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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너무 사랑한 목사님… “‘장기 기증’ 건강 회복도 산에서” | |
국내에서 헌혈을 제일 먼저 했고, 가장 많이(91년까지) 한 사람은? 신장기증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답은 똑 같다. 사랑의장기기증본부장이신 박진탁(朴鎭卓, 73) 목사이시다. 이 땅에 헌혈과 장기기증을 봉사의 이름으로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국내 첫 장기기증과 헌혈 1호를 기록한 장기기증본부장 박진탁 목사.
절대 빈곤을 막 넘어서던 40여 년 전. 그는 한신대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신출내기 병원 원목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66년 어느 날 퇴근 길 응급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급차에 실려 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어떤 일인가 지켜봤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환자가 위독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혈액형이 무엇인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궁금했다. 마침 환자는 B형이라고 했다.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당장 소매를 걷어붙였다. “내가 B형이니 빨리 수혈하시오.” 박 목사의 팔뚝에 꽂힌 혈액주사는 생명의 촌각을 다투는 환자에게로 바로 수혈됐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환자는 다행히 소생했고, 수일 뒤 완전 회복하여 퇴원했다. 우리나라 공식 헌혈 1호의 순간이었다.
이 일은 박 목사에게도 깨우침을 주었다. ‘그래, 목사로서 봉사의 삶은 바로 이런 거다. 생명이 위독한 환자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구체적 일을 하자.’ 이후 박 목사는 원목 생활을 접고 68년 한국 헌혈협회를 결성, 본격 헌혈운동에 나섰다. 교회, 학교, 기업 등을 찾아다니며 헌혈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헌혈 가두캠페인까지 벌였다. 그도 직접 헌혈에 솔선수범했다. 두 달에 한번씩 빠짐없이 했다. 91년에 151회로, 당시 최다 헌혈자로 국민포장을 받았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두 달에 한 번꼴로 헌혈한 셈이다.
지난 2006년 직원들과 함께 유명산 정상에서.
박 목사의 삶을 보면, 그는 타고난 목회자였고 봉사의 삶이 천직으로 보인다. 그는 종로구 가회동에서 자랐다. 아버지를 따라 5세 때 서울로 올라와 터전을 잡았다. 아버지는 삼청공원과 북악산, 인왕산을 자주 오르내리셨다. 때로는 따라가기도, 때로는 아버지의 땀 흘린 모습을 보면서 산에 대한 동경심을 키웠다. 그는 인근 경복고에 입학했다. 공부도 곧잘 했다. 고교 때 교회를 다녔다. 3년간 새벽기도를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교회만 가면 마음이 너무 편했다. 교회에서 받은 안정된 느낌은 다른 어느 장소에서 받았던 느낌과는 달랐다. 스스로도 이 편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가 궁금했다. ‘성경 공부를 제대로 해보자’고 인생 목표를 세웠다.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목사가 되자고 했다.
그는 한신대에 입학하겠다고 선언했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아버지는 “부자의 인연을 끊을 생각이면 가고, 입학하더라도 등록금은 못 준다”고 했다. 그는 그 느낌 그대로 한신대에 입학했다. 어버지의 말씀대로 첫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했다.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목사로 세상에 발을 디딘 인생 서막이다.
2008년 그랜드캐넌에서. 외국에 가면 경비 절감하고 등산하기 위해서 야양하는 경우가 많다.
산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서 산에 갔었고, 한신대 다닐 적엔 수유리에 살아 북한산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68년 10월3일 날짜도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으면 안 되는 지금의 부인을 중매로 처음 만났다. 건강테스트 하자고 백운대까지 같이 올랐다. 부인도 흔쾌히 나섰다. 천생연분 부부다. 만나자마자 백운대까지 올랐고, 3일후 우이동에서 깔딱고개로 오르며 혈압체크를 했고, 일주일 후 북한산에서 프러포즈하고 결혼했다. 산에서 사랑을 나눴고, 결실을 맺어 가정을 이룬 전형적인 경우다. 산사람 이야기가 아닌 목사님 부부 이야기다. 그만큼 그의 산에 대한 역사도 오래된다.
한신대 졸업 후 목사로 발령받았으나 교회보다 다른 자리가 없을까 고민했다. 더 봉사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아픈 사람을 위해 봉사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찾은 게 병원 목사였다. 고려대 병원의 전신인 우석대 병원 원목이 됐다. 없는 자리를 그가 사람을 찾아다니며 만들어 들어갔다. 그게 어떻게 보면 그에게 앞으로 많은 일을 하게 한 하늘의 계시였는지 모른다. 우리나라 헌혈 시조로서 ‘헌혈 전도사’로도 자임하며 열심히 활동했다. 74년엔 적십자사로 옮겨 헌혈사업 과장이 됐다.
