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굴기(大國堀起), 강대국의 조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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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국굴기(大國堀起) Short Summary
왕지아펑 외 7인 지음
이 책은 중국 CCTV와 EBS에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12부작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崛起)〉의 핵심 요약본이자 심층 해설서이다. 중국공산당 정치국에서 ‘집체학습’한 내용이기도 한 대국굴기는 우리나라에서도 경영자들을 중심으로 이슈가 되고 있다. 이는 강대국들의 패러다임을 통해 기업 환경에 적용 가능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이후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힘에 밀려 온갖 수모와 시련을 겪어왔다. 지금도 진정한 강국으로 나아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미 일본은 굴기(벌떡 일어섬)를 이루었고, 이제 중국이 대국의 길로 들어서려고 한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가 지난 500년간 세계를 주름잡았던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검토하고 이를 통해 조금 더 심오한 역사적 시각과 원대한 안목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이 책에는 15세기 이후 굴기를 이룬 9개 강대국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들의 역사를 관통하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한 국가를 지배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있어야 굴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발전을 위한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반드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수요자와 참여자가 이상적으로 결합한 결과물이 곧 역사가 된다. 즉 깨인 지도자 그룹과 더불어 대국을 향한 에너지가 분출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국민이 있을 때 바로 굴기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세계 최초로 탐험을 통해 식민정책을 실행한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를 시작으로 굴기의 역사를 연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세계 최초로 탐험을 통해 굴기의 길을 열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국력, 기술, 생산성과 같은 객관적인 기반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 모두가 에너지를 모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중국은 해양 기술면에서 상당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해외 탐험을 금지시켰다. 반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탐험 사업을 국가와 국민이 공동으로 노력하고 참여하는 국가의 핵심 사업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그들은 부와 패권을 거머쥐었다. 네덜란드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열악한 자연조건과 부족한 지하자원의 조건 속에서도 강인한 민족정신으로 온갖 불리한 조건을 장점으로 만들어 굴기를 이루었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의 지원이 뒷받침되었다.
한 나라가 대국의 길로 들어서는 데 지정학적 요소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은 틀림없다. 하지만 통제 가능한 여러 요인들, 즉 시대적 분위기, 깨인 리더 그룹의 존재, 제도적 장치, 단결력 등이 굴기의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대국들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네덜란드의 실용주의, 명예혁명을 기반으로 한 영국의 정치체제,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선도한 프랑스의 선구자 정신, 통일을 이뤄낸 독일의 단결의식, 빠른 체제 전환으로 굴기를 지속시킨 미국의 도전정신 등은 많은 교훈을 전달한다.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여러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분석된 이 책은 〈대국굴기〉라는 콘텐츠를 원하는 방식으로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경제학자의 해제는 영상에서 제공할 수 없었던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정보를 제공한다. 굴기를 이루고 싶은 국가나 기업들은 이 책을 통해 ‘창조 경영’의 방법론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차례
머리말
1장 블루오션을 찾아 바다로 나아가다 : 포르투갈, 에스파냐
2장 ‘안전’까지 사고팔았던 바다의 상인 : 네덜란드
3장 변혁을 주도한 산업혁명의 기수 : 영국
4장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다 : 프랑스
5장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키우다 : 독일
6장 시대의 흐름을 따른 백년 유신의 선물 : 일본
7장 유일무이한 슈퍼 강국을 갈망하다 : 러시아
8장 도전과 스피드로 진화한 세계 제일의 강국 : 미국
해제 : 공병호
대국굴기
왕지아펑 외 7인 지음
크레듀 / 2007년 8월 / 374쪽 / 15,000원
블루오션을 찾아 바다로 나아가다 :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세계 최초의 식민 제국 건설과 세계분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가장 먼저 해외 개척을 시도하여 근대제국을 이룩한 나라들이다. 양국의 굴기는 길지 않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포르투갈은 1415년 북아프리카 탐험을 시작으로 에스파냐보다 먼저 식민지 무역사업을 실행했다. 특히 디아스라는 무역업자가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고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에 의해 인도가 발견됨으로써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마닐라 향료제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역 거점을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1500년경 우연히 브라질을 발견하여 이곳에 사탕수수를 경작하는 아메리카 최초의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듦으로써, 유럽의 주요 설탕 공급지이자 포르투갈의 주요 경제 기지를 갖추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이렇듯 인도양을 장악하고 아프리카에 상업기지를 세우고 브라질에 대규모 농장을 세움으로써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식민 사업은 포르투갈보다 조금 늦었으나 곧 빠른 속도로 포르투갈을 뛰어넘었다. 1492년 8월, 3척의 범선을 이끌고 동방 탐험에 나선 콜럼버스는 1년 동안의 항해 끝에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곳은 애초에 생각했던 동방이 아닌 아메리카였지만 그는 그곳이 꿈에도 그리던 동방의 인도, 중국의 어딘가라고 굳게 믿었다. 콜럼버스의 탐험이 성공하고 10여 년 뒤 마젤란이 함대를 이끌고 세계 탐험에 나섰다. 마젤란은 3년 동안의 탐험으로 인해 수많은 위기를 겪어야 했는데, 오랜 탐험을 견디지 못하고 귀국한 탐험대가 마젤란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모함하여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게다가 마젤란 역시 필리핀제도에 닿았을 때 그곳의 부족 간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된다. 하지만 마젤란의 탐험은 향료제도를 에스파냐에 안겨주었고, 지구가 둥글다는 가설을 증명시켰다.
