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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붕(朴有鵬) ? - ? (1806~66)
조선 철종-고종 때의 관상가.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이다.
별호는 백운학(白雲鶴)으로, 한국 관상가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원조 백운학이다.
출생과 성장
젊은 시절부터 관상과 점술을 공부하였으며,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 스승으로부터 애꾸눈이 되면 더욱 신묘하게 관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송곳 혹은 젓가락으로 찔렀다고도 하며, 아예 담뱃불로 지졌다는 말도 전해 온다.
역시 매천야록에 쓰여진 바에 따르면, 그가 장가든 처가가 명나라 무장 두사충(杜思忠)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두사충은 명나라 기주자사 두교림(杜喬林)의 아들로 상서 벼슬을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조선의 원병요청으로 출병이 결정되자 이여송(李如松)·진린(陳璘)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왔다가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다.
두사충은 당대 풍수, 점술, 관상의 일가를 이루었던 사람으로, 조선에 정착한 뒤 자신의 풍수, 점술, 관상에 대한 지식을 정리한 비전서(秘傳書)를 남겼다고 한다.
그가 조선에 남은 것도 명나라가 곧 청나라에 멸망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어쨌든 박유붕은 처가에 전해지던 이 책들을 입수하여 공부하였고, 이로써 장안 제일가는 관상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매천야록에서 한가지 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박유붕의 처가의 본관을 만경두씨(萬頃杜氏)라고 쓰고 있는데, 두사충의 후손은 두사충의 고향인 중국 두릉(杜陵)을 본관으로 삼아 두릉두씨(杜陵杜氏)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사실과는 다르다.
만경두씨는 고려 무인정권시대의 무장 두경승(杜景升)을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지금의 김제인 전주 만경현이 본관지이다. 두경승의 후손은 이 만경현을 본관으로 분파하기도 했고 일부는 그대로 두릉두씨에 남았지만, 두경승의 후손과 두사충의 후손은 따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 황현이 뭔가 착각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항간에 알려진 이야기가 잘못되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궁도령을 돕다
철종조 안동 김씨의 세도 말기에 아직 궁도령이라 불리며 안동 김씨로부터 모욕을 받던 흥선군 이하응에게 곧 천하가 쥐어잡힐 것이라 점치고 운현궁(흥선군의 사가)을 찾아간 그는, 제기를 차고 놀고 있던(팽이치기를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의 관상을 보고 그 자리에서 "상감마마!"라고 외치고 엎드려 절했다.
이에 놀란 흥선군이 그를 불러들여 사정을 묻자, 박유붕은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기에 찾아뵈었더니 둘째아드님께서 제왕의 골상을 타고 나셨음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야심을 숨기고 있던 흥선군이 흥미를 가지고 그게 언제쯤일지 물었더니, 박유붕은 앞으로 4년 뒤일 것이라고 말했다.
흥선군은 그것을 반신반의하며 관상을 보아주었으니 복채를 주어야 할 것인데 자신은 궁도령 신세이니 어찌하겠느냐 농을 하였다. 그러자 박유붕은 자신의 말대로 될 것이니 4년 뒤에 받으러 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것도 아닌 제왕의 관상을 보았으니 최소한 3만냥은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흥선군은 이 말을 제대로 믿지 않았다.
그런데 4년 뒤인 1863년, 흥선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조씨)의 합작으로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이 철종의 뒤를 이어 새 왕으로 즉위했다. 이가 곧 고종이다. 흥선군이 신정왕후를 만나 암암리에 인맥을 쌓았던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박유붕의 말대로 된 것이다.
대원군 섭정기
고종이 즉위하고 얼마 뒤, 박유붕은 대원군으로 올라선 이하응을 찾아가 약속했던 3만냥을 받으러 왔다고 말한다. 박유붕의 지인지감에 탄복하고 그를 곁에 두고 싶었던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을 자신의 책사로 두었고, 운현궁 바로 옆에다 45칸 저택을 마련해주었으며, 수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넓은 땅도 내려주었다.
