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장 평면

선교장 전경
강릉 선교장(중요민속자료 5호)
한반도 남부에 최고의 집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함 없이 선교장을 꼽는다. 안온하면서도 장대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주변경관과도 잘 어울린다는 점이 나를 사로잡는다. 선교장을 짧은 글로 소개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건물이다. 이 집처럼 집에 대한 이력이 잘 보관되어 있어 집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우도 드물다. 선교장의 주인은 이 곳에서 만석군으로 불리던 거부이다. 집도 그에 걸맞는 규모이다.
같은 만석군이라고 해도 넓은 들판을 가지고 있는 경상도나 전라도에서의 만석군과 지형이 좁고 척박한 영동지방의 만석군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농사를 지을 땅이 부족하고 척박한 이곳에서 만석군이 되기 위해서는 삼남지방보다는 훨씬 광대한 토지를 보유해야 한다. 토지개혁에 의해 땅이 소작인에게 강제로 분할되기 전만 하여도 추수 때 거두어들인 곡식을 저장하기 위하여 선교장 주변 외에도 주문진과 묵호에 따로 창고를 운영할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다. 이러한 만석군의 집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선교장 입구에서 바라보는 행랑채의 위용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선교리船橋里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선교장 앞은 넓은 들로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경포호가 이 곳 앞까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경포호는 호변이 4㎞ 정도지만 예전에는 12㎞나 되었다고 하니 경포호의 규모가 지금보다 3배정도 더 넓었던 것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선교장이 있는 마을도 배를 타고 들어갔기 때문에 선교리라고 불렸고 그 마을 이름을 따라 선교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열화당(주 사랑채)
처음 이 자리에 집터를 잡은 사람은 청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이내번李乃蕃이다. 이내번은 효령대군 11대 손으로 어머님과 충주에서 분가하여 저동에 자리잡고 가산을 불린 후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곳으로 옮기게된 것은 족제비가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는 것을 보고 이내번이 신기하게 여겨 쫓아가다 족제비가 홀연히 사라진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명당자리여서 이곳에 새로운 집을 짓고 옮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곳으로 집을 옮긴 후 손자 때까지 가세가 급격하게 불어 이 지방의 호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선교장은 여러 단계에 걸쳐 증축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최초의 모습은 아마도 지금 안채를 중심으로 한 영역이었을 것이다. 후손이 쓴 <강릉 선교장>이라는 책에서도 안채는 이내번이 지은 집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가 176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이내번의 손자인 이후李垕가 사랑채인 열화당(1815년)과 활래정과 연못을 조성하였고 이후의 아들인 용구가 서별당을 지었다. 동별당은 이용구의 손자인 이근우李根宇가 1920경에 지었다고 한다. 또한 안채 앞에는 새로 복원한 동별당이 있는데 이는 이후의 아들인 용구가 분가한 동생을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밖도에 열화당 앞 행랑채 밖(연못과 행랑채사이의 공간에는) 이근우가 소실을 위해 지어준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 외에도 선교장 주변에는 하인들이 살던 수 십 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대저택인 선교장은 이처럼 여러 차례의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과정은 집안의 번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세가 커가면서 그에 걸맞게 집을 조금 씩 증축해 가면서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서별당과 열화당 사이 일각문
선교장은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안채를 중심으로 동별당, 서별당을 아우르는 가족을 위한 사적인 영역과 열화당을 중심으로 한 공적인 영역으로 구분된다. 부를 어느 정도 쌓은 이후때에 이르러 선교장 가문은 부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선비와 교류하며 시문을 즐기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행적으로 이후는 “처사공” 또는 “오은거사”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보아 새로운 교류의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교류의 장소로 열화당과 활래정을 짓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에도 열화당과 활래정은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인적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게 된다.
이러한 내적 구성의 모습은 외관에서도 나타난다. 선교장에는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둘이다. 일반 반가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드러내놓고 둘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더라도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 측면이나 배면에 은밀하게 설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집의 규모가 크다보니 그러한 모습을 만들기조차 쉽지 않았다. 선교장의 대문 격인 사랑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은 다른 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집들은 높이의 차이가 있는 경우 계단으로 처리하는데 이 곳은 경사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경사로는 아마도 기능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워낙 거부이다 보니 집안으로 들고나는 재물이 많아 일일이 사람 손을 빌리기보다는 우마차로 나르는 것이 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 행랑채
선교장의 중요한 집들은 모두 이곳 영동지방 집의 특징인 겹집구조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안채,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 사랑채, 동서 별당 등 중심건물 모두가 겹집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겹집구조는 원래 추운 지방의 생활에 맞도록 만들어진 구조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선교장처럼 부호들의 삶에도 적절한 구조이다. 홑집에 비하여 간살을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어 방의 규모를 기능에 맞도록 할 수 있고, 넓게 방을 꾸밀 수 있어 부자집에는 잘 어울리는 평면이다. 이러한 겹집의 특성을 선교장에서도 잘 살리고 있다. 필요에 따라 방을 넓게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활용하고 있다. 안채나 사랑채 모두 겹집의 기능성을 활용하여 방의 규모를 조절하고 있다.
선교장에서 가장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은 큰 사랑채인 열화당이다. 열화당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락樂琴書以消憂(금서이소우)>라는 글귀 중 “悅․話”라는 글자를 따와 지은 것이다. 위 글은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떨쳐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은 오은거사인 이후가 형제들과 같이 이곳에서 정담을 나누고 싶다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고향인 충주를 떠나 머나먼 강릉으로 터전을 옮겨 이후 때까지 겨우 삼대를 살았다. 아마도 친인척이 없는 이곳에 자리를 잡기까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대에 겨우 형제들이 있었을 것이니 형제간의 정이 몹시도 중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당호堂號에도 절절히 배어있는 것이다.
열화당은 찬찬히 곰씹어 볼 집이다. 사람 키 높이 정도 되는 높은 기단 위에 당당히 서있는 집은 올려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왜 이러한 집을 지었을까. 아마도 열화당을 지을 때 앞에 행랑채가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래 안채의 모습은 완성된 ㅁ자형 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옆의 서별당 영역이 사랑채 역할을 하였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열화당은 주변의 풍광을 즐기며 객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계획하였고 그러한 기능에 맞도록 높은 기단 위에 집을 짓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렇게 높게 지은 것은 거대한 부를 축적한 이후 자신을 대외에 과시하기 위한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활래정
선교장의 또 다른 멋은 활래정에 있다. 아마도 활래정이 지어질 당시 멀지 않은 곳에 경포호의 끝자락이 보였을 것이다. 그 풍광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고 그 정취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 정자에 앉아 인위적으로 조성된 방형 연못에 떨어진 달과 넓게 펼쳐진 경포호에 떨어진 달을 같이 바라다보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취였을 것이다. 지금 활래정 앞에는 연못에는 가산이 있다. 예전에는 나무다리가 있어 가산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현재의 활래정은 일제시대 때 다시 지어진 것으로 건물의 격이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
선교장은 우리나라 최고이자 제일 큰집이다. 매년 선교장의 매력을 느끼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지금 선교장 주변의 모습은 예전의 당당함과 기품을 찾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이미 선교장 앞은 장사를 위한 조잡한 초가가 자리잡고 있어 안온한 마을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도 점점 더 해질 것이다. 관리의 어려움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주변환경을 관리하는데 보다 신경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