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연말(12월18일) 지역(영광) 동호인 모임인 향리학회에서 동국대 철학과 교수를 지내신 정종박사께서 강연한 내용입니다. 이 분은 금년 95세의 극노인이면서도 10년전 고향 영광에 낙향하시어 아직도 총총한 억양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다가가는 재미있고 깊이있는 열강을 하십니다. 녹취와 주해를 하신 분도 연로하셔서 문맥이 잘 이어지지 않고 일부 철자도 틀린 부분이 있으니 양해하여 주시고 서두 부분은 그냥 넘어가시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근 한세기를 사신분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동서양의 역사. 문화. 종교관을 풀이하시는지 조금의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지금도 등산탕(?)을 주1회는 꼭 드시면서 건강을 유지하십니다.
공자사상의 현대적 의의
자! 시작해볼까요?
지금 몇 시에요? 6시 반.....그럼 7시 반 조금 넘어 까지 할께요. 잉...
나는 영광유치원 1 회 졸업생인데 (영광유치원은) 1921년 9월 1일에 개원했어요. 지금 (농협 옆) 창무슈퍼가 우리 집이었습니다.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교(보통학교)엘 들어갔는데 그 때 나는 장돌뱅이처럼 어디서 굿한다고 하면 ...그때는 당굴레 보고 굿이라고 했는데...굿 한다, 잔치(향연)한다 하면 구경한다고 마냥 쏘아 다녔어요.
초등학교 4학 땐 데, 백수 길룡리에서 무슨 굿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래서 거길 가야겠는데 같이 갈 놈도 없고 해서 혼자 갔어요.
초등학교 4학년 짜리가 거길 걸어가야 하니 얼마나 멉니까? 가는데 40리 오는데 40리, 합하여 80리 인데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상상도 못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거길 갔어요. 거길 가보니 흰옷 입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디다. 야! 이런데도 있구나! 하고 점심 한 끼 얻어먹고 40리를 걸어서 집으로 오는데 얼마나 다리가 아픈지 들에서 그냥 쓰러져 자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그때는 소 구루마(달구지)도 말 구루마(달구지)도 없으니까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걸어서 거길 다녀왔어요. 아마 일요일이나 되었겠지요.. 잉...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들어오는 어린애한테 우리 아버지 어머닌 “어디 갔다 왔느냐?" "왜 이리 늦었느냐?”하고 꾸중도 하시고 할 텐데 도통 묻지를 안았어요. 요즘 같으면 따지고 할 텐데도 말이에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인 해가 1926년(지금부터 83년 전)입니다. 원불교가 1916년부터 시작했는데 그때는 불법연구회라고 했어요. 내가 태어난 해 보다 한 살 아래 시작했어요.
일제 때 원불교라고 하며는 여러 제약이 따르니까 소태산[박중빈 朴重彬, 1891.5.5~1943.6.1] )이 “우리 몇 사람이 모여서 불법을 연구한다...”하는 식으로 종교 활동을 했는데 내가 간 날이 불법연구회 창립 10주년 기념일이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겁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영광에서 무슨 일이 있다하면 안 간데 가 없이 죄다 쏘 다녔어요.
옛날에는 신파연극이 지방순회를 하고 다녔어요. 활동사진(영화)도 그렇고.... 어느 날은 (영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밤에 야담회(만담)를 한다고 해서 가보니 - 그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만담가가 누군 고 하니 신정언(申鼎言)이에요.- 조선왕조 때 유명했던 오리 정승이야기를 해요.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고 도요도미[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풍신수길, 1536~1598.9.18]가 망하고 들어갔다 회복해 가지고 다시 쳐 들어온 전쟁이 정유재란인데 그 때 강항선생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조선왕조가 1392년에 창업하여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는데 그때 이미 이씨왕조는 망했습니다. 그리고 1811년에 홍경래 난이 일어났는데 홍경래 난이 성공했어야 해요. 그래서 성씨가 바뀌었으면 새나라가 되거든요. 그랬으면 일본 놈들한테 경술국치도 당하지 않았어요. 일본 놈들한테 먹히지 않았어요. 나는 그렀게 봐요. 이괄이다 이시애다 정여립이다.. 난이 많았지만 홍경래 난은 성공적으로 잘 했었어요. 평안도에서 내려와서 한양을 거의 육박했었어요.. 그때 홍씨 조선이 되어야 하는 건데 그것이 안 되가지고 왜놈들한테 우리 5천년 역사와 우리 국토를 진상해 버렸어요.
임진왜란 때 정승이 모두 바뀌는데 그때 바뀐 정승 중의 한사람이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대감입니다. 호가 오동나무 오(梧)자에 동리 리(里)자를 썼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영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들은 신정언의 만담이야기가 바로 오리 정승 이야기인데, 오리(梧里) 이 정승이 12살 때라고 그래요. 어느 날 사랑채에 계시는 아버지한테 간 오리(梧里) 이 정승이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아버지 소원이 있습니다.”하니 “그래 무슨 소원이냐? 말해봐라..." ”제가요 꼭 필요하니까 은방울...조그마한 은방울 4개를 한 묶음으로 해서 2묶음만 만들어 주세요...“뭐하려고 그러느냐?” “만들어 주시면 그때 가서 말씀드리지요.” “그래.. 그럼 보름 후에 오너라. 만들어 주지...” 그리고 보름 후에 사랑방에 가보니 은방울 두 묶음을 예쁘게 만들어 아버지가 소년 오리(梧里)에게 주었답니다.
