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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 민속문화제 제21호(전북)
명 칭 : 장재영가옥
지정일 : 1986년 09월 08일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095-1
장재영가옥 안채
장수군 번암면에는 장수군문화재로 등록된 곳이 두 군데있다 장재영가옥과 어서각이 있다
오늘은 번암면으로 문화답사를 계획중이다 장수를 출발하여 수남초등학교를 지나서
뜬봉샘이 있는 수분령을 거쳐서 남원방향으로 직진 하다보면 번암면 소재지가 나온다
번암면에 대하여 잠깐 알아보자.
“번암면은 구 한말 이전에는 상번암방, 중번암방, 하번암방으로 부르면서
남원부의 관할 구역에 속했는 데 이때의 방은 편의상 구역을 획정하는데
불과했다 그래서 구역명을 부를때 방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예(상번암, 중번암, 하번암 등) 그후 1906년에 지방관제 개정으로 상.중.하
번암은 남원시에서 장수군으로 편입했으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
으로 방이 면으로 개칭됨에 따라 장수군 상번암면(교동, 국포, 죽산, 사암)
중번암면(죽림, 노단, 동화, 지지), 하번암면(논곡, 대론,유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1917년 면제 공포로 상·중·하 번암면이 번암면으로 통폐합되었다.
번암면은 태백정간(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두메산 어느골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있다 주변에 백운산, 장안산, 팔공산, 대성산
고남산이 동서남북으로 병풍처럼 둘러있다 이렇듯 큰 산들이 첩첩으로 둘러
있어 수분계곡, 국포계곡, 사암계곡, 지지계곡, 유정계곡 등이 수십리의
골짜기를 이루고, 자연경관이 빼어나서 가히 무릉선경을 연상케 한다 계곡마다
흐르는 요천 맑은 물은 노단에서 합류하여 번암들의 젖줄 역할을
하며 유유히 남원으로 흐른다 번암면의 지형은 동으로는 백운산과 경계를
이루어 경남 함양군 백전면과 남원시 아영면 운봉읍과 접해있고 남으로는
대론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실개천으로 경계를 이루어 남원시 산동면과 접해
있고 북으로는 수분치와 경계를 이루고 장수읍과 장안산과 경계를 이루고
계남면, 장계면과 무룡궁재와 경계를 이루어 양면과 인접해 있다.
장수읍에서 19번국도 따라서 남원방향으로 약 16㎞지점에 번암면 소재지가 나온다
번암면사무소, 신협등 작은 관공소들이 위치한 곳이 노단리 마을이다
오늘 답사하고자 하는 장재영가옥 그리고 어서각이 있는 마을이다 노단마을은 남노령이
주산을 이룬 대성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중엽 노단리 일대에 눌재(訥齋)
장승세(張升世)의 후손들인 흥성(興城) 장씨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서 동족 마을로 이루어졌다
노단리(魯壇里) 지명은 성인(聖人 공자)을 낳은 노(魯)나라 터와 비슷한 명당이어서
노나라(魯)자와 기초.터(壇)자에서 유래한다 이 집에 만인(萬人) 적선자(積善子)가 있었는데
삼남지역은 물론 한강이남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덕불고(德不孤 덕은 외롭지않다) 란 말은 세상에서
가장 존중하는 말인데 이 집에서 대대로 유덕자(有德者)가 나왔다 한다
이 마을은 대성산을 등지고 길게 배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마을 끝자락에 공동우물이 있으며
그위에 반계정(磻溪亭)이란 정자가 위치해있다.
번암면 소재지 들어서는 입구에 삼거리가 있다 왼쪽으로는 번암초. 번암중학교
봉화산 및 지지계곡 가는길이고 직진하여 100m쯤 거리에 번암 버스정류장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남원방향이고 좌측은 번암시장 방향이다 오늘의 답사지 장재영가옥은
우측으로 50m쯤에 위치해 있다 가는길 막걸리 공장이 보인다 번암 막걸리는 아주 유명하다
3대째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중 이라한다 해발600m 청정 지지계곡과 방화동계곡에서 흐르는
물좋은 곳에서 전통 누룩을 사용하여 술을 빚는다고 한다
물이좋아 그럴수 있지만 아마도 특별한 전통의 기술이 있을리라 생각한다 먹을수록 더욱더
땡긴다는 번암의 막걸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고 말만 잘하면 공짜란 말도 있지 않는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까 애주가인 나로서는 구미가 땡긴다 한사발 들이키니 세상만사
부러울것 하나도 없구나 좋은 기분으로 “장재영가옥”에 도착했다.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1호 지정된 장재영가옥 집 앞에는 문화재 지정 현판과
커다란 정자나무가 서 있다 들어가는 대문을 솟을대문 이라고 한다 대문열고 들어서면 좌측에
행랑채 우측엔 사랑채가 있어 뒤쪽 앞마당과 사랑마당을 구분해준다
사랑채는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곳이라는 뜻을 지닌 “영락헌(英樂轩)”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렇듯 장재영 가옥은 옛 모습은 잘 간직하고 있다 행랑채는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장재영 가옥은 인근 산서면의 권희문가옥과 함께 조선후기 농촌 부호의 전형적인 가옥이다
누가 지었는지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눌재(訥齋) 장승세(張升世) 후손 반계정을 지은
취헌 장안택 선생의 父親 동몽교관인 장석룡이나 또는 祖父 남요 장홍규가 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 고택에 현재 사람이 살고있다 장수군수를 역임한 장재영 전직군수가 안채에서 기거하고 있다
이 가옥의 관리자이며 실재의 주인이다.
