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一. 종사(宗史) 중국의 각 종파 가운데 가장 많은 신앙을 얻고 가장 보편적으로 유전(流傳)되며 세력이 가장 넓고 깊은 것이 곧 정토종이다. 이 종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극락세계 청정한 불국토에 왕생하기를 발원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정토종(淨土宗)이라 이름 하였다. 모든 대승경전이 공통으로 찬양하고 정토 삼부경에서는 전적으로 그 이치를 밝히고 있다.
반주(般舟), 비화(悲華), 보적(寶積) 등 경전의 가르침은 더욱 간절 했는데 이것이 곧 이 종의 기원이다. 마명(馬明) 보살이 대승기신론에서 정토왕생을 권장하였고 용수(龍樹)보살은 12정례와 이행품 등을 지었으며 천친(天親)보살은 왕생론을 저술하였는데 모두 정토가 널리 전해지게 된 원류(源流)였다. 불법이 중국으로 전해들어온 이후부터 비록 정토종의 유포(流布)가 없지 않았으나 이 종을 크게 펴고 실제로 수행 한 사람은 마땅히 동진(東晉)의 혜원대사를 제일인으로 뽑아야 한다.
원공이(遠公) 여산에서 연사(蓮社)를 창립하고부터 한때 모여든 자들은 대부분 법문의 용상(龍象)과 유교의 태두(泰斗:태산과 북두칠성)였으며, 한사람이 제창하자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따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뒤로 담란, 지자, 도작, 선도, 청량, 영명 등 여러 대덕께서도 스스로 이 법을 닦으시면서 중생들을 교화 하셨다. 이 법을 극찬하신 분으로는 장로, 천의, 원조, 대통, 중봉, 천여, 초석, 공곡 등 여러 대 조사였는데 비록 선종을 널리 폈으나 두루 정토를 찬탄하셨다.
명나라 연지대사에 이르러 소암(笑岩)을 참방(參訪)하여 크게 깨닫고 나서 곧 참선을 버리고 정토를 닦으셨다. 왜냐하면 정업(淨業)이 완성되면 선종은 저절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 뒤로 우익(藕益), 절류(截流), 성암(省庵), 몽동(夢東) 등 여러 대사님들 또한 이와 같았다. (선禪, 정淨 두 종을 개괄해서 보면 선종은 오직 향상(向上)만을 제시하기 때문에 한 법도 세우지 않는다. 부처조차 설 자리가 없거늘 하물며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겠는가? 이것은 진제(眞諦)로서 하나를 없애면 일체가 없어지는 것인데 이른바 실제 진리의 자리(實際理地)에는 한 티끌도 받지 않는 것이다. 성품의 본체(性體)를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 수행을 확실히 논하자면 한 법도 폐지 할 수 없다. 일을 하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는데 하물며 염불로 정토왕생을 구하는 것을 폐지하겠는가? 이것은 속제(俗諦)의 하나를 세우면 모든 법이 다 서는, 이른바 불법문중에서 한 법도 버리지 않는 것인데 성품의 모습(性具)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약 반드시 속제를 버리고 진제를 닦는다면 이는 이미 진제가 아니다. 마치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을 버리고 심성(心性)을 말 하는 것과 같아 이미 몸조차 존재 하지 않는데 마음 또한 어디에 맡기겠는가? 속제로서 진제를 닦는 것이 진정한 진제이다. 마치 눈을 통해 보는 것을 견(見)이라 하고 귀를 통해 듣는 것을 문(聞)이라 하는 것처럼 사대오온을 통하여 심성이 드러나는 것이 곧 옛 부터 선종의 여러 조사들이 은밀히 정토를 닦는 요지<要旨>이다.) 우리는 화엄경이 모든 경전 중에서 으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화엄경에서 보현보살이 열 가지 큰 원을 세워 극락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정토종은 마땅히 보현보살을 초조(初祖)로 삼아야 한다. 중국에서 당시 혜원대사는 종을 열고 파를 세울(開宗立派) 뜻이 없었고 다만 발원을 같이 할 것을 기대했을 뿐 전승(傳承:법을 전하고 계승함) 을 취하지 않았다. 천백년 이래 비록 정토종의 유포가 나날이 널리 퍼졌지만 스승이 전수하고 제자가 법맥을 잇는 계통은 없었다. 송나라 때 사명 효 법사에 이르러서야 역대 정업을 닦은 분들 가운데서 그 공덕이 가장 크고 높은 대사님들을 골라 7조로 모셨다. 즉 혜원(慧遠), 선도(善導), 승원(承遠), 법조(法照), 소강(少康), 연수(延壽), 성상(省常) 등 7인이다. 지경(志磬)이 이 설을 따라 한편의 정토 입교지(立敎志)를 지었다. 나중에 운서(雲棲)의 제자가 연지대사를 8조로 모시고 후인이 또다시 우익(藕益), 성암(省庵), 철오(徹悟) 등을 합하여 연종(蓮宗)의 11조가 되었다. 이것은 단지 선인들의 덕을 경모하여서 일뿐 다른 종교가(宗敎家)의 스승과 제자간의 전승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정토법문은 세 가지 근기에 두루 가피를 주고 모든 법을 통섭 하므로 일체의 법문이 이 법계로 부터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이 법계로 귀결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따로 계통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
第二. 찬양(讚揚)
우리는 앞 문장의 정토종 약사(略史)를 읽고 나서 이 정토 법문은 석가세존(釋迦世尊)과 미타도사(彌陀導師)가 공통으로 건립하고 문수와 보현보살이 권장 하였으며 마명과 용수가 널리 찬양하고 광려(匡廬), 천태(天台), 청량(淸凉), 영명(永明), 연지(蓮池), 우익(藕益)이 제창 하고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러 보살과 대사님들께서 천백 년 전에 일찍이 우리를 위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두루 연구하고 특별히 이 혹업을 끊지 않고 보처(一生補處)의 지위에 오르며 금생에 생사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극히 원만(圓)하고 지극히 급작(頓)스러우며 지극히 간편하고 지극히 용이 하면서도 얕으면서 깊고 방편이면서 진실한 선(禪) 교(敎) 율(律)을 통섭하고 선, 교, 율 을 초월한 수승하고 오묘한 법을 골라 주셨다.
우리는 부처님의 일대기 가르침 가운데 이 특별한 법문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첫 번째: 대승법문은 물론 법마다 원만하고 오묘하나 중생들의 근기에는 무르익고 설익음이 있고 인연에는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에 작은 법은 큰 근기가 닦을 필요가 없고 큰 법은 작은 근기가 닦을 수 없다.
오직 정토 법문만이 세 가지 근기에 두루 가피를 주고 뛰어나고 둔한 근기를 전부 거두어들인다.
화엄경은 여래가 최초로 정각(正覺)을 이루고 나서 41위(位)의 법신대사(法身大士:법신을 증득한 보살의 통칭)에게 당신이 증득하신 성품을 있는 그대로 설하신 일승(一乘)의 오묘한 법이다.
그 누가 화엄경이 모든 경전의 임금임을 모르는가?
이 경전은 마지막에 선재(善財)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여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에 가지런히 이르른 뒤 보현보살이 그에게 열 가지 큰 원을 설해 주면서 선재동자와 화장해회(華藏海會)대중들로 하여금 서방 극락세계에 회향 왕생하여 원만한 부처의 과위(果位)를 성취하도록 두루 권하고 있다.
그리고 관무량수경의 하품하생을 보면 비록 온갖 죄업을 지어 임종 시에 지옥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선지식을 만나 염불가르침을 받고 곧 바로 그 가르침대로 부처님의 명호를 지송하면 열 번을 다 마치기전에 곧 부처님의 화신(化身)이 나타나 친히 손을 내밀어 영접을 받아 극락왕생한다고 하셨다.
또 대집경(大集經) 에서는 "말법시대에는 억억사람(億億人)이 수행을 하더라도 한 사람도 도를 얻기 어려우며 오직 염불을 의지해야만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셨다.
이러한 경전들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염불법문이 참으로 위로는 등각보살(等覺菩薩)도 그 밖을 벗어날 수 없으며 아래로는 오역(五逆)과 십악(十惡)을 지은 중생들도 그 가운데 참여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최상의 성인으로부터 최하의 범부에 이르기까지 다 함께 수행하는 큰 도이며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두루 통하는 법문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여래께서 이 법을 열어주지 않으셨다면 말법의 중생들에게 어찌 생사해탈의 희망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단지 어리석은 남정네와 어리석은 아낙들도 염불을 하는 것을 보고 정토를 가볍게 여기는데 어찌하여 화엄회상에 화엄성중이신 41위의 법신대사(法身大士)님들을 보지 않는가?
