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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강사(月岡祠)
종 목 : 지방문화재자료 제31호(전북)
명 칭 : 월 강 사
지정일 : 1986. 09. 08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계면 월강리 562-1
월강사 전경
오늘은 장계에 있는 월강사를 답사하고자 한다 장수읍에서 약 12㎞지점에
19번국도 따라서 가다보면 장계면 장계리 소재지가 나온다.
장계면은 장수군에서 두 번채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장계면을 간략히 알아보면 ;
삼국시대부터 장계면의 변천사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백제시대 : 백해군(지금의 장계면)
2. 통일신라시대 : 백해군(장계면) - 벽계군으로 바꿈(757년)
3. 고려시대 : 벽계군(장계면) - 벽계현(940년) - 장계현으로 바꿈(985년)
4. 조선시대 : 장계현(장계면) - 장수현으로 귀속시킴(1414년)
* 장수와 장계는 조선태종14년(1414년)에 통합됨
5. 1414년 후부터 장계면을 임현내방으로 불렀다
6. 1895년(고종 32년)에 전국 23부 331군으로 지방관제 개정
임현내방 → 임현내면으로 고침
장수현 → 장수군으로 개칭됨(1895년)
7. 1917년 면제 공포로 임현내면 → 계내면으로 개칭함
계남면 소속 동남마을(동남동)과 남산마을을 계내면에 귀속시킴
장수군(7면을 형성) -장수면,계내면,계남면,천천면,계북면,번암면,산서면
8. 계내면 → 장계면으로 바꿈(1993.11.1)
장계면산무소와 무.진장 119급대 소방서
1917년 이후부터 면은 말단 행정기구의 중요 역할을했다 1917년 면제공포 이전에는
장계천 이남 동남동과 남산마을은 계남면에 속했 있었으나 1917년 면제공포 이후부터
동남동은 계내면 장계리에 남산마을은 계내 삼봉리에 편입되어 장계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면세가 대폭 확장되었다 장계면은 태백간(소백산맥)이 남으로 힘차게 뻗다가
남덕유산을 이루는데 그 발치에 두문봉 추락봉 노고봉 백화산 등 형제봉들이 정답게
둘러싸여 있는 오목한 넓은 분지에 한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렇듯 산간부 에서는
보기 힘든 넓은 한들에서 생산되는 곡식들을 자급자족은 물론 외화 획득의 주산물이
되기도 한다 장계면의 지형은 東으로 육십령과 경계를 이루어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접해있고 南으로는 동평들을 흐르는 실개천이 경계되어 계남면과 西로는 산정수동하는
동정대재와 경계를 이루어 천천면과 접해있고 北으로 집재와 경계를 이루어 계북면과
인접해 있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장계천과 장안산에서 발원한 유천이 장계면 한들의 젖줄
역할을 하면서 천천면으로 굽이쳐 흐른다 또한 장계면 중심부를 관통해 東(경남) 西(전주)로
연결되는 26번 국도와 南(남원) 北(무주)으로 연결되는 19번 국도는 면의 중심지인 장계리에
십자로를 형성하고 있어 동부산악권의 교통 요충지가 되고있다 1993년 11월 1일 계내면을
장계면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절의 표상인 의암 주논개님 백장선생의 생활유흔처로 절개와 의리· 전통 예절을 존중하는
충절이 빛나는 고장이며 논개생가, 남덕유산, 장안산 군립공원의 수려한 백두대간 주능 등
풍부한 관광자원과 장수목장 추진으로 테마가 있는 관광명소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대전↔통영, 익산↔장수 2개의 고속도로와 19호, 26호선 국도의 교차 등 사통오달의
교통 요충지로서 대도시 접근성이 뛰어나고 기업유치 호조건, 개발 잠재력 상존
행정수요 다양화, 사회단체활동이 활발한 장계리를 중심으로 한 도시형 농촌지역이다
장계면 면적 67.75㎢ 이고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으며 장계(長溪)· 금곡(金谷)· 무농(務農)· 금덕(錦德). 송천(松泉)· 월강(月岡)· 삼봉(三峰)
명덕(明德)· 오동(梧洞)· 대곡(大谷) 등 10개 행정의 법정리 마을이 있다.
장수읍방향 장계면 소재지 들어가는 입구에 작은 로타리가 있다
우측으로는 백화산 줄기 언덕위에 하얀집 백화여고가 있으며 월강사를 가려면
로타리 깃점 우측방향 거창군과 함양 안의면쪽으로 가야한다 조금 가다보면 우측으로
장계복지관이 나오고 왼쪽으로 장계면사무소와 무.진.장119급대 사무실이 보인다
장계면사무소 정면쪽으로 26번 국도를 따라서 함양군 방향 육십령고개 가는길로
약 1㎞ 지점에 왼쪽에 월강리 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죄회전하여 시멘트 포장길 따라서 500m 정도 들어가면 도장마을이 있다
이 마을 입구 왼쪽편으로 저 멀리 월강사가 보인다.