은방울을 받아든 소년 오리(梧里)는 아버지께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이 은방울을 꼴마니 양쪽에 차고 인사를 드리고 나갔는데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방울소리가 나지 않게 걸었답니다. 방울소리가 나면 발걸음을 멈추고 절대 방울소리가 나지 않도록 걸었다고 해요. 아무리 급해도, 설사가 나도, 집안에 불이 나도, 뛰지 않고 서서히 걷기를 12살 때부터 시작했다고 해요. 그리고 일국의 재상이 되었는데 키가 5척 단구라 남에게 깔보임을 당하기 쉬우니까 그때부터 방울소리가 나지 않도록 걷는 연습을 했다고 해요.
이렇게 해서 5척 단구 이 정승 앞에서는 7척...8척되는 장군들도 꼼짝을 못했는데 이 이야기는 무엇을 시사 하느냐하면 5척 단구로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만들어 세상에 내 놓았지만 그것은 겉을 만들어 주신 거고, 속은 내 스스로, 자기가 채워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는 이야기에요.
우리 어머니는 영광교회 초대 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끌어 들여서 교인을 만들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영광읍내에 조씨하고 정씨하고 50%정도가 살았는데 정씨와 조씨 중에서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던 집은 우리 집 뿐이었어요. 조씨는 없고 편씨하고 정씨하고 영광교회를 떠받들었던 시절이었어요. 당시의 여자들은 이름이 없고 조성녀 조처녀 무슨 씨...그렇게 이름이 없이 시집을 갔던 시절이라 우리 어머니도 나중에 아버지 함자에서 희자를 따서 조희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어머니는 교회에 가서 성경을 읽어야 하니까 한글을 깨우치기 위해서 야학을 다녔어요. 당시에는 야학이 유행이었던 시절이라 야학에서 글을 깨우쳤고 우리 어머니도 그런 정도의 지식밖에 갔고 있지 않은 분이었는데 하루는 내가 장자(큰아들)니까 나한테 이런 말을 해요. “어머니는 말이다 자식을 겉만 낳지 속 낳지를 않는다.. 잉.” “겉 낳지 속 낳지 않는다.“, 우리나라 속담이 한 4만개되는데 우리나라 속담 집에 보면 이 말도 나오는데 나는 이 이야기가 뭔 소린가 그때는 몰랐어요.
그런데 이 말은 “겉은 부모로부터 받았으니까 속은 내가 채우라”는 이야기예요. 오리(梧里)대감의 이야기에서도 비록 5척 단구의 작은 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지만 8척이나 되는 대장군보다 몸을 무겁게 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요.
한국역사를 보면 키가 작은 사람이 출세합니다.. 잉. 키 큰놈, 속없어요. 우리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로 “키 크고 속없다.” “콩나물처럼 키만 크다.” “허우대는 좋지만은...” 이런 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으면 “작달 만하다” “꼬치는 작은 것이 맵다.” “앙팡지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 키 크고 속없는 놈의 대표자는 최규하 [崔圭夏, 일본식 이름: 梅原圭夏. 1919년 7월 16일 ~ 2006년 10월 22일, 강원도 원주시 출생]여요. 체격은 건사하지.....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출생] 이 한 테 돈 처먹고 벙어리같이 죽었어요.... 그런데 5척 단구를 보면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604~661] 가 있고 전봉준[全琫準, 1854년~1895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이 있고 또 대원군[이하응 李昰應,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1820~1898] 도 5척 단구였어요. 오리(梧里)대감도 그렇고 키가 크면 출세 못해요. 현대에 와서 보면 박정희[朴正熙, 일본식 이름 :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 1979년 10월 26일,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가 5척 단구에요. 154cm거든요. 박정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나폴레옹[1769.8.15~1821.5.5] 전기를 읽었다고 해요 물론 일제 시대였으니까 일본말로 된 걸 읽었겠지요. 잉.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 박정희는 “내가 나폴레옹이 되어야겠다. 한국의 나폴레옹이 되어야겠다.”하고 각오했다고 해요. 그런데 나폴레옹도 5척 단구에요. 157cm니까 서양 사람으로 치면 난쟁이거든요. 박정희하고 2~3cm차입니다. 또 있어요....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년∼1982년, 마산 출신], 월탄 박종화[朴鐘和, 1901년 ~ 1981년 1월 13일, 서울출생], 일석 이희승[李熙昇, 1896년 6월 9일(음력 4월 29일) ~ 1989년 11월 27일, 경기도 개풍 출생] .. 모드 5척 단구에요.
영광에서 신식결혼을 최초로 한사람은 여기 있는 서(민영)회장 아버지 어머니에요. 서 회장 어머니 아버지가 연애를 했어요. 그 당시 연애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최초로 연애꾼이 되었거든요... 영광우체국 자리가 영광청년회관 이었는데 청년회 뜰에서 신식결혼식을 했어요. 아주 인산인해를 이뤘었습니다. 법성, 홍농에서 도 오고 .... 신식결혼식이 어떤 것인지 보려고 많이 왔어요. 나도 쫑쫑 하게 앞에 앉아서 봤거든요. 그 때...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산을 좋아해가지고 혼자서 물무산, 노인봉, 옥녀봉...그리고 또 하나 봉우리가 있는데 이름이 없어 내가 소년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 소년봉으로 해서 고들재로 내려오곤 했어요. 중학교 때는 방학으로 고향에 올 때마다 연실봉하고 해불암엘 다녔어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여름방학하고 겨울방학은 해불암에서 보냈어요. 해불암은 내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습니다. 고등학교 전문학교 대학교 때 방학이면 쭉 해불암에서 살았거든요. 우리 집은 상가여서 시끄러웠고 내 방도 따로 없으니까 머슴이 쌀 몇 말만 져다 주면 한 달은 먹여주었으니까 해불암에서 지냈어요.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던 1938년[지금부터 61년 전] 여름방학 때 고향에 와서 어디 좀 높은 산을 가보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요... 그때 정참사 내 손자, 정헌무가 있는데 정태희씨 아들이거든요 헌무는 내조카이기도하고....헌무한테 “나하고 노고단엘 가지 않겠느냐? 해 가지고 지리산 노고단엘 가서 하룻밤 자고 내려오기도 했어요.