콜럼버스와 마젤란 같은 탐험가들의 성공은 에스파냐에 방대한 영토와 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탐험 과정에서 포르투갈과 수시로 충돌했고, 그때마다 교황이 중재에 나섰다. 1480년, 두 나라가 다시 대서양에서 충돌하자 교황은 양국 간의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대서양 동쪽으로, 에스파냐는 대서양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하면서 생겨났다. 즉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증명됨으로써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또 다른 경계선이 필요해진 것이다. 1529년, 두 나라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몰루카제도에서 동쪽으로 17도 떨어진 지점을 경계로 동쪽은 에스파냐가, 서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근대 역사상 최초의 세계 분할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두 나라만의 약속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이웃나라들 역시 세계 팽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제국의 쇠락이 남긴 교훈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제국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포르투갈은 1580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에스파냐에 합병되었고, 60년 후 다시 독립하긴 했지만, 쇠락의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한편 에스파냐는 더욱 강성해졌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역시 쇠락하고 말았다. 탐험을 통한 식민 활동은 사회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성공은 귀족과 교회에 집중되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에스파냐는 전성기를 이룬 시기에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여러 지역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의 식민지에서 저항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유럽 본토에서도 프랑스, 영국과의 패권전쟁,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한 종교전쟁 등에 관여했다. 이렇게 에스파냐는 30년 이상을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 급속도로 몰락해 갔다.
쇠락의 원인은 이교도 탄압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에스파냐에는 상당수의 무어인(이슬람교도)과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상공업과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추방함으로써 상공업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졌다. 또한 이교도 탄압수단의 하나로 이루어진 마녀사냥은 수많은 부녀자들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부정적인 사회분위기를 조성시켰다. 게다가 에스파냐는 수공업과 농업 등 일상용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천시했다. 이런 사회분위기는 국민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능력 개발을 제한시켰다. 반면 영국과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를 위해 일상용품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에스파냐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안전’까지 사고팔았던 바다의 상인 : 네덜란드
전통 농촌 개혁
네덜란드의 근대 굴기 역사 중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아주 많다. 네덜란드는 열악한 자연조건과 부족한 지하자원 그리고 주변국들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강인한 민족성으로 끊임없이 분투하여 굴기를 이루었다. 그들은 처한 환경에 맞추어 적절한 대책을 세우고,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고 활용하는 데 뛰어났으며, 치밀하고 철저한 계획하에 경제 이윤을 극대화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해냈다. 이러한 요인들이 가장 크게 적용된 분야가 바로 어업, 수공업, 농업이었다. 네덜란드는 이 세 가지 분야의 발전을 기반으로 재력을 갖춘 다음 해외 팽창을 시도하여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우선 어업의 경우를 보면, 당시 네덜란드에서 청어 포획은 ‘금광’으로 통할 정도의 큰 이익사업이었다. 청어 가공에는 고기 잡는 사람, 내장을 발라내는 사람, 생선을 소금에 절여 통에 넣는 사람 등의 분업 체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체계는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그로 인해 많은 도시 상인들의 자본이 투자되면서 청어 가공 산업은 대규모 생산 공정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효율적인 어업관련법규는 청어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청어산업의 중심 도시인 5개 항구에는 어민들로 이루어진 ‘대어업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는 의회로부터 일련의 법적 권리를 부여받아 엄격한 심사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어선은 출항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시스템은 청어의 국가경쟁력을 높여 유럽 시장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농업 역시 어업에 못지않은 놀라운 발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는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물난리가 매우 잦았다. 그래서 마을마다 둑과 제방을 쌓아 바다와 호수, 습지 등을 육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땅은 ‘폴더(Polder)’라 하는데, 폴더를 경작한 농민은 5년에서 길게는 20년까지 면세 혜택을 받았다. 농민들은 경작지가 처한 자연환경에 맞추어 업종을 선택했다. 예를 들면, 점토 지역에서는 곡물을 생산하고, 작물을 경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목축업을 발달시켰으며, 교통이 편리한 도시근교에서는 부식품과 원예작물을 집중 재배했다. 또한 같은 업종이라도 지역에 따라 중점분야가 달랐다. 목축업을 예로 들면 어떤 곳에서는 버터 생산에 중점을 두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유제품, 양털, 소고기를 생산했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에 공급할 신선한 우유를 생산했다.
