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광주작전에 투입된 600명의 근거▶
1) 광주시민들을 분노하도록 유언비어 만들어 살포했고, 2) 수십 개의 파출소, 2개 방송국, 세무서 등 공공시설에 방화했고 3) 경상도 사람들이 발견되면 때려죽이고
경상도 차량 및 경상도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에 방화했고, 2개연대분 5,408정의 무기를 탈취하였고, 5) 극비 중의 극비에 속하는 20사단 사령부의 이동계획을 알아내 300명의 정예요원들이 광주톨게이트에 매복해 있다가 사단사령부 지휘용 지프차 14대 및 트럭을 빼앗아 아시아자동차로 달려가 위세를 보이며 명령에 복종하라며 4대의 장갑차와 374대의 군용트럭 및 그 열쇠들을 탈취해 전남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44개 무기고로 향했고, 6) 8톤 트럭 분의 TNT와 뇌관 및 도화선을 탈취하여 도청 지하에 옮긴 후 순식간에 폭탄으로 조립하여 계엄군을 향해 광주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 협박했고 7) 좌익수가 득실거리는 광주교도소를 6회씩이나 공격했고, 8) 경찰과 군을 차량으로 깔아죽이고, 돌로 때려죽이고, 총으로 쏘아죽였다. 이 자체로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반정부 반국가 폭동이다. 민주화라고 하면 목적도 민주화, 방법도 민주적인 방법이어야 한다. 북한 특수군 개입 여부를 떠나 광주사태를 민주화로 인정하고 국민세금을 마구 퍼부어 주는 것은 반드시 단절돼야 한다.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으며, 개입 규모가 600명 수준이라는 것은 군의 상황일지와 검찰이 2년에 걸쳐 작성한 “수사기록결과보고서” 그리고 북한의 역사책들에 명시돼 있다.
감히 20사단 사령부의 이동계획을 탐지해 이동 중인 사단 사령부 지휘용 차량을 대량 탈취해 아시아자동차로 달려가 불과 4시간 만에 전남 17개 시군에 산재해 있는 44개 무기고를 털어 2개 연대 분의 무장을 확보하고, 8톤 트럭 분의 TNT와 40km의 도화선 및 뇌관을 세트로 털어 순식간에 도청지하실에 폭탄으로 조립해놓은 사람들이 바로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사망한 166명 중 12명은 신원 미상이다. 154명만이 광주주시민이다. 이 중 33명은 10대 학생들이다. 121명만 20대 이상인 것이다. 여기에 대학생은 거의 없다. 대개가 양아치로 대표되는 천민 계급이었다.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283명, 이들의 직업 역시 대부분 54개종의 다양한 양아치 계급이다. 사망한 20대 이상의 양아치 계급 121명과 유죄를 받은 유공자(?) 283명을 보태봐야 404명이다. 이들 대부분이 천민계급이다. 이들은 군중을 따라 움직일 뿐이지 자기들이 300명, 600명 단위로 결속할 수 있는 군중이 아니다.
그렇다면 검찰 수사보고서에 나타난 600명, 감히 이동 중인 20사단 지휘부를 습격하여 사단장 지휘차를 포함하여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이를 몰고 군용차량 제조업체인 아시아자동차에 가서 장갑차 4대를 빼앗고 트럭 300여대를 빼앗아 순식간에 전남 17개 시군에 숨에 있는 무기고 44개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 5,408 정의 총기와 실탄과 다이너마이트를 전광석화의 준비된 속도로 털고, 8톤 분량의 TNT를 순식간에 폭탄으로 조립한 세계 톱-클래스에 속하는 눈부신 특공대는 어디에서 온 특공대일까?
1. 북한의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5.16.에 발간한 “광주의 분노” 35-36쪽에 있는 글이다.
“폭동군중은 괴뢰들의 군용차량공장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중들은 로획한 이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여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내였다”. “200여명으로 묶어진 다른 한 폭동집단은 시내의 ≪향토예비군≫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총들을 로획하였다. 그리고 ≪카톨릭쎈터≫앞에서는 괴뢰군 지방 ≪계엄군≫을 포위하고 놈들의 군용차와 여러대의 버스를 탈취하였다.”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정, ≪엠-1≫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발이였고 장갑차가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무기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지역에로 확대되였다.” “라주군에 진출한 폭동군중은 괴뢰경찰서 ≪산포지서≫, ≪로안지서≫ 등 5개의 괴뢰경찰서들을 습격하고 놈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모조리 빼앗아내였다. 화순군에 진출한 봉기군중은 괴뢰경찰서의 역전무기고, ≪전투경찰중대무기고≫,≪동면지서≫, ≪릉주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들을 들이치고 수많은 무기들을 탈취하였다. 장성군, 강진군, 령광군, 승주군, 해남군에서도 무기탈취투쟁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에는 오전보다 더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하여 오후에 이르러 봉기군중들은 일반상용무기들을 대체로 다 장만하였다.”