그들은 전부 다 무명을 깨뜨리고 법성을 증득하신 분들로서 모두 본원의 수레를 타고 부처가 없는 세계에서 부처님의 몸을 나툴 수 있다. 어디에서 단 한명의 범부와 이승(二乘: 성문,연각)을 찾아볼 수 있는가?
하물며 화엄의 바다에는 정토가 무수히 많은데도 반드시 서방극락세계로 회향왕생(回向往生)하는 것을 볼 때 극락왕생이 진실로 고통을 벗어나는 현묘한 문이며 부처가 되는 지름길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일체법문은 모두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斷惑證眞)해야만 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오직 이 염불 법문만이 자력과 타력이 둘 다 갖추어져 있어 이미 미혹을 끊은 이는 금방 법신을 증득하고 미혹을 끊지 못한 자라도 업장을 짊어지고 왕생할 수 있다.
이법은 극히 평범하여 비록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또 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등각보살도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누구라도 이 법을 닦을 수 있고 또한 이법을 닦지 못할 사람은 없다.
참으로 손대기가 쉬우면서 성공률이 높고 적은 힘으로 가장 빠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第三 . 결택(抉擇)
선도화상께서 말씀 하시기를
“만약 이해를 배우고자(學解) 한다면 범부의 경지로부터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까지 모든 법을 마땅히 다 배워야 하고 만약 수행을 배우고자(學行) 한다면 마땅히 진리에 부합하고 근기에 적합한 법문 하나를 골라 전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비로소 진실한 이익을 빨리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한량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하셨다.
여기서 진리에 부합하고 근기에 적합한 법문이란 당연히 정토왕생을 구하는 것으로서 이보다 수승한 법문이 없다.
모름지기 수행에는 두 가지 다른 법문이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자력으로 계(戒), 정(定), 혜(慧)를 닦아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것을 일반법문(通途法門)이라 하고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원력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며 부처님의 자비하신 원력에 의지하여 극락왕생하는 것을 특별법문이라 이름 한다.
비유를 들자면 일반은 마치 산수화(山水畵)를 그리려면 반드시 한 획, 한 획을 거쳐야만 그림이 완성 될 수 있는 것과 같지만 특별은 마치 산과 물을 거울로 비추듯 비록 수십 겹의 무성한 초목과 산봉우리들이 있지만 한번 비춤으로 거울 속에 다 드러나는 것과 같다.
또 일반은 마치 보행으로 먼 길을 떠나는 것과 같아 힘이 센 자라 할지라도 하루에 백십리 이상을 걷지 못하지만 특별은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보배수레를 타고 하루만에 사대천하(四大天下)를 두루 다닐 수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다시 이 속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얘기 하겠다.
일반 법문의 교의(敎義)를 살펴보면 도를 보고(見道)나서 도를 닦고(修道), 도를 닦은 후 도를 증득(證道)하는데 이것은 천성(千聖)의 정해진 이치(定理)이다.
그래서 교종은 반드시 대개원해(大開圓解: 선종의 확철대오에 해당됨)하여야 하고 선종은 반드시 겹겹이 쌓인 관문을 곧바로 뚫어야만 견도(見道)란 두자를 말할 자격이 있으며 비로소 더불어 수도를 논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곧 맹목전인 수행으로서 담장에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히지 않음을 보장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빠지고 참호에 떨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정토법문은 특별하여 모든 경전의 가르침 가운데 오직 아미타경만이 석가세존께서 무문자설(無問自說) 하셨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면 세계가 있어 이름을 극락이라 하는데 그 나라에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니 지금 법을 설하고 있느니라. 다만 원을 세우고 명호를 지송하기만 하면 곧 왕생 할 수 있다.” 고 하셨다.
이것은 부처님의 마음과 부처님의 눈으로 친히 알고 친히 본 경계이므로 어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알 수 있으며 볼 수 있겠는가?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깊히 믿고 이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를 토대로 발원하고 명호를 지송하는 것이 곧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자신의 지견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깨달음의 문을 구할 필요가 없다.
일반법문의 교의에 맞추어 법을 닦아 익히는 순서를 보면 계로 말미암아 정이 생기고(因戒生定), 정으로 인하여 혜가 드러나고(因定發慧), 혜에 의지하여 미혹을 끊는다(因慧斷惑).
드러난 지혜에는 우열이 있고 끊은 미혹 에도 깊이가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더불어 물러나는지 물러나지 않는지를 논할 수 있다.
이 정토법문은 특별하여 타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아미타 부처님이 크신 원력으로 거두어 들여 업장을 지니고도 왕생 할 수 있다.
일반법문의 교의를 살펴보면 견혹(見惑: 잘못된 견해)과 사혹(思惑: 잘못된 사상)이 털끝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하면 동거국토(凡聖同居土)를 벗어날 수 없지만 정토법문은 특별하여 정업을 닦아 가로로 삼계를 초월(橫出三界)할 수 있다.
번뇌를 끊어 제거할 필요 없이 사바의 동거토에서 극락의 동거토로 왕생 할 수 있다.
(정토를 제외한 나머지 법문으로 도를 닦는 것을 수출삼계“豎出三界: 세로로 삼계를 벗어남”라 하고 염불왕생을 횡출삼계라 한다.
마치 벌레가 대나무를 뚫는 것과 같아 세로로는 마디마다 다 뚫어야 하므로 어렵지만 가로로는 단번에 뚫고 나올 수 있다. 하나는 느리고 하나는 빨라 서로 비교가 안 된다.)
저 나라에 태어나기만 하면 생사의 뿌리가 영원히 끊어지고 만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정토법문은 깨달음의 문을 구하지 않고, 지혜가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않으며, 번뇌를 끊지도 않으니, 어찌 지극히 간단하고 쉬우며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잠깐 여러분과 솔직하게 상의해 보자.
우리는 선 자리에서 즉시 부처가 될(立地成佛) 자격도 없고 견혹을 끊어 마음대로 행동하여도 악업을 짓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실증도 없는데 만약 정업을 전수(專修)하여 부처님의 자비로운 원력에 기대어 업장을 짊어지고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않는다면 미래세가 다하도록 여전히 삼악도와 육도에서 생활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기 어렵다.
우리가 자신의 힘을 헤아려 임종 시에 생과 사, 가고 머무름에 자유자재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시작이 없는 옛날부터 지어온 갖가지 악업과 무거운 장애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이 보신(報身:업력으로 받은 몸)이 반드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만약 삼악도에서 이류((異類:삼악도의 유정)와 함께 살아도 고뇌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만약 자신을 분명히 알고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오. 마는 혹 그렇지 못하거든 잠시 한 때의 교만으로 도리어 영겁(永劫)을 침륜하는 누(累)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본디 수행의 목적은 생사를 해결하기 위함인데 만약 열심히 수행을 하고도 생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또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면 어찌 금덩이를 버리고 삼을 짊어지며(棄金擔麻), 스스로 그 허물을 사는 게(自取其咎)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염불을 하는 동시에 선종과 교종을 통달한 사람은 숙세(宿世)부터 선근(善根)을 깊이 심었기에 이(理)와 사(事)가 원융하다,
이치에 집착해 사상(事相)을 폐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事) 밖에 따로 이(理)를 보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사일심(事一心)과 이일심(理一心)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을 이미 분명히 알아 의심이 없으므로 금연대(金蓮臺)에 올라 상품상생으로 왕생할 수 있어 다시 남들의 권장이 필요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덮어놓고 이성(理性)만을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만약 사상(事相)을 들어 그런 사람에게 해설을 할 때 오묘한 뜻을 묵묵히 이해하지 못하면 바른 믿음(正信)을 일으키기란 몹시 어렵다.
그런 까닭에 본 종의 취지를 밝혀 설명하기 전에 이 점에 대해 미리 언급을 하였다.
옛 사람들이 “유심정토, 자성미타(唯心淨土, 自性彌陀)”라고 하신 것은 서방정토가 유심을 벗어나지 않고 아미타불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셨다.
그런 이치(理致)와 사상(事相), 성품의 모습(性相)이 모두 이 가운데서 원만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태껏 참선을 하면서 지금까지 진정으로 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많은 오해를 갖고 있다.