네덜란드 농업에서 무엇보다도 주지할 점은 그들이 언제나 시장의 경쟁력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농민들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시장경제 관념을 키워 나갔다. 당시 대학 교육을 받았고, 비교적 재산이 넉넉했던 한 농장주의 장부를 보면,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한 밀과 보리를 시장에 내다 팔고 호밀을 사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밀은 부유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가장 비싼 곡식이었고, 맥주 원료였던 보리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반면 호밀은 주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데다 발트 해 주변지역에서 생산된 호밀이 대량 수입되면서 가격이 더욱 폭락했다. 이런 시장의 흐름을 읽은 농장주는 자신이 생산한 밀과 보리는 외국에 내다 팔고 대신 싸게 사들인 호밀을 일꾼과 하인들의 식량으로 공급하여 가계 지출을 최소화했다. 이러한 경제관념은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생각이었다.
시장의 발달과 해상운송 혁명
네덜란드의 황금산업들은 모두 발트해 무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서유럽 국가의 선박은 발트해의 관문인 외레쥰드(Oresund)해협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당시 이 해협을 장악하고 있던 덴마크는 이곳을 지나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했다. 그런데 당시 통행료 산정방식이 매우 특이했다. 선박의 중량이 아닌 갑판의 너비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즉 갑판이 좁을수록 통행료를 적게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산정방식은 네덜란드 조선업 발달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대량 무역을 하게 된 네덜란드인들은 통행료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만드는 대신 대부분의 시설을 선체 아래에 집중시킨 플류트선(Fluit)이라는 화물수송선을 만들었다. 이런 모양 때문에 플류트선은 뚱보선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 화물선을 계기로 시작된 조선업의 발달로 네덜란드는 해상운송사업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조선업이 발전하자 네덜란드는 발트해 무역을 통해 국내 경제발전을 확대시키는 한편, 원양항해를 통해 대외 확장을 꾀했다. 당시 유럽의 신흥 자본 계급들이 앞 다투어 세계로 진출했듯이 네덜란드 역시 동서 두 방향으로 나누어 해외무역 확장을 진행했다. 동쪽으로는 아시아 대륙 및 인도양과 태평양의 무수한 섬나라를 겨냥했으며, 서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을 중심으로 무역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대외활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해외무역 전문 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이다. 사실 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은 포르투갈, 에스파냐와 비교할 때 1세기가량 뒤늦은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은 이미 동인도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근대 주식회사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1595년 4월, 암스테르담 상인 7명이 모여 원거리회사를 설립하고 동방 탐험을 위한 함대를 파견했다. 첫 항해에서 인도양 탐험에 성공했고, 다음해 인도네시아 자바에 상업 도시 반탐을 건설했다. 이러한 성공은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새로 생겨난 수많은 동방무역 회사들이 줄지어 아시아로 진출했다. 그런데 난립하는 동방무역 회사를 관리하고 조정해 줄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었다. 게다가 상품 확보를 두고 벌어지는 과다경쟁은 여러 가지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자 무역회사들은 서로 힘을 합해 ‘연합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동인도회사에는 거대 자본이 모여들었고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가 뒷받침되었다. 의회는 동인도회사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면세권을 부여했고, 식민도시에 대한 행정과 사법, 국방의 권리까지 부여했다. 한마디로 동인도회사가 네덜란드의 대사관 역할을 한 셈이었다.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각종 특권에 대한 조건으로 2만 5,000길드를 지불했다. 그런데 의회에서는 이 돈을 한 푼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투자했다. 즉 국가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짜리 특허장을 발급했는데 10년에 1번씩 자산평가를 다시 하여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이때 사전에 자금을 회수하고 싶어 하는 주주들은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에서 손쉽게 주식을 매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식 전매로 주식 수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주주만 바뀌는 오늘날의 주식 시장과 같은 형태가 나타났다. 또한 동인도회사는 주식을 최대한 작은 단위로 나누었다. 그 결과 암스테르담 시장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까지도 전 재산을 동인도회사 주식에 투자했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동인도회사는 자금을 최대한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으로 인해 각종 위험 요소가 내포되는 대규모 해외무역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가 만들어낸 근대 시장경제 체제는 주식회사뿐만이 아니라 증권거래소와 은행 시스템도 만들어냈다. 영국보다 100여 년 빨리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은 네덜란드 경제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가장 특이할 만한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신용'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 유럽을 통틀어 신용 대출 개념을 응용한 것은 네덜란드 상인뿐이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설립 초기 연이율 6.25%의 높은 대출이자를 산정했으나 17세기 중반에는 3~4%의 이자율로 상인들에게 대출을 해주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 상인들은 낮은 제조원가로 선박을 제조하여 대량 무역을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결국 안정적인 신용 대출 조건, 저렴한 운송 원가가 네덜란드 상인이 새로운 기적을 창조할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네덜란드는 17세기 황금시대 이후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힘을 잃어 갔으나 오늘날 다시 세계 운송 대국, 무역 대국, 투자 대국, 농업 대국, 수리(水利) 대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변혁을 주도한 산업혁명의 기수 : 영국
17세기의 명예혁명과 정치체제 개혁