오늘날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일요일마다 산에 다닌 덕분이고 산이 나에게 건강의 선물을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1969년 12월 25일...지금부터 40년 전 이야깁니다 잉... 서울 오봉에서 도봉으로 등산하는 도중에 조난을 당해 가지고 요 눈 하나를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나머지 요놈 하나가지고 30~40년 잘 써 먹고 영광에 온 것이 2004년 5월 8일인데 갑자기 나머지 이 눈 하나가 이상하게 되어요. “망막박리”라는 병명인데 영상을 비쳐주는 스크린이 망막인데 이 망막이 떨어져 나가는 병이에요. 허니 이제는 글을 쓰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게 돼 여러 곳을 탐문해 보니까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관이 있어요. 여기서 7~8천권의 장서를 녹음해 줘서 2004년부터 5월 13일부터 오늘까지 하루 열 시간씩 그것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지산(조경길)선생이 영광을 대표하는 독서광이라고 생각해요. 이 양반이 어느 날 나한테 전화가 왔어요. “한국의 명문장 100선이라는 책을 보니까 선생님 이름이 나오던데요.”해요 그런데 나는 몰랐거든요. 그래서 찾아 봤더니 제가 그 책의 말 석울 더럽히고 있어요. 그 책을 출판한 회사가 창문사인데 창문사에 전화를 해서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소.!!!”했더니 책 10권을 보냈습디다. 그래서 지산(조경길)선생 덕분에 한국명문장 100선을 받았는데 지금은 읽을 수가 없으니까 그것도 가톨릭 점자도서관에 보내서 녹음해 가지고 들었습니다. 그 책 참 좋아요. 집에 비치해둘만한 책입니다. 좋은 책이에요....또 지산(조경길)선생이 “중국의 명저”라는 책을 나 한테 선물해 주셨는데 이 명저도 가톨릭 점자도서관에 보내 녹음해서 녹음으로 읽어 보았는데 중국역사 5천년동안 명저만 골라서 수록해 놓은 좋은 책입디다. 이렇게 나는 2004년 5월 13일부터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카세트로 글을 읽고 있습니다. 카세트는 안팎8개인데 300페이지 분량이 녹음돼요. 하루에 300페이지 들으면 10시간이 소요됩니다. 최근에는 구약성서...그 방대한 것을 다 들었습니다.
자! 유대인은 어쩌냐? 중동을 보세요.. 여기 이스라엘이 있고 이라크가 있고 이란이 있고 사우디가 있고...페르시아만에 아주 밀집되어 있거든요. 이스라엘은 좁고 각박한 땅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사시사철이 뚜렷하고 ...그런 땅이 아니거든요. 가나안이 “우유가 흐르고 기름진 땅”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엉터리에요. 이집트에서 400여 년 살다가 탈출해 나, 오면서 모세가 유혹하는 말이에요. 이집트에서만 살라고 하니까 데리고 가려고 했던 말이었거든요. 이렇게 나라 땅이 좁고 고대문명국가에 딱 짜여있는 곳이 이스라엘인데 내가 이스라엘에 가 보니까 역시 땅도 각박한데다가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지정학적 정도가 아니어요. 완전히 대국이 밀집되어 있어 앗시리아한테 완전히 망해가지고 전 국민이 노예가 되었고 손톱 발톱보다 적은 나라가 최후에는 마사다[Masada]라는 데서 천년 로마한테 씨가 마르게 돼 버렸거든요. 그래서 땅을 잃고 세계 여기 저기 흩어져 버렸어요.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고 최후에는 로마한테 완전히 당해가지고 한 치의 땅도 없이 돼버렸어요.
이렇듯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땅이 각박하여 살수가 없던 땅이었어요. 그래서 구약전서 창세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어제 죽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요,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최고로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염세주의입니다. 또 창세기에 보면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세상에 헛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나옵니다.
이건 이스라엘 사람들의 허무주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내세(來世)에 저승이 있어야 되요. 이승은 잠간 지나가는 것이고 내세(來世)가 있어서 우리는 구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해 준다. 이렇게 이 사람들에게는 내세(來世)가 있어야 되요. 여기서 탄생한 것이 유대교이고 이 유대교에서 나온 것이 기독교에요. 기독교가 모양 세는 유대교에서 얻어 왔지만 예수의 위대한 점은 이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를 완전히 극복한 점이에요. 하나님 여호와만 있으면 천당에 가 더 잘 살 수 있다고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를 극복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저승이 없어요. 우리속담에 보면 “거꾸로 매달려도 이승이 좋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이것이 바로 현실 제일주의고 내세(來世)의 부정이에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필요 없어요. 그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했지만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어요.
신채호의 역사관에 의하면 신라 김춘추가 앞장서서 당 태종과 고종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했는데 이건 잘못됐다는 거 에요. 내 생각에도 삼국통일을 안했으면 당나라가 침범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 되었다면 지금의 북만주가 우리 땅이 되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주가 우리나라, 우리국토가 되었을 거 아닙니까....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1932년 9월 30일~]라고 소설가였던 동경시장이 “북한은 중국한테 주어 버려야 한다.”라는 소리를 했다고 하는데 삼국시대를 생각하면 남북통일하려고 하지 말고 북한을 그대로 놔 두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공자사상의 밑바탕에도 내세(來世)가 없습니다. 힌두교에서 나온 불교도, 이를 근본 불교라고 하는데, 석가모니가 생전에 설법을 할 때는 지옥과 극락이 따로 없었어요.
