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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이미 인터넷으로 소개된 글입니다만 반복적으로 알리는 것이 아직도 류차문제를 이해 못하는 종친에게 도리라 생각되어 아래 글을 소개합니다.
아래 첨부파일 글을 문화류씨와 관련된 내용으로 요약합니다.
1. 개성왕씨, 연안차씨, 문화류씨의 계통에 관하여 드리는 말씀
① 문화류씨 연안차씨 개성왕씨 족보에 있는 원파록의 근본 출처는 "차원부설원기"이다.
② 문화류씨는 원파록을 폐기하였다.
③ 개성왕씨 집안에서도 원파록을 재검토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④ 2002년부터 문화류씨의 시조이신 류차달을 문화류씨의 시조가 아니며 성도 류씨가 아니라 차씨라 하는 주장으로 소위 류차문제(柳車問題)를 일으켜서 결국 류문의 궁구(窮究)를 통해 류차동원설을 폐기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⑤ 1812년에 원파록의 강남보 계보를 추가한 연안차씨강렬공파보를 위조라고 차문이 공소(고발)하였다.
⑥ 차원부는
2. 고려왕조의 위업 재평가 새 의미로 복원돼야
① 개성에 자리한 고려태조 왕건의 무덤----황해도 구월산에 복원된 대승공 류차달 시조 묘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② 조선조정은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에서 서인으로 살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내 배를 가라앉혀 수장시켰다-----이런 역사적 사실을 차원부설원기에서는 정도전 등이 차원부 일족 70명을 바다에 수장시켰다고 바꾸어 씁니다.
③ 왕씨들이 변성명한 이야기는 ‘일토초가자(一土草家者)가 왕이 된다’는 기자조선시대의 고사(古事)와 중첩된다. 田씨, 全씨, 玉씨, 車씨, 申씨 등으로 임금왕자를 숨기거나 아예 다른 성씨를 사용하며 살아남았다. 왕제구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사무국장은 “그런 설이 있다. 하지만 다 그렇다는 확신은 없다”고 한다.-----이부분을 차원부설원기는 왕몽(고조선 왕조명 58세손)이 일곱째아들 림을 대리고 지리산으로 피난하였는데 신이 나타나 성을 세 번 바꾸라고하여 田씨 申씨 車씨로 바꾸고 이름을 차무일로 고쳤는데 이때가 기원전 194년이고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여 차무일에게 좌상의 관직을 내렸다. 고합니다(신라 화백제도 6부족에 차씨는 없으며 이제는 박혁거세가 차무일에게 차씨성을 하사했다고 함)
④ 개성왕씨는 왕씨가 田씨, 全씨, 玉씨, 車씨, 申씨 등으로 살았다는 근거가 없다고 한다.
3. 개성왕씨
① 개성 왕씨는 왕건의 4대조를 시조로 삼고 있으나, 세대를 헤아릴 때는 태조 왕건을 1세로 간주하고 있다.-----원파록은 왕몽 셋째아들 式(왕식)이 왕건의 조상이라고 함)
② 성원록에 기록된 용녀는 고구려 보장왕 서자 고안승의 후손이고 서해용왕의 딸로 그녀에게 장가를 들어 용녀를 낳았고 당숙종의 아들인 작제건을 보고 제왕의 조상이 될 사람임을 알고 용녀를 그에게 주어 용건을 낳았다고 한다. 이 용건이 송악태수 왕륭으로 왕건의 아버지이다.-----고려성원록에 의하면 작제건→용건→왕건으로 이어지는데 성씨 작→용→왕씨가 작→왕(왕륭)→왕(왕건)으로 바꾸어진다. 즉 차씨가 왕씨로 변했다는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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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kswang8730/Q90e/16
♧개성왕씨, 연안차씨, 문화류씨의 계통에 관하여 드리는 말씀
안녕하세요?
전에 실명을 쓰는 원칙을 알지 못해서 번거롭게 해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개성왕씨 중앙종친회에 메일로 보낸 것입니다. 아직 답장이 없고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아서 반응을 알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제가 개인적으로 작성한 것이지만 이미 문화류씨 문중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천명된 사항입니다. 귀문(貴門)도 깊게 관여되어 있고, 조상의 역사를 사실에 맞게 기록하고 아는 것은 종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렇게 어려움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을 잘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릴 수 있는 적당한 게시판이 보이지 않아서 이곳에 올리니 운영자님께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적절한 곳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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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귀중
발신: 류주환 (연락처는 하단에 있습니다)
제목: 개성왕씨, 연안차씨, 문화류씨의 계통에 관하여 드리는 말씀
요약:
개성왕씨 대동보에서는 현재 황제(黃帝)에서 시작되고 왕씨, 차씨, 류씨 등이 등장하는
계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원파록"인데, 맨 처음 원파록이 실린 것이 문화류씨의 족보입니다.
그것이 연안차씨의 족보에 실리고 후에 개성왕씨 족보에도 실렸습니다.
그런데 원파록의 근본 출처는 "차원부설원기"입니다.