영국의 굴기 과정을 한마디로 말하면 왕권 대 귀족 간의 투쟁으로 인한 정치체제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1215년, 귀족들은 존 왕에게 대헌장에 서명하도록 함으로써 의회를 국왕과 맞설 만큼 강력한 정치기구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왕권약화는 국가 통일과 국내시장 발전을 저해하였다. 그나마 15세기 중반, 영국의 군소 귀족들이 왕위를 쟁탈하기 위해 장장 30년이 넘게 벌인 장미전쟁(1455~1485)으로 인해 많은 명문 귀족 가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국 최후에 왕위를 거머쥔 주인공은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의 헨리 튜더(Henry Tudor, 헨리 7세)였다. 하지만 튜더왕조는 전제 왕권의 막강한 파워를 토대로 영국을 통일시켰다.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부녀는 영국을 더욱 강력한 민족국가로 발전시켰다. 헨리 8세는 로마교황과 단절하고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 강국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내정간섭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민족 단결력을 고취시키고, 해외 영토 확장에서도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1588년 해상 강국이었던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퇴시킴으로써 유럽 해상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로써 영국은 세계 역사 무대에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 이후에는 다시 왕과 귀족 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특히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세금을 강제 징수하는 등, 강력하게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의회는 당연히 반발했고, 결국 찰스는 1642년 1월 런던에서 쫓겨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쫓겨난 이후에도 왕권을 포기하지 않고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승리함으로써 그는 1649년 1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크롬웰은 자신을 호국경이라 칭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여 잉글랜드공화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크롬웰 역시 의회의 권력을 축소했고, 이후 새로 집권한 왕들 역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여 국왕과 의회의 주도권 싸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제임스 2세는 다시 가톨릭을 끌어들여 전제 왕권 강화에 이용하고자 했다. 의회는 제2의 크롬웰이 등장하여 의회를 장악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전을 유보했지만 그 대신 제임스 2세의 사위이자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의 통치자 윌리엄과 메리 부부에게 종교의 자유와 의회의 권리를 보장하는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윌리엄이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런던에 진입하자, 의회는 윌리엄과 메리를 영국의 공동통치자로 인정하는 동시에 윌리엄에게 권리선언을 요청하여 승인 받았다(1689년 2월).
권리선언에는 국왕이 다시는 의회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법령을 삭제하거나 세금을 징수할 수 없도록 규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윌리엄은 이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했다. 1689년 10월, 의회는 권리선언을 토대로 법규를 제정했는데, 이것이 바로 ‘권리장전’이다. 이 법안을 토대로 입헌군주제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의회는 왕권을 제한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이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1688년에서 1689년까지를 영국 역사에서는 ‘명예혁명’이라 부른다. 명예혁명은 전례 없는 무혈혁명으로, 훗날 영국이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정치적 기틀이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
영국의 굴기는 산업혁명으로 완성되었다. 18세기 후반 아메리카에서 들여오는 대규모 면화는 면직물 가공을 발전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직조 속도를 높이기 위한 방적기가 발명되었다. 방적기 도입은 금속 수요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그로 인해 제철업과 채광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산업이 발전해가자 에너지문제가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탄생된 제임스 와트의 증기 발전기는 전반적인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증기기계는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계마다 부속품이 제각각이었다. 따라서 발전기가 고장 날 경우 수리가 어려웠다. 결국 기계 제조업이 탄생했고 똑같은 부속으로 각 산업분야에 필요한 기계를 생산하게 되면서 산업혁명의 기본을 완성시키게 되었다. 즉,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내고 기계가 다시 상품을 생산하는 새로운 경제활동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공장화는 교통 및 운송의 급속한 성장에도 기여했다. 1800년까지 1,600개 이상의 도로가 건설되었고, 18세기 후반까지 총 6,000km에 달하는 내륙 운하가 뚫렸다. 또한 스티븐슨에 의해 철도 건설과 증기기관차가 탄생하면서 19세기 중반 영국은 세계적인 공업대국이 되었다. 1851년 영국은 만국박람회 개최를 통해 영국의 산업혁명을 온 세상에 알렸다. 이로 인해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그때부터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자유무역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는 각각 『국부론』과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라는 저서를 통해 자유무역 경제정책을 주장하고 국가가 경제활동에 관여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손’ 즉 본연의 경제원칙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을 때 국가 경제가 발전하고 풍요로운 미래가 펼쳐진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자유무역에 대한 주장과 움직임은 자유무역 경제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825년 영국 정부는 새로운 법규를 발표하고 은행과 회사의 조직 시스템을 개혁했다. 즉, 주식투자형 은행을 설립하고 지방마다 지점을 개설시켰다. 이와 더불어 수많은 주식회사들도 생겨났다. 그리하여 1850~1860년대에 이르러서는 석탄 채굴, 제철, 기계 등 각 산업 분야의 합작회사들 대부분이 주식회사로 탈바꿈했다. 은행과 회사들이 주식회사로 바뀌어가면서 정부가 경제활동에 관여하는 비중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로써 주식투자형 은행과 회사가 영국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이끌어 가는 견인차가 되었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세계의 공장에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영국은 자유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한편, 활발한 식민지 확장정책을 시행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가장 크게 늘어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영국은 1866년 이후 인도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는데, 철도, 수리, 면화 및 황마 직물 생산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면서 투자자본 이상의 이익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또한 아프리카를 분할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많은 이익을 얻었다. 1876년 영국은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이집트 경제를 프랑스와 함께 맡게 되었다. 그리고 1850년부터 이집트의 이웃나라 수단에도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점령하고 1886년에는 미얀마를 점령했다. 그리고 1898에는 중국 웨이하이와 신계를 영국의 조차지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국의 식민지는 19세기 후반 약 930만km2를 기록했다.