설악산 등산 도중 생일을 맞아 직원들이 초코파이에 축하 촛불을 켜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인생의 전환기나 고비는 있는 법. 헌혈사업은 하고 있었지만 생활은 너무 어려웠다. 미국으로 이민한 형제들이 나름대로 성공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민 오라고 초청했다. 주저했지만 어려운 생활에 돌파구가 필요했던 부인과 주변의 집요한 설득으로 미국행을 결정했다. 이는 그에게 헌혈뿐만 아니라 장기기증에 대한 새로운 소명을 받기 위한 부름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미국에서의 어느 날, 잘 아는 교포가 뇌사상태에 빠졌다. 의사의 권유로 유가족들이 환자의 장기를 기증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뇌리에 뭔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날 여기로 이민 오게 한 건 이 장면을 보게 하기 위한 부름이었구나’라고 느끼며 바로 짐을 꾸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버드대학에 입학한 아들과 딸, 부인을 남겨두고 홀로 90년 9월 영구 귀국했다.
2006년 치악산을 오르며.
91년 서울 YMCA 강당에서 재단법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창립대회를 가졌다. 91년 1월엔 국내 최초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헌혈 효시에서 장기기증 효시 기록을 더했다. 후원자를 모집하고, 각 교회 설교를 통해 장기기증에 대한 전 국민적 인식을 넓혀 나갔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된 고비가 찾아왔다. 95년 3월 한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로 큰 곤욕을 치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모 신문에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사랑의 탈을 쓴 장기매매집단’으로 매도 보도하면서 발칵 뒤집혔다. 이 신문은 처음부터 아예 작정하고 매도했다. 없는 사실을 1면 머리기사로 며칠을 썼다. 종합면, 사회면으로 옮기며 날조에 가까운 기사를 써댔다. 근거가 없고 무리하니, 다른 언론에서 따라오지를 않았다. ‘혼자만의 모험’을 이 신문은 계속했다.
소낙비가 내리면 맞을 수밖에 없다. 박 목사와 사랑의장기기증본부 직원들은 소리없이 맞았다. 기증자와 후원자가 즉시 줄었고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사필귀정. 보도가 멎고 박 목사는 바로 소송을 냈다. 법원도 재판을 신속히 진행했다. 판결이 나왔다. ‘보도한 크기와 똑 같은 제목과 기사로 정정 보도하라’고. 이 신문은 반응이 없었다. 다시 제소했다. 정정 보도를 지체하는 하루마다 글자 한 글자에 얼마씩 계산해서 지급하라고 다시 판결했다. 금액은 눈덩이로 불었다.
급기야 그 신문에서 사람을 보내 협상을 제의했다. 원하는 대로 줄 테니 그만하자고 했다.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협상을 받아들였다. 5억원을 받고 끝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아마 헌혈과 장기기증 사업을 그쪽에서 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순수 후원금으로 운영하는 우리 본부를 생각하면 더 많은 금액을 받을 걸 그랬나 싶다.”
2007년 1월 신년 워크샵을 마치고. 장기기증본부는 모든 행사 뒤 등산으로 전 일정을 끝낸다.
박 목사는 이 사건으로 잃은 것도 많았지만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데 도움 됐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순풍에 돛단 듯 나갔다. 91년 임대해서 설립했던 법인이 지금은 전국 12개 지부에 200여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커졌다. 서울에서만도 사무직원 30여명, 간호사 45명 등 총 80명 가까운 직원이 있다. 재단법인으로 정부 지원은 없고 개인 후원금으로만 본부를 운영한다. 후원회원은 전국적으로 약 20,000명가량 된다. 전부 박 목사 혼자서 일궈낸 업적들이다.
박 목사는 장기 기증자들이나, 기증받는 환자들에게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선 산에 열심히 다니라고 말하는 것부터 격려한다. 장기 이식 후 건강관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가장 빠른 회복에 등산이 제일 좋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천에서 6명의 릴레이 장기이식의 미담 주인공 중 첫 기증자인 김세영씨는 신장 기증을 한 후 한달도 안돼 태백산 정상을 밟아 건강을 과시했고, 신장과 간 기증자가 기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식인과 함께 내장산 등산을 한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박 목사 스스로도 매주 정기적으로 산을 오르고 있다. 미국에 이민 가 있던 시절도 산을 못 잊어 아들을 데리고 그랜드캐넌 계곡을 하루 종일 내려갔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외국에 출장 갈 때는 숙소를 호텔로 잡는 게 아니라 캠핑을 한다. 볼일을 마친 후 그랜드캐넌, 브라이스 캐넌, 자이온 국립공원을 방문하여 캠핑그라운드에서 등산을 하며 자연을 즐기면서 텐트에 지낸다. 지난 추석 연휴 때도 중국 황산을 혼자 다녀오기도 했다. 사랑의장기기증본부 직원들과 거의 매주 산에 간다. 직원들도 이제는 의례히 주말이 오면 산에 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우리 나이로 74세인 본부장인 목사님이 솔선수범하는데 마다할 직원이 없다. 거의 매주 산에 가는 것과 별도로 분기별로는 전체 직원들과 산행행사를 가진다. 워크숍, MT 등은 당연히 산에서 한다. 공식 행사 후 산행으로 모든 일정을 끝낸다. 근무하는 날이지만 눈이 3㎝이상 쌓이면, 그날은 산에 가는 날이다. 등산복을 입고 사무실로 출근한다.