늘 스스로 우쭐대며 말하기를 “정토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디 따로 정토가 있으며, 자신의 성품이 미타인데, 따로 미타를 볼 필요가 있는가.” 고 한다.
그들은 오로지 유심과 자성에만 집착하여 정토와 미타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선종조차 모르는데 하물며 정토를 알겠는가.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어 정토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단지 참선을 하여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만 꽉 차서 서방정토는 왕생할 가치가 없고 아미타불은 만나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마음이 곧 경계이므로 마음밖에 경계가 없고 경계가 곧 마음이므로 또한 경계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기왕 경계의 전체가 마음인 이상 구태여 마음을 고집하여 경계를 꾸짖고, 경계를 물리치고 따로 마음을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염불과 염심(念心)은 본래 서로 장애가 되지 않지만 만약 염심에만 집착하고 염불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마음과 부처가 둘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모름지기 이 일념의 심성(心性)은 공간으로 말하면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시간으로 말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세가 다함을 꼭 알아야 한다.
가로로 시방에 두루하다는 것은 지금 이 일념으로 서방 아미타불을 염송할 때 서방의 의정(依正:유정의 심신과 주변 환경)이 곧 나의 마음속에 있고 나의 이 마음 또한 서방 의정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만약 세로로 삼제(三際:과거 현재 미래)가 다 함을 얘기하자면 염불을 할 때가 곧 부처님을 친견할 때이고 또한 부처가 될 때이며 왕생을 구할 때가 곧 왕생할 때이고 또한 중생을 구제할 때인데 앞뒤가 따로 없다.
이 마음의 성품은 실제로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어 부처에게 치우치지도 않고 중생에게 쏠리는 것도 아니다.
만약 마음이 미타(彌陀)에게 속하는 것이라면 중생은 곧 미타 마음 가운데 중생이고 마음이 중생에게 속하는 것이라면 미타는 곧 중생의 마음 가운데 미타다.
그러므로 극락미타의 상호(相好)가 드러날 때가 자신의 마음이 드러날 때며 자신의 마음이 드러날 때가 그 부처의 마음이 드러날 때이다.
나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고 그 부처는 곧 내 마음속의 부처이며 마음과 부처는 둘이 아닌 하나의 전체이다.
그렇다면 미타 마음속의 중생이 중생 마음속의 미타를 생각(念)하는데 어찌 중생 마음속의 미타가 미타 마음속의 중생에게 감응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내가 갖추고 있는 부처의 마음으로 내 마음에 갖추어진 부처를 생각(念)하는데 어찌 내 마음에 갖추어진 부처가 내가 갖추고 있는 부처의 마음에 감응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이치를 깨닫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믿기란 아주 쉬워 단지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마침내 온 몸으로 받아 쓸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유심정토”와 “자성미타”라는 말이 결코 서방에 국토가 없고 부처가 없으니 굳이 왕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생멸이 있는 인연의 그림자(緣影)가 결코 유심과 자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처를 구하는 것이 곧 자신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을 구하려면 반드시 저 부처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꼭 알아두어야 한다.
아쉽게도 그들은 내 마음이 정토가 될 수 있다는 것만 알뿐 돌연히 정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또 내 성품이 미타가 될 수 있다는 것만 알뿐 갑자기 미타가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지 못한다.
이런 폐단은 단지 원만한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으로서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마치 서육(徐六)이 맬때를 매는 것처럼 앞만 보고 뒤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묻건 데 저 서방정토에는 탐심이 없고 성냄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는데 그대의 마음에도 탐심이 없고 성냄도 없으며 어리석음이 없는가?
저 서방에는 옷을 생각하면 옷을 얻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을 얻는데 그대가 옷을 생각하여 옷이 없을 때는 추운 괴로움이 그 마음을 차지할 것이고 음식을 생각해도 음식이 없을 땐 배고픈 괴로움만이 그 마음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치스럽게 유심정토를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아미타불의 복은 산과 바다보다 무겁고 힘은 천지를 떠받들 수 있으며 지옥을 연화세계로 변화시키는데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고 다함없는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마치 눈앞에 두고 보는 듯하다.
그대의 복력으로는 자신을 추스리기도 부족한데 하물며 연화로 변화 시키겠는가. 담장 밖의 일도 채 모르면서 하물며 다함없는 세계이랴!
그러면서도 사치스럽게 자성미타를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취하는 것은 생멸(生滅)이라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거꾸로 동방을 고집하여 서방을 버리는 것이 단멸(斷滅)임을 모른다.
궁극적으로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경지는 부처가 되고 난 다음의 일이다.
만약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하였다면 그동안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것이 모두 취사(取捨)에 속하는 일이다.
삼아승지겁을 수련하고 백겁동안 원인을 닦아(百劫修因),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데 어느 하나가 취사선택의 일이 아니겠는가.
이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취사를 허락한 이상 어찌하여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취하며 더러움을 버리고 청정함을 취하는 취사선택은 허락하지 않는단 말인가?
참선을 놓고 말하면 취사선택이 모두 잘못이지만 염불을 논하자면 취사가 다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오로지 자기의 마음만 참구(參究)하는 것이고 하나는 부처님의 힘을 더불어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문의 근본이치를 모르고 함부로 망령되이 참선법문으로 염불법문을 공격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의도가 아주 잘못 되었다.
참선에서 취사선택을 하지 않는 것은 본래 최상의 정수(精髓)지만 염불에서도 취사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곧 독약이 되고 만다.
옛 사람들이 말씀하시기를 “태어남은 결정 코 태어나고, 감은 진실로 가지 않는다. 생칙결정생 거칙실불거(生則決定生,去則實不去)”고 하셨다.
앞 구절은 사(事)를 말하는 것이고 뒷 구절은 이치를 밝히는 것인데 두 구절을 한 구절로 볼 수 있다면 이사가 원융(理事圓融)하여 물론 가장 좋겠지만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理)와 사(事)에 대한 이해가 애매하여 차라리 사상(事相)을 따를지언정 이치에 맞추어 말을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감은 진실로 가지 않는다.”를 고집하느니 차라리 “태어남은 결정 코 태어남”을 고집하는 편이 훨씬 낫다.
무엇 때문인가?
사(事) 속에는 이(理)가 전부 갖춰져 있지만 이(理)는 홀로 설수 있는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이치를 고집하고 사상(事相)을 폐지하면 공허에 빠지는 비난을 면치 못하지만 사상을 고집하고 이치에 어두우면 그래도 구품(九品)에 오르는 공이 헛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남녀가 비록 이치는 잘 알지 못하나 오히려 은밀히 오묘한 도와 계합(암합도묘:暗合道妙)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고(緣故)이다.
한마디 아미타불은 물론 확철대오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완전히 들 수 없지만 가장 어리석고 가장 둔한 사람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본래부터 감정을 초월하고 계산을 여의었기에(초정이계:超情離計) 의식적으로 단절할 필요가 없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받아 지니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어찌 어렴풋한 깨달음이 중요하겠는가.
신중(愼重)을 위해서 정토를 닦는 사람은 선종의 문자를 탐구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데 견해가 약간 어긋나면 두 법문이 죄다 파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아울러 정토를 닦지 않으면 안 되는데 물러남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과연 정토를 전수(專修)할 수 있다면 당연히 다른 법문을 섭렵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믿기만 하고 이 마음을 굳건히 지켜 곧장 염송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이 익숙해지면 삼장십이부(三藏十二部)의 지극한 교리와 천칠백의 공안(公案), 그리고 삼천 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까지도 그 속에 전부 들어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염불하여 몸과 마음의 세계를 놓아버릴 수 있다면 곧 대보시(大布施)요,
진정으로 염불하여 다시 탐, 진, 치 가 일어나지 않으면 곧 대지계(大持戒)요,
진정으로 염불하여 옳고 그르고,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곧 대인욕(大忍辱)이요,
진정으로 염불하여 조금도 중간에서 염불이 끊어지고 번뇌가 뒤섞이지 않으면 곧 대정진(大精進)이요,
진정으로 염불하여 다시 망상이 날뛰지 않으면 곧 대선정(大禪定)이요,
진정으로 염불하여 다른 법문에 현혹되지 않으며 곧 대지혜(大智慧)이다.
