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1883~1969)의 사진. 본래 정신병리학 연구자였던 그는 정신병리적 현상 속에서, 인간의 개성에 대한 강한 탐구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만년 저작인 〈위대한 철인〉 통해 동·서양 위인들의 사상을 서구 철학적 사유로 살폈다.
|
1권에 실린 인물은 소크라테스·공자·예수·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칸트·스피노자·노자(老子) 등을 비롯해서 불교의 부처님·용수보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주제나 목차만을 보았을 때는 다분히 개론서적인 성격으로 이해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놀랄만한 객관성과 창의성을 담고 있다. 특히 동양의 성인들에 대한 기술(記述)은 그로서도 상당히 부담되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원전에 충실했고, 독특한 자기주장을 실으면서 전문적 소양인 못지않은 내용을 보여준다. 단편적인 한 구절만 언급해 본다.
흔히 석가의 생애를 기술할 때 출가(出家)에 대한 언급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출가를 ‘집 떠남’(Homeless)이라고 보지 않는다. 세속의 영화를 벗어나서 새로운 결단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위대한 포기’(The Great Renunciation)라고 강조한다. 그는 한마디의 단어로서 붓다의 위대함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선택한 위인들에게는 각자의 독창성과 의미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철학사의 위인들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조명하고자 하였다.
①역사적 모습 ②사유의 체계 문제 ③발생적 모습 : 신화·종교·언어 등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봄 ④실천적 모습 ⑤역동적(力動的) 모습. 이 다섯 가지는 실제로 혼융(混融) 되어 있고, 이 성찰을 통해 우리는 그 위인의 본질,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야스퍼스의 저술 동기였다.
그가 특히 ‘위대하다’고 말한 뜻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어느 위인이든지 시대정신과 무관할 수는 없다. 부처님은 질식할 듯한 캐스트의 부조리, 제사의식에 대한 맹신 등이 난무하던 시대를 살았던 분이다. 그가 캐스트를 정면 부정하고 제사의례 대신 인격의 무한한 가능성을 언급한 것도 인도사회의 시대상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위인은 시대 정신의 소산이다. 그러나 ‘위대함’은 동시에 그 시대의 한계점을 넘어선다. 시대정신을 초월하기 때문에 위인의 사상과 삶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철인들’의 조건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구분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외적인 조건으로는 ①저술이 남아 있어야 한다. 단 기원전 인물의 경우에는 예외일 수밖에 없다. 공자나 예수, 부처님 등이 모두 그 예외에 해당한다. ②후대 사람들에 대해서 선명한 영향을 주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권위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내적인 조건이 있다. ①시간 속에서 시간을 초월할 것, 즉 초역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②근원에 있어서 독창적이어야 한다. 새로운 것, 태어남에 대한 놀라움이 있어야 한다. ③정신적 독립성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고정적이어서는 안 되고 언제나 유동적인 독립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조건들을 갖춘 위인들 층에서도 붓다는 조금 더 특이한 존재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다른 어떤 사람도 이루지 못한 방식으로 인간존재를 역사적으로 규명한 분이다. 구태여 따진다면 소크라테스·공자·예수 등도 포함 시킬 수 있겠지만, 그 이외의 다섯 번째 위인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용수보살의 사상적 특징을 그는 사상의 비전이 풍부한 인물로 보고 있다. 노자(老子)나 스피노자 등이 같은 범주에 속한다. 용수는 불교의 위인이면서도 초기불교가 미처 이루지 못한 무한한 상상력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대승불교의 이론과 실천은 그로 인해 꽃 피운다고 보아야 한다.
사상의 비젼이란 원전을 재해석해 내는 힘이기도 하다. 즉 새로운 해석과 통찰로서 원래의 사상을 더욱 더 포괄적으로 가꾸는 철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서양학자들은 용수를 기독교의 역사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Paul)에 비교하기도 한다. 예수와 바울은 100여년의 시간간격을 둔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동일하였다. 신의 복음을 온 누리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말한다. 그 한 가지 목적에서만 보면 예수는 실패했고 바울은 성공하였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지만, 바울은 로마제국은 물론, 그 통치하에 있는 전 유럽과 팔레스타인에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용수는 석가가 못 이룬 꿈을 완성시킨 인물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불교관
카알·야스퍼스는 유신론적 실존 철학자로 분류된다. 반면 무신론적 실존철학자로는 하이데거·사르트르 등을 꼽는다. 사상적으로 보면 20세기는 실존철학의 시대였다. 두 차례에 걸친 참혹한 세계대전,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는 냉전시대, 그리고 소련의 붕괴와 국가 간의 경제적 대립 등이 지난 세기를 풍미하였다. 그때 제기된 의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었다. 과연 인간은 선할까? 선하다면 어째서 인간들은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을 반복할까?
그렇다면 인간은 악한가. 자기 자식을 죽인 이를 용서할 수 있고, 김밥 팔아 모은 돈을 사회에 기부하는 그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보통 우리는 착한 행위를 선하다고 규정하고 잘못된 형태를 악하다고 단정한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행위는 분명히 악한 행태이다. 그러나 권투선수는 때려야 만 산다. 전쟁은 상대를 죽이는 게임이다. 적에게 동정을 베풀면 내 생명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없다는 뜻이 되고 만다. 늘 선하고 악한 행위 앞에 단서를 부칠 수밖에 없다.