“바로 이 세상에 지옥도 있고 극락이 있다. 극락이 뭐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그랬는데 그 뒤에 많은 불교학자들이 내세(來世)가 있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달리 중국은 내세(來世)지향적인 종교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정치가 제일 중요했어요. 그리고 그 정치는 질서의 안정이 제일과제였었고, 공자도 자연히 이런 정치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려면 정치제도를 잘 가져야 한다. 착취가 없어야한다. 귀족들이 백성들을 못살게 해서는 안 된다. 백성을 위주로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자연히 가질 수밖에 없었어요. 이승절대주의 나라에서는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려면 도덕적 질서가 따라야 하거든요. 도덕적 질서가 없는 정치적 질서는 있을 수가 없는 법이에요. 공자는 “백성들이 정치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귀족들한테 시달리고 하니까 백성이 위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같게 되었고. 여기서 민본사상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 정기호 군수를 만났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근자열(近者悅) 원자래(遠者來)”라는 말을 했어요. “가까운 사람은 기뻐하고, 기쁠 열(悅)자에요 잉... 먼데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 그것이 정치의 요체랍니다.”라는 말을 했어요. 해방 직후에 영광민립중학교 교가에 “군민 13만”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6만정도 밖에 안 되요. “근자열(近者悅) 원자래(遠者來)”해야 되는데....
공자가 13년 동안 중국천하를 돌아다닐 때 저기 북쪽에 있는 섭공이라는 지방장관을 만나게 됩니다. 섭(葉)자는 입사귀 엽(葉)잔데 이름으로 읽을 때는 섭 자로 읽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가섭존자가 있는데 이때도 입사귀 엽자를 섭자로 읽어요 잉....엽이라고 읽어서는 무식한 사람이 되어요 잉.... 공자가 제자인 자로와 함께 가서 섭공을 만났는데 섭공이 공자보다 “정치의 요체가 뭡니까? ”하고 물어요. 이때 공자가 한말이 “근자열 원자래”입니다.
공자는 같은 사안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답이 각각 다릅니다. 정치적 요체도 천편일률적이지 않아요. 때와 장소에 따라 전부 달라요. 의사의 처방이 병의 증상에 따라 다르듯이 공자도 그 증상에 맞게 처방이 다른 겁니다. 공자가 섭공한테 내린 처방은 바로 “근자열 원자래”였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이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스승 공자의 뒷바라지를 다 한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 제자 중에 돈이 많았던 크리튼이 그 스승 소크라테스를 스스로 도왔듯이 자공도 그 스승 공자에게 그랬습니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섭공자에게 했던 질문인데 이때의 답은 “국방과 의식주와 신, 믿은 신(信)”이라고 했어요. 그래 다시 묻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한 조건이지만 부득이 하나를 뺀다면 무엇을 빼야할까요?”하니 “거병(去兵)”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국방을 빼버려라“ 했어요. 평화만 유지된다면 국방은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 다시 묻습니다. ”그럼 나머지 둘 중에 어느 것이 급할까요? 하나를 뺀다면 어느 것을 빼야 할까요.?“하니 ”거식(去食)“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먹어도 어느 정도는 버티고 살 수 있으니 먹는 것을 빼버려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믿을”신(信)“은 ”최후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子貢(자공)問(문)政(정) 子曰(자왈) : “足(족)食(식), 足(족)兵(병), 民(민)信(신)之(지)矣(의)” 子貢(자공)曰(왈) : “必(필)不(부)得(득)巳(사)而(이)去(거),
於(어)斯(사)三(삼)者(자)何(하)先(선)?” 曰(왈) : “去(거)兵(병)” 子貢(자공)曰(왈) : ““必(필)不(부)得(득)巳(사)而(이)去(거), 於(어)斯(사)二(이)者(자)何(하)先(선)?”
曰(왈) : “去(거)食(식), 自(자)古(고)皆(개)有(유)死(사), 民(민)無(무)信(신)不(불)立(립)”].. 안연편 7
자! 믿은 신자를 보세요. 사람 인(人)변에 말씀 언(言)자 아닙니까?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에요. 성경에도 “최초에 하나님의 말씀 있었느니라.”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의 모든 것이 말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말이 바로 믿음입니다.
논어에는 의무니 책무니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아요. 그때는 의무다 책무다 하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던 시기이니 모든 것이 믿음 즉 서로 믿어야 했고 그래서 믿고 맡기고, 믿고 부탁하고, 모든 것이 믿음이었거든요. 그래서 믿음 속에 책무니 의무니 하는 개념이 다 들어갔어요. 2600전의 이야기이니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 말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공자는 춘추 말 전국 초 때 태어났는데 주(周)나라가 망해서 진(秦)나라의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천하 통일할 때까지 500년이 걸립니다. 이 시기가 국가가 없는 난세였거든요 150년간이 전국시대고 나머지 350간이 전국시대인데 군웅이 활거하고 싸우고, 하다가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공자는 정치적 질서를 잡으려면 도덕적 질서가 선행되어야한다는 생각을 같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사상 속에는 절대라는 것이 없습니다. 현대 철학적 술어로는 상대주의인데 이 상대주의에는 절대가 없습니다. 절대 가(可)도 없고 절대 불가(不可)도 없습니다. 가(可)일 수도 있고 불가(不可)일 수도 있으며, 적당할 수도 있고 부적당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시중, 때 시(時)자 한가운데 중(中)자를 쓴 시중(時中)사상이기 때문에 공자는 절대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절대만 찾았고, 기독교 유대교가 모두 절대만 찾았는데 공자사상에는 절대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간세상은 모두가 상대적이어서 절대 可(가)도 없고 절대 不可(불가)도 없는,... 때에 맞는 時中(시중)사상이 바로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사상이기도 했습니다.