2.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년 3월 20일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5쪽에 있는 글이다. “5월 26일 600여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
3. 1995년 대한민국 검찰 조사보고서 (서울지방검찰청, 1995, 92-93쪽)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시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 등 지휘용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1명이 실종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300여 명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4. 1985.5.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제40-41쪽,
“5월 18일 14:25, 유동3거리에 학생 300명, 광주공원의 학생300명이 출현, 15:50, 학생 600여명 도청방향으로 이동하며 시위, 학생 300명은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민주인사 석방하라“는 구호 외치며 동산파출소에 투석 파괴, 또 다른 300명은 16:40에 지산파출소 파괴하며 시위” (주: 광주공원은 5월 21일 오후 5시까지 시위 지휘소이었고, 무기 분배 하고, 사격술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들 5월 21일, 오후 5시에 전남도청을 접수한 세력이 바로 이 600명이었다)
5. 광주출신 김영택 기자의 검찰 신문조서
문: 그 전에도 연·고대생 300여 명이 광주시내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어떤가요. 답: 위와 같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500여 명이 광주시내에 나타나던 날 10시45분에 저는 도청 앞에서 취재하고 있었는데, 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연·고대생이 광주에 도착했다고 하며 위와 같은 방법으로 환영행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 그 다음날인 5월23일 오후경 복면부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화시키고 확산시켰다고 했는데,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위하던가요. 답: 저는 당시에 도청 앞 및 금남로 일대에서 복면부대들이 하는 시위광경을 지켜보았는데, 그들은 수십 대의 버스와 트럭 등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몽둥이를 각자 하나씩 들고 차량을 치면서 『全斗煥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계엄해제하라』, 『金大中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를 통하여 주위에 있는 기존의 시위대들로 하여금 시위를 과격하게 하도록 유도했으며, 그때부터 시위는 더욱 가열되고 확산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시위대학생 등이 총기를 반납하고 대화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며 총기를 반납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우리는 끝까지 투쟁을 하여야 한다』고 외치면서 시위를 과열시켰습니다.
문: 복면부대들이 언제까지 시위를 주도했나요. 답: 그들은 5월 26일, 再진입작전이 임박하자 어디론지 전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6. 전옥주(본명 전춘심)의 증언
'5.18 연고대생의 실체' 민원에 대한 광주시 답변
민원신청 민원제목- 5.18민주화운동 당시 연고대생 600명의 실체와 활동
민원내용 : 1980년도 당시 광주에서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당시 5.18단체측이 널리 홍보한 연고대생 600명의 시위 가담에 관한 사실입니다. 이들의 실체여부와 이들의 당시 활동상황에 대하여 정부측의 자세한 해명과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처리기관- 광주광역시
인권담당관
◈처리결과(답변내용) 1. 시정발전 및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 감사드립니다. 2. 귀하께서 문의하신 사항에 대하여 알아본 결과 80년 항쟁일지에 ‘스피커를 통해 연․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발표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직접 가두방송을 한 전옥주씨는 그 당시 전달받은 쪽지를 읽었을 뿐 사실여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증언하고 있고, 3. 5․18민주화운동에 연․고대생 참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였으나 현재까지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 bo_table=board02&wr_id=47315&sca=&sfl=wr_subject%7C%7Cwr_ content&stx=%B1%A4%C1%D6%BD%C3+600%B8%ED&sop=and
▲위 주소를 클릭하면 518기념재단의 홈페이지 중 “광주사태 타임라인”이 게시돼 있다, 광주사태 시간표인 것이다. 여기에 기재된 일지 중 5월 22일, 15:08분 상항이 슬쩍 변조됐다. 변조된 사실은 2013년 7월 14일 네티즌들에 의해
발각됐다 "5월 22일,15:08 서울서 대한생 5백여명 광주 도착, 환영회 거행"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것이 최근 "5월 22일,15:08 시위도중 연행된 시민. 학생 등 800 여명 석방되어 도청도착"으로 둔갑돼 있다. 핵심 증거이기 때문에 둔갑시킨 것이다.
“5월 22일 오후 3시 08분,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연고대생 600명’에 대한 환영대회를 가졌다.”
9. 1980년 3월 28일의 경향신문 보도 (제목: “북한특수부대 남파”) 1979년 5월 북한은 당시가 혁명전야의 시국으로 규정하고 남한 전국 단위의 폭동을 획책하기 위해 간첩들을 남파하고 있다.
2014. 2. 3.
지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