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차씨는?
연안차씨종친회중앙본부 홈페이지를 보면 신라시대 1세 차무일부터 33세 차승색까지 34명이 대승상 6명, 승상 17명(합계 21명)이 나오고 상대등1명, 시중 1명, 사공 2명(얼마후면 이 숫자가 변할 것임)이 나오고 상주국, 상장군 등이 나옵니다. 과거 승상이 24명(? 숫자가 수시로 변함)이 등장했는데 신라에 승상이란 관직명이 없다는 저와 류재준님을 비롯한 몇분의 글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대승상과 좌승상을 만들더니 이제는 신라 관직명이 있는 시중 상대등을 추가 했으나 신라관직에 없는 사공 상주국 상장군을 만들어 선조 관직에 추가 했습니다.
이런 글이 의심스러우면 인터넷상에서 신라 관직명을 검색하여 보십시오.
과거 왕족도 왕위계승을 장자로 계속 이어온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신라도 3성이 돌아가면서 왕을 했는데 어찌 차씨만 최고위직을 대대로 이어 올 수 있겠습니까?
조선선조 때 차천로 부자가 원파록과 차원부설원기를 만들어 꾸며낸 이야기를 당시 정보 공유가 안되어 차원부설원기가 위서라는 정보를 알 수 없어 문화류씨가 수용했고 대성씨인 문화류씨 자료를 근거로 개성왕씨가 수용했으나 현재 문화류씨 개성왕씨는 물론 차원부설원기를 국역에 참여한 고려대총장도 부인하고 있으며 차원부설원지를 지었다는 박팽년 후손들(순천박씨대종회)도 부인하고 있는데 문화류씨중에 몇분이 차문에 붙어서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 소개한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를 보시면 신라에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6부성이 있었으나 차씨는 없고 이들 성씨도 본인 아들 손자로 이어진 것이 아닌데 어찌 차씨만 이어올까요? 그리고 신라는 진흥왕 이후 성씨가 나타난다는데 그 이전 차씨는 왕족이 아닌데………
1. 김해허씨대종회
http://cafe.daum.net/Kh.daum.net/WcjK/13?q=%BF%EC%B8%AE%B3%AA%B6%F3%BC%BA%BE%BE%C0%C7+%BF%AA%BB%E7
우리나라 성씨의 역사(내용 발췌함)
우리 나라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한 뒤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을 성으로 삼았다.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한 것은 이것을 실증한다.
삼국시대
고구려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인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 우리 나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 신라 진흥왕의 네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진평왕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예를 들어 추정해보면,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성은
- 고구려: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 백 제 :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등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 라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많았다.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없는 사람은 과거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 현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으로 기록되었다.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86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2. 영일정씨진사공 카페
http://cafe.daum.net/jhz4013/7TtD/17?q=%BF%EC%B8%AE%B3%AA%B6%F3%BC%BA%BE%BE%C0%C7+%BF%AA%BB%E7
◐우리 나라 성씨의 역사
1. 삼국시대 (위와 중복 내용 삭제하고 내용발췌함)
[신라]
- 성의 사용 시기 추정 : 진흥왕시대(540~576)부터
- 신라의 성 : 박, 석, 김 3성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 장, 비 등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성의 起源은 아무래도 新羅의 朴, 昔, 金 3姓과 李, 崔, 孫, 鄭, 裵, 薛의 6村姓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新羅의 王室계보를 보면 역대 56王 가운데 朴氏가 10명 昔氏가 8명 金氏가 38명으 로 되어 있다. 朴氏는 박속에서 나왔다 하며 姓을 "朴"이라 하고,이름을 赫居世라 하 여 B.C57년에 왕으로 추대했다. 昔氏는 B.C19년 昔脫解로 57년 儒理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金氏는 65년 탈해왕 9년 金城 서쪽 鷄林의 나무끝에 걸려 있던 금궤 에서 태어났다. 三珹氏는 이리하여 태어났다. 이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학자도 있다.
3. 자세한 성씨 유래를 보려면 이들 카페를 방문하여 보십시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서 차원부를 검색하면 차원부는 나오지만 차원부설원기는 삭제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차원부 설명에 나오는 정도정 서자라는 내용을 부인하는 봉화정씨글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본카페 류-차문제 288번글 "차천로가 봉화정문과 문화류문을 농락한 자료 소개"를 참고로 보시면 차문의 만행을 알 것입니다.
첫댓글 차문에 붙어서 저의 글을 감시하고 차문관련글을 쓰지 말라고 하여 몇년동안 차문관련 글을 안쓴 것으로 그분에 대한 예우는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차문과 대동사 소유권 문제로 재판중이고 또 다른 분에 차문에 붙어 재판장에 나오는 현실입니다.
이글은 문화류씨전국청년연합회 밴드 운영자인 류찬길님의 자료에 몇가지 추가한 글입니다. 류찬길님은 본카페에 글을 쓰지 않지만 차문 관련 내용 알리기에 앞장서신분입니다.
5년전 차문에 붙은 저의 먼친족을 조정하는 차모씨가 저와 여기 글을 자주 올리는 류병수님이 서울 예술회관에서 전국 문화류씨를 모아놓고 강의를 한다면서 그 원고로 류교수님글을 제 불로그에 스크랩해놇은 것을 출력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그 친척에게 예술회관 1시간 대관료가 얼마인지 아느냐? 예술회관을 대관하는데 무명인에게 대관해 주는가?를 묻고 차모씨의 술책에 놀아 나지 말라고 했더니 류병수님 인적사항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차모씨의 목적은 류병수님의 인적사항을 알아 저처럼 글쓰는 것을 방지하려고 술수를 부렸는데 그친척은 그것을 모르고 차모씨가 시키는대로 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친척을 차씨로 대합니다.
어제 차문 일부가 제가한 대동사 소유권 재판이 있었는데 하정공파 1명 지후사공파 1명 서산류씨 1명이 차씨와 함께 재판정에 나왔습니다. 하정공파 1명은 저의 종친회에서 제명 시킬 예정입니다.
저도 하정공파 입니다. 어느분인지 모르지만 창피한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