그리고 최근 다년간의 연구에 의해 "차원부설원기"가 저자와 내용 모두 조작된 것임이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원파록은 근거가 없어졌으며, 이미 문화류씨 집안은 원파록을 완전 폐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실정을 상세하게 알리고 개성왕씨 집안에서도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원파록을 재검토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귀문(貴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우선 저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자면, 저는 문화류씨 홈페이지 운영자를 맡고 있으며,
충남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다름 아니오라, 귀문의 계통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외람되다 여기지 말아 주시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전화(02-521-0038)를 시도했는데
잘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곳에 수소문 한 끝에 상주의 종친회로부터 주소를 받아서 이렇게
우편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의 개성왕씨 대동보는 그 내력을 그간 연안차씨와 문화류씨 집안에서 받아들였던 이른바 "류차동원설(柳車同源說)" 혹은 "황제연원설(黃帝淵源說)"을 받아들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 다 제가 처음 명명한 용어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귀 대동보에 실려 있는 "보계변증기(譜系辨證記)"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에 걸쳐 이 황제연원설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다면 귀 왕문(王門)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신지 하는 것과 추후의 대응 방향은 어떻게 계획하고 계신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일 귀문에서 심각하게 논의된 적이 없다면 사실을 상세히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귀문에 연락을 드리는 목적입니다. 저희 류문(柳門)에서는 2004년 즈음부터 계기가 있어 류차동원설(=황제연원설)을 혼신의 노력을 다해 깊이 살펴보았고, 그 결과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두 사람의 의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중 전체의 공개적인 의견이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그 사실을 대전 뿌리공원의 문화류씨 유래비, 문화류씨세보(대동보: 무자보), 총회, 공식 홈페이지, 종보 등을 통해 세상에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화류씨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류차동원설을 사실로 받아들여 집안의 역사를 기록한 연안차씨와 개성왕씨에게도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연안차씨 문중은 문화류씨의 시조이신 류차달(柳車達)을 문화류씨의 시조가 아니며 성도 류씨가 아니라 차씨라 하는 주장으로 소위 류차문제(柳車問題)를 일으켜서(대략 2002년 정도부터) 결국 류문의 궁구(窮究)를 통해 류차동원설을 폐기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차문(車門)에게는, 그 폐기가 세상에 천명되면서 자연스레 확실하게 알려졌습니다.
반면에 귀 왕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류문이나 다른 출처로부터 전달된 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제가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저도 그동안 몇 번의 시도는 해보았지만 제대로 이런 논의를 귀문에 드릴 기회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류차문제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문중이 더 있는데, 순천박씨 문중(박팽년 관련)과 진양하씨 문중(하위지, 하륜 관련)입니다.
이들 문중에는 제가 임원분들과 연락이 닿아 이미 상세하게 전말을
전해드렸습니다.
먼저 결론을 말씀드리면 황제연원설은 조선 중기에 비로소 만들어져 세상에 나온 꾸며진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黃帝, 王祖明, 王受兢, 車無一, 車建申, 류/차承穡, 류/차/왕恭道 등이 등장하는 장황한 계보는 모두 믿을 근거가 없어집니다.
이들은 수백 년 동안 신봉되어온 것이지만 잘못되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며, 류문에서는 그런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고 오랜 기간 동안의 격론을 통해서 여전히 진실일 수밖에없음을 검증한 다음 그 설을 폐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귀문에서 이미 인지하고 계실지도 몰라서 이번 글에서는 상세하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만일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원하신다면 제게 다시 연락을 주시면 그때 말씀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최소한의 설명은 필요해 보여서 가급적 간략하게 언급을 하겠습니다.
황제연원설은 문헌으로 가장 일찍 기록된 것이 문화류씨의 기사보(1689년)입니다.
여기에 원파록(源派錄)이 실렸고, 그것이 연안차씨 족보(1708년)와 개성왕씨 족보(1798)에 옮겨졌고, 그 후인 1812년에 강남보(江南譜)라는 계보가 추가되어 현재의 족보에 실린 계통이 완성되었습니다. 우선 이 강남보는 위조되었음이 연안차씨강렬공파보(剛烈公波譜)에 밝혀져 있습니다. 문화류씨 기사보의 원파록에는 대략 세 가지의 문헌이 원파의 근거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 두 가지는 사실 검증을 할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수준의 자료이며, 원 사료가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원파록의 가장 핵심이며 모든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이하 '설원기')라는 문헌입니다. 그런데 다년간의 사학계의 연구와 재야 사학가들의 고찰을 통해 이 설원기가 위서(僞書)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설원기는 주저자가 박팽년으로 되어 있고 서문을 하위지가 썼다고 나오며, 그 외 각종 저자가 수 십 명이 등장하는데, 이 저자들도 모두 조작이며, 내용도 모두 위조이고, 책에 쓰여 있는 저작 날짜도 명백히 위조입니다. 그 중심 등장인물인 차원부(車原頫)라는 인물 자체가 조선에서 내렸다는 시호(諡號)도 조작임이 조선왕조실록에 버금가는 중요한 사료인 "일성록(日省錄)"에서 증명되고, 과거급제는 사실이 아니고, 벼슬의 전력도 조작임이 확실시 되고, 그 행적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설원기가 위서이므로, 그 역사적 실체는 물론 실재(實在)조차 믿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설원기의 저작 목적은 오로지 집안의 내력을 꾸며내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설원기는 연안차씨가 문화류씨와 뿌리가 같음을 선언적으로 제시하고 있고 개성왕씨 역시 같은 계통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원파록의 근간입니다.