이를 시작으로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을 잠저시절부터 모셔오던 중인 4인방(천하장안)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활약했다. 이때부터 별호인 백운학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복채를 받으러 왔을 때 "죽고나서 신위에 현고학생부군이라고 쓰여질 것이 싫으니, 나리께서 벼슬 하나 내려주시어 학생 신세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면 알겠지만 벼슬이 없는 남자는 죽어서 신위에 학생(學生)이라고 쓰도록 되어있다. 배우는 입장의 학생이 아니라, 벼슬못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박유붕은 1864년(고종 1년) 언양현감에 제수되었다. 지금은 자수정과 한우로 유명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이다. 이를 시작으로 박유붕의 출세길이 열렸다. 언양현감을 지낸 뒤 남양부사로 옮겼다가 이후 여러 현직을 거쳐 정3품 당상관의 품계를 받았다. 점쟁이로서는 유례없는 관직행보였다.
의문의 최후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멀어지는 계기가 일어나게 되니, 나중에 명성황후가 되는 규수 민자영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오랜 시간동안 외척이었던 안동 김씨의 세도를 척결한 뒤, 다시는 외척의 발호가 없는 조정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고종의 중전후보로 자신의 처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치록의 딸 자영(민자영, 곧 나중의 명성황후)을 점찍어두고 박유붕에게 관상을 보게 했다. 그러자 박유붕은 장래 흥선대원군의 앞을 막게 될 것이라며 세번이나 반대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으며, "내 며느리를 뽑는 게지 자네 며느리를 뽑는 거라든가?"라며 역정을 냈다. 결국 새 중전은 흥선대원군의 뜻대로 자영이 간택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앞길을 흐리게 하는 시초가 된다.
하지만 지인지감으로는 박유붕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기에 흥선대원군은 여전히 박유붕에게 의견을 묻거나하며 곁에 두었다. 그러나 박유붕의 화려한 경력은 곧 끝나게 된다.
중전 민씨(민자영, 곧 나중의 명성황후)와 고종의 사이는 처음엔 그닥 좋지 않았다. 그것은 고종이 연상의 궁녀를 총애하는 등 중전을 등한시했기 때문이었다. 중전 민씨는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고종의 마음은 중전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박유붕은 처음 반대 입장이었던 중전 민씨와 운현궁 사이의 절충점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균형이 1868년에 깨진다. 귀인 이씨(영보당 이씨)가 고종의 서장자이자 첫 아들인 완화군(完和君)을 낳은 것이다.
완화군을 총애한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완화군을 원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박유붕은 완화군의 명이 길지 않음을 알고 중전 민씨의 편에 가까운 입장을 표하며 사실상 반대를 하게 된다.
이에 노한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을 관직에서 추방했으며, 흥선대원군에게서 버림받은 박유붕은 자신의 시대가 다 되었음을 알고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그의 죽음은 명성황후가 중전으로 간택되던 그 시점을 전후해서라고도 하는데, 장래 시아버지가 될 흥선대원군의 눈에는 들었지만 결정적으로 관상의 대가였던 박유붕에게 반대당하는 것이 꺼림칙했던 명성황후 측에서 사람을 보내 사정했으나, 박유붕은 나머지 한쪽 눈을 마저 지지고 장님이 되어 더이상 관상을 볼 수 없다고 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도 한다.
매천야록에도 그가 한쪽 눈을 마저 지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박유붕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예감하자 주저앉고 장님이 되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관상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점쟁이로서의 길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박유붕이 버림받은 뒤, 완화군은 그대로 원자에 책봉될 듯 했지만 중전 민씨측의 견제로 불발로 끝났고, 이후 완화군은 1880년 13살의 나이에 병을 얻어 요절하고, 생모인 영보당 이씨도 충격에 뒤를 따르듯 병으로 죽었다. 박유붕의 우려는 실현되었던 것이다.
현대 매체에서의 박유붕
2009년부터 현재까지 만화가 유승진이 연재하고 있는 웹툰 포천의 앞부분에서도 박유붕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으며, 같은 작가의 웹툰 한섬세대에도 등장한다. 지금도 박유붕, 백운학의 두 이름은 우리나라 점술가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MBC 드라마 닥터 진의 등장인물 춘홍의 캐릭터는 이 사람에게서 약간 가져온 듯하다. 신점을 볼 줄 안다는 설정이나 사람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 그리고 흥선군의 참모 역할도 하고 있는 점은 점쟁이이자 특히 관상에 능했던 박유붕과 공통점이 있다.