공자의 논어에 은자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어느 성서에도 없는 논어편자들의 구성인데 공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공자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수록해 놓았어요. 성서 같으면 다 빼버렸을 거 에요. 그런데 논어에는 그걸 다 집어넣었어요. 참 대국사람다운, 금도가 넓은 사람들의 행태라고 생각되는데 공자을 비판하는 이, 은자들은 공자들의 현실참여를 비판하는 현실 도피자 내지는 불참자들이고, 공자의 일행들은 현실참여론 자 들이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독립운동에 앞장 서는 거, 뒤 딸아 가는 거, 박수치는 거, 군재독벌 때 앞으로 나가서 수류탄 맞아 죽는 사람...뒤에서 박수치는 사람. 등 등 인데 이 모두가 시류에 참여하는 행위거든요. 공자의 행위는 참여였습니다.
춘추 말 전국 초니까 공자는 “모든 사람들이 나라를 버렸는데 우리마저 버리면 되겠느냐?” 하는 입장이었고 은자들은 “니 따위들이 도도히 흐르는 이 거대한 탁류(濁流)와 같은 세상을 바로 잡아...어림도 없지.. 우리같이 이렇게 자연과 벗하며 편하게 살아야지... 흐트러지고 엉킨 세상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헛수야...홍수가 져 가지고 탁류(濁流)가 흐르는데 혼자 깨끗해 보려고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야...”하고 공자의 현실참여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 소리를 듣고 “그렇다면 이 백성들은 어쩔 것이냐?” 논어에서는 사인이라고 하거든... 이 사(斯)자를 써 사인지도(斯人之道徒)라고 했거든....날마다 전쟁만하고 이 전쟁 통에 가족들을 다 잃고, 버리고, 굶주리고...우리가 6.25생각하면 되요. “서로 인육을 먹고 사는 이 사람들을 모른 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어떻게든지 도와야지.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너희들의 말처럼 아무 힘도 없지만 너희들같이 짐승들 하고는 못살겠다. 사람들하고는 살 수 있어도 사인(斯人)하고는 살 수 있어도, 새나 짐승들하고는 못 살겠다.” 하고 반박합니다.
은자가 공자 제자 자로보고 “우리들은 말이야 피세인(避世人)이야..” 즉 “세상을 버린 사람, 피한 사람들인데 너희 스승이라는 사람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피인자(避人者)다.” 즉 백성들은 놔두고, “이 임금한테 가서 굽실거리면서 이렇게 정치를 하면 잘되어 갑니다.”하다가 안 따라주니까 그 임금 버리고 또 다른 임금한테 찾아가서 “이렇게 정치하세요.” 그래도 안 되니까 또 버리고... .“그러니까 피인자(避人者)가 아니고 무엇이냐?” “우리는 피세인(避世人)이지만 너희 스승은 사람을 피해 다니는 놈 아니냐?” “이 임금한테 말해서 안 되면 저 임금한테 가고...그러니 피장파장이다.”라고 했습니다.
[장저걸익우이경(長沮傑溺遇而耕), 공자과지(孔子過之)...걸익왈(傑溺曰) : “도도자천하개시야(滔滔資天下皆是也), 이수이역지(而誰以易之), 차이(且而), 여기종피인지사야(與其從辟人之士也), 기약종피세지사재(豈若從辟世之士哉)!” 자로행이고(子路行以告), 부자무연왈(夫子憮然曰) : ”조수블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窘), 오비사인지도여이수여(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천하유도(天下有道), 구불여역야(丘不與易也)“] 미자편 6
여기서 나오는 사인지도(斯人之徒)라는 말이 논어의 몇 군데 나오는데 나는 내가 쓴 책에서 이 사인지도(斯人之徒)를 사인(斯人)주의라는 말로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바로 휴머니즘[Humanism]이거든요.
오늘날 모든 사상이 허무주의니 염세주의니 뭐 등등 다 있지만 인본주의(人本主義),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이것을 덮을 사상은 없습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년] 레닌[Nikolai lenin, 1870-1924] 주의도 다 소용없습니다. 인간을 존중하는 사상...요놈 무너지면 끝나는 거에요...·
허무주의가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최후까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부정하면 뭐가 되겠어요.. 인간만은 살아 있으니까 존중해야지요... 인간만은 긍정해야지요...인간을 버리면 나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니까 인간만은 존중해야 된다는 것, 이것이 공자사상이고 이 공자사상이 한마디로 인간중심교라고 나는 생각해요.
사람을 버릴 수 없다는 사인주의(斯人主義)...영어로는 휴머니즘[Humanism]...
이렇게 공자사상은 철저하게 인간본위주읩니다. 이러한 사례가 논어의 도처에서 나옵니다.
공자 논어는 500장으로 봅니다. 이 500장중에서 공자의 3대 강령이 있는데 맨 첫 장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이고 두 번째 장이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세 번째 장이 “인부지이 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거든요.... 이 1장, 2장, 3장이 공자학단의 세 가지 강령이에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이렇게 공자학단에서는 학문을 장려한 거에요. 2600년 전에 나온 학습(學習)이라는 말을 지금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배우고 익히고...학습(學習) 즉 공부만 해서도 안 되는 거 든요. 사람을 존중해야 되요. 또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멀리서 친구가 많이... 동료, 동호인들이 많이 왔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그런데 그때 만해도 교육이란 건 없었으니까 ...학교라는 건 없었으니까 사교육으로... 귀족들만 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학교는 아니지만 세 사람이고 네 사람이고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이 제자들이 일명 3천명이라고도 하고 70명이라고도 하고 10철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공자는 개방적이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노(魯)나라에서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 넓은 중국에서 제자들이 다 모여 들었어요. 수 십리, 수 백리, 수 천리 밖에서 공자에게 배우기 위해 모여 들었거든요. 이러한 현상이 그 당시 이전에는 없었던 특색입니다.