그리고, 원파록에 언급되어 있는 다른 사료들이 설원기가 조작된 것과 동일한 시기
(임진왜란 전)에 세상에 나온 것으로 파악되는데, 설원기의 위작자가 설원기를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함께 조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들이 합해지고 거기에 앞에 언급한 강남보가 합해져 현재의 원파록이 완성된 것입니다. 설원기는 난삽한 문장과 내용으로 이루어진 문헌이고, 외견상 철저하게 왕명(王命)과 대학자들과 대신들의 권위를 가장하고 있어 지금까지 사림(士林)의 유학자들까지도 속여 왔습니다. 그런데 정교하게 분석해 보기 시작하면 스스로 위작임을 명백히 드러내는 허망한 문헌입니다.
그리고 설원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학계의 논문도 여러 편 등장했습니다. 만일 이 문헌이 더 정교하게 조작되었거나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게 모호하게 작성되어 있었다면, 류문에서도 조상들께서 수 백년 동안 신봉해온 원파록의 폐기라는 엄청난 일까지는 감히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데도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향후 귀(貴) 왕문에서도, 차문에서도, 또한 여타의 다른 많은 기록에서도 황제(黃帝)로 이어지는 계통은 삭제되고,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계통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재 각종 역사 사전에 '차원부'와 '차원부설원기' ('운암선생설원록' 등의 다수의 이본이 있음) 등이 버젓이 올라가 있는데, 저는 이미 관계 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과 연락을 취해서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저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 내용을 정정하겠다는 공식적인 약속을 받은 상태입니다.
사전의 개정 작업이 한두 건이 관계되는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런 실정인데 문중의 계통의 기록이 그 위서(僞書) 설원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면
문제가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서서 이런 연락을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조심스럽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그냥 기다려서 저절로 문제가 인지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방법일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알려 드리는 것이 도리일 듯하여, 다시 귀 문중의 연락처를
수소문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문중과 역사적 차원의 문제임을 깊이 혜량해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저에게 답글을 주신다면 가급적이면 아래의 이메일 주소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상의 내용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에 주소를 밝힌 두 홈페이지에 들어 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이메일이나 전화로 연락을 주시면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귀문의 무궁한 발전을 축원하오며, 이만 줄입니다.
2011년 12월 26일
대전에서 류주환 배상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고분자공학과 교수
문화류씨대종회 홈페이지(http://moonhwaryu.kr/)운영자
홈페이지: http://kenji.cnu.ac.kr/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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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kswang8730/Q90e/15
△ 고려태조 왕건 △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해서는 너무나 다 잘 아시고 계시지만 그래도 또 모르는것이 있을것 같아서 여기 올려 봅니다.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 송악 출생입니다.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다.
전설에 따르면, 왕건은 서해 용왕의 외손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려의 역대 임금들은 용의 피가 흐르고 있는 용의 후예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의 출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륭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새로 짓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도선(道詵)대사란 고승이 문 밖에서
이것을 보고 “북쪽으로 옮겨 지으면 이곳에서 세상을 구할 성인이 태어날 것” 이라고 중얼거리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왕륭에게 새 집터를 잡아주고 이 일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 뒤 길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륭의 부인 한씨에게 태기가 있더니 그 이듬해 음력 1월 14일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종일 뜰에 서려 있었습니다.
왕륭은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建)이라 지었습니다.
895년(신라 진성여왕9) 아버지를 따라 궁예 부하가 된 뒤 900년 광주,충주,청주 등의 군현을 평정하였으며 903년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금성군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고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습니다.
그 뒤 궁예가 난폭한 행동으로 민심을 잃자 918년 강대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내쫓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한 뒤 이듬해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 견훤과 아들 신검과의 싸움이 벌어진 틈을 타서 견훤을 포섭하고 신검을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건국이념으로 융화정책, 북진정책, 숭불정책을 내세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신라와 후백제 유민들을 포섭, 융화·결혼정책을 쓰고 지방 호족들을 회유, 무마하는 한편,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하였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 지역에 절을 세웠습니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계백료서》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였고 943년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는데 그의 정치사상이 엿보이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943년 임종을 눈 앞에 두고 고명대신인 삼중대광 박술희에게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 10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내려 자신의 자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원칙으로 삼는 귀감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개성에 위치한 현릉(顯陵)입니다.
태조의 뒤를 이어 차비(妃)인 장화왕후(莊和王后)에게서 난 아들 무(武)가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惠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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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kswang8730/Q90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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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의 위업 재평가 새 의미로 복원돼야
이성계의 조선개국으로 ‘멸족 참변’
田·玉·車·씨 등으로 변성하고 피신
대부분 개성王씨 환성하지 않고 玉씨만 환성
본지는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기획 특집 면을 마련했습니다. 이 지면은 해당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기획·취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재음미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지면을 활용하여 각 성·본 대종회 및 종친회의 단합과 교육, 홍보효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글·박병로 국장
왕씨는 천강성(天降姓), 즉 하늘에서 시조가 내려온 성씨가 아니다. 그래서 그 시조가 불분명하다. 보통 개성 일대에서 왕씨 성을 사용하며 대대로 살아왔으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왕씨 성을 개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성왕씨는 왕건의 4대조를 시조로 삼고 있다. 다만 개성왕씨 세대를 헤아릴 때는 태조 왕건을 1세로 간주하고 있다.
