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세종 19년 정사(1437,정통 2)
11월29일 (을묘)
19-11-29[01]
바람에 견디는 볍씨를 관가에서 심어서 시험하게 하다
이성 현감(주1) 전강(全强)이 상언하기를,
“먹는 것은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니 관계가 매우 중합니다. 우리나라는 동쪽에 큰 산이 있어서 동풍이 불면 산 서쪽의 곡식이 충실해지지 못하고, 서풍이 불면 산 동쪽의 곡식이 충실해지지 못합니다. 화곡이 충실하지 못하는 일이 해마다 있음은 민생이 함께 걱정하는 것입니다. 신이 무술년에 교하(交河) 고을을 맡았던 바, 마침 벼알이 다른 해보다 곱절이나 충실하지 못했으나, 간혹 열매가 충실한 벼도 있었습니다. 그 연유를 노농(老農)에게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벼는 바람을 꺼리는 것이 있고 바람을 꺼리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오로지 볍씨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무신년에 또 영흥(永興) 고을을 맡았는데, 그 해 농사도 무술년과 같이 충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여러 노농에게 물었던 바, 또한 ‘볍씨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곧 상언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시험하지 못한 일이므로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근년에 농장에다 바람을 꺼리지 않는 볍씨를 심어서 시험하였더니 과연 노농의 말과 같았습니다. 딴 사람들의 벼는 비록 충실하지 못하였으나, 신이 심은 벼는 모두 충실하였습니다. 만약 바람에도 견디는 이 볍씨를 바꾸어서 심게 한다면, 수년 후에는 자연히 충실하지 않는 벼가 없을 터이니 거의 백성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여러 도의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전강의 상언이 이와 같으니, 바람에도 견디는 볍씨를 바꾸어서 우선 관가에서 심어서 시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가을 거둠을 기다려서 수량을 자세히 아뢰어라.”
하였다.
【원전】 4 집 117 면
【분류】 *농업-농작(農作) / *농업-농업기술(農業技術)
(주1)이원군[ 利原郡 ]
정의
함경남도 동북부에 위치한 군.
역사
[조 선]
1436년(세종 18) 단천군 마운령 이남의 시질간사(時叱間社)·시리사(施利社) 및 북청부 동다보사(東多甫社) 이북의 땅을 떼어 이성현(利城縣)을 설치하였는데, 이처럼 독립된 현으로 승격된 것은 세종의 진취적인 동북경 개척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원은 현감·훈도 각 1인이고, 군사 체계는 북청진관에 속하여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1인이 있어 현감이 겸임하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를 침공하였을 때 이성도 점령되어 막심한 전화를 입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행정구역은 시질간사·시리사·다보사 등으로 나뉘어 있었고 호구는 2,085호 1만 3609명이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선조어휘(先祖御諱)의 자음(字音)을 피하기 위하여 이성현을 이원현으로 고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원군 [利原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