중국은 이스라엘 같이 조그마한, 코딱지만 한, 땅이 아니거든요. 그 넓은 땅, 각지에서 모여들었어요. 저 아래 초(楚)나라에서 까지 공부를 하기위해서 배낭 같은 걸 등에 메고 올라 왔거든요... 이렇게 멀리서 배우러 찾아들 오니 어찌 즐겁지 않겠어요. 그리고 마지막 강령인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인데 중국에서 사람 인(人)자가 나오면 타인(他人)을 뜻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강령에 나오는 인(人)의 의미는 일반대중들을 뜻하는 거 에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어도,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은자처럼 공자를 몰라주어도 성내지 않는다, 노여워하지 않는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에요.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어도 싫어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또 불만하지 않는 것이 군자가 아니겠는가?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이 말은 군자와 소인을 나누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해요.
성균관에서는 공자공부를 안 해요. 순전히 성리학만 하거든요 퇴계, 율곡 등과 같은 성리학만 해요. 그런데 공자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거든요. 아마 내가 “불온(不慍)의 정신”이라는 말을 처음 썼을 거예요. 성내지 않는 정신...이 말은 논어의 도처에서 나옵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 에이 씨 나쁜 세상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 이런 때는 하나님이 알아주신다고 하면 편리해요. 그래서 하나님하고 살면 은 고독하지 않는 겁니다. 여기서 유일신 사상이 나오는데 공자의 동양사상에서는 이거 없거든요. 즉 “내가 알아줘,... 그러니까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성내지 않는다, 나는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군자다 그랬거든요...
내가 해불암에서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독서를 시작했는데 그때 내가 열심히 읽었던 책 첫 장에다 “지아자는 기유아호(知我者 其唯我者)”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나 뿐 이다. 라는 말을 써 놨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논어에 보니까 공자가 ”기아자는 기천호(知我者 其天乎) “라고 했어요.
공자가 “지아자는 기천호(知我者 其天乎)”라고 하니까 자공 등 공자의 제자들이 “선생님 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늘이 알아준다는 말씀을 어찌 하십니까? 우리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제자들이 선생님을 다 알아드리는데 선생님의 그런 말씀은 섭섭합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나온 것이 사람이에요. 말하자면 우주의 3대 요손데 공자의 논어에는 하늘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악당들이 공자를 해치려고 할 때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라고 일갈하는 말이 나옵니다. 하늘이 뭘까요. 다산[정약용, 丁若鏞, 1762-1836, 경기도 남양주 출생]은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논어를 해설할 때 공자가 말하는 천(天)은 가톨릭에서 말하는 천제(天帝) 즉 여호와 하느님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귀양살이를 합니다. 공자의 논어에서도 천(天)이 많이 나오지만 그 천(天)이 나에겐 자꾸 인격적인 신(神)처럼 들려요.
악당이 나왔을 때 “너희 놈 들! 내가 지금 하늘을 떠받고 하늘이 나를 보호하고 있는데 나를 어찌하려고 하느냐?”하고 외치거든요. 하늘이 마치 인격적인 존재처럼, 신(神)과 다름이 없이 느껴지는데 그게 의문이에요. 여기서도 천(天)이 가톨릭의 神(신)과 무엇이 다르냐? 라는 생각이 드는데 來世(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점이 다르지만 이런 원시유교사상을 그대로 받은 것이 우리나라예요.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천벌(天罰)을 받을 놈이다” “천도(天道)가 있는 세상이다.” 이렇듯 하늘이 마치 인격적인 관념처럼 우리 속에 있거든요. 그래서 공자사상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사상의 기초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존중하고 내세(來世)는 없고 이승에서 최선을 다하는 민족이 바로 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승에서 할아버지가 잘하면 손자가 덕을 봐요. 이 복락(福樂)은 내세(來世)에서 받는 것이 아니고 당대(當代)에서 끝납니다. 당대(當代)에서 할아버지가 잘하면 손자가 덕을 보게 된다는 것이거든요. 공자의 원시유교사상이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렸어요.
공자는 인간중심적인 것을 주장했고 인간을 최고의 자리에 놓았고 그리고 보조수단인 하늘 천(天)을 두었는데 이러한 사상이 그 뒤에 훈구사상이 돼 가지고 훈구 학이 되서 11~12세기에 주나라 때 주자학이 돼 가지고 우리나라에 오게 됩니다. 이조 500년 동안 성리학... 기(氣)냐, 이(理)냐, 기이(氣理)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율곡은 氣(기)고, 퇴계는 理(리)고 하면서 싸우거든요. 이 이기사상(理氣思想)인 성리학 또는 주자학과 공자 학은 차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원시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공자의 원시사상으로 돌아가자... 이것을 수사학이라고 하는데 공자가 태어난 중국의 곡부마을에 가보면 강이 두개가 흘러요. 그 하나는 수수(洙水)고 또 하나는 사수(泗水)인데 공자가 제자들과 노닐 때, 그래서 거기서 살아간 그 곡부의 수수와 사수의 고향, 영광이 고향이면 영광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수사학(洙泗學)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육성을 들어 보자... 주자학의 입장에서 공자를 본 것도 아니고, 청나라의 고증학적 입장에서 공자를 본 것도 아니고 공자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는 운동... 그것이 바로 논어를 직접 읽는 겁니다. 주자를 통해서 읽지 않고 논어를 직접 읽자는 운동입니다.
