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에 다시 찾은 꿈의 백두대간(2009년 4월 12일)
구 간 ; 개터재-백학산(615m)-개머리재ㅡ지기재((901지도)-신의터재(280m)
일산 하나산악회 백두대간 종주대
전문가의 지도로 준비운동을 하고있는 우리 대원들의 모습.
백두대간 종주길이 진달래꽃 산행같다.
앞에가는 님은 무대포님 부부이시다.
윗왕실을 지난 곳에서 바라본 오늘의 최고봉 백학산.
백학산도 20 여센티는 낮아졌겠죠?
산행중 제일 즐거운시간,
영원한 해병님처럼 저 정도의 자세는 되어야지.
건산님은 또 뭐가 못 마땅해 저 모양이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산벗나무.
곳곳 이렇게 이정표를 세워주신 자자체에 감사드립니다.
등산로도 정비해 주시고 위험한곳은 돌아가게 유도해 주시는데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는 아예 막아버리면 어쩌라는겁니까.
한곳에서는 길 내어주고 한곳에서는 막아버린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적은 예산에서도 이렇게 해 주는데
국가 기관에서는 막는게 특권이라도 되나?
그렇다면 아예 지리산에서 부터 산이란 산은 전부 막아버리고
국립공원 관리공단도 없애 버리고 그 지방 자치단체에 넘겨주면 더 잘 할것 같은데
높은데 있는 어른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오.
죽은듯 말없이 서있던 저 낙엽송도
봄바람에는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연녹의 새순들,(지기재 내려서기 전)
수계를 가르는 백두대간,(지기재)
은왕봉(395.4m)
이번 종주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 보았더니
정상 조금아래엔 전망좋은 무덤이 있었고
정상은 오히려 시계도 없고 조그만 묵무덤만 한기 가 있었다.(왕봉 1km정도)
그곳으로 가다보면 이렇게 넓은 암반도 있고
지나온 백학산과 그 주변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좋은곳이다.
암반위에서 바라본 지나온 산 너울,
무덤쪽에서 바라본 신의터재 부근
다음구간 가게될 윤지미산과 그 주변이 가늠된다.
대건중 유일한 논 두렁에서 찍은 봄을 맞는 산의 모습,
라일락,
원래 우리나라가 원산지라는데
6,25때 미군들이 이름을 만들었기에 그렇다고 듣긴 들었는데 그 진의 여부는 ?
신의터재 직전 잣나무 조림지
가지치기와 간벌을 해 주어야겠는데....
많이도 컸고 그동안 많은 모습들이 달라져 가고 있었다.
오늘의 산행 종점인 신의터재.
산의 높이는 없었어도 날씨가 더워 대원들이 많이 지쳐있었고
후미의 알바로 조금 지체 되었다.
그러나 먼저온 대원들의 특별 요리로 푸짐한 음식 감사했습니다.
춘자님 내외분 그리고 태자님, 건산님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종주를 마친 수제자들의 시범 순서.
향수님 자세 돋 보입니다.
귀경길 속리산 휴게소에서 바라본 구병산(충북 알프스)
이제 완연한 봄이다,
오늘로서 백두대간중 제일 낮은 지역인 덕유산 구간과 속리산 구간의 완충 지대인 중화지구대를 통과 했으니 다음부터는 속리산 구간에 입성하게 된다,
상판저수지의 규모가 대단하다, 지난번 산행을 끝냈던 상주시 모동면 효곡리에서 농로를 따라 다시 개터재로 갔다.
10여분 거리 이며 이곳에서 다시 10여분 대간 길을 오르니 505봉이 숨은 듯 누워있고 윗왕실 고개를 향해 왼쪽으로 꺾어간다,
산길을 찾는다는 것은 처음이나 두 번이나 다를 게 없음에도 우리 인간은 유난히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싶다,
잘 다듬어진 목장의 초지처럼 편안한 길이 계속된다. 넘어진 나무가 길을 막고 쉬어 가라고 하지만 아직은 쉬어야할 이유가 없어 사이로 지나쳐 버린다.
단단한 땅에 물 고이고 높이 올라야 멀리 볼 수 있다는데 하늘은 선명하다 못해 창백할 만큼 진한 푸르름으로 덮여있다.
윗왕실재는 모동면 효곡리와 외남면 소상리를 잇는 비포장도로로 1955년 개설되었고 처음엔 이곳도 높은 절개지 였으나 4차 종주 때 오니 동물 이동통로로 다시 만들어 대간 길을 이어 놓았다.