장계면 월강리는 본래 장계군 지역인데 태종때 장수군 임현내면에 편입되어 있다가
이후 1917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장리, 풍천리, 저동을 병합하여 월강리라
칭하고 계내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93년 장계면 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월강리(月岡里)는 달이 뜨는 산등성 이라해서 “달구재”라 부르기도 한다
월강사가 위치하고 있는 도장마을은 약 700년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최근에는 이 곳이 황희정승 유배지 였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학계의 활발한 연구중이다
도장마을은 마을이 길어 “진말”이라 불렀는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을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을 따라서 위쪽은 진말 아래쪽은 도장이라 불렀다 월강사(月岡祠)란 이 지방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일곱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며 정신재 백장(靜愼齋 白莊)
퇴휴 송보산(退休齋 宋寶山), 손재 김남택(遜齋 金南澤), 일휴당 최경회(日休堂 崔慶會)
퇴거재 김남중(退居齎 金南重), 삼락당 송수산(三樂堂 宋壽山), 경재 백여옥(敬齎 白如玉)
이상 일곱분이시다 이 곳의 현재 소유, 관리는 김순지선생이 하고 계신다.
월강사에는 정문 회충문(懷忠門)과 모현재(慕賢齋) 등이 있다
회충이란 충신을 생각한다는 뜻이요 모현은 어진이를 추모한다는 뜻이다
달이뜨는 언덕에 자리 잡았다 하여 월강사라 이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장군이 전라도 동북방면의
방어임무를 띠고 들어와 창의소(暢義所)를 차리고 의병들을 모집하여 조련하면서
장대將臺(장수가 명령하던 돌로 높이 쌓아 만든 곳)를 차린 곳이다
천혜의 요새지로서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아 훈련소로 적격이다
이 곳에 순조 28년(1828년)에 사림의 장계에 의하여 예조에서 인가를 얻어 사당을
세웠으며 고종5년(1868) 전국 서원이 철폐 될 때 헐렸다가 1948년에 장수유림의
복설발의로 재건되었다.
일곱 선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월강사
1826년(순조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백장(白莊)· 송보산(宋寶山)· 김남택(金南澤)
최경회(崔慶會)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위패를 모시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 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유림과 후손에 의하여 제단을 마련하고 春秋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그 뒤 1948년에 복원하였다 이후 장수의 유림들에 의하여 1974년에 백여옥(白如玉)
김남중(金南重)·송수산(宋壽山)을 추가로 배향하여 일곱 선현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4칸의 강당, 고사(雇舍), 행랑, 대문 등이 있으며
경내 맨 꼭데기 사우에는 "月岡祠"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백장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로 송보산, 백여옥, 김남중, 최경회, 김남택, 송수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쪽 건물은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이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행랑은 공부하는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사용하며
고사(雇舍)는 관리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20일과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변두(籩豆) : 과실을 담는 제기(祭器)인 변(籩)과, 국 따위를 담는 제기(祭器)인 두(豆)를 아울러 이르는 말.
유물로는『사선생사실록(四先生事實錄)』1책 등 40여 권의 문헌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500여평과 임야 700여평이 있다.
1)주벽-백장(白莊)
고려조 이조상서(吏曹尙書)의 벼슬에 있다가 이태조(李太祖)가 모반함에 벼슬을 버리고
둔적 하였으나 태조와 태종의 부름에 불응하여 다시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장수현 임내면
호덕동에 유배되어 여생을 마쳤다
자세한 내용은 전편에 소개한 백장선생 유적편을 참고 하시기 바란다.
2)송보산(宋寶山)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인(大仁)이며 호는 퇴휴재(退休齋)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어려서부터 경서를 탐독하여 특히 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며 정여창(鄭汝昌)과 도의로 깊이 교유하였다
1429년 세종(世宗)11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전적(典籍) 병조(兵曹)
예조의정랑(正郞) 사헌원의 정언(正言) 헌납(獻納)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 교리(校理)
등을 거쳐 세종20년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가 1449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다
단종(端宗)이 폐위(廢位)되고 세조(世祖)가 등극하자 선생께서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의
폐위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장수땅으로 돌아 왔으니 비록 사절(死節)하지는 못하였으나
생육신의 행적에 비겨 부족함이 없다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지조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권세에
아부하고 벼슬이나 돈에팔려 아부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을 때 퇴휴재 선생의
지조와 정신을 높이 우러러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장수(長水)
임현내면 침령(砧嶺)에 은거하였다
백장선생의 장남 백형옥의 사위가 되는 분이다 즉 백장선생의 손녀사위가 된다
퇴휴재 송보산 선생은 1484년(성종 15년) 10월 2일 장수군 임남면(현 장계면)
침령에서 별세하셨다.