영국 굴기의 역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2,000만 명이 채 안 되는 인구를 가진 작은 섬나라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가 되었으니 말이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영국의 성공도 여러 가지 종합적인 원인이 작용한 결과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는 명예혁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명예혁명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당시 사회 상황에 알맞고 생산력 향상을 지지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영국인들은 이러한 정치체제하의 자유로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고, 이것은 곧 영국 사회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다 : 프랑스
유라시아의 강자로 향하는 길
9세기 무렵, 서유럽을 통일했던 프랑크왕국이 3개의 제국으로 나뉘면서 생겨난 서 프랑크왕국이 오늘날의 프랑스다. 초기의 프랑스는 정확한 국경의 개념이 없는 데다, 국왕 역시도 국토 전체를 관할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봉건영주들이 뽑은 중재자에 지나지 않았던 국왕은 세금을 징수할 권한이 없었으며 마음 놓고 다른 봉건영주의 영지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이렇듯 왕권이 약하다 보니 프랑스는 영국과의 100년 전쟁, 그리고 36년 동안의 종교전쟁 등으로 통일과 분열을 계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과 분열은 왕권강화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관념의 변화와 부르봉왕조 초기 국왕들의 100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프랑스는 루이 14세(1661~1715)에 이르러 전형적인 절대 군주제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봉건시대 초기, 프랑스의 경제는 대부분이 소농 중심의 경제체제였으므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통일을 이루고 주권을 갖추게 되자 프랑스 경제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10세기 이후, 농업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수공업과 상업도 활기를 띠었다. 그 결과 점차 인구가 늘어났고 신흥도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시가 발달하자 새로운 사회 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 제3계급이라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계급 집단이었다. 제3계급은 귀족들이 자행하는 전쟁과 국토 분열로 인해 자신들의 상업 활동에 가해지는 엄청난 손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연히 이들은 자금을 동원해 국왕의 중앙집권 강화에 조력했다. 즉, 프랑스의 절대군주제는 시민계급과 왕권 간의 협력 덕분에 이루어진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대외 팽창의 야망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가 재정대신 장 바티스트 콜베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매우 좋지 못해서 1663년의 예산을 미리 끌어다 1661년의 지출을 감당하는 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임한 콜베르는 부패 관리들을 엄벌하고, 부호들을 겨냥한 세수개혁으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이루어냈다. 또한 이윤이 높은 사치품 산업을 지원하여 유럽의 강세화폐를 끌어 모았으며, 도로를 만들어 상업 활동을 부추기고 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줌으로써 국내시장 발전을 도모했다. 이렇게 국내 경제가 안정되자 콜베르는 조선소를 만들어 267척의 함대를 보유한 강력한 해군을 창설하여 해외무역을 지원하고, 동 ․ 서인도회사 등 독점권을 가진 무역 기구를 창설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을 통해 프랑스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봉건 영지의 집합체에서 명실상부한 유럽대륙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이처럼 콜베르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전제정치로 프랑스의 위상을 정립했다. 하지만 그는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재위 기간 중 31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선왕 앙리(Henri) 4세가 발표했던 낭트칙령을 멋대로 폐지했다는 점이다. 1685년, 그는 신교도들을 핍박하는 퐁텐블로칙령을 발표했고 이로 인해 40만 명의 위그노 교도들이 해외로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 중에는 능력 있는 기술자와 부유한 상인, 병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주변 적대국에 대량의 인재와 자금을 제공해 준 셈이 되고 만 것이다.
1715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의 국채는 24억 리브르에 달했다. 이러한 재정상황은 이어 계승한 왕들에 의해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루이 14세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섭정왕 필리프 2세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계급에 칼을 대고자 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나마 재정대신으로 영입한 스코틀랜드의 은행가 존 로가 투기와 화폐발행을 이용해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아예 금융시장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이어 즉위한 루이 15세는 궁정 귀족들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고 세제를 개혁했으며 대외무역을 확장함으로써 프랑스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식민지 쟁탈을 놓고 벌인 대규모의 국제전쟁으로 엄청난 재정적 손실을 초래했다. 폴란드왕위계승전쟁(1733~1755),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1740~1748) 등을 겪으면서 프랑스는 매번 실패와 후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영국과 벌인 7년 전쟁(1756~1763)에 패배함으로써 거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고 말았다.
