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해변에서 수많은 게들이 나타나 저마다 춤을 추다가 일제히 사라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그 일사불란하고 경이로운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대략 10여 년 전 낙동강 하구 을숙도 아래 작은 섬인 대마등으로 쓰레기를 치우러 간 적이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의 모래사장은 강과 해변에서 떠내려온 온갖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낮 동안 섬을 돌면서 열심히 쓰레기를 치우고, 늦은 오후 무렵 이제는 깨끗해진 해변 한 쪽에서 넓은 모래 갯벌을 가득 메운 콩게들을 만났다. 콩게는 주위를 경계하며 모래 속에서 나타났다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저마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만세를 부르듯 집게발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위아래로 흔드는) 그 행동이 우리 눈에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영역을 나타내는 행동이라고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콩게가 그렇게 한동안 열심히 춤을 추다가 누군가 발을 한번 굴리기만 해도 순식간에 모래 갯벌 속으로 사라진다. 언제 그 수많은 콩게가 춤을 추었나 싶을 만큼 텅 빈 해변이 되어버린다. 다시 한참을 가만히 숨죽이고 기다리면 콩게들은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다시 녀석들의 춤이 시작된다.
게들은 어떻게 순식간에 일제히 사라질 수 있을까? 게는 왜 옆으로 걸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게의 행동생태학을 연구한 이화여대 에코과학 연구소 김태원 연구원 덕분에 게가 옆으로 걷는 능력과 집을 찾아가는 능력 등 게에 대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게가 옆으로 걷는 이유는 포식자로부터 빨리 도망가기 위해서다. 게가 먹이 활동을 하다가 포식자를 발견하면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거나 포식자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 갯벌 속으로 숨어야 한다. 이때 몸을 돌려 앞으로 도망가려면 더욱 시간이 걸린다. 게는 그 자세 그대로 빠르게 옆으로 이동하여 갯벌 속으로 숨는다. 김태원 연구원은 이를 설명할 때 야구에서 루상에 나가있는 주자가 빠르게 다음 루로 진루하거나 되돌아가기 위해 게걸음처럼 옆으로 움직이며 투수를 주시하는 동작을 예로 든다. 정말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다. 그런데 모든 게가 옆으로 걷는 것은 아니란다. 밤톨처럼 생긴 밤게는 앞뒤로 걷는데, 걷는다기보다는 기어 다니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인다고 한다. 물론 이 녀석도 포식자를 발견하면 재빨리 진흙 속으로 숨는다.
그럼 게는 어떻게 포식자를 알아볼까? 게는 자신의 키 높이(즉 눈높이)의 7~8배(약 10cm 가량)밖에 볼 수 없다. 이때 자신의 키보다 낮으면 동료나 먹이로 인식하고, 그보다 더 크면 무조건 포식자로 인식한단다. 그땐 알다시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게들은 어떻게 빠르게 자기 집을 찾아갈까? 김태원 연구원은 놀랍게도 게가 자신의 집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한단다. 게를 오랫동안 연구한 과학자들은 그 방법을 어느 정도 알아냈다. 게가 집을 찾는 방법의 첫 번째는 발로 걸어간 거리와 횟수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파나마 나오스 섬의 쿨레브라 해안에서 농게를 연구하던 김태원 연구원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농게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끄럼판을 설치했는데, 미끄럼판을 지나며 제자리걸음을 여러 번 하게 된 농게는 원래 집보다 훨씬 못 미친 곳에서 집을 찾아 맴돌았다. 두 번째 특징은 집을 나가 활동하는 농게는 거의 항상 몸의 장축을 집을 향해 두고 있다고 한다.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언제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방향은 집을 향하고, 자신이 집에서 걸어온 만큼의 거리와 횟수를 기억해두고 있기 때문에 게는 순식간에 집으로 돌아가 숨을 수 있다. 한편 게는 집을 쉽게 찾기 위해 흙을 쌓아 수직 구조물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고 한다. 생각보다 훨씬 똑똑한 녀석들이다!
