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량이 커서 대종회홈에 올리지 못하고 여기 올립니다.
茅山[글자로는 띠모 메산 글자이지만 뜻은 누추(陋醜)한 거처(居處)에 산신의 마을]
세종초기 함풍노씨의 외손 영해박씨가 입향하여 모산이라하였는데 세종12년(1430) 하동정씨 10세손 정희주(사헌부장령) 아들 정의중이 모산의 만석군인 영해박씨 박준미(진사, 산정뒤편에 묘소 있음) 무남독녀 사위가 되어 모산에 입향합니다. 모산 천동에 하동정씨 제각인 모산사(茅山祠)가 있습니다.
박준미의 사위 정의중의 손자 정효손(생원, 承仕郞 鄭收敍의 아들)의 딸과 모강공 柳用恭(1492-1551) 선조가 혼인하여 문화류씨가 모산에 정착하였습니다.
모산사에 배향된 세분중 기묘사화(1519) 때 200여 명의 진사와 함께 상소를 올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모효(慕孝) 정문손(鄭文孫,1473~1554)의 사촌형님이 정효손(모강공처 장인)입니다.
茅山 李蟹(모산 이해,1468-1525, 중종14 기묘사회 때 조광조를 따르는 기묘명헌중 한 사람)의 딸과 모헌공 柳用剛(1514-1589) 선조가 혼인하여 모산에 입향합니다.
당시 정자 이름이 ‘모정(茅亭)’이였는데 그 후 율곡 이이(1536-1584)가 모정에 와서 주변 경관을 보고 팔경시(八景詩)로 읊었기에 정자 이름이 오늘날의 ‘영팔정’으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영팔정은 1689년(숙종 5)에 영의정을 지낸 후손 약재(約齋) 류상운(柳尙運,1636~1707) 선조가 산정(영팔정에 山亭主人 헌판시가 있음)에 거주하시는 동안 대동계주관으로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주1 : 모산에 입향 순서는 600년전 영해박씨→하동정씨→문화류씨
※주2 : 하정공 아들 휘 맹문선조가 족보에는 기록이 없으나 무진군을 광주목(光州牧)으로 환원시킨 畢門 李先齊(1389-1454)를 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필문이선제부조묘지), 필문로는 남광주 4거리에서 산수 5거리를 걸쳐 서방 4거리까지 연장 3,777m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