현대 프랑스의 탄생
7년 전쟁은 프랑스혁명의 간접 원인이 되기도 했다. 패전의 치욕을 갚기 위해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13개 주의 독립 전쟁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미국을 돕는 데 무려 20억 리브르를 쓰는 바람에 40억 리브르의 적자 상태가 되고 말았다. 프랑스 국민들은 분노했고 결국 루이 16세는 175년간이나 중지되었던 삼부회를 소집해야만 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원인은 바로 절대왕권의 봉건성과 부패에 있었다. 인구의 겨우 2%에 해당하는 왕실과 귀족계급은 토지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각종 특혜와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의 재정부담은 제3계급이 안아야 했다. 제3계급 중에서 비교적 부유한 시민계급 즉, 자본계급이 가정 먼저 혁명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층민들을 자신들의 동맹군으로 만드는 동시에 소농, 지주의 요구를 무상으로 들어주고, 도시 빈민의 생존권을 보장해 준다는 공약을 내세워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리하여 부르봉왕조를 뒤엎고 공화정을 세웠으며,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냈다. 하지만 시민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에 즉시 자유와 민주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제1제정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고 결국 완패하게 되자 부르봉왕조가 다시 파리로 입성하게 된다. 부활한 왕조의 실제권력은 모두 귀족계급이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본계급과 대중들은 투쟁을 계속했고 1830년 7월, ‘7월 왕정’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프랑스 자본계급 중에서도 폐쇄성과 보수성을 띤 상류층이었다. 즉 그들의 ‘민주정치’는 ‘금융귀족’ 내부에서만 이루어졌다. 이로 인한 사회갈등은 다시 새로운 혁명의 불길을 일으켰고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프랑스 제2공화국이 탄생된다. 2월 혁명의 실질적인 주체는 산업화 발전 과정에서 탄생한 노동계급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위협을 느낀 자본계급은 노동운동을 진압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정권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다시 프랑스 공화국의 폐허 위에 ‘제2제정’이 세워지게 된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민 경제 발전에 눈을 돌렸다. 그는 자유시장 경제 원칙을 내세워 산업화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산업화의 발전은 금융업의 발전을 앞당겼고 기타 경제 분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하지만 제2제정의 정치적 본질은 숨길 수가 없었다. 루이 역시 대외 전쟁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것은 시민혁명을 성공시킨 프랑스 국민들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1870년 루이가 프로이센 전쟁을 일으키자 국민들은 혁명을 추진했고 루이 보나파르트는 전쟁의 패배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에도 프랑스의 정치무대에는 거센 바람이 그칠 날이 없었다.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의 힘 겨루기가 끊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파리코뮌과 같은 무산계급의 급진적인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산업화의 완성은 시민 민주세력을 전에 없이 강성해지도록 하였고, 프랑스의 현대 민주정치 체제는 마침내 ‘제3공화국’이라는 형식으로 어느 정도 확립되게 된다.
현대 프랑스의 침몰과 부흥
프랑스의 정치는 공화제의 안정, 정권과 사회생활의 민주화 등 계속해서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대외 정책에서는 민주원칙에 완전히 위배되는 노선을 택했다. 확장주의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세계 전쟁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재난을 피할 수 없었고 프랑스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것을 위해 치른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동북의 공업지역은 초토화되었으며, 수백만 명이 부상을 당했고, 그동안 해외에 투자했던 엄청난 자본은 회수할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70억 달러의 외채와 1,000여 억 프랑의 국채를 떠 안아야 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후 처리 문제를 두고 근시안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독일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독일에 파시즘이 출현했고, 그 결과 또 다른 세계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진보와 보수, 현대 문명과 근대 문명 간의 대결이었다. 파시스트 진영의 극단적 민족주의의 팽창에 대해 영광스런 혁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대중들은 두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각종 형식의 조직을 만들어 이에 대항했으며, 그 중심에 드골 장군이 있었다. 이들은 대기업의 국유화와 자본 착취의 제한, 사회복지 제도의 개선, 민주제도의 정비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식민지 침략 정책에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여전히 해외 식민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식민지 해방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는 상황에서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생각은 프랑스 정치를 시종일관 흔들리게 했다.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은 베트남의 디엔비엔푸에서 참패했고 뒤이어 이집트 침략전쟁과 알제리 전쟁의 실패로 분열이 일어났다. 그러자 프랑스 국민의회는 갖은 방해와 압력을 극복하고 드골 내각을 구성했고 드골은 제5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드골은 과감한 개혁으로 파산상태의 프랑스 경제를 회생시켰다. 프랑스는 1958년부터 10년 동안 60% 이상의 공업 성장률을 이루었으며, 1959년에서 1964년까지 7~8%의 경제성장률을 이뤄냈다. 또 자동차, 화학, 석유, 제련, 항공기 산업, 우주 항공과 원자력발전, 군수산업과 같은 신흥 산업 역시 빠르게 성장해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 3위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65년 드디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드골은 집권초기에 특히 알제리 문제의 평화적 해결로 프랑스 식민체제를 붕괴했는데, 이는 향후 프랑스가 국제정치무대에서 반패권주의 투쟁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위상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프랑스는 국제사회의 정치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성실한 추진자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 세계 6위의 국내총생산을 기록하는 선진공업국이 되었다.