연지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한마디 아미타불은 팔교(八敎: 藏, 通, 別, 圓 ,頓, 漸 秘密, 不定)를 포괄하고 오종(五宗: 禪, 敎, 律, 密, 淨)을 원만히 거두어들인다.” 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염불을 하찮은 짓거리로 여기는데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第五. 依正
시방세계 부처님은 본래 다 가까이 할 수 있거늘 어찌하여 유독 아미타불만 추천하는가?
그 속에는 세 가지 연고(緣故)가 있다.
첫째는 서원이 깊고 무거우며(誓願深重),
둘째는 사바세계와 인연이 있으며(娑婆有緣),
셋째는 중생교화와 연관이 있다.(化道相關)
서원이 깊고 무거운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미타 부처님은 옛날 아직 부처가 되기 전에 48가지 큰 원을 세우셨는데 그중 세 가지 원은 오로지 염불중생들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발하셨는데 그 대의(大義)는 “내가 부처가 된 후 만약에 중생들이 보리심을 내어 온갖 공덕을 쌓고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여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혹 나의 이름을 듣고 온갖 착한 일을 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생각한다면 비록 하루 밤 낮 일지라도, 혹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열 번만 나의 이름을 불러도, 이러한 모든 중생들이 만약 나의 나라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부처님의 원력이 얼마나 크신지 알 수 있다.
사바세계와 인연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량수경에서 “내가 이 경을 설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무량수불과 아울러 그 국토를 보게 하였고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으니 내가 멸도(滅度)를 한 후에 다시 의심을 내어서는 안 되느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서 경도(經道)가 다 멸(滅)하더라도 내가 자비로서 중생들을 가엾이 생각하여 특별히 이 경(經)을 백년동안 더 머물게 하리니 그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만나거든 소원에 따라 모두 생사고해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경전에 “이 무량수경이 멸하고 나서 불법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다만 아미타불 사자명호(四字名號)만 남아 중생을 구제 하리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사바세계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말법시대의 중생이지만 승(僧),속(俗),남(男),녀(女)와 빈(貧),부(富),귀(貴),천(賤)을 불문하고 불교를 조금 아는 자들도 많이 신향(信向)을 한다.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미타불을 부를 줄 알며 어리석고 포악하며 믿음이 없는 무리들도 혹 큰 어려움이나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혹 찬탄하거나, 원망하며 한탄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미타불을 부른다.
이런 일들은 전부 권장하지 않아도 자발적이고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하는 것이니 어찌 인연이 있다 하지 않겠는가.
중생교화와 상관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두 나라의 성인께서는 각각 정토(淨土)와 예토(穢土)에 계시면서 절(折), 섭(攝) 두 문으로 중생들을 조복시켜 사바에서는 고통과 촉박, 마장과 번뇌(魔惱)를 끊어서 사바세계의 혼탁한 경계를 싫어하게 하고 정토에서는 청정과 즐거움, 연장(延)과 불퇴전으로 거두어 극락세계에 기뻐하는 마음을 내어 중생교화가 이루어지게 한다.
석가세존이 삼승(三乘: 성문, 연각, 보살)의 교화 외에 못 다 건진 중생들은 곧 아미타불이 건질 대상이므로 대승의 여러 경전에서 반복하여 신신부탁 하고 왕생을 권장하며 칭찬한 것이 곧 중생교화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 가지 연고가 있으므로 유독 아미타불을 추천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은 태어나는 괴로움(生苦)이 있지만, 저곳에는 연화 화생(蓮花化生)이므로 어찌 태어날 고통이 있겠는가!
이곳에는 사계절이 순서대로 바뀌고 노쇠(老衰)가 서로 침범해 오지만, 저곳에는 춥고 더운 변화가 없는데 어찌 늙는 괴로움(老苦)이 있겠는가!
이곳에는 사대(四大)가 조화롭지 못해 질병이 많지만, 저곳에는 화(化)하여서 얻은 몸이 향기롭고 깨끗하니 어찌 병고(病苦)가 있겠는가!
이곳에는 옛 부터 70이 드물고 무상(無常)이 신속하지만, 저곳에는 수명이 무량하니 어찌 죽는 고통(死苦)이 있겠는가!
이곳에는 친한 감정과 애착이 있지만, 저곳에는 부모와 처자식조차 없는데 어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이 있겠는가!
이곳에는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수와 만나게 되는 괴로움이 있지만, 저곳에는 최상의 착한 사람들과 모이므로 어찌 원수와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이 있겠는가!
이곳에는 혹 온갖 어려움과 춥고 배고픔이 있고 아무리 욕심 부려도 늘 부족하지만, 저곳에는 옷과 음식, 진귀한 보물이 다 갖추어져 있어 받아쓰기만 하면 된다.
이곳에는 혹 몸뚱이가 못생기고 더러우며 더러 육근이 부족하고 추하지만, 저곳에는 외모가 단정하고 몸에는 광명이 있다.
이곳에는 생사가 윤전(輪轉)하지만, 저곳에는 영원히 무생(無生)을 증득한다.
이곳에는 사취(四趣: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괴로움이 있지만, 저곳에는 삼악도란 이름조차 없다.
이곳에는 구릉과 구덩이, 가시나무가 숲을 이루고, 흙과 돌로 된 산에는 온갖 보기 흉한 더러움으로 가득 찼지만, 저곳에는 땅이 황금으로 되어 있고 보배나무가 하늘을 치솟으며 누각은 일곱 가지 진귀한 보배로 높이 세워지고 연꽃은 네 가지 색깔로 핀다.
이곳에는 석가불이 이미 열반 하셨고 미륵불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저 곳에는 무량수불이 현재 법을 설하고 계신다.
이곳에는 단지 관음, 세지의 거룩한 이름을 우러러 볼 뿐이지만, 저곳에는 두 보살과 친한 친구가 된다.
이곳에는 온갖 마구니와 외도들이 바른 수행을 어지럽게 괴롭히지만, 저곳에는 부처님의 교화로 통일되어 마구니와 외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곳에는 요염한 여색과 음란함이 가득하여 수행자들을 현혹하지만, 저곳에는 정보(正報)가 청정하여 실로 여인이 없다.
이곳에는 악마와 요괴들이 사악한 소리로 서로 번뇌를 부추기지만, 저곳에는 물과 새, 나무(水鳥樹林)들이 전부 미묘한 법을 널리 펴고 있다.
두 국토를 서로 비교해 보면 환경과 조건이 크게 다르니 어찌 한 번에 다 들 수 있겠는가.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환경이 빼어난 점은 중생들이 청정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조건이 빼어난 부분으로는 왕생한 자들의 수행력을 도와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성현들이 두루 극락을 가리키고 있다.
정토왕생은 본디 곧장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물러남도 없으며 수명이 한량없어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수명이 짧고 병치레가 많은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혼침(昏沈)하여 잠을 자는 시간만 하더라도 인생의 반은 차지한다.
게다가 보살은 아직 격음(隔陰: 전생을 기억 못함)의 어두움이 있고 성문은 출태(出胎)의 번민이 있다.
척벽촌음(尺璧:직경이 한척인 보옥.寸陰: 매우 짧은 시간: 시간이 소중하면서 짧음.)을 이미 열에 아홉은 잃어 버렸으니 스스로 물어(自問) 아직 불퇴전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한 점의 확신마저 서지 않았으니 어찌 마음이 섬뜩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꼭 서방정토로 왕생해야 하는 것은 바로 확실한 생애(生涯)를 위함이다.