산행 하면서 직원들의 가정사에서부터 직장생활의 애로, 개인 고민까지 듣는다. 사무실에서 하기 힘든 얘기를 걸으면서 나누니, 직원들도 마음을 활짝 열고 보여준다. 목사님은 사심 없이 있는 그대로 듣고 위로 하고 격려한다. 목사님은 직원 한명, 한명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산행 날짜는 서로 조정해서 맞추지만 직원들이 정해오면 가급적 따른다. 2년 전인 2006년 전 직원이 설악산에 2박3일 갔을 때 일이다. 목사님 생일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등산 도중 “오늘이 생일이다”고 하셨다. 직원들은 부랴부랴 희운각 대피소에서 조촐하게 생일파티를 열기도 했다. 이 정도 되니 본부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거의 준산악인이 될 정도로 체력이 단련됐다. 건강이 안 좋아 휴직했던 직원, 심폐기능에 문제 있어 헉헉되던 직원들도 본부에 들어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처음 들어와 산에 가기를 머뭇하던 직원들은 본부장이 바로 등산장비를 개인비용으로 사준다. 공짜에 끌려서라도 따라간다. 몇 번 가다보면 스스로 재미를 붙이기 마련이다. 목사님은 또 본부에 항상 아이젠, 랜턴, 우비 등 등산용품 28인용을 비치해둔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 직원들이 바로 등산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사랑의장기기증본부엔 산악회가 따로 없다. 전 직원이 산악동호회원들이다. 지리산을 서너 번 종주한 직원이 수두룩하다. 지난 10월9~10일 1박2일 간 백무동~장터목~천왕봉으로 갔다 왔다.
목사님의 산사랑은 개인취미와 생활에서도 여실도 드러난다. 그의 집은 등산장비로 꾸며져 있다. 거실의 샹들리에는 등산용 랜턴으로 장식돼 있다. 미국에 있을 땐 산을 너무 좋아해서 이름을 Jintak, Park이 아닌 Mountain, Park으로 바꾸고 싶을 했을 정도였다.
본부장과 직원들이 산을 통해 가깝게 지내니 사무실 분위기는 화기가 넘친다. 일이 있으면 모두 단합된 힘을 과시한다. 사랑홍보팀 이지선 팀장은 “2년전 설악산 등산이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며 “산을 오르다보니 웬만큼 힘들거나 어려운 일도 이겨낼 자신과 배짱이 생겼고, 건강도 훨씬 좋아졌다는 걸 느낄 수 있다”고 좋아했다. 그녀는 또 “산을 통해 전 직원들이 한마음 되어 생명나눔운동에 정진할 계기를 만들 수 있어 더욱 기대를 갖게 된다”고 각오도 밝혔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근무하려면 등산을 잘 해야 한다. 기본 조건을 갖춘 후보자들의 면접을 볼 때 본부장인 목사님이 던지는 최종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등산 잘 하는가”이다. 다른 조건이 똑 같으면 등산을 잘 하던지, 잘 할 것 같은 사람을 채용한다. 등산은 체력과 끈기, 열정을 한꺼번에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객관적 지표라는 것이다. 면접 마치고 채용된 직원과 갖는 첫 행사가 바로 산행이다.
2007년 가을 북한산에서.
목사님은 항상 “내 두 다리가 나의 주치의다”라고 강조하신다. “산에 가서 보이는 자연이 전부 나의 정원이다. 큰 집에 살 필요도 없지 않나. 산에 오면 정원이 바로 그곳에 있는데, 뭐 하러 큰 집에 살려고 하나. 자연의 넓은 정원을 쳐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순화되고 욕심도 사라진다. 산행도중 흠뻑 땀을 흘리면 잡념이 없어지고, 세상이 전부 내 것이 된다.”
목사님은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다. 장기기증본부를 이끌고 갈 후계자를 빨리 찾아야 한다. 순전히 혼자서 동분서주하며 후원자와 후원금을 모아 조직을 조금 안정시키고 돌아보니 미래가 걱정되더라는 거다. “내 나이도 있는데 갑자기 가면 이 조직을 누가 이끌고 가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장기기증에 사명감을 갖고 사심 없이 조직을 계승 발전시킬 사람이 나타나면 지금이라도 당장 자리를 내놓을 목사님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