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사당 1.2편에 이어서 3편에는 사당내 논개 유적물에 대하여 알아 보고자 한다
논개사당안에는 논개기념관,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논개영정등이 모셔져 있다
먼저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논개사당 광장을 거쳐 제일 첫번째문 외삼문 현판은 숭앙문이라 써있는 문을통해
사당안을 들어가면 왼쪽에는 논개님기념관이 위치해 있고 오른쪽으로 잘 단청해서
아름다운 비각이 보인다
희귀한 소나무 한그루가 비각을 지키고 있다 팔작지붕으로 된 비각은 풍우로부터 비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높이 6m 가로2.5m 세로 2.5m인 아담한 비각이다 이 비각안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의 비문 제목이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이다
정주석 현감이 1846년에 세운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이 비는 1844년(헌종10년) 장수현에 부임한 정주석(鄭冑錫) 장수현감에 의하여
1846년에 세워진 것이다 비석에 세겨진 제목 그대로 풀이하자면 ;
"우뚝솟은 이 돌에 쓰노라 의로운 기생 논개는 이고장에서 태어나서 자라다" 뜻이다
이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0㎝에 가로50㎝ 세로30㎝에 갓 두겁을 씌워진 육중한 무게이다
이 비석은 대단히 단단한 화강석으로 다듬어져 있으며 비문 역시 명문장으로 쓰여있다
논개 살신성인의 위대한 정신을 함축 작성 하였음을 엿 볼수있다
논개님이 그전에는 막연하게 민요가락이나 구전으로 장수를 의미한바 있으나 1800년 초에
호남절의록에 기록되기 시작하면서 논개는 장수인이다 이를 근거로하여 국가관청 수장인
현감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수명비 비문 내용
비석 뒷면에 쓰여진 비문 해석 ;
疾風板蕩不茍不易(질풍판탕불극불역)
질풍이 몰아치듯 국난을 당하였음에도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고
烈士所難而一女子(열사소난이일여자)
절개를 굽히지 않는것은 열사라도 어려운 일인데 한갓 여자의 몸으로
辦別大義視死如歸街(판별대의시사여귀가)
대의를 판단하여 죽음을 보기를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하였으니
基烈也.(기열야)
그 어찌 대단하지 아니한가.
想像當日凛热熱氣(상상당일늠열렬기)
그 당일을 생각해 보건데 그 늠름한 열기가
炳如日星何基壯也(병여일성하기장야)
해와 별같이 밝았으니 그 어찌 장엄하다 아닐손가
山有靈菌水有醴泉(산유령균수유예천)
산에는 영스러운 버섯이 있고 물에는 맛좋은 샘이 있으니
君子称尚况人之名節源根天性(군자칭상황인지명절원근천성)
군자라도 칭찬을 하거늘 항차 사람의 이름과 절개가 천성에 근원하여
布人耳目(포인이목)
사람의 이목에까지 퍼져 있음이랴
者手愧余六旬腐儒(자수괴여육순부유)
부끄럽게도 나는 육순의 보잘것 없는 선비로서
終旡成已之功(종무성이지공)
끝내 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이룸이 없음으로
每如斯人豊功義烈(매여사인풍공의열)
매양 이 사람같이 의렬의 큰공을 세운 이에게
艶服起敬尋常感槪(염복기경심상감개)
삼가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고 언제나 감동 감개 하였다
今義妓竪名傳(금의기수명전)
이제 의기의 수명을 전하니
後以生平趁㐋下風之願謹以書記識(후이생평진톨하풍지원근이서기지)
이후 그녀의 늘 영향을 따르기를 원하며 삼가 글로 적노라
崇禎 紀元後 四丙午 季秋上(숭정 기원후 사병오(1846년) 계추상-늦가을)
知縣 西元 鄭冑錫 詮識(지현 서원 정주석 전식)
子 幼學 基永 謹書(자 유학 기영 근서)
碑 有司 密陽 朴吉仁(비 유사 밀성 박길인)
이비는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설명하여 알리고 그의 아들 유학, 기영
둘이서 비석을 직접쓰고 밀성 박길인이가 책임지고 재정을 마련하여 세운다.