어떻게 된 까닭일까. 태조 왕건이 제왕(帝王)이기 때문이다. 즉 황제는 하늘과 같이 지엄·지고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식이 함부로 아버지(보통의 인간)라 칭할 수 없는 이치와 같이 후손이 함부로 그를 시조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개성왕씨 파조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개성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 파조인 효은태자 왕 원(王垣)은 태조의 15번째 아들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시중공파의 파조인 시중공 왕 제(王濟)도 태조로부터 16세손인 충정왕의 맏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이다.
안경공파의 안경공 왕 창도 10세손 고종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양양공파의 왕 서(王恕)도 8세 신종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평양공파 평양공 왕 기(王基)는 3세손인 현종의 넷째 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고려태조는 결혼정책으로 지방 호족들과 연대감을 유지하며 중앙집권적 권력 기반을 다졌다. 부인이 29명이었고, 성원록에 이름이 오른 아들이 모두 20명에 이른다. 이 20명의 아들들로부터 고려 왕조 476년 동안 왕씨 후손이 생산됐다면 그 인구가 얼마나 불어났을 지 짐작할만하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의 격변과 원나라의 내정간섭 과정에서 권력의 부침이 있었다 해도 전체 개성왕씨는 모르긴 해도 고려말엽에 이르러 대성받이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함께 멸족의 참변을 당했다. 왕손인 왕씨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고려조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는 이조실록 등에서 단편적으로만 찾아볼 수 있다.
이조실록, 국조보감, 문헌비고 등에 의하면 문종 때에 고려 태조를 위시한 몇몇의 고려조의 왕들을 제사지내지 못함을 가엾이 여겨 숭의전을 지어주고 멸족한 왕씨를 수소문하여 배향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일로 여겼던지 정사에는 왕씨 멸족의 방법이나 경위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런데 추강 남효온이 남긴 글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왕씨의 몰살당한 이야기가 있다. 남효온에 의하면 조선조정은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에서 서인으로 살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내 배를 가라앉혀 수장시켰다고 한다. ‘물재주’가 뛰어난 뱃사공들이 배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고 돌아오게 했다는 것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용케 헤엄쳐 나온 왕씨들이 있었으나 뭍에서 기다리는 관군에 붙잡혀 역시 무참하게 살해됐다고 한다. ‘추강냉화’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잠궈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살아남은 왕씨도 물론 있었다. 전국에 방이 나붙었으나 은둔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있고, 조선 조정의 왕씨 멸족 계획을 눈치 채고 피신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명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 왕씨들이 변성명한 이야기는 ‘일토초가자(一土草家者)가 왕이 된다’는 기자조선시대의 고사(古事)와 중첩된다. 田씨, 全씨, 玉씨, 車씨, 申씨 등으로 임금왕자를 숨기거나 아예 다른 성씨를 사용하며 살아남았다. 왕제구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사무국장은 “그런 설이 있다. 하지만 다 그렇다는 확신은 없다”고 한다.
그러다 문종 때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됐다. 왕씨가 다 죽고 없어 고려태조왕을 비롯하여 전왕조의 여러 왕들을 받들어 제사지내지 못하는 것이 결국 아버지 세종대왕과 할아버지태종대왕의 위대한 업적과 높은 도덕성에 오점이 된다고 보고 숭의전을 지어 제사를 모시게 했던 것이다.
개성에 자리한 고려태조 왕건의 무덤.
이렇게 해서 숨어 살던 왕씨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맨 처음 햇빛을 받은 이가 현재의 개성왕씨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 중조가 되는 왕 미이다. 충주에서 외가의 성인 민씨로 살고 있던 왕 미가 밭의 경계를 다투던 중 이웃사람의 고변으로 관아에 붙잡혔으나 그때 이미 ‘방면하여 편히 살게 하라’는 명이 내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발견된 당시 왕 미는 49세였고, 나중에 조정의 서책을 담당하는 교서감의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전하는 옛문헌들(‘개성왕씨세보’와 ‘숭의전사’에 관련 부분이 발췌돼 있다)에 의하면 공주에서 왕순례라는 사람이 발견돼 숭의전 부사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손이 끊겨 후일 숭의전 전감의 신분이 천첩의 소생이냐 아니냐로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왕 미 대부터 개성을 본관으로 삼은 고려왕조의 성, 개성왕씨가 명맥을 잇게 됐다. 국조보감 등에 의하면 멸족령을 내린 조선왕조가 숭의전 제사를 위해 노비와 전답을 하사하고, 마전현을 군(郡)으로 승격시켜 주기도 했다.
국조보감, 이조실록 등 문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씨들이 그 뒤 승승장구한 것 같지는 않다. 훗날 세조는 이렇게 살아남은 왕씨 후손을 세자의 생일잔치에 불러서 전왕조의 후손이니 자신의 신하가 아니라 손님이라면서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으나 세조 이하 역대 조선왕조에서 개성왕씨가 크게 중용되지는 않았다. 인구수가 절대 부족했거니와 전왕조의 성씨라는 이유로 경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왕씨 성을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왕씨멸족령이 내려질 당시 변성명하며 목숨을 부지한 대부분의 개성왕씨 후손들이 끝내 왕씨로 환성하지 않았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1918년에 발행된 무오보에 옥(玉)씨 성을 쓰던 일파가 환성한 것이 유일하다고 했다.
세계사에 ‘고려’ 등장시킨 위대한 왕조
고려청자·금속활자 등 서양에 전파
정재계·학계·예술·방송계 등 포진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이지만 세계에서 통용되는 국호는 고려(KOREA, COREA)다. 일설에 고구려도 ‘구리’, ‘고려’ 등으로 불렸다고 하지만 한반도 배달겨례가 세계무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은 고려 왕조 때다.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제지술, 금속활자 등 찬란한 우리 문화상품을 서방에 전한 것도 하고 고려 왕조 때였다.