논어에 주자가 주(註)를 달았는데 그걸 순전히 주자 식으로 달았어요. 그걸 신주(新註)라고 하는데 이것은 주자가 자기의 입장에서 쓴 것입니다. 성균관 계통은 전부 이와 같은 주자 쪽입니다.
우리고장의 강항선생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서 강항 선생보다 다섯 살 손위인 일본의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라는 승려를 만나 가지고 주자학을 전수해 줍니다. 그때까지도 일본에는 중국의 주자학이 들어가지 않았던 때라 주자학을 처음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후지하라가 중 옷을 벗고 유학자가 됩니다. 일본 최초의 유학자가 됩니다. 왕인박사가 일본에 전한 것은 논어하고 천자문이고 주자학을 전수해 준 사람은 우리고장의 강항 선생이에요. 이때 강항 선생이 가르쳐 준 주자학이 덕천[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막부, 260년 동안 [1603~1867] 일본의 정치적 이데오르기[Ideologie]로 삼았거든요. 조선왕조가 500년 동안 그랬듯이 ... 이렇게 일본과 우리나라가 주자학을 정치적인 이데오르기[Ideologie]로 삼았는데 일본은 개화를 했고 우리나라는 망했습니다. 같이 주자학을 했으니까 우리나라도 일본과 같이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렇게 된 되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섬사람들은 고루한데가 있지만 개방적이어요...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자연히 개방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덕천막부 260년 동안의 중간에서 일본은 주자학을 무시하게 됩니다. 학교가 있었는데 요즘말로 하자면 국립대학이었겠지요. 이 학교에서 낮에는 주자학을 강의하니까 주자학을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사숙(私塾)에서 양명학(陽明學)을 했어요. 그래서 무슨 말이 생기느냐하면 “주주야왕(晝朱夜王)” 즉 밤에는 왕양명을 낮에는 주자를... 이렇게 두 가지를 다 한 거 에요. 그래서 유학자들이 주자는 국학(國學)이니까 하고 양명학은 좋아하는 학문으로 둘 다 한 겁니다. 그에 반해 조선에서는 “양명학”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으로 취급했고 주자 이외에는 일체 안됐습니다. 왕양명은 발도 못 붙이게 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그것을 가르쳤어요. 주자학을 받아 들였어요. 왕양명이도 받아 들였어요..
덕천막부 260동안의 중간에 마츠다이라(松平)라는 내각총리대신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집에 가서 왕양명이를 가르치는 사람은 사문난적이다. 주자학만 해라.” 이렇게 법령을 만드니까 주자학자들이 들고 일어났어요. “그러면 안 된다. 주자학도 있고 양명학도 있는 거다. 양명학이 없으면 주자학도 없다. 양명학도 좋지 않으냐? 주자학도 비교해 가지고 배우면 좋지 않으냐?” 이것이 섬나라 사람들의 장점이에요. 그래서 많은 문물과 접촉하면서 머리가 틔었어요. 그리고 개화해 가지고 우리를 침략했고 이로써 우리는 망하고 일본은 일어났던 거 에요. 그리고 서양문물을 막 받아들이면서 서양종교도 받아 들였어요. 대신에 나가사키에서 만, 하라고 했거든요. 반면에 우리나라는 1750년에 가톨릭을 받아 들여 개화를 했어야 했는데 가톨릭 신자들을 막 죽여 버리지 않았어요. 대원군과 조대비 둘이서 짜고 무자비하게 학살해 버렸지 않았어요. 이렇게 우리나라는 기회를 놓쳐 버린 겁니다.
일본은 학파가 셋이 있습니다. 양명학과 주자학과 근본불교처럼 공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공자의 육성을 들어 보자는 옛 고(古)자를 쓰는 고학(古學)입니다. 이 셋이 다 골고루 일본에는 존재했어요. 만약 우리나라가 이리 되면 큰일 납니다. 주자학만 유일했고 그 외에는 전부 사문난적으로 몰아 버렸어요. 다산이 1836년에 돌아가셨는데 논어에 주석을 달았어요. 주자와는 달라요. 그것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입니다. 그 논어 고금주(古今註) 즉 다산의 고금주(古今註)에 보면 일본의 고학파에 이등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등나무 등(藤)자에요. 고금주를 처음 읽었을 때 “등왈(藤曰)”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등(藤)이라는 사람은 중국에 없었으니까 도대체 누군가 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일본의 이등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이렇게 다산의 고금주는 중국 것은 물론 일본 것까지 다 받아 들였어요. 또 다산이 쓴 “일본고(日本考)”라는 논문이 있는데 즉 “일본을 생각 한다”라는 제목의 논문이에요. 여기에 보면 일본의 고학파 “이등과 오류서기(?)라는 사람이 있는 동안은 일본이 망하지 않을 것 같다.”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을 했어요. 이렇게 다산의 입장은 수사학(洙泗學)적 입장입니다. 주자를 뛰어 넘어서 공자가 하신 육성을 듣자는 주의였습니다.
공자의 육성에서는 어려운 말을 하지 않았어요. 아주 쉽게 정리했거든요. 내가 공자에 대해서 큰 책으로 쓴 것은 “공자의 교육사상연구”인데... 교육사상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으니까 생략하겠습니다.
