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 |
1) 김생(金生)711-791( 성덕왕 10 - 원성왕 7 ) |
신라의 명필.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매우 뛰어났으며, 평생동안 다른 재주는 배우지 않았다. 일생을 서예에 바쳤으며, 예서(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 > 이라 불렀고, 송(宋)나라에서도 왕희지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이 났다. 그 한 예로서, 고려의 학자 홍 관이 송나라에 사신 으로 갔을 때, 한림원의 한 관리들에게김생의 글씨 한 폭을 내보이자 그들은 깜짝 놀라며, "오늘 뜻밖에 왕 우군(왕희지 의 호)의 친필을 보는군!" 하고 말하였다. 홍관이, "아니요, 이것은 신라사람 김생의 글씨요." 라고 하자, 그들 은 믿지 않으며, "천하에 우군을 빼고 어찌 이런 묘필이 있으랴!" 하고 끝내 믿지 않았다고 한다. 김생의 서풍은 왕희지에 뿌리를 내렸고 필력이 힘차고 결체(結體)에는 무리와 과장이 엿보인다. 작품으로 글씨에 <<백 률 사 석당기>> <<창림비>> <<화엄사 화엄경 석각>> <<전유암서>> <<유점사 편 액>> 등이 있다. |
2) 최치원(崔致遠)857 - ?( 헌왕왕 1 - ? ) 신라말기의 학자. 경주최씨의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85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874년 과거 에 급제하여 ,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承務朗)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5년(헌강왕 5) 황 소의 난 때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 로 돌아와,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로 지냈다. 894년(진성여왕 8) '시무 10조'를 건의하여 정치의 어지러움과 백성들 의 어려운 생활을 구제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며 해인사 쌍계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을 찾아서 각지를 유랑하였다. 오늘날 불리는 부산의 '해운대'라는 이름은 최치원의 자인 '해운'을 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 뒤, 그 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글을 쓰고 시를 읊으면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는 구양순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법을 좇아 썼는데, 무척 글씨에 뛰어나 그가 쓴 <<난랑 비서문>>은 신 라시대의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숭복사 쌍계사 성주사 봉암사 등 4군데의 비석 글씨를 합하여 <<4산비명>>이라 하는데, 그 글씨체와 글씨가 모두 뛰어났다. 이외에도,글씨에 <<숭복사비>> << 진감국사비>> <<지증대사적조탑비>>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 >> <<중산복궤집>> <<석순응전>>이 있다. 조선 시대에 영평의 고운 영당 등 여러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
3) 탄연(坦然)1170 - 1159 ( 문종 24 - 의종 13 ) 고려시대의 승려이자 서예가. 속성 손(孫). 호는 묵암(묵庵), 시호는 대감(大鑑). 1085년(선종 2) 명경과에 급제하였고, 묵종의 청으로 세자(후에 예종)를 가르치다가 88년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안적사에서 중 이 되어 광명사 혜소국사(慧炤國師)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각지를 다니며 참선과 교학을 연구하다가 1105년(숙종 10) 승과에 급제하여, 1106(예종 1)에 대사(大師), 1109년 중대사(重大師), 15년 삼중대사(三重大師), 21년 선사(禪師)에 올랐다. 23년(인 종 1) 첩수가사(帖繡袈裟)를 하사받고 29년 보제사 주지로서 법회를 열었다. 32년 대선사(大禪師)로서 왕의 자문역이 되고 46년 왕사(王師)가 되었다. 47년 의종이 즉위한 후에는 예우가 더욱 극진하였으나 48년 은퇴하고 단속사에 들어가 계속 선교(禪敎)의 중흥에 이바지했다. 서예에도 뛰어나 김 생에 버금가는 명필로 알려졌으며 왕희지의 필체를 따랐다. 격조높은 시문을 남겼다. 국사(國師)에 추증 되 었고, 단속사에 비(碑)가 있다. 작품에 <<청평사문수원중수비>> <<북룡사비>> <<승가사 중수비>> 가 있다. |
4) 안평대군(安平大君)1418 - 1453 ( 태종 18 - 단종 1 ) 조선 세종의 세째 아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각거사( 珏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그의 맏형인 문종이 다스릴 동안에는 조정의 배 후 에서 실력자 구실을 하며 둘째 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은연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꾸며 김 종서 등을 죽일 때 억지로 죄를 씌워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렸다.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혀, 중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갔다 한 다. 글씨는 조맹부체를 본받아 썼으며, 오래 살았다면 크게 발전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1452년(문종 2) 경자자(庚子字)를 고쳐 임신자(壬申字)의 자모를 썼고, 그림에도 뛰어나 화가 안견과도 친분이 깊었다. 대표작으로는 <<몽유도원도 발문>> 이 있고, 이외에 글씨로 <<영릉신도비>> <<청천부원군 심 온 묘표>>가 있으며, 저서로는 <<비해당집>>이있다. |
5) 양사언(楊士彦)1517 - 1584 ( 중종 12 - 선조 17 )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 본관은 청주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 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사 철 원군수 회양군수를 지냈는데, 자연을 사랑하여 지방관을 자청한 그는 회양군수 때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 ( 蓬萊楓嶽元化洞天)>의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재임 중 지릉의 화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귀양갔다가 2 년 후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시와 글씨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큰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 김 구, 한 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 렀다. 저서에 <<봉래시집>>이 있고, 작품중에는 많이 알려진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등이 있다. |
