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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4 주일설교
본문: 시편 42:5
제목: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오늘 본문으로 택한 5절 말씀은, 11절에서도, 다음 43편 5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함으로 은혜를 받고자 한다.
1. 고난은 낙심과 불안을 가져온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긴 고난 앞에 장사가 없다고 한다. 긴 간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사랑으로 고난을 잘 견디지만, 그 고난이 길어지고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면,
믿음도 허물어지면서 낙심이 되고 불안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멱우리 15년 동안 돌아보면, 이런 낙심과 불안이 순환주기를 따라 찾아오곤 했다.
다시 믿음으로 추스르고 일어서고 말씀을 붙들고 하는 몸부림이 있었다.
욥의 고난을 생각하고 모세와 아브라함의 긴 고난을 생각하고, 요셉과 다윗의 급격한 고난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삼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울왕의 긴 추적 생활, 압살롬의 반란 시에 썼을 것으로 본다,
긴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어디 있는가?
성경에도, 기독교 역사에도, 예외가 없다.
고난 없이 축복부터 받은 자들은 하나 같이 교만과 불순종으로 멸망으로 마침을 받았다.
사울왕이 그랬고, 솔로몬왕이 그랬다.
사울은 왕의 축복을 받았지만 끝은 너무 비참했다. 아들 요나단이 얼마나 아까운가?
솔로몬은 아비 다윗 덕에 생전에는 화가 미치지 않았지만, 아들 르호보암 때로부터 긴 멸망의 길을 갔다.
다윗은 그 긴 고난 중에서도 거룩한 소원을 아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1-3)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아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여도, 하나님의 얼굴을 뵈울 수가 없다.
성전 예배를 할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하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사람들은 “네가 그리도 찾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서 어찌 응답이 없고 구원하는 역사가 없느냐고 비웃는다.
그러니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타나시지 않는 하나님을 보면서도 낙심하고 불안해 하면서도
그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이다.
욥의 아내는 극심한 고난에 뭐라고 했는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하루 아침에 십남매를 잃고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간 첫 번째 고난 때 한 말이 아니다.
사탄이 하나님 허락하에 욥을 한번 더 쳐서 몸까지 엉망이 되었을 때 보다 못해 한 말이다.
하나님이 잊으셨는지, 어디 가셨는지, 살아 계시기는 하는 건지 탄식과 눈물이 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시42:9-10)
고난과 위기 가운데 원수와 대적들은 더욱 잘 되고 공격하면서 믿음을 조롱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한다고 한다.
말이 독하면 뼈를 찌르는 칼보다 더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내 반석이셨는데, 이제는 나를 잊으셨는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
대적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조롱해도 아무 역사가 없다.
졸고 계시는지 주무시고 계시는지 살아 계신 반응이 없다.
그러나 긴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불안해 하는 가운데서도,
슬픔과 탄식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욥에게서 배워야 한다. 아내의 비난에 대한 응답이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2:10)
우리가 고난 중에 속으로 낙심할 수 있고 불안할 수 있지만,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 속에서 불안으로, 내 속에서 낙심으로, 마쳐야 한다.
2. 믿음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기에 사는 것도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 못할 고난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견고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신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 고난을 주셨는데, 이를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증을 떨며 여기 저기 해결의 손길을 사정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난만 더욱 길어지게 하고 고난만 더욱 무겁게 할 뿐이다.
믿음의 시련(고난)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온전하고 구비된 성품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고난의 인내를 통한 온전히 구비된 성품이 축복을 가져오고 영광을 가져온다.
고난시에 소망을 재물에 두고 사람에 두는 사람은 낭패를 볼 날이 온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해 고난을 주셨는데,
재물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고난은 하나님께 끝까지 소망을 두는가 아닌가에 대한 확실한 시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고난시에 강대국 애굽이나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31:1)
여호수아도, 다윗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였기에
전쟁에 이기고 나서는 말의 힘줄을 잘랐다.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로 살랐더라”(수11:9)
“다윗이 그 병거 백 대의 말들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대상18:4)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한다.
재물도 사람도 권력도 우상도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을 시험하실 때 합격하시기 바란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우리의 일시적인 낙심도 불안도 극복할 수 있다.
애굽에는 소망이 없다.
그래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먹잇감 노릇하다가 함께 멸망하고 만다.
하나님께 소망을 둘려면 진리 위에 믿음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을 통해 알지 못하면 소망을 그분께 둘 수가 없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의 진리를 매일 상고하고 그 진리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한다.
하나님께 왜 소망을 두지 못하느냐?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진리의 영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시146:5)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기 때문이다.(딤전4:10)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 하신다.(딤전6:17)
3. 하나님은 나타나 도우신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소망은 그 소망이 이루어짐으로 그 영광을 발한다.
소망은 소망으로 끝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재물이나 우상에게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은 그것들이 소망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소망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그로 인해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시냇물을 찾는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나 도와주신다.
고난 중에 낙심하며 불안했지만, 다윗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을 때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났다.
하나님은 나타나 도우셔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모세의 고난도 끝이 나고
하나님의 나타나 도우셔서 그를 능력의 지도자로 세우셨다.
노예로 팔리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요셉에게
하나님은 나타나 도우셔서 총리로 그를 세웠다.
자손을 약속하신지 25년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 이삭을 주셨다.
그들이 고난 중에도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심으로 우리는 축복과 영광을 받는다.
고난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의 열매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우리가 잠시 고난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윗의 고백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자.
그러면 다윗의 간증이 우리의 간증이 될 것이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시고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1-2)
우리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견디고 하나님을 찾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우리의 몫이 될 수 있다.
모세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 구하였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년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90:15-17)
하나님께 둔 그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시고 그 기도를 이루어 주셨다.
그가 고난 당한 40년 만큼 그를 영화롭게 해 주셨다.
주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종들에게 나타내셨고, 주의 영광을 그 자손들에게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은총을 내려 주셨다.
이제 손으로 하는 일마다 견고하게 하셨고 축복해 주셨다.
믿음을 잃지 않고 지키며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둔 욥에게는 갑절의 축복을 주셨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다윗에게는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푸시고 축복의 잔이 넘치게 하셨다.
성경은 우리의 경계와 거울로 쓰여졌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과 소망과 축복의 과정이 우리의 과정과 결말이 되게 하자.
고난 중에도 믿음을 잃지 말자. 진리를 확고하게 붙들자.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자.
하나님의 때가 되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나타나 도우실 것을 믿자.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향해 단계적으로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은 멱우리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적은 능력으로 믿음을 지켰다고 하셨다.
화서제단은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꿔 입는
엘벧엘의 제단이 된다고 하셨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진리의 교회가 되라고 하셨다.
오늘은 우리가 이사 온지 석달이 되어도 역사가 없다고, 낙심하거나 불안해 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다.
부지런함과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자기 기업으로 받는 이들을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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