도전과 스피드로 진화한 세계 제일의 강국 : 미국
국가탄생과 발전
독립 초기, 미국 정부는 주권도 없고, 심지어 국가원수도 없는 등 조직 체계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정부는 외교, 재정, 국방, 우편과 관련된 몇 가지 기본 부서만 갖추고 있었으며, 의회가 열리지 않는 동안에는 각 주에서 파견된 대표들이 모여 나랏일을 처리했다. 그러다가 1787년에 제정된 ‘연방헌법’에 의해 미국은 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연방제 실행으로 13개 주가 국가를 공동 경영하되 각 주는 고유의 헌법과 의회를 가지고 주 정부를 운영하기로 했으며, 대통령, 국회, 고등법원이 상호견제하면서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한 연방헌법을 차후 수정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는데, 이는 미국적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규정에 따라 향후 미국은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이상적인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굴기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머스 제퍼슨을 양 날개로 삼아 국정을 펼쳤다. 해밀턴은 산업발전으로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제퍼슨은 농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워싱턴은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조율했다. 이로써 농업과 산업의 고른 발전이 진행되었다. 미국은 유럽국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산업혁명에 발맞추어 남부의 주요 재배 작물을 담배에서 면화로 바꾸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면기(繰綿機)의 발명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면화의 씨앗을 매우 효과적으로 제거하여 작업 효율을 50배 이상 높였다. 조면기의 등장은 면화 재배 열풍을 일으켜 1830년대에는 멕시코만 평야까지 달하는 대규모 면화왕국이 세워졌다. 이와 동시에 로드아일랜드에는 최초의 면방적 공장이 세워졌으며 이를 시작으로 미국 내에는 200여 개의 근대식 공장이 설립되었다.
미국 굴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서부개척이다. 그것은 집단이민, 영토 확장, 그리고 대규모 경제발전을 가져오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1784년, 제퍼슨에 의해 작성된 토지조례가 발표되었다. 이는 다른 주에서 할양 받거나, 다른 국가로부터 매입하거나, 인디언들로부터 빼앗은 새로운 서부 토지를 먼저 국가의 공공 토지로 편입시킨 후 저렴한 가격으로 이민자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이민자들이 서부로 가기 시작했고, 그들은 낮은 세금으로 집과 농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땅이 개간되면서 서부에는 밀과 면화, 목장의 3대 업종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이 세 가지는 미국이 농업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3대 업종에서 나오는 생산물이 도시에 필요한 식량과 원료로 공급되면서 대량의 농기구, 교통, 운송 기구가 필요해졌다. 이는 자본가들에게 서부 투자 의욕을 불러일으켰고, 미국의 제조업이 서부로 이동하면서 수많은 운하가 건설되고, 철도망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또한 철도의 수요에 따라 철로용 강철뿐 아니라 각종 기계 및 자동차 생산 등의 중공업이 함께 발전했다.
재건과 발전
1861년에 발발한 남북전쟁은 애써 이룩한 미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남북전쟁 이후 실시된 일련의 정책과 각종 조치는 미국 경제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고 미국의 산업화를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870년 이후부터 미국의 산업은 주식회사 형식의 대기업이 주도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대기업은 가장 먼저 트러스트(trust, 독점적 기업결합) 형태로 등장했다. 이것은 특정 회사의 주식을 매수하여 경영권을 얻는 방식으로 이때부터 그룹 경영 혹은 모자 기업이 탄생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기업이 포드자동차회사이다. 포드사는 1913년, 세계 최초로 조립식 생산라인을 구축했다. 그리고 다음해 다시 이동식 조립라인을 탄생시킴으로써 규격화, 라인화 한 대규모 생산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포드사는 합병 회사의 대규모 생산 시스템의 전형이 되었다.
