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싸리나무와 야생화들, 유배 가던 단종 모습 기억할지…
-옛길을 찾아서 원주시 신림면 싸리재 옛길 -월간 산(2010.10월호)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겨 유배길에 오른 단종,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약을 받은 집현전
원로학자 성삼문. 그 성삼문은 죽기 전 단종을 그리는 애절한 시조
‘단종(端宗)’을 애달프고 구슬프게 읊었다.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밤마다 잠을 청하니 잠은 이룰 수 없고 /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단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 중의 한 명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 조부모를 다 여의고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끝내 목숨마저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삶을 살았던 단종, 그의 삶 자체가 세인들의 한없는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비운의 삶을 산 단종의 흔적은 여기저기 유적으로 흩어져 있고,
또 그가 눈물을 머금고 가던 길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원주 싸리재는 단종이 귀양 가던 에 넘었던 고개다.
한양에서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싸리재 길은 말 그대로 고갯길이다. 지금은 산 아래로 터널이 뚫려 산책로로 이용하지만 한때는
영월로 가는 차들이 다녔던 신작로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만든 영월~원주 간의 유일한
통로였고, 그 이전에는 방랑시인 김삿갓과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지났던 길이었다고 전한다.
산 아래로 터널이 뚫린 덕분에 싸리재는 옛길로 거듭나 운치를 자아내는 분위기 있는 길로 바뀌었다.
슬픔의 고갯길 ‘싸리재’는 원주시 신림면 치악산 명성수양관에서 시작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싸리재옛길’이란 간판이 크게 붙어 있다. 옛길식당, 싸리치농원 등도 이정표로 같이 있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싸리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싸리치마을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싸리나무는 이제는 사라져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원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양한모씨가 말했다.
한때 차들이 다녔던 길이라 그런지 시원스레 걷기에도 좋다. 몇 년 전 폭우가 쏟아져 움푹 파인 길이
많았으나 마사토와 황토로 복토하며 깔끔하게 정비했다고 양 해설사가 전했다.
길 양옆으로는 계곡과 산이어서 크게 자란 나무들이 적당한 그늘을 드리워 가로수 역할을 대신했다.
한때 싸리재 고갯길은 나무들이 우거져 ‘신(神)들의 숲’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한여름에도 곳곳에 그늘이 있을 정도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싸리나무 많았다고 해서 싸리재
싸리치마을 사람들은 채밀, 싸리비, 땔감 등을 지고 한양과 영월로 넘나들며
소금, 생선 등을 사가지고 돌아왔던 애환 서린 곳이다. 길에서의 애환은 당대는
모르지만 시대가 흐른 뒤에는 누구나 보고 느낄 수 있다. 마치 단종이 지나간 길을
지금의 사람들이 애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문종의 왕비인 현덕왕후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홍휘 왕자를 분만했다.
난산으로 간신히 해산을 하긴 했지만 기력이 쇠진해진 탓에 3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녀는 죽기 직전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 양육을 부탁하며 어미로서의 역할을 못 하고
떠나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하늘나라에서 보살필 것을 기약했다.
홍위는 여덟 살 되던 1448년(세종 30년) 세손에 책봉됐다. 할아버지 세종은 세손 홍위를 무척이나 아꼈다.
홍위는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재주가 영특해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던 것으로 역사서는 전한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세종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을 잘 보필하라”고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 자신도 병세가 깊어 죽음을 얼마 두지 처지였고, 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듯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로운 인물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로한 왕은 어린
세손이 그 대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날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죽고 세자 향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단종의 아버지 문종이다.
홍위는 당연히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됐다. 그 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뒤에도 집현전 학자인
이개와 유성원이 교육을 계속 맡았다.
그러나 문종은 즉위 2년 3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세종 말년 10여 년간 병든 세종을 대신해서 정사 등 궁중의
스무 살 이하의 미성년 어린 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 관례인데, 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 왕비조차 없었다. 열두 살 어린 왕 단종은 기댈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처지였다.