第六. 起信 염불법문은 믿음(信), 발원(願), 실천(行) 세 가지가 수행의 요건이며 이 세 가지가 다 갖추어지면 결정 코 천명이 닦으면 천명이 왕생하고 만 명이 닦으면 만 명이 왕생한다. 만약 믿음은 있으나 발원이 없으면 곧 믿지 않은 것과 같고, 발원은 있으나 실천이 없으면 곧 발원하지 않은 것과 같으며 실천은 있으나 용맹스럽지 못하면 실천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실상 실천이 용맹스럽지 못한 것은 발원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이요, 발원이 간절하지 못한 까닭은 믿음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서 이 법이 어렵다는 것은 바로 바른 믿음(正信)을 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믿음이 과연 진실 하다면 발원은 절로 간절해지고 발원이 과연 간절하다면 실천은 절로 용맹스러워져 결정 코 정토에 왕생할 것이며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광겁(曠劫)이래 생사업의 뿌리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 그러니 어찌 진실한 믿음과의 관계를 등한시 할 수 있겠는가. 경전의 말씀에 “믿음을 손으로 삼고 보배 산에 들어가 자유롭게 보물을 가질 수 있지만 손이 없으면 얻을 수 없다” 하셨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청정한 믿음은 불법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들어 갈수 없다. 마치 소 가죽이 부드럽지 않아 구부려 꺾지 못하는 것과 같다.”하셨다. 옛날에 왕중회(王仲回)가 양무위(楊無爲)에게 “염불을 어떻게 해야만 끊어지지 않습니까?” 고 묻자 답하기를 “한번 믿고 나서 다시 의심하지 않는 것이 곧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하셨다. 회(回)가 뛸 듯이 기뻐하며 돌아가서 머지않아 극락왕생을 하였는데 다시 돌아와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므로 단박에 깨치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믿음의 뿌리(信根)를 깊이 심고 믿음을 토대로 수행하면 마침내 성공할 날이 올 것이다. 정토법문이 이토록 넓고 크지만(廣大) 수행의 방법은 또한 지극히 간편하고 쉬우므로 숙세에 정토의 선근을 깊이 심지 않고서는 의심 없이 굳게 믿기란 몹시 어렵다. 비록 석가본사와 여러 부처님들이 서로 믿을 것을 권장하지만 세상에는 의심을 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다. 세간의 지혜와 평범한 감정(世智凡情)으로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참선과 교법을 깊이 통달한 선지식들도 더러 의심을 한다. 비단 선지식들이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미혹을 끊어 참된 진리를 증득하고(斷惑證眞), 업장이 다하고 감정이 텅 빈(業盡情空) 성문과 연각도 더러 의심을 한다. 비단 작은 성인(小聖: 聲聞 緣覺)이 믿기 어려울 분만 아니라 권위(權位:견성을 하지 못한 보살)의 보살들도 의심을 하는 경우가 있다. 법신보살은 비록 믿기는 하지만 근원까지 철저히 알지 못한다. 진실로 이 법문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원인 자리의 마음(因地心)으로 삼기 때문에 전체가 부처님의 경계이므로 몹시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려워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궁극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 법신을 증득한 보살도 다 알지 못하거늘 어찌 범부중생이 함부로 억단(臆斷)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부처님 당시 문수와 보현보살,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마명과 용수보살, 그리고 지자와 영명대사 등을 살펴보면 모두 정토왕생을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 설마 그들이 전부 둔한 근기란 말인가? 세존께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부친인 정반왕과, 그리고 6만 석종(釋種)에게 모두 정토왕생을 권장한 것이 결코 그들이 모두 평범한 그릇이었기 때문인가? 우리가 이 법에 깊은 믿음을 낼 수 있다면 곧 범부의 마음으로 부처의 깨달음의 바다(覺海)에 뛰어들어 은밀히 부처님의 지혜와 통하고 오묘한 도와 계합되므로 비록 범부중생이지만 그 근성은 이미 성문과 연각을 뛰어 넘는다. 우리들은 석가세존의 말씀에 절대 거짓이 없고 미타여래의 큰 자비심에는 결코 헛된 원(虛願)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염불로 왕생을 구하는 원인은 반드시 부처님을 만나 뵙고 왕생을 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마치 수박을 심어 수박을 거두고, 콩을 심어 콩을 거두며, 메아리는 반드시 소리에 응하고, 그림자는 반드시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 원인은 헛되이 버려지지 않고, 결과는 제멋대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부처님께 여쭤보지 않아도 저절로 믿음이 갈 것이다. 여러분들이시여! 인간세상의 부귀(富貴)는 백년도 못가서 텅 빌 것이고 천상의 번화 (繁華)도 천년이면 바닥이 날 것이다. 그러나 한번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수명이 무량하고 왕생의 방법은 단지 한마디 아미타불에만 의지하면 되는데 세상에 이처럼 편의(便宜)하고 좋은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닦으려 하지 않고 또 저기서 쇠로 만든 신(鐵鞋)을 신고 지극한 도를 묻고 있구나! 옛 사람들의 말씀에 “불법을 만나기 어렵고 진실한 믿음을 내기란 더욱더 어렵다.”고 하셨다. 그대가 지금 능히 믿음을 내어 염불할 수 있다면 마땅히 이 선근(善根)을 항상 증장(增長)시켜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염송해야지 유명무실(有名無實) 해서는 안 된다. 第七. 發願 화엄경에서 “이 사람은 임종 시에 일체 모든 근(根)은 모두 다 흩어져서 무너져 버리고 일체 친속은 모두 다 헤어지게 되며 일체 위엄과 세력은 모두 다 물러나 잃어버리게 되고, 보좌하는 재상과 대신(大臣), 궁성의 안팎과 코끼리와 말과 수레와 보배 창고 등 이와 같은 모든 것은 다시 서로 따르지 않고 오직 이 원왕(願王)만이 서로 버리어 헤어지지 아니하며 언제나 그 앞을 인도하여 잠깐 사이에 곧 극락세계에 왕생 할 것이니라.” 하셨다. 이발원은 비록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났지만 실다운 믿음은 발원으로 인(因)하여 참다운 것이다. 믿음과 발원이 이미 진실하고 간절해졌다면 실천 또한 일어나길 기대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설령 번뇌의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나는 오직 한마디 아미타불만 염송할 뿐이요, 설사 즐거운 경계가 눈앞에 나타날지라도 나는 오로지 한마디 아미타불만 염송할 따름이다.
가령 전륜왕(轉輪王)의 승묘(勝妙)한 오욕(五慾: 財, 色, 名, 食, 睡)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끝내 이 즐거움으로 인하여 극락왕생의 발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벌겋게 달아 오른 쇠 바퀴가 머리 위를 맴돌지라도 결코 이러한 고통 때문에 극락왕생의 발원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극심한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속에서도 발원한 바를 바꾸지 않거늘 하물며 작디작은 순역(順逆)의 경계이랴! 이렇게 결심을 굳게 다지고 언제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자연히 온갖 환경과 인연에 끌려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하고 온갖 사설(邪說)에도 마음이 흔들려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다른 날 이 한 목숨이 다할 때 당연히 곧장 서방정토로 왕생하여 다른 곳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비록 이 한마디 명호를 입만 열면 부를 수 있어 별로 어려움이 없지만 사바세계에 대한 애착이 많으면 왕생하기가 어렵다. 비유를 들면 만근의 배가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치며 순식간에 천리를 달리는 기세가 있지만 그대가 도리어 뱃머리에 말뚝을 박아 놓는다면 어찌 앞으로 나아 갈수 있겠는가? 부처님의 교법(敎法)이 동쪽으로 젖어들면서부터 고금(古今)이래 수행을 잘하신 사람들도 적지는 않지만 아쉽게도 많은 분들이 불법의 지극한 이치를 모르고 마음을 잘못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생신날 예참(禮懺)과 경전을 독송하는 목적은 현세에 재앙을 소멸(消災)하고 복을 불러오는(邀福)데 있고, 늘그막에 채식하고 염불하는 이유는 내생에 복 있는 곳에 태어나기 위해서이다. 비록 불법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있지만 큰 것으로 작은 것을 구(求)하고, 이미 부처님의 본원(本願)을 타고도 불법을 배우는 진리를 등지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진귀한 명주(明珠)가 참새를 잡는데 쓰인다면 얼마나 아까운가? 왜 감옥에 갇힌 사람은 항상 감옥을 벗어나길 바랄까. 그것은 그 사람이 이 가시담장 밖에 더 큰 편안하고 즐거운 세상(安樂世界)이 있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중생들은 번뇌를 가택(家宅)으로 삼고 생사를 원유 (園囿: 꽃과 나무를 심고 짐승을 기르는 동산)로 생각하여 도리어 큰 철위산(鐵圍山)이 곧 나의 가시담장인 줄 모르고 삼계밖에 각자 자신의 편안하고 즐거운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만약 그 나라의 즐거움으로 사바세계의 괴로운 점을 돌이켜 본다면 염리(厭離)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절로 일어날 것이며 마치 죄수가 하루빨리 감옥을 벗어나고 싶듯이 절박해질 것이다. 또 사바세계의 고통으로 멀리 저 나라의 즐거운 점을 관찰하면 기뻐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함이 하루속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듯이 간절해 질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 명호를 지송할 때 자연히 생각과 생각 사이 기쁘고 싫어하는(欣厭) 마음이 절로 갖추어질 것이다. 마치 감옥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달려갈 때처럼 한발 한발 자국마다 저절로 기쁨(欣)과 싫어함(厭)이 갖춰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사바세계에 대한 애착은 날마다 가볍게 하고 극락에 대한 생각은 매일 매일 한결같게 해야 된다. 가볍고 또 가볍게 하여 점차 없애 버리고, 하나같이 또 하나같이 하여 차츰 극에 인접해야 한다.