따라서 왕씨의 위대한 인물로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숭의전에 배향하는 역대 왕들을 꼽을 수 있다.
태조 왕건은 KBS드라마에서 자세하게 묘사한 바와 같이 나면서부터 영걸의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 도선국사가 큰 인물이 날 것으로 예언했고, 예언 그대로 궁예의 휘하에서 승승장구, 시중의 지위에 올르고 마침내는 포악한 궁예를 내쫓은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를 개국했다.
고려왕조는 부침을 거듭했다. 무신들이 권력을 찬탈하여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원나라가 침입하여 오랫동안 내정간섭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23대 고종은 원나라의 침공에 맞서서 7번을 물리치며 결사 항전하는 영웅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당시 원나라가 중동을 거쳐 터키, 나아가 유럽까지 진출한 가공할 무력의 군세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종의 항전은 실로 위대했다고 할 수 있다.
개성왕씨 전통에 따라 역대 왕들을 제외한 왕씨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조는 물론이고 조선조에도 인구에 회자된 인물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조 문헌 기록자들이 왕씨를 깎아내렸을 가능성이 있고, 고려조의 인물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 묻혔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 성씨총연합회에서 펴낸 ‘성씨총감’에 수록된 왕씨 역대인물은 다음과 같다.
■ 고려 : 동양군 왕 원, 한림학사 왕 융, 상서우복야 왕동영, 태자첨사, 호부상서 왕이보, 태자첨사 왕 유, 상서령 왕 기,중서령 왕충지, 판상서병부사 왕무숭, 중서시랑평장사 왕 석, 판도병마사 왕국모, 판삼사사 왕 가, 판호부사 왕자지, 태부소경 왕상필, 문하시중 왕 충, 덕양후 왕 식, 간의 왕세경, 내시낭중 왕준명, 동경유수 왕 해, 호부상서 왕중선, 보승낭장 왕 열, 시중 왕 제, 찬성사 왕유소, 중랑장 왕 석, 첨의평리 왕 자, 동지밀직사사 왕중귀, 양광전라경상도원수 왕복명, 순안군 왕방
■ 조선 : 교서감 왕 미, 왕 흥, 왕강, 왕안덕, 왕 화, 왕승귀, 왕승보, 계림부윤 왕 보, 의금부도사 왕방연, 홍문관부제학 왕희결, 좌승지(추증)왕의성, 왕 태 등이 있다.
■ 근현대 : 근현대의 왕씨 인물은 지면관계상 생락한다. 현재 개성왕씨 중앙종친회장 왕상은 범주해운 회장이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경제계에 동원수산 왕윤국 회장 등이 있고 학계, 예술계, 방송계 등에 다수의 왕씨가 포진하고 있다. 참고로 최근 국가대표유도선수로 개성왕씨가 발탁되기도 했다.
개성왕씨 세거지의 변천
12대손 왕 미 경기 시흥시 군자동에 거주
15세손 종인 등 5형제 서초동에 둥지
왕씨 세거지 변천 경로는 비교적 단순하다. 12세손 왕미가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에 거주했으며, 그 손자가 되는 15세손 종인, 종의, 종례, 종지, 종신 등의 5형제 때에는 지금의 서초동(예전의 과천)에 거주했다.
이들 5형제, 즉 ‘인·의·예·지·신’ 다섯 형제의 후손대부터 태인, 정읍, 남원, 천변, 문척, 인관 하동, 양주,과천, 인천, 후인, 남양, 장단, 양주, 산청, 예산, 상주, 예천, 의령, 울산, 거창 함열(무순) 등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번연하여 개성왕씨의 대종을 이루게 됐다.
또 숫자는 적지만 여러 지파 후손들이 전국에 산재하고 있다. 13세손인 왕효충의 후손들은 개성에서 많이 살았으며 강동, 신천, 장단, 덕천 춘천, 이천(伊川)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뤘다. 양양공파의 후손은 개성해주에 세거했으며 평양공파의 후손은 논산, 은진, 김제, 익산 여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다.
2000년 인구주택 총 조사에 의하면 현재 개성왕씨는 총 6,148가구 19,808명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농현상으로 인구수가 많지 않은 전북 지역에 왕씨가 다수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경남지역에도 다른 도 단위에 비해 인구수가 월등히 많다.
이들 지역은 서울의 5179명 경기 4811명 부산 1706명에 이어 4위 5위를 차지하고 있다. 광주전남이 900여명에 불과하고, 대구·울산·경북을 합해야 겨우 1000여명이다.
숭의전과 숭의전보전회
숭의전은 고려 태조묘를 봉안한 전각으로 조선 문종 때에 명명됐다. 세종 때까지 고려태조묘로 있던 것을 문종 2년 속육전에 따라 ‘숭의전’으로 한 것이다.
