진실로 조심하여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니, 어찌 일찍이 장생이 그 스승의 막대한 누(累)를 말하면서, 지금 헌신(憲臣)의 말처럼 조금도 서슴치 않고 곤란하게 여기지 않고서 말하겠습니까. 군자(君子)는 남의 착한 것을 들으면 찬양하고 허물을 들으면 살피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 스승의 허물을 말 하면서 조금도 서슴치 않고 곤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어떠한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원통하게 여깁니다. 헌신은 처음에는 이이(李珥)를 높이지 않고 뒤에는 장생(長生)에게 옮기어 황홀난측 하게 말하였습니다. 헌신이 만일 “이이는 사실 삭발하지 않았는데 장생(장생)이 삭발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사람은 측량하기 어려운 사람이다”라고 말 한다든지 혹은 “실지로 삭발을 하였기 때문에 장생이 사실대로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 말뜻은 비록 공손하지 못하나 말을 억눌렀다 올렸다 하여 천청(천청)을 현란하게 하는 것에 비교하면 또한 질실(質實)한 말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이이가 삭발 하였다는 말 같기도 하고 또 삭발하지 않았다는 말 같기도 하며, 또 주자(朱子)가 횡거(橫渠)를 찬양한 것을 들어 억지로 끌어 붙여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리려 하니 이것이 어찌 관중역문(關中役文)의 폐단 뿐 이겠습니까. 옛 적에 범조우(范祖禹)는 이천(伊川)이 순수한 스승은 아니지마는 이천이 무함을 당하였을 때에 곧 변명하지 않아서 주자(朱子)에게 비방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장생과의 관계를 부자(父子)지간처럼 여기니 우러러 한번 울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오나 돌이켜 생각하면 국사(國事)가 계란을 쌓은 것처럼 위급한데 시배(時輩)들이 이 시비를 하나의 큰일로 삼아서 이리 저리 격발(激發)싴켜 위망(危亡)이 날로 촉박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신이 다시 한 마디 말로 스승의 원통함을 신구(伸救) 한다면 반드시 한 층 더 올라가서 마침내 하늘에 닿은 지경에 이른 후에야 그만둘 것이므로 입을 다물고 참아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신은 진실로 범조우와 같은 죄인입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천질(賤疾)이 날로 깊어지고 겸하여 지독(舐犢)의 통절함이 잇어서 생각나는 대로 슬피 울부짖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끝내 한 마디 말을 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비록 땅속에 들어가더라도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유고를 올리면서 대략 이렇게 신변(伸辨)하오니 삼가 비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신이 남과 서로 교제한다고 하지 마소서.
이상과 같은 소를 올렸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우리 역사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조선왕조 후기의 고유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후 이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토착화 시켰 으며 민족정기를 바로잡고자 했던 위대한 정치가요 사상가였다.
독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겠으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왕가의 법도와 스승과 제자 아비와 자식 동지(同志)간의 참다운 우정이 어떠한 것인가를 간명 하면서도 정연하게 서술하였기 때문에 공감 하지 않는 자 없을 것으로 본다.
인간이 참답게 살아가야 하는 정도(正道)는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욱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과제다.
비록 개체가 모여 전체를 이룩했을지라도 항상 개체 보다는 전체가 우선하는 대의정신(大義精神), 이것이야 말로 나를 살찌게 하고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기약하는 밑거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