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2008년] 서울의료원.
칠십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말기암으로 입원, 우리에게 호스피스케어를 받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나는 대부가 되어 그분께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드렸었다. 그리고 미망인인 부인의 청(교적부활)을 이루어 드렸다. 계성여중 1학년 때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에게서 영세를 받았고, 견진은 다음해인 중학교 2학년 때 노기남 대주교님에게 받았었다고 당시를 회상하셨다. 나는 이분의 소망을 이루어드리고자 계획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2008년 그때의 내 나이 57세였다.
당시 70대 중반의 노골룸바 할머니가
청담동성당에서 내게 건네 준 편지
편지 곳곳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고
부족한 나를 크게 칭송하는 표현에서
그분의 깊은 사랑과 겸손함을 보게된다.
천주교우였던 부인은 이십대 때에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오십 여년을 절을 다녔다 한다. 이제 남편 요셉씨도 하느님께로 가셨으니 당신도 다시 성당으로 돌아오려는데 교적이 없단다. 나는 그분이 세례받은 명동성당을 찾았다.
컴퓨터에는 기록이 없다, 오십여년 전일이니~~ 당시에는 수작업으로 기록을 남겼다했으니. 직원의 도움으로 옛 서고에서 부인 노골룸바할머니의 세례대장을 찾았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청담동성당에 새롭게 교적을 만들어 대세를 받은 남편과 함께 교적에 올려드렸었다. 그후 임종과 장례의 전 과정을 함께 했었고, 우리는 삼우제까지도 흑석동성당 납골당을 다녀온 후 집에서 함께 연도를 바쳐드렸었다.
노골룸바 할머니는 지금도 고우시지만 그 당시에도 얼마나 옷맵씨가 세련되고 언행도 기품이 있으시며 정말 멋쟁이셨다. 사별가족케어 차원에서 우리는(창고지기들) 가끔 삼성동 자택으로 골룸바여사를 뵈러 놀러갔었다. 언제나 음악은 클래식을, 맛난 먹거리와 후식으로는 특별한 향의 커피를 내어 놓으셨던 분이다. 돌아가신 남편이 나의 대자이니 노골룸바할머니는 영적으로 나의 며느리였던 셈이다. 위의 편지에서 당신스스로도 딸이니, 며느리로 자신을 칭하셨다.
울 며느리 골룸바여사님과 함께!
지난 추석연휴 말미에 우리는 노골룸바 며눌님이 계신 실버타운을 방문하였다. 지난 봄 아들이 미국으로 들어가며 홀로 계신 어머니가 염려스러워 분당에 있는 시설 좋은 실버타운에서 어머니가 편히 생활하실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였다. 우리가 운이 좋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그곳에서 명절이라고 찾아온 노골룸바님의 자매들도 함께 만나 볼 수 있었으니까! 지난 얘기꽃을 피우며 우리 일행은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보다 일찍 왔던 자매들이 먼저 돌아가고 나서도 우리는 늦게까지 남아 노골룸바여사와 저녁도 먹고 옥상에서 산책을 하기도 하였다.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보여줄 동영상을
찍으며 '아들에게 뭐라 한 말씀 하시라'
하였더니 "정필아, 사랑해." 그뿐이었다.
사실 엄마가 자식에게 이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오직 자식사랑 밖에는!
카톡으로 전송하려니 9초에서 끊었다.
나에게 아들과 통화하게 하고 싶다며
미국에 있는 아들 전화번호를 찾고있다.
건강식단으로 잘 차려나온 저녁상
나는 얌전히 앉아 있으라하신다.
당신이 손수다니며 챙겨다 주셨다.
육십대 시아부지는 앉아 있고,
팔십대의 며누리는 음식나르고!
젊은 시아버지? 며눌님 덕에 호강했다.
창고지기 막달레나와는 잘 통한다.
형님 동생하며, 때로는 친구같이
어떨 때는 엄마와 딸처럼 정겹게!
원래 형제가 일곱자매이신데 오늘은
둘째와 다섯 째만 못오고 다 모였다.
참 복 많은 집안이다.
언니동생 일곱명이 모두 교우들이다.
큰언니 안나에서 막내 아녜스까지,
우리 며눌님 노골룸바는 셋째란다.
우리는 밤늦게 실버타운을 나섰다.
우리의 심성고운 착한 며눌님이
시아부지 가신다고 손에 택시비까지
쥐어주고 눈에서 멀어질 때까지
망부석이 된듯이 그 자리에 서계신다.
하느님나라가 아니라면 가능할까?
할머니가 자신을 딸이라 자처하며
젊은 대부에게 베푸는 겸손한 사랑.
그분의 은총이 아니라면 내가 어디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창고로 돌아오는 길에 내 입가에
나도 모르게 은근한 미소가 감돈다.
내 하얀머리를 보시고 쓴 그분의 표현
'하느님의 귀한 경험의 보석들을
머리 속에 가득 쌓아 밖으로 넘쳐
하얗게 뿌리내리는 모습.'
놀림감이던 젊은 날의 내 흰머리가
문학소녀같은 우리 예쁜 며눌님의
찬사를 통해 하늘나라 훈장으로 여겨졌다.
고귀한 표현에 흠이 되지 않도록
나의 남은 인생 주님안에서 잘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