만약 여의치 못한 일을 만나거든 바로 생각을 돌려서 이 한마디 명호를 급급히 들어 올려 염송하며 회광반조(回光返照)하되 “나는 극락세계 사람인데 어떻게 저들과 똑같은 생각을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고는 일심으로 염불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과연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비록 아직은 사바세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미 사바에 오래 머물 손님(久客)이 아니고 비록 아직은 극락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벌써 극락의 반가운 손님(嘉賓)이다. 아미타 부처님께서 큰 원을 세우시고 성불하셨는데 만약 나의 발원이 부처님이 중생을 거두는 원력과 부합되면 어찌 왕생이 어렵겠는가? 부처님은 무량겁 전에 널리 시방세계에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하여 48가지 크신 원력을 세우셨다. 발원을 따라 기나긴 세월동안 보살도를 닦았으며 금륜왕(金輪王)의 자리와 나라, 성곽, 처자식, 머리, 골수, 눈 등등을 버린 적이 몇 천 만억 되는지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바를 능히 참아내고 실천하지 못하는 바를 능히 실천했으며 육바라밀을 원만히 닦아 정토를 청정하게장엄하고 성불에 이르렀다. 또 헤아릴 수 없는 분신(分身)으로 중생들을 접인하며 방편으로 거두어 교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정토왕생을 하게 한다. 만약 중생들의 입장에 서서보면 부처님은 널리 모든 중생을 위해서이지만 만일 나 한 사람의 각도에서 보았을 때 부처님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다. 이렇게 보면 아미타불의 성품에 맞춘 큰 대원(稱性大願)은 나를 위해 발(發)한 것이고 아미타불이 오랜 세월 닦으신 큰 행은 오직 나만을 위해서였다. 네 가지 국토(四土)는 나를 위해 청정하게 장엄 하셨고 삼신(三身: 法, 報, 化)은 나를 위해 원만하셨다. 그리고 번번이 몸을 나투시어 접인을하고 곳곳에서 상서로운 감응을 나타내시는 것 까지도 전부 나를 위해서이다. 내가 업을 지을 때 부처님은 곧 나를 경책하셨고, 내가 고통을 받을 때 부처님은 나를 건져 주셨으며, 내가 목숨 바쳐 귀의(歸命)할 때 부처님은 곧 나를 섭수하시고, 내가 수행할 때 부처님은 나에게 가피를 주셨는데, 부처님께서 이토록 나를 돌봐 주시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나더러 염불을 하고, 나더러 왕생을 하며, 나더러 영원히 뭇 고통에서 벗어나 온갖 즐거움을 누리고, 나더러 육도를 오르내리면서 모든 중생을 건져 곧장 부처가 되라는 것이다. 이처럼 심중(深重)한 은덕을 어찌 말로써 다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송나라의 영가(瑩珂)스님은 본래 술 마시고 고기 먹던 사람이었는데 왕생전(往生傳)을 읽고 나서 곧장 채식하며 염불을 하였다. 그렇게 삼일이 지났을 때 부처님이 몸을 나투시어 위로해 주셨다. “너의 수명은 아직 십년이 남아 있으니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느니라.” “부처님, 사바세계는 몹시 혼탁하여 정념(正念)을 잃기 쉬우니 바라옵건데 하루빨리 극락에 왕생하여 여러 성인들을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가 삼일 후에 데리러 오겠느니라.” 과연 때가 되자 왕생을 하였다. 그리고 회옥(懷玉)선사께서는 정토 업을 정수(精修)하셨는데 어느 날, 불보살이 허공에 가득한 가운데 한사람이 은대(銀臺)를 갖고 오는 것을 보고 회옥은 맘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일생을 염불 정진하여 금대(金臺)에 뜻이 있거늘 어찌하여 그렇지 않습니까?” 하니 은대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후부터 더욱더 정진하여 21일후에 다시 불보살이 허공에 가득하였고 전에 은대를 가져왔던 자가 금대로 바꾸어 나타나자 옥(玉)은 곧 미소를 머금고 왕생하셨다. 또 유유민(劉遺民)이 여산 동림사(東林寺)에서 결사염불(結社念佛)을 할 때였다. 어느 날, 한참 염불을 하고 있는데 부처님이 몸을 나투시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어떻하면 여래께서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까?” 하자 부처님이 곧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다시 생각하기를 “어떻하면 여래께서 옷으로 나의 몸을 덮어 주실까?”하자 부처님께서 곧장 옷으로 몸을 덮어 주셨다. 이렇듯 빨리 왕생하고자 하면 빨리 왕생하고 금대를 얻고자 하면 금대를 얻고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옷으로 몸을 덮어 달라면 곧 몸을 덮어 주시니 큰 자비심에는 간택(揀擇)이 없음을 볼 수 있다. 능엄경에 대세지보살께서 말씀하시기를 “시방제불이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만약 도망을 간다면 비록 그리워한들 무엇 하랴! 만약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함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그리워 할 때와 같다면 모자(母子)는 여러 생이 지나서도 서로 엇갈려 멀어지지 않는다. 만약 중생의 마음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현세와 미래에 기필코 부처님을 만나며 부처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 방편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이 열려 마치 향을 가까이 하는 사람의 몸에 향내가 베이는 것과 같다. 이것을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이름 한다. 나는 본래 원인의 자리(因地)였는데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을 얻어 지금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들을 거두어서 정토로 돌아 가게 한다. 부처님께서 원통(圓通)을 물으시는데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육근을 모두 거두어 청정한 생각이 이어져 삼매를 얻는 것이 제일이다.” 하셨다 이것은 보살이 몸소 증득하고 실제로 도달한 경계를 심장을 토하고 담을 토하(吐心吐膽)는 심정으로 알려주신 진실한 말씀이시다. 내가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아도 부처님은 나를 생각 하시는데 내가 만일 간절히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부처님은 틀림없이 더욱더 나를 생각할 것이다. 부처님이 대자대비 하신 마음으로 나를 기억하고 이토록 나를 생각하며 거두어 교화하시는데 이 깊은 은혜에 감격하여 우러러 받들고 마땅히 염불을 해야 한다. 여태까지 오랜 세월동안 억울하게 온갖 고통을 받아왔지만 내가 지금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마땅히 염불을 해야 한다. 이미 지은 업은 어쩔 수 없지만 미래의 업을 어찌 또 지울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부끄러운 마음을 낸다면 마땅히 염불을 해야 한다. 바탕이 같은 심성은 본래부터 있었으며 지금은 단지 오증(悟證)이 부족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마음을 깨닫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염불을 해야 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크신 원력은 마치 한척의 큰 배와 같아 어떤 물건이든지 배에 싣기만 하면 곧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아 가라앉을 우려가 없다. 반대로 물을 타던, 바람을 타던, 다 배에 오르고 난 후의 일인데 만약 그대가 배에 오르려 하지 않는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언제까지나 자신의 발원이 먼저 앞서야 한다. 우익(藕益)대사의 말씀에 “왕생할 수 있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믿음과 발원의 유무에 달려 있고 품위의 높고 낮음은 전적으로 지명(持名)의 깊이에 달려 있다.”하셨는데 진실로 천고에 바뀔 수 없는 지당한 말씀이시다. 이상 믿음과 발원을 설명했으니 다음은 마땅히 수행을 얘기할 것이다. 第八. 行持 여러 경전에서 개시(開示)한 정토의 수행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면 지명(持名 혹은稱名), 관상(觀想), 관상(觀像), 실상(實相)등이 있는데 네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닦아 수행이 이루어지면 모두 정토왕생을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오직 칭명염불만이 모든 근기를 가장 널리 두루 포섭하고 착수하기가 가장 쉽다. 만약에 염불이 일심불란(一心不亂)에 이르면 실상의 묘한 진리(實相妙理)의 전체가 뚜렷이 나타나고 서방의 미묘한 경계 또한 철저히 원만하게 드러난다. 즉 지명(持名)으로 실상을 몸소 증득하고 관(觀)을 하지 않고도 철저히 서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세존께서 청하여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이 법을 특별히 지혜제일인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가히 방편중의 제일 방편이요, 요의(了義) 가운데 무상요의(無上了義)이며 원돈(圓頓)속의 최고 원돈이라 할 수 있다. 염불에는 묵지(黙持:묵묵히 칭명함), 고성지(高聲持:큰소리로 염불함), 금강지(金剛持)등이 있다. 