숭의전에 배향하는 위패 현황
정전에 배향하는 4왕
고려태조신성대왕, 현종원문대왕, 문종인효대왕, 원종순효대왕
배신청에 배향하는 16공신(본관)
복지겸(면천), 홍 유(의성), 신숭겸(평산), 유금필(평산), 배현경(경주), 서 희(이천), 강감찬(금천), 윤 관(파평), 김부식(경주), 김취려(언양), 조 충(횡성), 김방경(안동), 안 우(탐진), 이방실(함안), 김득배(상산), 정몽주(연일)
개성왕씨 제사일
연천 숭의전:태조, 현종, 문종, 원종(9월 3일, 3월3일) / 강화도 고종릉:9월 9일 / 고양 공양왕릉:10월 24일 / 마포 공민왕 사당:10월 23일
■ 인터뷰 -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상은 회장
숭의전 제향 등 포용하는 리더십으로 수행
서로 화합하는 친목 유지하는게 큰 힘
王회장 25년간 사비털어 비용 충당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상은 회장은 개성왕씨 동양군파 후손으로 1920년에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다. 일본 동지사대학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에 협성해운 사장으로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해운업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왔으며 90세를 바라보는 현재 범주해운 회장으로 경영일선을 지키고 있다.
국제상공회의소위원, 대한적십자사 중앙상임위원, 제11대, 12대 국회의원, 민정당중앙위원회 의장, 헌정회 11대국회의원회장, 부산영사단 단장,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선수촌 촌장 등 사회에 봉사하는 직책을 두루 역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왕상은 개성왕씨 중앙종친회장을 범주해운 사옥 10층 접견실에서 왕제구 사무국장이 배석한 가운데 만났다.
범주해운 사옥 접견실에는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제구 사무국장이 먼저 나와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20여분 앞서 도착하였으므로 개성왕씨 중앙종친회에서 왕상은 회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자연스럽게 물었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1982년부터 지금까지 25년여를 왕상은 회장이 맡고 있다고 했다. 경제인이지만 왕 회장은 11대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된 정치인이기도 했다.
왕상은 회장 이전에 개성왕씨중앙종친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왕윤국 동원수산 회장이었다. 왕윤국 회장이 개성왕씨 중앙종친회를 궤도에 올려놓았다면, 왕상은 회장은 여러 분야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며 고려왕조의 각종 유물, 문화재의 관리, 숭의전에서의 제사 봉향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수행하는 데 제격이었다. 따라서 전임 회장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 개성왕씨중앙종친회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각종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왕상은 회장이 특히 포용력으로 모든 종친회 사람들을 화목하게 이끌고 있다고 했다. 반대파도 있고 집행부와 다른 의견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왕상은 회장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해 왔다고 한다.
시간이 돼 왕상은 회장이 도착하여 첫 질문으로 개성왕씨를 이끌어가는 중앙종친회장으로서의 철학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왕 회장은 “화목이다”라며 “이사나 지회장, 회원들이 반대하거나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으면 다 들어줍니다”라고 했다. 숫자가 많지 않으니 서로 화합하고 친목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이다.
왕제구 사무국장도 왕 회장이 지난 25년여 동안 중앙종친회가 수행하는 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을 사비로 충당하며 이끌어왔다고 한다.
왕상은 회장으로부터 직접 들어보자.
-중앙종친회장으로서 지방의 파종회 대표들과도 자주 만나는가? 총회나 임시회의나….
“숭의전 제사를 지내기 한달 전에 보통 모인다. 봄의 경우 3월 3일의 한달 전, 가을의 9월 3일 한달 전에 모여 경과보고, 제사 봉행에 대한 의논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왕제구 사무국장은 한번 제사를 모실 때 500여만원 정도씩 들어가는데 그비용을 왕상은 회장이 사비로 충당하며 이끌고 있다고 한다. 숭의전 제사 봉향 때는 숭의전에 배향된 고려 16공신들의 후손들이 참례하기 때문에 무척 성대하게 치러진다는 것)
-종친회원들은 어디어디에서 오는가?
“이사회는 돈을 내는 이사도 있지만 내든 안 내든 우리는 모두 화목하게 만난다. 강원도 삼척에서도 오고, 구례 상주, 의령, 남원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왕씨들이 다 만난다. 협조도 잘해주고 애종심도 투철하다.”
-이분들과 함께 다른 행사를 하기도 하는가?
“해군에서 왕건함을 건조했을 때 우리 종친회원들과 함께 참관하고 둘러보았다. KBS에서 고려태조왕건을 드라마로 방영할 때 방송국에서 초청해 우리 종친들과 찾아가 격려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개성은 휴전선 이북에 있다. 고려 유물과 이북에 거주하는 왕씨 생각도 할만하다.
“한때는 족보도 그쪽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만월대를 비롯하여 고려왕릉을 관리하는 문제도 생각해봤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다만 숭의전이 있는 연천이 개성과 가까우니 그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
(여기서 왕상은 회장은 연천과 개성 지역에 떡을 자잘하게 잘라내는 풍습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이성계의 이씨들을 자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곧 개성왕씨의 중앙종친회 사업을 수행하면서 이재형 전 국회의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웃었다.)
-숭의전도 그렇고 강화도 고종왕릉, 고양시의 공양왕릉도 지자체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지자체가 잘 되고 있어서 우리로서는 부담이 줄었다. 강화도 같은 경우 우리한테 말도 하지 않고 왕릉을 파헤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으나 결국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제사를 봉행하는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씨 핍박이 이제 끝났다고 보는가?