한 입장에서 보면 선, 혹은 악의 구분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인간존재 보다 ‘현존(Da sein)’하는 실존이 가장 핵심적인 테마이다.
야스퍼스 철학의 핵심은 ‘포괄자’(Das Umgreifende)이다. 포괄자는 각자의 경지에 있어서 관련적이다. 정신·초월·실존 등을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힘이다. 철저히 인간 실존을 존중하면서 일상의 자신, 합리적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상당히 연기론적 사고방식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단순히 객관적 세계현상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다. 연기는 자기의 존재, 자신의 문제에 집중된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상호이해를 요구한다. 연기를 철저히 구명하고 내증(內證)하는 것이 곧 자신과 관계되는 세속을 초월하는 곳. 즉 해탈이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철학 한다”는 것에 있어서 ‘대상적으로 인식하는 사유법’과 ‘초월하는 사유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자는 과학에 의해 수행되지만, 후자야 말로 철학의 ‘근본 작용’이며 그것은 대상적 사유에 있어서의 모든 대상성을 밟고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불교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 삶’ 이라는 이상과 상통하는 논리이다.
본래의 자기는 불교적 입장에서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불교관은 상당히 깊숙할뿐더러 상호의존적이기도 하다. 물론 야스퍼스의 불교관이 철저히 불교적이지만은 않다. 야스퍼스와 불교는 분명히 이질적인 면이 농후하다. 불교는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해탈이란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분명히 비합리적이다. 마치 선어(禪語)의 화두(話頭)가 초논리적인 것과 같다. 논리를 넘어서고, 논리를 부정해야만 진실이 보인다는 그 ‘과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산이 물위로 가고’ ‘바다 밑 제비가 알을 품는’ 경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없다. 야스퍼스 또한 공감한다. 그 능력을 다해야 된다는 점에서는 합리적이지만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비합리적이다.
동과 서의 만남
원래 야스퍼스의 철학체계는 불교, 혹은 다른 동양전통과 많은 관련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야스퍼스의 대표적 저술로는 〈현대의 정신적 상황(Die Geistige situation der Zeit, 1931)〉, 〈이성과 실존(Vernunft und Existenz, 1935)〉, 〈자유·진리·평화(Freiheit, Wahaheit, Friede, 1959)〉 등이 있다.
특히 세계 대전 이후의 최대역작으로 〈진리에 관하여(Von der wahaheit, Erster Teil der philosophischen logic, 1947)〉를 꼽는데 그 어디에도 불교사상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야스퍼스가 정면으로 불교를 다룬 것은 바로 이 〈위대한 철인들〉에서 부처님과 용수를 쓰면서부터였다.
특히 그가 용수를 다루면서 삼제(三諦) 논리의 핵심인 공(空) 사상을 언급한 것은 인상적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논하는 공의 세계란 사유의 세계에서 비 사유에로 복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할 수 없는 것에의 지양(止揚)이 그 궁극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야스퍼스 철학의 주류, 생(生)에의 점화(點火), 다시 말해서 천명(闡明)의 길이 불교 안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저술을 통해 시야의 확대, 나아가서 동과 서의 만남이라는 21세기의 사상적 필연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야스퍼스는 서양적 사유와 불교를 비교하고 있다. 무명(無明)과 원죄, 불교와 기독교의 신비주의 비교, 공의 입장과 니힐리즘(Nihilism). 용수의 팔불중도(八不中道)와 변증법 등이 그 대표적 실례이다.
야스퍼스는 그 글에서 서양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에 한계와 부담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는 ‘존재와 비존재’라는 말을 쓸 때 이와 같은 ‘서구적 개념이 모두 인도적인 색채를 갖는다’라는 변명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단순히 불교와 서양의 유사성을 찾아낸다거나 혹은 양자의 사유방법을 혼동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한국불교의 특성을 회통성(會通性)이라고 주장하면서 종파적 근거를 무시하려는 태도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종합함으로써 상이성과 개별성을 없애버리는 것이 ‘회통’일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한국불교의 특성은 ‘원융성’(円融性)으로 규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개별적인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궁극적 지향점을 하나로 회귀시킬 수 있는 능력, 전체로 총괄하면서도 개체적인 자율이 허용되는 사상성을 의미한다.
그가 특히 용수의 마지막 장에 ‘간격’(間隔)이라는 언급을 남기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서양에 있어서 단서·계기였던 것이 동양에서는 전체가 되고, 전혀 별개의 것이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말은 같지만 의미는 다를 수 있다. 표현은 같아도 궁극에 이르는 과정은 여럿일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다. ‘붓다에 의해 하나의 위대한 해결이 발견되고 실현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라는 표현은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정병조/ 금강대 총장 |
그는 60년대 초반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교토에서 일본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을 친견하였다. 그때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경지, 달관의 미소를 보여주는 다시 없는 걸작’이다.
우리는 야스퍼스의 감격적 언사에 동의한다. 나는 6·25 직후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전후의 비참한 환경속 이었지만 철저히 서구성향적 교육을 받았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최고의 조각이고, 밀레의 ‘만종’ 보다 더 위대한 그림은 없다고 배웠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미륵반가사유상을 보았다. 그때의 감동은 야스퍼스와 다를 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도대체 이 아름다운 미소를 만든 장인(匠人)은 누구였을까? 야스퍼스는 그 일본 불상의 불모(佛母)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돌아갔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 현대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