白鶴山은오늘 구간에서는 제일 높은 곳이고 낮은 곳은 지기재(260m)이다,
숲은 미래를 닮은 큰 그릇이다. 그 큰 그릇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백년 내지는 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가꾸고 정성을 들여야만 아름다운 미래가 조성되는 것이니 산을 사랑하는 우리들부터 가꾸고 돌보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청상지를 안은 갑장산(805.7m)은 이제 바라볼 수 없다. 대신 왼쪽으로 흘러가는 지능선이 효곡리의 뒷산인 성봉산(572.1m)줄기다,
상주의 중화지구대는 2~400m로 산으로는 아주 낮은 곳이고 들(野)로서는 높은 곳이다.
그래서 평지 보다는 평균기온이 3~4°차이가 나는 까닭에 생산되는 과일의 당도가 높아 고품질의 과수농업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 성종때 慶州와 尙州의 첫 머리글자를 따 慶尙道라고한 그 연유도 알만하다,
修行은 작은 씨앗을 키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 대간 종주대도 어렵게 한 구간 한 구간 종주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주의 기쁨을 누리리라 본다, 별처럼 빛나는 완주의 그날을 위해 우리는 거름도 주고 가꾸어야 튼튼하고 알찬 결실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것이다.
번뇌의 구름, 업장의 그림자를 지워가는 공부가 참선이라고 한다면 염불과 기도는 내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수행이 될 것이다,
千江有水 千江月 이요 萬里無雲 萬里天 이라했듯이
천개의 강에도 달이 뜨지만 그것은 달의 그림자일 뿐 하늘의 달 즉 참 마음은 오직 하나뿐이고 萬里 하늘에 구름 걷히면 만리가 다 하늘이니 결국은 번뇌와 업장에 가려진 마음을 잘 수행하자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회원님들도 많은 참여와 관심으로 집행부의 방침에 잘 따라주시고 다소간의 부족함과 서운함이 있더라도 대간종주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차원에서 무리 없는 소화를 기대 하자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산행을 마치는 신의터재는 해발 280m로 표지석 엔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임을 알리고 쌍 용두를 이고 있는 크고 검은 비석은 義士節谷金先生俊臣遺跡碑가 세워져있다.
신의터재는 임진왜란 때 상주지방에서 봉기한 의병 600여명이 왜적 1만7천명과 싸우다 전멸한 내륙에서의 첫 接戰地이다, 임란 전에는 신은현이라 불렀고 의사 김준신이 의병을 모아 왜적을 도륙하고 장렬하게 순절한 뒤부터 신의터재라 부른다고 한다.
5차 종주 때는 부산의 석봉산악회 백두대간 종주대원과 함께 이곳에서 비박으로 하늘의 별을 보는 즐거움을 갖기도 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大幹 길을 종주하다보면 머물고 싶도록 아름다운 곳이 어디 한 두 곳인가.
다리가 아파 퍼질러 앉아 있던 그곳이 제일 머물고 싶고 배가 고파 허기질 때 차라리 한숨 자고 싶은 충동도 있었지만 그러질 못 하는 것이 대간쟁이의 고통이고 안타까움 뿐이다,
붕어빵에 붕어 없고 국수봉에 국수 없다는 용문산 구간을 지날 때는 날씨가 흐려 주변을 챙길 수 없었지만 밤은 깊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는 법이고 우리는 만나면 만날수록 멀고 먼 대간 길은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
배고픈 까마귀처럼 산이 고파 산을 찾는 우리 대간쟁이(전문가, 기능공)들은 한 달에 두 번씩 만나는 이 순간이 항상 기다려지는 것은 이미 백두대간에 취해가고 있음 이겠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그 만큼 관심을 갖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이젠 마음이 몸을 부리던 시기는 지나갔고 몸이 마음을 부리던 때가 왔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내 주위에는 산과 하늘만이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산이란 오름도 있고 평지도 있지만 내리막은 더욱 조심해야할 것이다,
때로는 두고 온 세상을 생각하며 山이 되고 峰이 되는 선경도 꿈 꾸어야할 것이며 마음의 정상석을 어디다 내릴지도 조용히 생각해 봄직도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산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며 산에서 찾는 행복도 같이 느껴 보자.
그리되면 건강하고 생산적인 밝은 에너지가 전달되어 스스로 행복을 느낄 것이며 내 행복이 곧 남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이 산을 자주 찾으면 느껴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들 덕택으로 오늘의 백두대간종주도 즐겁고 유쾌하게 마침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집행부 운영진의 노력하는 모습 든든함을 느끼며 그 고마움에 박수를 드린다.
아름다운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