“글세… 끝났다고 본다. 다만 나쁘건 좋건 지난 과거를 지워버리고 불태워버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끝으로 고려왕조의 위업이 소홀히 평가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중앙종친회가 앞으로 바라는 것은 고려왕조의 위업에 대한 발굴과 재평가, 의미부여가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 세계화를 이룬 고려왕조, 고려문화와 개성왕씨가 재조명되고 새로운 의미로 우리 사회에 복원됐으면 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중앙종친회의 힘은 미약하다. 데모를 할 수도 없다. 청원서를 내거나 여론을 조성하기에는 인구 3만 명은 너무 적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좋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렇게 해주기를 희망한다. 좋은 사회라면 그렇게 가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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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kswang8730/Q90e/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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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왕씨(開城王氏)
연원[편집]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고려의 왕족으로 시조는 고려 왕건의 증조인 왕국조(王國祖)이다. 후에 그는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되었다. 개성 왕씨는 송악(松嶽)의 호족 집안으로서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왕씨 성을 개창했다고 볼 수 있다. 개성 왕씨는 왕건의 4대조를 시조로 삼고 있으나, 세대를 헤아릴 때는 태조 왕건을 1세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제왕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다는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는 개념에서 유래된다. 이러한 관념은 개성 왕씨 파조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황실 후예설에 관하여[편집]
고려 때 관찬된 편년통록에 의하면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로 서술하고 있는데,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인용하며 의조(懿祖)의 아버지가 당 숙종이라는 이야기를 허구로 규정하였다. 이 설은 원나라 한림학사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고, 고려 측에서는 숙종이 아니라 선종이라고 항변했다.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중국인을 사칭한 것으로 보이며, 개성 왕씨는 송악(松嶽)의 호족 집안으로서 한반도 토착 성씨이다.
안승 외손설에 관하여[편집]
성원록에 기록된 용녀 저민의의 아버지 두은점각간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서자 고안승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평주출신 고구려계 진골출신으로 무열왕계의 몰락과 동시에 패서로 좌천되었는데 평주로 돌아올 때 황룡과 청룡의 싸움을 보고 화살로 청룡을 쏘아 황룡을 살려주었는데 황룡은 서해용왕의 딸로 그녀에게 장가를 들어 저민의를 낳았는데 고구려계 당나라 절도사 이정기의 손자 또는 당숙종의 아들인 작제건을 보고 제왕의 조상이 될 사람임을 알고 저민의를 그에게 주어 용건을 낳았다고 한다. 이 용건이 송악태수 왕륭으로 왕건의 아버지이다. 평주에는 두은점각간과 관련된 설화가 남아있는데 두은점각간은 설화에서는 김씨로 전해진다.
분파[편집]
개성 왕씨(開城 王氏)는 모두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으로 개성 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분파의 파조는 다음과 같다.
•동양군파(東陽君派)의 파조는 제1대 고려 태조(太祖)의 제15왕자 원(垣)이며,
•평양공파(平壤公派)의 파조는 제8대 고려 현종(顯宗)의 제4왕자 기(基)이며,
•양양공파(襄陽公派)의 파조는 제20대 고려 신종(神宗)의 제2왕자 서(恕)이며,
•안경공파(安慶公派)의 파조는 제23대 고려 고종(高宗)의 제2왕자 창(滄)이며,
•시중공파(侍中公派)의 파조는 제30대 충정왕(忠定王)의 제1왕자 제(濟)이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개성왕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 파조인 효은태자 왕원(王垣)은 고려 태조의 15번째 아들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시중공파의 파조인 시중공 왕제(王濟)도 고려 태조로부터 16세손인 충정왕의 맏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이다. 안경공파의 안경공 왕창(王滄)도 10세손 고려 고종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양양공파의 왕서(王恕)도 8세 고려 신종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평양공파 평양공 왕기(王基)는 3세손인 고려 현종의 넷째 아들로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고려 태조는 결혼정책으로 지방 호족들과 연대감을 유지하며 중앙집권적 권력 기반을 다졌다. 부인이 29명이었고, 성원록에 이름이 오른 아들이 모두 20명에 이른다. 이 20명의 아들들로부터 고려 왕조 476년 동안 왕씨 후손이 생산됐다면 그 인구가 얼마나 불어났을 지 짐작할만하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의 격변과 원나라의 내정간섭 과정에서 권력의 부침이 있었다 해도 전체 개성왕씨는 모르긴 해도 고려말엽에 이르러 대성받이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멸망 뒤[편집]
조선 태조 1년(1392) 7월 20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 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王氏)를 밖에 두기를 청하니, 조선 태조가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그 아들 강(康),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조(珇)·관(琯)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8월 20일에는 고려 왕씨들의 노비의 수를 줄였다.