아무튼 공자는 “인간 중심교육”이기 때문에 노력제일주의에요. 노력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거에요. “생이지지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상(上)이다.” “학이지지자”는 “배워서 아는 사람은 차(次), 그 다음이다.” “곤이학지자” “어렵게 배우는 사람은 그 다음이다” 3번째라는 이야기에요 잉....내가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앞에 3가지 중에서 마지막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에요. “곤이불학자” 어렵게 공부를 하지도 않는 놈, 배우지 않는 놈, 하 아래 하(下)를 썼어요, 하방이다란 뜻이에요. “생이지지자”가 상(上)이 아니라 괴롭다고 공부하지 않고 팽개쳐 버리는 놈이 제일 하찔이다. 라는 이야기에요.
[공자왈(孔子曰) :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 상야(上也),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차야(次也), 곤이학지(困而學之). 우기차야(又其次也), 곤이불학(困而不學), 민사위하의(民斯爲下矣)”] 계씨편 9
이렇게 공자는 모든 것이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공자의 교육학에 보면 “유교무류(有敎無類)” 교육만 있으면 따로 종류가 없이 똑 같다 그 말이여... 교육만 받으면 다 똑 같다. 교육이라는 것은 자기(自己)교육과 타자(他者)교육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교육하는 것이 평생교육이고 남에게서 배우려는 것, 학교에서, 선생에서 배우는 것 등은 타자교육이에요.
그런데 타자(他者)교육은 잠깐이어요. 일생을 자기 교육해야 해요. 공자의 교(敎)는 자기교육입니다.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 즉 수재들, 천재들은 공부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나 그런 특출한 사람들은 몇, 안되니 문제될게 없잖아요. 페스탈로치[요한 페스탈로치 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 는 “나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미련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공부에 뜻이 없는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이것만이 내 제자다”라고 했어요. 공자의 교육을 소극주의 적 교육이라고 말합니다. 목적은 적극적이지만 방법은 소극주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교육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자발적으로 자기가 하도록 유도하는 교육이었어요. 18세기 서양에서도 이런 소극적인 방법이 처음으로 데뷔했는데 2600년 전에 공자가 했던 교육방식이니 얼마나 빠릅니까? 교육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기교육의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자발적인 능력을 길러주는 유도 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 다음은 “니가 알아서 해라”식이어야 해요.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니거든요. 서양사상에서 소극적 교육은 루소[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그랬고 패스탈로치가 실행을 했어요. 스웨덴에 에랜케이[Ellen Karolina Sofia Key, 1849-1926] 라는 여사가 있어요. 교육사상가인데 그분이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교육이란 한마디로 교육하지 않는데 있다.”라고 했어요. 10년 전인가 20년 전인가 내가 신문에서 보니까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하루 쉬고 싶다. 토요일은 하루 쉬고 싶은데 쉴 수가 없어 밤 11시까지 그냥 쥐고 짜 그냥.... 이건 교육이 아닙니다. 살인이지.... 교육은 절로 되도록 도와줘야지.. 얼마나 도와주고 얼마나 환경을 조성해 주느냐에 달려 있어요. 그러면 자발적인 힘이 나오는 거 든요. 병도 약으로 고치는 게 아닙니다. 치유력을 도와주는 거거든요. 교육제일주의 이것은 자발성 노력제일주의입니다. 노력하면 되는 겁니다.
서양사상의 경우는 지식을 위한 지식이 많아요. 그러나 동양사상은 모든 것이 실천학이거든요. 현실 학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우리 삶에 도움을 주는 거 ...이것이거든요
2600여 년 전 임금 절대주의 시대에 임금을 없애라... 이건 혁명이거든요 반역이었고... 그래서 그런 말 그런 생각을 함부로 못했어요. 그래서 그대로 두고 백성들을 잘 살 수 있게 하고, 굶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임금을 교육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임금이 국가니까... 루이14세가 그러지 않았어요? “짐이 국가다.”라고... 그러니까 짐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나라 전체를 교육시킨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공자에겐 반봉건적인 면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니까 어쩔 수 없었을 거에요. “여자와 소인은 대단히 기르기가 어려우니, 여자를 예뻐하면 버릇이 없고 여자를 미워하면 뾰루퉁해 가지고 적이 된다.” 그런 말을 했어요. 남존여비사상의 근원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서양에서도 플라톤[Plato, BC 428/427~BC 348/347]시대에도 여자들에게는 교육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한 말 중에 “나는 신에게 감사한다. 희랍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여자로 태어나자 않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라고 했어요.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희랍사람으로 태어나서 신에게 감사하고, 여자로 태어났으면 소크라테스를 못 만났을 텐데 담 넘어 로 소크라테스가 지나가는 것 쯤은 봤겠지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밑에서 8년 동안 교육을 받아서 플라톤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라고 했을 정도였어요.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원천이라고 하면 불란서 혁명 10년 전에 불란서 혁명을 도운 장쟈크 루소도 그가 쓴 교육 책 “에밀”의 끝 부분에 에밀 부인이 “쏘피“인데 ”소피“도 교육을 안 시켰어요. 학교를 안 보냈거든요. 이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동서가 봉건적인시대였으니까 ...”여자가 밖에 나가면 안 된다.“ ” 여자가 큰소리...“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 등의 반봉건적인 사조... 이런 것은 잘라버리고 우리에게 맞는 것 만 받아들이면 되요.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만 합시다.(2009년 12월 18일 자사원 여사 댁에서)
첫댓글 오랫만에 긴 글 잘 읽었습니다 해설사들에겐 유익한 글이군요 언제 그분의 강의를 들으려면 영광엘 가야겠네요 ^^
올해도 많은 가르침 기대하겠습니다. 검색,'정종박사'를 열면 2시간 분량정도 동영상이 있습니다. 더욱 건강하십시요.
좋은 글 감사 합니다 요즈음 유교의 성현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유교도 초기 공자시대와 조선의 패러다임인 성리학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많이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