이 가옥의 구조, 형태를 알아보자 안채, 사랑채, 곳간채, 대문채로 구조되어 있으며
안채는 8작 4간 믿도리로서 한와 오량집이다 사랑에는 맛배집 한와 오량집으로 건축되었고
대문체는 한와집이며 중방은 시멘트 몰탈로 돌을 혼합하였다 이 대문채를 제외하고는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형태로 보아서 당시의 귀족 가옥이다.
좌측 1 - 행랑채, 우측1 - 안채,
좌측 2 - 곳간채(광), 우측2 - 전체전경
좌측 3 - 사랑채, 우측3 - 문간채(솟을대문)
안 채 :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 지붕집이다.
사랑채 :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 지붕집이며 기둥은
원기둥이다 앞에서 볼 때 왼쪽 첫칸의 지붕은 다른 3칸보다 훨씬낮고 각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훗날 달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행랑채 :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고 공기가 잘 통하도록 땅에서 40㎝높이에 널판으로
바닥을 깔았다.
문간채 : 앞면 3칸 옆면 1칸의 가운데가 솟을대문이고 왼쪽은 변소와 헛간 오른쪽에는 방이 있다
문 앞에는 화강암으로 된 하마석(下馬石)이 있는데 본래 집 앞 도로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대문채라고 부른다.
문간채의 오른쪽으로 솟을대문 형식의 중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
또한 마당 모서리에는 우물과 기와 조각으로 쌓은 굴뚝이 있는데 뒤쪽의 장독대와
어우러져 정감어린 분위기를 연출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 가옥은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사병진삼월이십팔일을유오시“
(崇禎紀元後四丙辰三月二十八日乙酉午時)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대로 풀자면
철종 7년(1856년)에 건립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청 뒷벽 상부에는 벽감
(壁龕 : 벽체의 오목하게 패인 부분)을 만들어 조상의 신위를 모신다.
숭정 기원후(崇禎紀元後) : 숭정(崇禎)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1628~1644년)이다.
1644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당한 이후에도 조선은 청나라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인정하지 않고 명나라를
존숭한다는 의미로 ‘숭정’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는데,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는 바로 그것을 표시한 것이다.
장수의 자랑스럽고 소중한 문화재 158년전의 우와한 고택 장재영가옥 천년만년 보존되길
바라면서 아쉬운 발길돌려 대성산 자락에 겹처마 우진각으로 지은 육각형의 정자 반계정을
찿아 가보려 한다 솟을대문을 나와 좌측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해있는 반계정은 19번국도
번암면 소재지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도로가에 자리하고 있다
낮은 담장에 문 하나를 만들어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정자 오르는 한편에 바위에 음각한
磻溪亭(반계정)이란 글씨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깨진 바위에도 똑같은 글씨가 있다
두 개가 존재한 이유를 알아보니 원래 반계정(磻溪亭)이란 글씨는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우측
벼랑끝의 암벽에 세겨져 있었다고 한다 1978년에 19국도 개설때 발파하여 방치해왔던 것을
2007년 반계정 아래 노단마을 공동우물 정비하던 중 표석을 발견 했다는 것이다
2007년 10월에 발견한 표지석을 원상태로 복원하고자 했으나 오랜세월 풍화로 인하여
보존하기가 어렵자 탁본을 하여 새로운 돌 표지석을 만들어서 세웠다 두 개의 돌 표지석이
존재하는 이유다.
반계정은 취헌 장안택 선생이 지었다고 전한다
대성산 기슭 바위아래 지은 정각은 지금이야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지을 당시만해도
암석과 흐르는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자였을 것이다 선생은 이 정자에서 자손들을
교육시키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磻溪란 바위와 맑은물이 흐르는것을 상징한다
취헌 장안택선생은 자는 사유이고 아호는 취헌이다 선생은 만인을 구제하는 제세구휼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몸소 실천을 하였다고 한다 취헌 선생의 이런 마음은 전국 각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급변하는 세대의 변천을 개탄하며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몸을 묻고자 생각했다.
반계정자 이모저모
취헌선생은 1863년(철종14년)에 태어낳으며 조선후기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사업가였다
아버지는 동몽교관인 장석룡이며 조부는 남요 장홍규이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때 관군에 쫏긴
농민들이 이곳 번암까지 피신하여 집결 장소였다 한다 선생은 그들에게 술과 고기 음식들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정자 뒤편 암벽에 장안택 반계정이란 글씨가 음각해있다
그밑에 작은글씨로 子 병준이라 쓰여있다 후손이 이곳에 조상을 기리기 위해 쓴것 같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평생 자선사업가로 살아온 취헌 장안택 선생의 정신, 마음을 담고있는
반계정 정자에서 차가운 바람불어 추운 겨울이지만 따뜻한 온정을 느끼노라 이웃과 더불어
상부상조하는 멋들어진 지역사회 살맛나는 나의고향 장수땅 작은것 하나라도 같이 나누며
살아가자는 교훈을 얻으며 발뿌리 돌려 다음 목적지 “어서각”으로 향해 보련다.
장 재 영 전직 장수군수
이 가옥의 소유자 장재영은 1945년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했으며
전주고와 농협대학 농업협동조합과를 졸업하고 장수축산협동조합 13-15대
조합장을 역임했다 전국 한우우량능력 평가대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제42대 제43대 장수군수를 거쳐 제44대 3선군수를 훌륭히 역임하고 지금은
고향 번암에서 거주하며 장수군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신다 2007년
제4회 장한한국인상을 수상한 자랑스런 장수인으로 꼽힌다.
~ 장수에서 호롱불 최 용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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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수지킴이
용표친구의 열정에 감탄입니다..대단하네~~~
좋게 봐주심에 감사하구여 더욱 노력 할께용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