포드시스템이 탄생한 이후 산업과 경영 규모가 나날이 커짐에 따라 시장경제에서 은행과 금융이 차지하는 영향력도 크게 증가했다. 은행과 금융은 미국 사회의 생산과 경영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고, 은행을 중심으로 재단이 형성되었다. 1882년에 설립된 모빌석유회사가 바로 그 전형이다. 또한 이 시기에 과학 경영이 나타났다. 미드베일 철강회사의 직원이었던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는 노동자의 작업을 작업량과 시간으로 나누어 이를 기준으로 임금제를 만들었다. 또한 작업 관리 부분에서 단계별 책임 관리 개념을 도입했다. 이러한 경영시스템은 각 산업 분야에 빠르게 보급되었고, 전반적인 산업 생산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미국은 1894년 산업 총 생산량이 세계 1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위기와 조정(1930~1945)-루스벨트의 ‘뉴딜’정책
1898년, 미국은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통해 전 세계에 최초로 힘을 과시했다. 미국은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어난 이 전쟁을 통해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쿠바와 필리핀을 거머쥐었다. 더욱이 이는 중국과 동아시아 대륙으로 가는 발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연달아 괌, 사모아를 비롯한 태평양 열도의 섬들을 획득함으로써 해외 식민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립주의를 벗어던진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도 뛰어들어 많은 이익을 얻었고, 1920년대 말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1929년 1월 24일 목요일, 미국은 대공황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전까지 미국은 많은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했지만 이러한 발전 중에는 알맹이 없는 산업 분야도 많았다. 농업은 장기 부진의 늪에 빠져 있었고, 산업에서는 매분기 어음 결제 및 외상판매가 급증했으며, 주식투기가 과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대외적인 요인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 책임이 문제가 된 것이다. 독일은 유럽 최대의 탄전(炭田)인 루르를 프랑스에 할양했고, 320억 달러에 달하는 배상금을 연합국에 지불해야 했다. 그런데 배상 능력이 없었던 독일은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 연합국에 지불했다. 하지만 연합국의 입장에서 그 금액은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미국에서 빌린 돈을 갚고 폐허가 된 유럽을 재건하는 데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미국에서 빌린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미국의 주식이 대폭락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다.
금융업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193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인물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다.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을 내세워 국가를 재건시켰다. 소위 뉴딜이란 국가가 사회에 적극 개입하여 개혁을 진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실 국가 개입이나 사회개혁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루스벨트의 정책이 주목되는 점은 그 핵심이 바로 ‘조정(調整, adjustment)’에 있었다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노사관계를 조정하고, 기업과 기업의 관계를 조정하여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생산과 무역 분야의 독점을 규제하고 사회 각 계층의 불평등 해소를 위해 누진세를 적용했다. 뉴딜 정부는 단순히 국가가 경제 간섭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부가 자본을 마련하여 회사를 창업하는 등 기업 활동에 직접 참여하면서 국가 경제의 엔진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뉴딜 혁명을 계기로 미국정부는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기업의 창립자이며 미국 전체의 경제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향후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되는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루스벨트는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시켰고 민주주의 국가에 대량의 군수물자와 군비를 제공함으로써 미국을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만들었다. 또한 강화된 군사력으로 세계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이 주도한 역사의 키포인트는 ‘냉전’이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맞선다는 명목하에 한국전쟁과 베트남전과 같은 전쟁에 적극 개입하고 거대한 국가 과학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원자력 개발과 컴퓨터 발명으로 생물, 화학, 에너지, 원자재, 항공 우주 같은 첨단 과학 기술 혁명을 이루었다. 또한 IT산업, 유전공학과 같은 제3의 산업을 만들어 전 세계의 생산, 경영, 군사, 교육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사고부터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을 크게 변화시켰다.
미국 굴기의 역사는 150년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전통 관습을 꿰뚫는 제도와 시스템의 변화로 이처럼 빠른 시간 안에 제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특히 포드시스템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경제 발전 모델에 대혁명을 일으키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굴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미국은 대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힌 후에도 결코 정체하거나 퇴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른 국가들이 전쟁의 후유증에 허덕이고 있을 때 미국은 첨단 과학 기술 혁명을 통해 새로운 경제 발전 모델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굴기를 지속할 수 있었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미국의 국가 및 사회체제는 어떤 변화에도 유기적으로 대처하고 적응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미국의 힘이다.
대국굴기
왕지아펑 외 7인 지음
▣ 저자
왕지아펑(王加豊) : 현 저장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CCTV 〈대국굴기〉 포르투갈, 에스파냐 편 감수위원
천용(陳勇) : 우한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박사과정 지도교수. CCTV 〈대국굴기〉 네덜란드 편 감수 위원
가오다이(高岱) :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CCTV 〈대국굴기〉 영국 편 감수위원
가오이(高毅) :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박사과정 지도교수. CCTV 〈대국굴기〉 프랑스 편 역사 각본 집필
리공전(李工眞) : 우한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박사과정 지도교수. CCTV 〈대국굴기〉 독일 편 감수 위원
탕중난(陽重南) :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이자 중국 일본사학회 회장. CCTV 〈대국굴기〉 일본 편 감수위원
쉬톈신(徐天新) :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박사과정 지도교수. CCTV 〈대국굴기〉 러시아 편 역사 각본 집필
허순궈(何順果) :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박사과정 지도교수. CCTV 〈대국굴기〉 미국 편 역사 각본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