[조용헌 살롱] 대원군 책사 박유붕
입력 : 2008.03.12
군왕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용인(用人) 능력이고, 신하가 갖춰야 할 자질은 용사(用事)이다. 군왕은 자질구레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잘 골라 쓰면 된다. 신하는 맡은 일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구한말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가장 고심한 것도 사람을 판별하는 일이었다. 매일처럼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밀려드는 사람들 가운데 옥석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때 대원군이 고용한 책사가 박유붕(朴有鵬)이라는 인물이었다.
박유붕의 주특기는 바로 지인지감(知人之鑑)이었다. 관상의 대가였다. 대원군 옆에 앉아서 내방객들의 얼굴과 행동거지를 보고, 그 성격과 주특기를 판별해주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박유붕의 내력을 추적해 보니까, 그는 경북 청도가 고향이었다. 박유붕이 관상에 일가견을 갖게 된 계기는 처갓집의 내력이 작용하였다.
장가를 '만경 두씨(萬頃 杜氏)' 집안으로 갔는데, 이 처갓집이 임진왜란 때에 이여송의 참모로 따라왔다가 조선에 눌러 앉았던 중국 도사 두사충(杜思忠)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처가에 전해 내려오던 두사충의 풍수서와 관상서를 박유붕이 입수할 수 있었고, 이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서울 운현궁으로 올라갔다. 운현궁 마당에서 제기를 차며 놀고 있었던 명복(命福) 도련님의 관상을 보고, 앞으로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 예언이 들어맞았다.
명복 도련님이 고종으로 등극할 무렵부터 대원군은 박유붕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도록 운현궁에다가 붙들어 놓았다. 이때부터 세간에는 일명 '백운학'으로 알려지게 된 인물이 바로 박유붕이었다. 말하자면 원조 백운학이 청도사람 박유붕이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복채(福債)로 서울 '삼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구역을 박유붕에게 떼어 주었다. 그가 살았던 45칸 집은 운현궁 길 건너편에 있었다. 현 '수운회관' 뒤였다. 어느날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며느릿감으로 데려왔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유붕은 반대하였다.
한 번 반대하고, 두 번 반대하고, 세 번째 반대를 하니까, 대원군이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당신 며느리 보나?"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후손인 박이수(朴二洙·73)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 일을 계기로 대원군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박유붕의 전자고택
전자고택(田字古宅)에는 훈훈한 미담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집이 99칸으로 집을 지을 때 많은 목재가 필요했다. 문제는 어떻게 많은 목재를 조달해 오는 데에 따라 집을 잘 건축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어 어려웠는데 이 집에서는 사람을 시켜 산 주변의 소나무에다가 금액을 써 붙이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 한 냥, 중간 나무는 두 냥, 큰 나무 세 냥, 이런 식으로 기록하고, 이 소나무를 운반만 해주면 써진 금액대로 돈을 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무만 가져다주면 돈이 생기니까 신이 났다. 대개 다른 집 부자들은 돈을 주지 않고 권세를 힘입어 공짜로 노동력을 이용하였지만 박씨 집안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적선을 베풀었다 한다. 그 득분에 6.25동란 때 다른 부자집들은 모두 불에 타 없어졌지만 이 고택은 훼손하나 되지 않고 잘 보존 되었다 한다.
박유붕:
박유붕은 관상을 잘 보았다고 한다. 그는 어늘날 흥성대원군을 만나 그의 아들(명복)의 관상을 보았는데 왕이 되실 귀한 재목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명복은13세에 고종이 되었다. 박유붕의 관상보는 실력에 감탄한 흥선대원군은 복채로 서울에 삼선교에서 돈암동까지의 토지와 남양부사의 관직을 주었고 그후 정삼품 당상관인 조수영 수사까지 벼슬을 하였다.
어느 날, 대원군이 며느리감으로 명성황후를 데리고 왔는데 명성황후의 관상을 보고 박유붕은 혼인을 반대를 했다. 계속 반대를 하자 흥성대원군이 당신이 며느리를 보냐며 화를 냈고 이를 계기로 흥성대원군과 사이가 멀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명성황후쪽에서 박유붕에게 관상을 보아 달라며 사람을 보냈다. 거기가면 결과적으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박유붕은 계속 미루다가 결국 인두로 한쪽 눈을 지졌다. 눈이 멀어 관상을 볼 수 없다며 자신의 운명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얼마 후 사인이 발혀지지 않은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인두로 눈을 지져 애꾸눈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박유붕이 스스로 관상을 보니 한쪽 눈이 없어야 귀인이 된다고 판단하여 자기를 애꾸눈으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