어쩌면 불행의 씨앗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 단종은 즉위 후 왕족 대표 두 사람에게 자신을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가장 가까운 직계 혈족의 최고 어른이자
아버지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과 수양의 네 번째 동생이자 일찍이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 방석의 양자로 입적되어
촌수로 따지면 수양의 당숙이 되던 금성대군이었다. 금성대군은 성격이 곧기는 하나 세력은 없었고,
정권욕도 없는 사람이었다. 왕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인물은 단연 수양대군뿐이었다.
수양은 원래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독점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원주~영월 가던 외길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총서편에는 ‘타고난 자질이 공검하고 예절이 있었으며,
또 충성스럽고 효도하고 우애가 돈독했다. 인(仁)을 좋아하고 의(義)에 힘썼으며, 소인을 멀리 하면서도
미워하지 않았으며, 군자를 가까이 하면서도 편사하지 않았다. 문학과 활쏘기와 말타기가 고금에 뛰어났으며,
역학·산학·음률·의술·점·기예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묘를 다했다.
그러나 항상 스스로 이를 숨기고 남의 위에 오르려고 하지 않으니, 세종이 이를 기특히 여기고 사랑해
대우를 여러 아들들과 달리했으며, 무릇 군국대사에는 반드시 참결하도록 했다’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능력이 출중한 성군으로 칭송하고 있다.
어린 단종은 정사를 돌볼 수 없어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든 고명대신들,
이른바 황보 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었다.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수양·안평·임영·금성·영응 등의 왕숙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 간의 세력다툼은 급기야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김종서와 황보 인 등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의 세력팽창을 막기 위해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좋은 ‘사냥감’이 생긴 셈이었다. 1453년 10월 드디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참살하고, 황보 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없애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해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명분이었다. 조정은 일시에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할 서무를 관장하는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1454년 열네 살의 나이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6년엔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 출신과 성승·유응부 등이 상왕복위사건을 일으켜 사형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로 인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된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총서편에는 단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노산군(魯山君)의 휘는 이홍위이고, 문종 공순왕의 외아들인데, 어머니는 권씨다.
세종이 왕세손으로 봉하고, 문종이 영의정 황보 인을 보내어 국저(國儲)로 삼도록 청하였다.
문종이 경복궁 천추전에서 훙(薨)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노산군을 받들어 함원전(含元殿)에 들어가 거처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왕의 기록 중에 가장 짧고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것도 단종이 아닌 노산군으로 적고 있다.
단종이 눈물을 삼키며 유배지로 가던 그 길을 지금 걷고 있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 단종은 관리 3명과
군졸 50여 명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광나루를 건너 여주→원주 부론→귀래→신림(싸리재)
주천을 거쳐 유배지 청령포에 이르렀다.
싸리재는 단종에게는 눈물의 고갯길이고, 서민에게는 삶의 애환이 깃든 생활의 길이다.
단종은 이 길을 걸으며 숙부인 수양대군을 얼마나 원망했을 것이며,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부재를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길을 걸으니 마치 단종의 애통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정상은 해발 596m지만 몇 십 년 전까지 차도 다녀
길 중간쯤 다다르자, 뜻밖의 ‘자연휴식년제 출입통제’란 푯말이 나왔다. ‘이게 뭐냐’ 싶어 자세히 읽어 보니
길 옆 계곡에 많은 사람이 출입해서 훼손된 듯 계곡출입을 금지한다는 팻말이 보인다.길가엔 야생화가 만발했다.
올라갈수록 싸리나무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노란색의 자잘한 꽃이 활짝 핀 금마타리, 꽃 모양이 나비를 닮은 땅비싸리, 꽃향기가 좋은 사위질빵, 뿌리나
꽃에서 노루오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은 노루오줌 등이 처음 온 내방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계곡에선 가끔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안내한 양한모 해설사는 “이 계곡엔 원체 물이 맑아
1급수에만 사는 버들치와 메기 등도 살고 있다”고 했다.
