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택신회 선사 ‘공인’…홍주종 득세로 잊혀
〈24〉선종에 7조가 없는 이유
“본래 내가 이 땅에 온 뜻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들을 제도하려는 것이었다. 한 송이의 꽃에서 다섯 꽃잎이 열리니,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리라.<전등록>”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가 2조 혜가에게 내린 전법게다. 자신이 중국으로 건너온 이유를 밝히며 앞으로의 선종사(禪宗史)를 내다보고 있다. 한 송이의 꽃과 다섯 꽃잎은 달마 본인과 그의 법맥을 계승한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등 다섯 제자를 가리킨다. 6조인 혜능스님에 이르러 조사선(祖師禪)이 뿌리를 내렸으니 달마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마음이 부처(卽心是佛, 즉심시불)’임을 역설하며 조사선을 완성한 6조 혜능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그의 법문과 행장을 모은 <육조단경>이, 록(錄)이나 어(語)가 아닌 경(經)으로 불린다는 점이 단적인 예다. 당시의 수행자들에게 혜능은 부처님과 동급이었던 것이다. 반면 6조를 끝으로 선사들의 계보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직접적으로는 6조가 열반하면서 자신의 의발(衣鉢)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
알고 보면 7조는 있었고 더구나 여럿이었다. 계파에 따라 7조로 올린 인물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육조단경>은 ‘…홍인-혜능-신회’ 순으로 법맥을 정리했다. 즉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가 7조인 것이다. 이에 반해 혜능의 라이벌이었던 신수(神秀) 계열의 북종선(北宗禪)에선 대조보적(大照寶寂) 선사가 7조의 자리를 꿰찼다.
다만 ‘자칭’이란 게 조금 께적지근하다. <대조보적선사비>에는 “홍인은 대통신수에게서 법을 이었으며 대통은 나(보적)에게 전해서 지금의 7조가 됐다”고 적혔다. 한편 문헌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6조는 혜능이 아닌 법여(法如) 선사였으며, 여기에 근거하면 7조는 ‘원규’다.
전거에 따르면 신회 선사가 명실상부한 7조다. 천자(天子)가 공인한 덕분이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화엄과 선>이란 책을 번역하며 당나라 규봉종밀 스님과 수행에 조예가 깊었던 정승 배휴(裵休) 사이에 오간 편지를 소개했다. ‘왜 6조까지만 있고 7조 8조 9조 10조는 없느냐’는 배휴의 질문에 규봉종밀은 ‘7조는 있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사연인즉 당나라 제9대 황제였던 덕종은 서기 796년 태자에게 선종의 적자(嫡子)와 방계를 가리고 7조도 정할 것을 명했다. 이를 통해 옹립된 이가 바로 신회였다는 이야기다. 신룡사란 절에 일련의 과정을 적은 비석을 세우고 황제가 몸소 7대 조사 찬문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아쉽게도 비석도 찬문도 오늘날엔 전하지 않는다.
물론 ‘신회 7조설’ 역시 의뭉스럽다. 그는 너무 정치적이었다.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병역기피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승적(僧籍)을 대량으로 팔았으며, 막대한 이문을 남겨 국가 재정을 메워줬다. 황제의 신임도 이런 류의 행보와 연관됐을 공산이 크다.
당초 신수의 문하였으나 신수가 인정해주지 않자 혜능 쪽으로 돌아선 전력도 있다. 자신만이 혜능의 직계제자라고 강변하는 동시에, 신수에 대한 비판으로 평생을 보냈다. 혜능에 대한 ‘신화화’도 그가 주도했다는 의견이 많다.
신회는 혜능을 6조로 만든 주역이었으나 정작 자신은 7조를 지키지 못했다. 평상심(平常心)으로 유명한 마조도일 선사의 홍주종이 주류로 부상하면서, 잔머리나 굴릴 줄 아는 지해(知解)종도로 위상이 급전직하했다. 홍주종은 공석이었던 7조에 마조의 스승이었던 남악회양을 모셨다.
해인사승가대학장 원철스님은 “7조는 6조가 물려주는 게 아니라 8조가 만드는 것”이라며 적통논쟁의 그늘을 꼬집었다. 일견 양반들의 족보싸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희미한 7조의 실체는 어쩌면 7조를 둘러싼 갈등이 혼탁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불교신문3118호]
첫댓글 승가에서도 머리가 복잡다 ㅎㅎㅎ
혜능에 대한 ‘신화화’도 그가 주도했다는 의견이 많다
6조는 회택 신회선사가 우상화했다
ㅎㅎㅎ
잔머리나 굴릴 줄 아는 지해(知解)종도로 위상이 급전직하했다
그는 7조를 지키지도 못했다
자신을 지키지도 못했다는 말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