만약에 큰 소리로 염불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고 묵묵히 염송하자니 또 쉽게 혼침(昏沈)에 빠진다면 염불소리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입술과 치아 사이에서만 나도록 하면 되는데 이것을 금강지(金剛持)라 한다. 그렇다고 꼭 한가지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힘이 든다면 묵묵히 염송해도 괜찮고 혹 혼침을 느끼면 큰 소리로 염불해도 무방하다. 만약 마음이 하나로 잘 집중되지 않으며 마땅히 지극한 정성으로 마음을 잘 다스려서 염송해야 한다. 염불을 소리 내서 하든, 묵묵히 하든, 반드시 마음에서 일어나 소리가 입으로 나오고 그 소리가 다시 귀로 들어가야 하며 마음과 입으로 또렷또렷하게 염송하고 귀로는 분명하게 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망상이 파도처럼 밀려든다면 마땅히 인광대사께서 제창하신 십념법(十念法)을 사용해야 한다. 이 방법은 염불할 때 첫 번째 구절부터 열 번째 구절까지 분명히 염송하면서 동시에 분명히 숫자를 기억하는 것이다. 열 번째 구절까지 다 염송하고 나서 다시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되풀이해 염송한다. 횟수를 기억하면서 염송하되 염주를 돌려서는 안 된다. 만약 열 구절을 곧장 기억하기가 어려우면 두 번으로 나누어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기억해도 된다. 그것도 힘들면 세 번으로 나누어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일곱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염송해도 괜찮다. 이렇게 전심(全心)의 힘을 부처님 명호에 쏟아 부어서 염송을 뚜렷이 하고, 기억도 뚜렷이 하며, 듣기도 뚜렷이 하면, 망상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게 된다. 이 방법으로 한번 염불하면 마음속으로 한번인줄 알고 열 번 염불하면 열 번 인줄 안다. 단지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되풀이 하며 염송하기만 하면 되는데 빨리 하던 천천히 하던 상관이 없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 해도 괜찮다. 이 방법은 비단 망상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정신 함양(養神)에도 가장 좋아 설사 하루에 수만 번을 염송할지라도 이처럼 기억하면 된다. 다만 일을 할 때 혹 숫자를 기억하기 어려우면 단지 간절하게 곧장 염송하기만 하고 일이 끝난 다음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숫자를 세면서 염불하면 된다. 염주를 굴리며 염불하는 방법은 오직 길을 걷거나, 머무를 때에만 적합하다.(정좌하여 정신을 함양 할 때도 염주를 돌리면 손이 움직여서 정신이 안정될 수 없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면 병을 얻기 쉽다.) 오직 이 십념 법만이 행, 주, 좌, 와 에 적합하지 않음이 없다. 다만 누웠을 때는 소리 없이 묵송해야 한다. 누워서 소리 내면 첫째는 공경스럽지 못하고, 둘째는 기를 손상시킨다. 염불의 공과(功課)는 각자 편의에 따르면 된다. 대체적으로 아미타경을 한편 독송하고, 왕생주(往生呪: 발 일체업장 근본득생 정토다라니) 세 번 염송하고, 찬불게(讚佛偈), 다음은 나무아미타불 정근을 하고, 정근이 끝나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청정대해중보살 각각 열 번, 회향문 한편 독송하고,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청정대해중보살님께 각각 삼배 올리고 삼귀의로 마치면 된다. 아침, 저녁으로 늘 이렇게 하고 경전을 독송할 때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일정한 속도로 해야 하며 염불할 때는 구구절절 소리와 마음이 서로 의지하여 빡빡(澀)하지도 않고 빠뜨리(掉)지도 않으며 뜨지도(浮)않고 가라앉지도(沈)않게 염송해야 한다. 회향을 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대보리원(大菩提願)이 우러나와야 하며 널리 모든 중생이 다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 발원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에는 집착하는 바가 없어 마치 허공과 같아야 하며 단지 한편의 문장을 읽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염불할 때 가장 꺼리는 것은 급하고 촉박하게 서둘러서 단숨에 하루의 기도를 마치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대충대충 끝내려는 생각이므로 진정한 수행이라 할 수 없다. 만약에 여러 대승경전과 다라니 등을 독송하려면 차라리 따로 시간을 내어서 할지언정 아침, 저녁의 기도에 뒤섞여서는 안 된다.(일이 바쁜 사람은 따로 논해야 한다.) 불상(佛像)은 비록 종이에 그려졌고, 나무로 조각되었지만 마땅히 진짜 부처님으로 모셔야 하며 아침, 저녁으로 참배하되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해야 한다. 법당을 나올 때 문신(問訊:합장하고 절함.)하고 들어갈 때도 문신을 해야 한다. 5리 10리 밖에서도 항상 눈앞에 있듯이 하고 마시고 먹을 것이 있거든 먼저 공양을 올려야 한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경전과 불상뿐이지만 만약 흙이나 구리, 쇠로 빚고 나무로 깎아 만든 형상을 진짜 부처님으로 모신다면 업장을 소멸하고 번뇌의 미혹을 깨뜨릴 수 있으며 삼매를 증득하여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 법당을 꾸미는 방법으로는 부처님 한분과 보살님 두분(西方三聖) 을모시고 경전, 향로, 책상과 의자 하나씩 외에 다른 물건을 놓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마당은 깨끗이 청소하여 경행에 걸림이 없도록 하고 마음은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고 온갖 걱정을 다 잊어 버려야 한다. 마음을 텅 비워 몸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며 또한 내가 오늘 한일이 수행이었다는 사실마저도 모른다면 도(道)와는 날로 가까워지고 세속(世)과는 나날로 멀어질 것이며 바야흐로 이 마음은 정업(淨業)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가령 우리가 평소에 모든 번뇌 망상을 깨끗이 던져버려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죽음이 임박했을 때 소탈하고, 아들딸, 자손들을 돌아보며 그리워하지 않는 모습이 어찌 대장부의 거동(擧動)이 아니겠는가? 염불의 방법은 비록 각자 자신의 형편에 맞게 꼭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정해진 기도시간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염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일로 끊어졌을 때 일이 끝나면 곧바로 염불을 해야 한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팔을 들어 숟가락을 집고, 허리를 굽히고, 돌리고, 우러러나, 수그리나, 움직이나 ,정지하나, 한가하나, 바쁘나, 언제 어디서나 이 한 구절 홍명(洪名:나무아미타불)이 마음과 입을 떠나서는 안 되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마음에다 착실하게 새겨야 하며 구구절절이 서방을 구하겠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한다. 모름지기 정토 수행의 방법이 전(專)과 근(勤) 두자를 벗어나지 않음을 꼭 알아야 한다. 전(專)은 다른 일로 끊어지지 않는 것이고 근(勤)은 잠시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집지명호(執持名號)란 곧 우리들이 이 부처님 명호를 마음속에 굳게 지녀서 잠시도 잊지 않는 것이다. 한 생각이 끊어지면 곧 집지가 아니요, 한 생각이 뒤섞여도 집지가 아니다. 반드시 생각과 생각 이어져 끊이지 않고 뒤섞이지 않아야 하며 언제나 어리석지 않고, 어둡지 않으며, 산란하지도 않고, 혼침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렇게 염불 한다면 곧 사일심(事一心)으로의 정진(精進)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만법이 다 진리이며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염불하는 마음을 떠나서 따로 염송하는 부처가 없고 염송하는 부처를 떠나서 따로 염불하는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밖에 마음이 없으며 부처가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이다. 이와 같이 내지(乃至)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정보(正報:심신세계)와 의보(依報:주변환경)가 둘이 아니다. 깨끗함과 더러움, 괴로움과 즐거움, 싫어하는 것(所厭)과 취하고 버림(取捨),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모두 평등하여 두 가지 모습이 없으며 다 같이 청정한 것이다. 억지로 안배(安排)할 필요 없이 다만 여실(如實)하게 참구하여 극처(極處)에 이르러 자신의 본심과 홀연히 계합 하였을 때 비로소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 언제나 삼매이고, 기뻐서 웃고 화내며 욕하는 것도 불사(佛事)가 아님이 없으며, 일심(一心)과 난심(亂心)은 끝내 희론(戱論)임을 알게 되고, 온종일 티끌만큼의 다른 모습(異相)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이처럼 분명하게 통달할 수 있으면 곧 이일심(理一心)으로의 정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일심(事一心)은 어려운 것 같지만 쉽고 이일심(理一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염불공부가 사일심(事一心)이 되면 틀림없이 왕생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이일심(理一心)이 되면 반드시 상품에 오를 것이다. 