양 해설사는 홍수로 계곡물이 넘쳐도 고기들이 그대로 살아 남는 비결을 설명했다.
들어가 살기 때문에 폭우가 쏟아져도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피할 수있어요
길은 구불구불 굽이졌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듯 경사도 매우 완만해졌다. 숨결도 조금 잦아들었다.
마침 쉴 때를 아는 듯, 의자가 나왔다. 의자 뒤로는 마치 작은 폭포같이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양 해설사는 “여기가 말 그대로 실금폭포”라고 가리켰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양 해설사는 “마사토로 복토한 길이라 맨발로 걷기 좋은 길”이라고 자랑했다. 훌쩍 자란 낙엽송이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도 걸을 만했다. 마침 새끼 뱀 한 마리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지난밤에 내린 비로 젖은 몸을 말리려 나온 듯했다.
30분 정도 더 걸려 싸리재 정상에 도착했다. GPS고도로는 596m다. 웬만한 산 높이다.
길옆으로는 나무가 많긴 했지만 낭떠러지였다. 이 길로 옛날에,
아니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차가 다녔다니, 믿기질 않았다.
정상 영마루엔 ‘싸리치’ 노래 시비 있어
정상에 비석이 하나 있다. ‘싸리치’라는 제목으로 시가 새겨져 있다.
‘산굽이 돌아돌아 골짜기마다 / 싸리나무가 지천이어 / 싸리치라네 // (중략) 단종의 애환 구름으로 떠돌고 /
김삿갓의 발길이 / 전설처럼 녹아 있는 / 영마루--- // (후략)’
정상에는 정자가 서 있고 공간이 넓어 주변을 둘러보며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분명 영월 유배지로 가던 단종도 여기서 쉬었으리라. 그는 주변을 살피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영월 유배지에서 단종은 적적함과 침울함을 달래기 위해 관풍매죽루에 올라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를 한 수 남겼다.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 시름 못 잊어 다락에 기대었네 /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 /춘삼월 자규루에는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
약관도 안 된 단종이 이토록 절절하게 세상을 읊었다.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뒤 인생의
비애감을 절실히 느낀 사람 같은 감정이 스며 있다. 단종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으리라. 할아버지 세종의 온화한 얼굴과 아버지 문종의 근엄한 얼굴, 그리고 자신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성삼문·박팽년 등의 피어린 눈물도 생각나고,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도 주마등같이
스쳐갔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시심이나 떠올리며 여기서 그냥 조용히 한세상 보내리라 결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의 끝은 거기가 아니었으니….
상왕복위사건이 무위로 돌아가자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됐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봉되고, 한 달 뒤인 10월에 만 17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숙부 세조의 무서운 얼굴은 어린 단종에게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의 무슨 업 때문에
이토록 참혹함을 겪어야만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을 것이다.세조의 명을 받고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은 형(刑)을 집행하고
(왕방연은 사약을 거부하는 단종에게 차마 강제로 마시게 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사이
하인 복득이란 자가 활시위로 뒤에서 단종의 목을 졸라 참혹하게 숨을 끊었다는 설도 있다)
싸리재를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비통한 심정으로 시조 한 수를 남겼다. 누구나 한번쯤 봤을 법한 시조다
.
천만리 머나먼 길 / 고운 님 여의옵고 /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 울어 밤길 예놋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즉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은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가족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자, 세조는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
그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의 왕권강화와 불교 융성책은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자신과 같이 다시는 왕위에 도전하지
못하게끔 왕권중심으로 정사를 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죽여 버린 행동은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싸리재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단종과 세조, 숙부와 조카, 조선왕조실록의 평가 등등.
실제로 지금까지도 다양한 평가가 있다. 역사적 사실은 분명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단종은 그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설은 단종이 사약을 마시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묘사한다. 어찌된 일일까?