2년 5월 26일에는 왕명에 따라 도평의사사에서 경상도 안렴사와 거제 병마사에게 이문(移文)하여 거제로 보내졌던 왕씨 일족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해서, 완산(完山)·상주(尙州)·영해(寧海)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3년 1월 17일에는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이 점쟁이에게 공양왕과 왕씨의 명운을 물은 역모를 하자, 다시 일부 왕씨들을 거제도(巨濟島)로 옮겼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월 21일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왕씨를 제거하자고 청하였고, 2월 21일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왕강(王康), 왕격(王鬲), 왕승보(王承寶), 왕승귀(王承貴)의 가족들을 모두 해도로 보낼 것을 청하였고, 2월 22일, 2월 23일에도 왕씨 일족의 죄를 청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5일에는 대간과 형조에서 박위(朴葳)도 모의에 가담했다고 주장하였다. 26일에 다시 공양(恭讓) 삼부자(三父子)를 법에 처하고, 왕강, 왕격, 왕승보, 왕승귀의 일가를 모두 해도(海島)로 내쫓고, 강화(江華)에 보내졌던 왕씨도 해도로 귀양보내라는 상소가 올려지자 조선 태조는 역시 거절하였다. 이에, 대간과 형조에서 정사(政事)를 보지 않는 시위를 하자, 왕강은 공주(公州)로, 왕격은 안변(安邊)으로, 왕승보는 영흥(永興)으로, 왕승귀는 합포(合浦)로 귀양보내졌다. 2월 27일에 조선 태조는 사헌부에 명령하여 강화에 살고 있는 왕씨 중 늙은이와 약한 자를 보살피라 명령했다. 4월 1일, 10일에 또 다시 왕씨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4월 14일에 다시 상소가 올라오자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남진(鄭南晉)과 형조 의랑(刑曹議郞) 함부림(咸傅霖)이 삼척(三陟)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 윤방경(尹邦慶)과 대장군 오몽을(吳蒙乙)이 강화(江華)으로, 형조 전서(刑曹典書) 손흥종(孫興宗)과 첨절제사(僉節制使) 심효생(沈孝生)이 거제도(巨濟島)로 왕씨를 제거하려 보내졌다. 4월 15일에 윤방경 등이 강화에 있던 왕씨 일족을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4월 17일에는 공양왕 일가가 살해되었으며, 4월 20일에 손흥종 등이 거제도에 있던 왕씨 일족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고, 같은 날에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4월 26일 고려 왕조에서 왕씨로 사성된 일족들은 모두 본성으로 환성하게 했으며, 왕씨를 가진 사람은 고려 왕실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6년 12월 1일에는 왕씨(王氏)의 서얼인 백안(伯顔)·연금(延金)·금만(金萬)이 성명을 달리 바꾸고 지내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2월 8일에는 역시 고려 왕씨의 서얼인 약사노(藥師奴)가 교살(絞殺)되었다.
조선 태종 13년 11월 15일에는 왕휴(王庥)의 아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가 붙잡혔다. 왕휴가 공주 사람 이밀충의 누이를 첩으로 맞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거을오미이다. 태조 3년에 왕씨가 도륙당하였을 때에는 그 어미가 무지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러 왕씨의 후손들이 중이 되어 산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사찰을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3년(1413) 11월 26일에 왕거을오미를 석방하고, 조선 태종이 "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혹은 남에게 고발을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自願)하여 거처(居處)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평안하게 하라."라고 하교하였다. 하지만, 11월 29일, 12월 1일에 왕거을오미를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하였으나 기각되었다.
16년 11월 1일에는 왕상우(王上尤)가, 왕씨의 후예가 이수라는 자의 여종과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 그 주인 이수에 의해 고발되었다. 5일에 그 아우 왕화상(王和尙)과 함께 풀려났다.
조선 문종 1년 11월 1일과 6일에 왕씨의 후예를 찾아 제사를 받들 게 할 것을 명하였다. 얼마 뒤에, 제우지(齊牛知)라 변성하여 공주에 숨어살던 왕우지(王牛知)가 이웃 사람과 밭 경계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지더니 이웃 사람이 관가에 왕씨라고 밀고하여 붙잡혀 오게 되었는데, 오히려 조정에서는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 뒤에 왕순례(王循禮)라는 이름도 내려졌다.
멸족령을 피해 왕씨들이 王과 비슷한 글자인 田, 全, 玉, 車, 申 등으로 변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왕제구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사무국장은 "그런 설이 있다. 하지만 다 그렇다는 확신은 없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 5대조 문종 때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됐다.
환성(換姓)[편집]
그런데 이렇게 왕씨 성을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왕씨멸족령이 내려질 당시 변성명하며 목숨을 부지한 대부분의 개성왕씨 후손들이 끝내 왕씨로 환성하지 않았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1918년에 발행된 무오보에 옥(玉)씨 성을 쓰던 일파가 환성한 것이 유일하다고 했다. 그리고 본래 고려 왕실에서는 태자를 제외한 왕자들을 승려로 출가시키거나, 아니면 모친의 성을 따게 해서 왕권에 피해를 주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현재 고려 성원록을 보면, 유(柳)씨, 임(林)씨, 이(李)씨 등등 외가의 성을 따른 왕자들이 많다. 그래서 현재 이 성씨들 중 고려 왕실의 후손이 있다는 얘기도 있다. 대표적으로 고려 희종의 손자 '광평공 혜'의 아들이 모친의 성을 따서 류(柳)씨가 되었다는 말도 그 일례다. 참고로 현재 '문화류(柳)씨 곤산군파(곧, 본래는 약목유柳씨)'가 이 광평공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다. 현재 약목유(柳)씨(참고로 약목유씨는 현재 주로 '문화유씨 곤산군파'란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본래 약목 류씨와 문화 류씨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가 이 광평공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
인구[편집]
개성 왕씨의 인구수는 2000년 기준 6,148가구 19,808명이며 한국의 270여 성씨 중 82번째이다. 현재 개성왕씨가 가장 많은 지역은 서초구 서초동이다
첫댓글 자료 유용하게 활용 하겠습니ㅣ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와 또 한 편의 역사를 공부하고 갑니다. 정리된 사료를 접할 때마다 문중을 위해 쏟으신 노고에 감사드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