믿음과 발원이 진실하고 간절한 사람은 한 구절 명호를 집지하기만 하면 비록 참된 이치를 모를지라도 이미 정업(淨業)을 성취하였고 품위가 비록 낮을지라도 결정 코 왕생할 수 있다. 가장 꺼리는 것은 초심 때부터 염이무념(念而無念:염불하면서 염불한다는 생각이 없음), 무념이념(無念而念:비록 염불한다는 생각이 없지만 한 구절 명호가 뚜렷하게 나타남)과 같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절로 나타나는 경계이므로 만약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하고서 여기에 착안 한다면 틀림없이 태만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경망한 지혜로 완공(頑空)에 빠져 자신의 마음도 깨닫지 못하고서 도리어 정토를 가볍게 얘기하고 왕생을 멸시하는 것은 더욱더 해악이 크다. 이른바 활달공(豁達空)으로 인과를 무시하고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는 사람들은 절대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 관법을 닦으려면 반드시 관 무량수경의 16관법을 숙독하고 나서 차례로 점입(漸入)해야 한다. 마땅히 경문을 자세히 연구하고 나서 여법(如法)하게 닦아야 하며 마음이 부처가 되고(是心作佛), 마음이 곧 부처(是心是佛)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하면 부처가 나타나고 경계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깊이 알아야 하며 모든 것이 오직 마음으로부터 나타나는 것(唯心所現)임을 알아 탐착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과연 이러한 경지까지 도달했다면 경계가 심묘(深妙)할수록 마음은 더욱더 전일(專一)해지므로 관상의 이익은 결코 적지 않다. 만약에 관하는 경계가 익숙하지 못하고 이치도 분명하지 않은데 조급하고 망령된 마음으로 급히 경계가 나타나길 바란다면 마음 전체가 망상이 되어 부처님과도, 마음과도 서로 감응을 얻지 못하나니 그 결과는 남에게 물어볼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선도화상께서 “말법시대의 중생은 정신과 의식이 흩날리고, 마음은 거칠고 경계는 세밀하여 관법을 성취하기 어렵다. 그래서 거룩한 성인께서 자비와 연민을 베푸시어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명호만 지송하기를 특별히 권하셨다. 명호를 부르기가 쉽기 때문에 염불이 이어지기만 하면 곧 왕생할 수 있다.” 고 말씀하셨는데 혹시라도 마음을 잘못 써서 마경(魔境)에 빠져들지 않을까 깊이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스스로 자신의 근성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지금 정토왕생을 하고자 한다면 오로지 염불을 정행(正行)으로 삼고 한걸음 더 나아가 공양, 지계, 보시, 작복(作福),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은 크고 작고, 많고 적고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전부 서방 극락세계로 회향해야 한다. 즉 사람들에게 물 한잔을 주거나 혹은 돈 한 푼을 주더라도 반드시 마음속으로 “이 착한 인연(善緣)을 극락으로 회향 하옵고 서방에 태어나기를 발원 하나이다”고 발원해야 한다. 이렇게 온갖 선행을 수희회향(隨喜回向) 할 뿐만 아니라 설령 한때 관조(觀照)를 놓쳐 우연히 악한 생각(惡念), 악한 행위(惡行)가 일어날지라도 반드시 참회회향(懺悔回向) 해야 한다. 일념이 항상 끊이지 않고 자나 깨나 극락을 생각하여 정토의 인연이 무르익게 되면 임종 시에 왕생을 하는 것은 곧 가벼운 수레로 낯익은 길을 달리는 것과 같아 조금도 장애가 없다. 그리고 단지 염불의 공덕만 서방으로 회향하고 그 외의 공덕은 따로 세간복보(世間福報)에 회향 한다면 마음이 하나로 통일 되지 않아 왕생하기가 어렵게 된다. 감산(憨山)대사께서 사람들에게 한편으로는 염불하고 또 한편으로는 생사의 뿌리를 증장시켜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경계 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緣由)에서였다. 그리고 나만 이고득락(離苦得樂: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음)하고 나만 사예취정(捨穢取淨:더러움을 버리고 청정을 취함)을 바라는 것은 성문과 연각의 원인이며 그 원(願)은 몹시 편협하다. 반드시 위없는 보리심을 내어 널리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고득락하고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사예취정하게 해야 한다. 비록 정토에 태어났지만 사바세계를 버리지 않았고, 비록 사바세계에 살고 있지만 중생들과 더불어 극락왕생을 발원해야 한다. 이런 원을 바른 원(正願)이라 하고, 또는 큰 원(宏願)이라 하며, 또는 위없는 원(無上願)이라 이름 한다. 연지대사의 발원회향문은 고금에 가장 완벽하고 훌륭한 작품이다, 처음 시작부터 “네 가지 은혜 끼친 이와 삼계 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위없는 도를 이루려는 정성으로 아미타불의 거룩하신 명호를 불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온갖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고 나서 극락세계를 떠나지 아니하고 사바세계에 다시 돌아와 한량없는 분신(分身)으로 시방세계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 신통력과 갖가지 방편으로 무량중생 제도하여 삼독번뇌 여의옵고 청정한 본심으로 극락세계 함께 가서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들게 하여지이다. 세계가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고 번뇌업장 또한 끝이 없아오니 이내 서원도 끝이 없나이다. 저희들이 지금 예배하고 발원하여 닦아 지닌 공덕을 온갖 중생에게 두루 베풀어 네 가지 은혜 골고루 갚사옵고 삼계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다 같이 일체종지를 이루게 하여지이다.”하셨다. 이속의 관계는 내가 생사가 있으므로 내가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일체중생이 모두 생사가 있으므로 모두 벗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나와 중생의 본체(本體)는 본래 하나이고 모두가 다생겁래의 부모이고 미래의 부처님이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은 석가세존과 미타여래께서 무량겁 이래부터 우리와 같은 중생을 위하여 목숨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부지런히 행하기 힘든 고행을 닦으시고 위없는 깨달음을 원만하게 성취하셨음을 볼 수 있다. 한분은 사바세계로 강림하셔서 정각(正覺)을 이루심을 보여 주시고 더러움과 고통으로 우리들을 조복시키고 우리들을 일깨워 주셨다. 또 한분은 극락세계에 편안히 계시면서 광명으로 시방세계를 비추며 청정과 즐거움으로 우리들을 거두어들이고 우리들을 이끌어 주신다. 수행자가 만약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만 생각하고 중생들을 전제(前提)로 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이 널리 중생들을 건지시려는 본래 회포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부처님이 거두어 주시는 무거운 은혜를 져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밖으로는 부처님과 감응이 통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자신의 본래 성품(本性)과도 계합하지 못하며 위로는 불도를 원만히 성취할 수 없고 아래로는 널리 뭇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없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의 은혜와 원한에서 해탈할 수 없고 한량없는 세월동안 쌓아온 죄업도 참회하여 제거하기 어려우며 여러 생의 선근(善根)도 성숙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품에 걸 맞는 큰 보리심을 발해야 한다. 철오(徹悟)선사께서 일찍이 “진정으로 생사를 위해 보리심을 내고 깊은 믿음과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지송하라. 眞爲生死, 發菩提心, 以深信願, 持佛名號 ”고 말씀하셨다. [진위생사 발보리심 이심신원 지불명호] 이 16글자는 염불 법문의 큰 강령(綱領)이자 종지(宗旨)이다. 여러 불자님 들이시여!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앞날을 위해 열심히 정진합시다. 나무아미타불. 願以此功德 바라옵건데 이 공덕으로 莊嚴佛國土 불국토를 장엄하겠나이다. 上報四重恩 위로는 네 가지 은혜를 갚고 下濟三途苦 아래로는 삼도의 고통을 건지며, 若有見聞者 만약 보고 듣는 이가 있다면 悉發菩提心 모두 보리심을 내어, 盡此一報身 이한 목숨 다하는 순간 同生極樂國 다 함께 극락에 태어날 지어다.
첫댓글 인광대사님 글 잘 보았습니다 시간 날 때 정독을 다시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 서방정토 극락세계 대자대비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