또 있다. 영월과 평창은 서로 인접한 마을인데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감싸고 도는 반면, 평창에서는
세조를 감싸고 돈다. 무속에서는 단종을 산신으로 모시면서 신격화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세조를 감싼다.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문학적 진실은 또 어떻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전설과 무속, 종교는 어디까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까? 단종의 유배길인 싸리재를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길은 역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원주, ‘걷기의 메카’ 자처하며 걷는 코스만 20여 개 조성…국제걷기대회도 열어
원주엔 많은 축제가 열린다. 9월 1~5일에는 2010 강원감영문화제가 원주 강원감영지 및
중앙로 문화의 거리 일대에서 열린다. 감영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을 말하며,
따라서 감영문화제의 백미는 관찰사가 각 고을을 순찰하던 순력행차가 꼽힌다.
취고수악대를 선두로 해서 기수와 군관, 군졸, 의장, 대고수를 이어 관찰사와 육방관속이 행차하며,
역대 관찰사 후손들이 뒤를 따르는 전체 2,000여 명 규모의 대형 행차와 퍼포먼스로 진행된다.
이어 9월 8~12일에는 원주따뚜 세계 군악 & 마칭밴드 페스티벌이 열린다.
미국·일본 등 9개국 20개 팀 1,500여 명이 참석, 군악대를 통한 음악의 하모니를 뽐낼 예정이다.
또 매년 4월 4일 영월 단종제 전후해서 단종 관련행사를 개최한다.
2002년엔 단종의 유배행렬 답사를 서울에서부터 싸리재를 거쳐 황둔장터까지 진행했다.
이 외에도 치악산 복사꽃축제(4월), 치악산 산나물제(5월), 장미축제(6월), 섬강축제(8월),
치악제(9월), 한지문화제(9~10월) 등이 열린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며, 세계 각국에서 신청자들이 쇄도한다.
원주시 일원에서 펼쳐지는 국제걷기대회는 5㎞, 10㎞, 20㎞, 30㎞, 50㎞ 등으로 나눠 개인의
취향대로 선택해서 참가하면 된다. 문의는 대한걷기연맹(033-762-2234).
원주시는 ‘걷기의 메카’를 자처하며, 싸리재 옛길 이외,
시에서 조성한 걷기 좋은 코스가 무려 20개에 달한다. 약 5㎞에 달하는 호저 대덕리 순환코스는
섬강 주변에 군락을 이룬 갈대와 전원풍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한다고 소개했다.
원주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11㎞쯤 되는 백운산자연휴양림 순환코스는 대한걷기연맹 공인
제1회 숲길로 아름드리 수목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는 멋진 길이다. 뿐만 아니라 개나리·연분홍 등 꽃길이
조성된 아름다운 제방길을 따라 걷는 남한강대교~흥원창 산책로 코스 등도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싸리재 탐방 가이드]
신림면 명성수양관서 출발…넓은 외길이라 ‘알바’ 우려 없어
싸리재는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치악산명성수양관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오른쪽에는 옛길식당 등이 보인다. 식당가와 명성수양관을 지나면 양쪽으로는 주로 밭이다.
옥수수와 고추 등을 키우고 있다.
한때 차가 다녔던 큰길이고 외길이라 길을 잃을 우려는 별로 없다. 길 따라 올라가다 처음 나오는
다리가 옛길교다. 옛길교를 지나자마자 펜션 같은 집이 한 채 있다. 싸리재 가는 길은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큰 길 따라 올라가야 한다. 이어 농바위골농원이 나오기 전, 통행을 제한하는 문이 나온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문은 항상 열어놓고 있지만 개인 사유지다. 무심코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안 되고
왼쪽 큰 길로 가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싸리재농원이 나온다. 싸리재 여인과 싸리재 장승이 입구에 세워져 있다.
바로 그 옆에 남근상이 우뚝 솟아 있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장소다.
1㎞ 남짓 가면 실금 같은 폭포가 바위 벽면을 타고 내리는 곳이 나오고, 그곳에 의자도 있다.
이곳에는 낙엽송나무와 소나무가 크게 자라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장소다.
이곳부터는 정말 외길이다. 한쪽은 산사면이고, 다른 한쪽은 낭떠러지다. 갈라질 등산로도 없다.