6) 한 호(韓濩)1543 - 1605 ( 중종 38 - 선조 38 ) 조선시대의 서예가.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청사(淸沙). 본관은 삼화(三和)이고, 개성 출신이다. 어머니의 떡 써는 고사로 잘 알려진 석봉은, 일찌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하여, 왕희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 (行) 초(草) 등 각 체가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 흡곡현령 존숭도감 서사관 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으며, 우리 나 라 서예계에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 나름대로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했다. 선조도 한석봉의 글씨를 특히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어 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 으 나 그가 쓴 비문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 <<서경덕신도비>> <<기자묘비> > <<행주승전비>> <<선죽교비>> <<좌상유홍묘표비>> 등이 있다. |
7) 김정희(金正喜)1786 - 1856 ( 정조 10 - 철종 7 ) 조선시대의 서화가 문신 문인 금석학자.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 노과(老果)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108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사가원설서, 충청우도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등 을 역임하였다. 일찌기 스승인 박제가에게서 학문을 깊이 깨우쳤으며,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당시 동양에서 중심지가 되고 있던 청나라의 뻬 이징으로 가서 그곳 대학자인 옹방강 완원으로부터 그의 재능을 크게 인정받았으며, 경학을 널리 연구하여 높은 수준에 이르러 ' 해동의 제1의 유학자'란 별명을 얻었다. 그외 금석학 서화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귀국 후 고증학을 도입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 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고통스러운 귀양살이에서도 학문과 예술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 게 학문과 예술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금석학과 서예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금석학이란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여 역사적 사실을 밝 혀내은 학문을 말하는데, 그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 비 가 이대조의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고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이며, 그 세워진 연대가 진흥왕 29년 남천주 설치이후임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두번 다시 찾아내기 어려운 서예의 대 가로서, 소식, 구양순 등 대가들의 글씨를 열심히 연구하여 그의 독특하게 뛰어난 추사체를 이룩하였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는데, 난초 대나무 산수화를 잘 그렸다 한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는데, 그는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 로 학문을 하여서는 아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뻬이징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 져와서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 <<실사구시설>> <<금석과 안록>> <<완당척독>> 등이 있 고,작품에 <<묵죽도>> <<묵란도>> 등이 있다. |
2. 중국의 서예가 |
1) 왕희지(王羲之)307 - 365 중국 동진(東晋)의 서예가. 자는 일소(逸少)이다. 우군장군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뚱성 린이현[臨沂縣]인 낭야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 도의 조카이고, 왕 광의 아들이다. 중 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 (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晋)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의 서풍을 배웠고, 뒤에 여러 가 지 서체의 장점을 두루 체득하고 종합하여,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질박하고 옹훈한 서풍을 연미하고 유려한 서풍을 바꿈으로 써 서예를 예술로 끌어올리는 데에 눈부신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왕희지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왕희지를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되 었을 정도로 끼친 영향이 막대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유 양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 그는 명문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 호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 안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 였다. 그러나 일찌기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 술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 년(永和 11) 벼슬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은사(隱士)와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 허 매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 때 모 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이른바 <<난정서(蘭亭序)>> 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 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 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 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의 태종이 992년에 조각한 < <순화각첩>>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나라의 회인이라는 승려가 고종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 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 에 <<상란첩>> <<공시중첩>> <<유목첩>> <<이모첩>> <<쾌설시청첩>> 등의 필적이 전하여 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 다. 당나라 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 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은 전아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 품이 매우 높다. |