수명비 모셔진 비각
수명비의 수난
이 수명비는 1846년 정주석 장수현감이 목숨을 걸고 장수향교를 지킨 충복 정경손의 비와 함께
장수향교 입구에 같이 세웠다 최초로 세워진 위치는 현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77번지이고 당시
이곳은 옥거리(獄衙.옥아)라 부를는 곳인데 장터 입구여서 많은 사람들이 장에 드나들며 만인의
마음에 거울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곳에 1896년까지 세워져 있었다
이후 수명비는 시장 확장을 하기 위하여 현 장수읍 장수리 장수교육청 사거리 들길 옆으로
이전 하였다 수명비가 이 자리에 세워지면서 동네 이름도 이 비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운데
동네를 중비 아래쪽 동네는 하비 위쪽동네는 상비라고 이름을 붙이어져서 지금까지도 동네
이름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이후 일제시대 1939년에 우리나라 성씨를 일본식 두자 성씨로 고치게 하는 소위 창씨령을 내리며
5천년을 내려오는 우리의 전통적인 역사와 문화마져 파괴 말살하여 영원히 일제화 시키려 가진
만행을 감행했을 때이다 일제의 이 같은 포악무도한 와중에 임진왜란당시 일제에 가장 치명적인
복수와 타격을 감행한 논개의 수명비를 그대로 묵인해 둘리는 만무했다
1942년 11월 캄캄한 그믐날밤을 기하여 장수리에 사는 정모라는 사람을 시켜 5명을 지명했다
이재영, 박옥, 강홍길, 이이석, 서순영 장정 다섯명을 1942년 11월30일밤 12시에 정과 큰메와
삽과 괭이등을 준비하여 경찰서 앞으로 모이라는 지시였다 당시 장수경찰서 고등계에 근무하고
있던 한국인 서모라는 형사와 일본인 다야마라는 순사부장이 주동하여 만행을 져지른 것 이다
논개수명비 앞에 다섯명의 한국인 장정을 세워놓고 일본 다야마 부장이 엄하게 지시하였다
이 비는 일본으로 하여금 원수의 비석이다 이 비석 때문에 내선일체국체에 방해가 되면 안되니까
부서 없애라는 것이다
비각은 헐어서 멀리갔다 불태우고 비석은 부숴 땅속에 깊이 묻으라는 지시였다
일정시대에 잘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운 시대이기에 하라면 하는수밖에 특별한 대응이
없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다섯 장정은 어쩔수없이 비각에 손을 대려하자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고 광풍이 불며 진눈깨비가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작업을 지시하고 감독하던 두형사는 자기들끼리 뭐라고 주고받더니 우리가 내일 아침에 일찍이
나와서 확인할테니 어떤일이 있어도 내일 아침까지 작업을 마치라고 했다 만약에 잘못되면 처벌을 할 것 이라고 협박하고 사라진 것이었다.
그들이 가고나서 다섯 장정들은 상의를 했다 비석을 파괴하자니 한국사람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대로 방치하면 처벌이 두렵고 궁리 끝에 묘수를 발휘했다
비석은 날이 밝기전에 멀리 운반하여 밭에다 묻고 비각은 부수어서 노하리 숲 밑에 갖다
태워버리자는 의견을 모으고 실행에 옮겼다 바람 세차고 눈은 폭설 수준이라 작업이 더디게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아침에 나타난 두형사에게 지시한대로 처리했다고 보고했다
비석을 묻은 자리를 확인하려 했지만 전날 내린 눈으로 흔적조차 없어 다행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
이 모든 것이 논개수명비를 지키려는 하늘의 뜻이고 순리라 사료된다
이 일은 다섯명의 현명한 기지를 발휘해서 지금까지 보관된 계기가 된다
또한 이때 묻었던 수명비는 그당시에 장수인들 알만한 사람은 다알고 있었다
다만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1945년 8월에 일제의 치욕 36년의 질곡에서 해방이 되었다
해방후에 장수초등학교 고학년 생들 몇 명이서 교정 동쪽에 일본놈들이 세워놓았던
소위 대마전이란 괴물을 넘어트려 불지르고 논개비 캐러가자 소리 질렀다
각자 집에돌아와 삽과 괭이등 농기구를 들고나와 논개수명비가 묻혀있는 장소로 몰려가
땅을파고 꺼내었다 인근에서 이를 지켜보던 어른들도 같이 달려들어 비석을 케낸것이다.
비석이 수난당한지 2년10개월만에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 이다 당시 비석 발굴에 앞장섰던
장수초등학교 학생들은 다음과 같다 장수리거주 박옥길, 천기창, 이갑선, 김진옥, 한순태, 김판천
노하리거주 박세민, 최일엽 노곡리거주 이영조, 백영선 무주군거주 김병열 주거주 오봉수 다
이들은 일제때 학교공부를 하면서도 선생님으로부터 논개 비석이 일제만행에 의하여 피치못하게
땅속에 묻혀 있다는 소리와 장소도 들었다고 한다 그당시 많은 문화재가 파괴 되었음에도 수명비를 지켜낸 우리 장수군민이 자랑스럽다
또한 위 학생명단에 노하리거주 최일엽씨는 필자본인의 부친이다 지금도 노하리에 거주하시면
농사를 짓고 계신다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논개수명비는 1942년 땅에 묻혔으며 1945년 해방이 되어 8월20일에 발굴 된 것이다
8월21일 누가 먼저랄것 없이 스스로 논개수명비 앞에 많은 군민이 모였다
이때에 60세쯤되는 건장한 노인 두분이 지휘를 했다고 한다 한분은 계남사시는 오일성선생이시고 한분은 장수에 사시는 이재순 선생이라 전해진다 두분의 지휘아래 오랬동안 햇빛을 못본 수명비는 현 장수 관주산 자락에 비각이 세워지고 비문이 안장되었다 이후 6.25전쟁때 비각이 불타 없어졌다 관주산 자락에 홀로남은 비석은 1955년 현 장수읍 남동마을 회관 옆으로 이전하였다가 1974년에
논개사당이 현위치로 옮기면서 단청해서 아름다운 비각을 짓고 비석을 보관하게 된 것 이다
한이많고 우여곡절 다겪은 논개수명비 천년만년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보전 되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이 수명비는 문화재로 등록하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 장수에서 호롱불 최용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