약 2㎞쯤 올라가면 싸리재 정상이 나온다. 정자와 시비(詩碑), 그리고 넓은 공간이 있어 영마루라 부른다.
발 아래 땅 속으로 신림터널이 지나고 있다.
길은 네 갈래다. 북(왼)쪽으로는 치악산과 응봉산 혹은 매봉산으로 가고,
남(오른)쪽으로는 감악산으로 가는 등산로다. 저 멀리 매봉산 정상 봉우리도 보인다.
싸리재는 동쪽으로 직진이다.
내려가는 길 오른편에는 장뇌삼 재배지역으로 철조망을 쳐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싸리재숲속랜드’라는 펜션이 나온다. 이제 거의 다 내려간 셈이다.
싸리재숲속랜드 펜션에서 1㎞쯤 떨어진 거리에 88번 도로가 나온다. 영월로 넘어가는 도로다.
도로와 연결되는 바로 그 지점의 맞은편에 과적차량검문소 사무실이 있다. 여기가 싸리재 끝지점이다.
[주변 볼거리]
과적차량검문소에서 1㎞쯤 도로 옆 인도 따라 내려와서 왼쪽으로 500m쯤 올라가면 우리나라 유일의
고판화박물관이 있다. 내려오는 길은 인도폭이 좁아 조금 불편하다.
고판화박물관엔 국내 판화와 중국, 일본, 티베트, 몽골판화까지 9년에 걸쳐 수집한 판화를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삽화판화, 불화판화, 문양판화, 민화판화까지 다양한 판화를 볼 수 있다.
1박2일, 2박3일 전통판화체험학교도 운영하고 있어 언제든지 신청이 가능하다.
문의 033-761-7885 또는 011-360-7885. 고판화박물관에서 주천면 방향으로 700m가량
내려가면 감악산 등산로 출발지점이 나온다.
50여 종 내외의 나무와 풀로 뒤덮인 숲이 천연자원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치악산국립공원이 바로 옆에 있다.
교통
승용차로는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로 가다 중앙고속도로로 바꿔 타자마자 나오는
고속버스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원주행 버스가 있다.
20분 내외 간격으로 수시 운행하며, 일반고속 6,800원, 우등고속 1만원. 1시간 30분 정도 소요.
원주고속버스터미널이나 바로 옆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24번이나 25번 시내버스를
타면 신림면으로 간다. 택시를 타면 보통 2만원 남짓 나온다.
개인택시 문의 018-281-1817 또는 011-378-3979.
맛집
신림삼거리 명성수양관 주변엔 음식점들이 많다.
시골밥상농가토속식당(033-762-8894 또는 011-9796-5759)은 산나물과 올갱이를 맛있게 한다.
싸리재 끝지점에서 고판화박물관이 있는 창촌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도 맛집들이 많다.
가든 풀잎향기 두메식당(033-766-2944 또는 010-8896-6466)은 청국장과 버섯전골 등,
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반찬들을 낸다. 조금 더 내려가 감악산 등산로로 들어가는 분기점에는
한우담소식당(033-765-8701~2)이 있다. 쇠고기를 직접 사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
/ 글 박정원 부장대우 jungwon@chosun.com
사진 김영훈
첫댓글 글을 보며 이광수의 역사소설 "端宗哀史"가 떠오르는군요.
가슴아픈 역사에 몸서리쳐지는건 어린 단종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강하게 전해져 오기 때문일겁니다.
저절로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고이는 이상한 그 곳은 역사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인 일 때문이었는지,,
제게는 아리고 서늘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시 가고 싶은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는 그 곳입니다.
요즘 날씨가 오락가락하다가 한낮엔 한여름의 날씨를 방불케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더욱 커다란 나무가 있는 그늘이 그리워지는걸요.
원주는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참 괜찮은곳이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요즘 제가 공부하고 있는 과목중 한국사가 있는데,이야깃거리가 있는길이라 나름 더 재밌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