2) 우세남(虞世南)558 - 638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자는 백시(伯施)이고, 여요출신이다. 6조(六朝)의 진(陳) 때부터 서와 학재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수의 양제를 받들었으나 그리 중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의 태종의 신임을 받아 홍문관 학사 비서감을 거쳐, 638년에는 은청광록 대부가 되었다.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구양순 저수량과 함께 당초의 3대가로 일컬어지며, 이왕(二王)과 지영을 배워 원융(圓融 )하고 질박한 필치를 이루었다. 특히 해서의 제1인자로 알려져 있다. 태종은 우세남에게 서(書)를 배웠는데, <세남에게 5절( 五絶)이 있는데, 그 첫째는 덕행(德行), 둘째는 충직(忠直), 세째는 박학(博學), 네째는 문사(文詞), 다섯째는 서한(書翰)이다 > 라고 절찬하였다고 한다. <<공자묘당비>>가 그의 필적으로 가장 유명한데, 행서로는 <<여남공주묘지고 >> 가 있다. 또 시에서도 당시의 궁정시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시문집 <<우비감집>>을 남겼다. 저술로 <<북당서초>> 160권이 있다. |
3) 구양순(歐陽詢)557 - 641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 사람이다.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가, 태어나기를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 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섬게 태상박사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학사를 거쳐 발해남으로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왕(二王), 즉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 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 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고 있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서예가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체는 구양순의 서체로서, 자획과 결구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에 순간이라도 정신적 이 완을 불허하는 율법적인 특색을 가진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서적은 비 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
4) 저수량( 遂良)596 - 658 중국 당나라때의 서예가. 자는 등선(登善)이고, 항조우 첸탕 사람이다. 우세남 구양 순과 아울러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린다. 아버지 양은 학문과 서도에 뛰어나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저수량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시서가 된 뒤 충절과 엄정으로 역 시 신임이 두터웠다. 왕희지의 필적 수집사업에서는 태종의 측근에서 그 감정을 맡아 보면서 그 진위를 판별하는 데 착오가 없 었다고 한다. 고종때 하남군공에 봉해졌으나, 만년에 황제에게 직간(直諫)한 것이 노여움을 받아 좌천된 지 3년 후 불우한 가운 데 생애를 마쳤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우세남의 서풍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서풍을 터득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그의 서풍은 아름답고 화 려한 가운데에도 용필(用筆)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 왕희지 이후 글씨체 변화의 새로운 시작을 연 인물로 평해지 며, 후세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맹법사비>> <<이궐불감비>> <<안탑성교비>> 등이 있다. |
5) 안진경(顔眞卿)709 - 784? 중국 당나라 서예의 대가. 자는 청신이고, 노군개국공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렀다. 산뚱성 낭야 임기 출 신이고, 북제의 학자 안지추의 5대손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가 되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을 맞았으며,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을 위하여 싸 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현부상서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 의 명으로 회서의 반장인 이희열을 설득하러 갔다가 연금당하 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 에 장욱을 배우고 중장(衆長)을 합도(合度)하여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등 새 풍격을 이루었는데. 남조 이 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의 전아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당대 이후의 서도를 지배 하였 다. 인품과 충절에서도 추앙받는 까닭에 더욱 글씨가 천고에 빛남을 후세에 보여준 사람이다. 안진경이 남긴 행초서의 대표적 필적 세 가지, 즉 <<제질문고>> <<고백부문고>> <<쟁좌위고> > 를 가리켜 안진경삼고(顔眞卿三稿)라고 하는데, 이들 글씨는 모두 글씨를 쓴다는 의식이 없이 졸연간에 휘갈겨 쓴 초고 그 대로의 필적이어서 더욱 자연의 묘미가 있고, 가장 진귀하게 여겨지는 글씨이다. 대표작은 해서의 <<안씨가묘비>>와 행서의<<쟁좌위>>가 있고, 이 밖에도 많은 금석문과 뛰어난 수적 ( 手迹)을 남겼다. |
6) 조맹부(趙孟 )1254 - 1322 중국 원나라의 화가 서예가. 자는 자앙(子昻)이고 호는 집현(集賢) 송설도인(松雪道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敏). 저장성 우싱 현 태생이다. 송나라 종실 출신이며, 원나라 세조에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고, 벼슬은 한림학사승지 영록대부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위 국공(魏國公)에 추봉되었다.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겨 영달하였으므로,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 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교양인으로서 정치 경제 시서화에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다. 서예에 있어서도 왕서(王書)로의 복귀를 주장하였으며, 글씨와 그림은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을 주장하였다. 서 풍은 단정하고 경건한데, 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시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림에 있어서는 남송의 원체(院體) 화풍을 타파하 고, 당 북송의 화풍에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은 산수 화훼 죽석 인마 등에 모두 뛰어났고, 서예 는 특히 해서 행서 초 서의 품격이 높았으며, 당시 복고주의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그의 아내 관도승(管道昇)은 묵죽에 이름이 있었고, 아들 옹 도 산수 화조 화가이며 서예에도 탁월하였다. 또 화우 문인이라 할 수 있는 전 선 진중인 왕 연 등이 있어, 우싱파라는 한 파를 이 루었다. 그림으로 <<중강첩장도>> <<사마도권>> 등이, 글씨 유품으로는 <<여중봉명본척독>> 등 이 있다. 그림은 오 진 황공망 왕 몽과 더불어 원대의 4대가로 손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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