뭐든 관심을 두고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재밌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새 연구자인 국립환경과학원 박진영 박사는 새를 조사하기 위해 새의 먹이인 칠게를 망원경으로 살폈는데, 이상하게 하나는 집게발을 앞으로 들어 까딱거리고, 하나는 위로 쳐들어 휘젓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시행동이 분명한데, 왜 같은 종에서 다른 과시 행동이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게다가 같은 종 수컷끼리 서로 위협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게 여겼다. 그때가 1988년쯤이었는데,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게의 행동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없었고, 분류학자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일본 학자가 칠게를 연구해서 신종으로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박진영 박사와 대화를 나누던 김태원 연구원은 새를 연구하는 분이 칠게의 종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렇게 일찍 발견한 것이 놀랍다고 감탄했다. 일본의 와다 교수가 칠게의 행동을 언급하며 분류학적으로 재연구가 필요하다는 발표를 한 것이 1989년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90년대 초에 분류학자와 함께 신종으로 발표했고, 집게발을 만세 하듯 흔든다고 학명도 '반자이'라고 붙였단다. 만약 당시 박진영 박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조사한 연구자가 있었다면 일본 학자가 아닌 우리 학자가 신종을 발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반자이'가 아닌 '만세'를 학명으로 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 지나간 일을 갖고 가정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박진영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새 도감인 [한국의 새]의 공저자이고, 여러 권의 새와 관련된 책의 감수를 맡았으며, 최근에는 [한국의 도요물떼새]라는 책을 공저자들과 함께 펴냈다. 그리고 저자로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멸종위기의 새]를 출간하는 과정에도 큰 힘을 보탰다. 놀라운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앞으로도 새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려주리라 기대해본다.
자연과학 책들은 시장이 무척 작다. 즉,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도감은 특히나 판매가 부진하다. 그런데 도감 중에서도 새 도감은 더더욱 안 팔린다고 한다. 그러나 판매가 되지 않아도 이 땅에 사는 생물들에 대한 기초자료는 필요하다. 우리가 하늘을 나는 새에 대해 얼마나 알까? 새들의 분류와 생태에 대해 미처 다 알기도 전에 환경오염과 파괴로 인해 사라져가는 새들이 많다. 앞서 살펴본 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새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도 제법 있고, 탐조인들도 많아서 점점 더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겠지만, 게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새만금 갯벌이 사라지면서 칠게가 사라졌듯이, 갯벌이 파괴되면 게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게들과 새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그들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좀 더 많이 알아내면 좋겠다.
- 저자
- 박진영, 박진영,박종길,최창용, 박종길, 최창용 지음
- 출판사
- 자연과생태 | 2013-04-20 출간
- 카테고리
- 과학
- 책소개
- 책 소개 습지 환경을 대표하는 도요물떼새 전종(63종) 수록 대...
- 저자
- 김성현, 김진한, 허위행, 오현경 지음
- 출판사
- 자연과생태 | 2012-11-26 출간
- 카테고리
- 과학
- 책소개
- 많은 새들 중 이미 우리나라에서 사라졌거나, 점차 개체수가 줄고...
- 저자
- 이우신, 구태회, 박진영 지음
- 출판사
- LG상록재단 | 2005-06-25 출간
- 카테고리
- 과학
- 책소개
- 취미삼아 탐조 활동을 해오고 있는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배려로...
※ 참고자료
월간 자연과 생태 10호(2007년 7월ㆍ8월호)
월간 자연과 생태 18호(2008년 11월ㆍ12월호)
월간 자연과 생태 17호(2008년 9월ㆍ10월호)
첫댓글 오,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열악한 한국의 출판 상황에서 '자연과생태'처럼 꿋꿋하게 한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출판사가 있어 큰 위안이 됩니다. 응원합니다!
재밌죠? 제가 '칠게'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게 벌써 여러 달 전인데요.
이 이야기는 꼭 써서 알리고 싶었어요.
칠게 부분만 조금 쓴 상태로 몇 달째 묵혀둔 글을 어제 찾아내서 후다닥 썼습니다.
요런 이야기들 잘 들춰내면 흥미로운 책 한 권 나올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