3)백여옥(白如玉)
조선전기의 문신이다 호는 경재(敬齋)이며 주벽으로 모신 백장(莊)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황희정승의 문인이며 전통문학을 터득하고 도학(道學)과 의리(義理)를 연구하여 당대의
대가로 성장하였다 아버지와는 달리 조선조에 출사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덕망과 학문이 높아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4)김남택(金南澤)(1370 ~)
조선전기 문신으로 자는 성수(聖洙) 호는 손재(遜齋)이며 관향은 함창(咸昌)이다
선생은 1370년 3월15일에 장수현 임남면 침령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을 따라서
서울에 머물면서 목은 이색 선생에게 사사하여 정통유학을 전수받았다
백장선생 손녀 사위다 즉 퇴휴재(退休齋) 송보산 선생과 동서지간이다
1402년 태종(太宗)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박사(博士) 수찬(修撰)
정랑(正郞) 사간(司諫)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1408년(태종 8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발탁되었고 1425년(세종 7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보직되었다 말년에 보직을 버리고 경상도 하동에 퇴거 하였다
이후 고향 장수 침령(砧嶺)으로 옮겨왔다 손재 김남택선생은 황희 방촌선생께 일시로
사사 받은적이 있다 고향으로 돌아올 시기에는 백장선생과 황희방촌 선생이 장수에서
유배하고 있을 시기이다 그런점으로 보아 선생은 고향으로 빨리돌아 오고자 했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후 두 선생을 모시고 국사를 논의하며 시문을 즐기며 전원생활을 하면서
후학 진흥에 힘썼다 황희선생은 서울로 올라가고 백장선생은 별세하셨으니 적적하고
우울하여 몇년 사시다가 고향 장수 침령에서 별세 하셨다
방촌황희는 손재(遜齋)선생을 일컬어 말하기를 “군자는 하늘의 뜻을 본받고 어진 사람은
일의 기틀을 살핀다 때로는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이 만물이 스스로 빛을 생기게 하노라“
칭찬의 글로써 선생의 덕과 도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5)김남중(金南重 1596∼1663)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진(自珍) 호는 야당(野塘) 김만균(萬勻)의
증손으고 할아버지는 좌의정 김명원(命元)이고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수렴(守廉)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순(恂)의 딸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1623년(인조1)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 회답사(回答使) 정립(鄭凌)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1625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변경의 오랑캐 침입을 잘못 보고해 파직당했다 뒤에 곧 기용되어
수찬· 교리· 지평· 장령을 거쳐 1628년 부수찬이 되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신병으로 휴가를
청하였다가 연소한 관료가 나태하다 하여 두 번째 파직되었다 다시 장령으로 기용되어
그뒤 사간· 시독관· 부응교를 거쳐 1632년 집의가 되고 추숭도감도청(追崇都監都廳)을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서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이 되자 강화도 함락에 대한 수장(守將)의 책임을 물어 처형할 것과
척화신(斥和臣)을 문책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생일에 여러 읍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전주 내려가 가족과 어울려 가무연락(歌舞宴樂)
한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 당하였다 1641년에 대사간으로 기용되어 우부빈객· 도승지를 거쳐
1644년에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대사헌이 된뒤 1649년(효종 즉위년)까지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을 번갈아 지냈다 1650년 이조참판이 되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을 거쳐 1656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사은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해 공조참판· 대사헌이 되었고 이듬 해 예조참판·도승지가 되었다 1658년 공조판서에
오른 뒤 형조판서를 지냈고 1660년 겸지춘추관으로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 해 공조판서가 된 뒤에 형조판서 예조판서 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역대인감 歷代人鑑≫이 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6)최경회(崔慶會, 1532∼1593)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陵州) 출신 충(冲)의 후손이며 혼(渾)의 증손으로 조부님 윤범(尹範)
부친은 천부(天符)이다 양응정(梁應鼎) 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 하였으며 1561년(명종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장수현감, 영해군수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전남 화순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경운(慶雲) 동생 경장(慶長)과 함께 고을
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는 고경명(高敬命)이 이미 전사한 뒤여서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 금산 무주쪽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승첩(제1차 진주전투)을 보다 쉽게 하였다 이 공로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에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가토(加藤淸正)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 2차 침입이 있었다 이때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였으나 9일 만에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살했다 화순 읍지에 그의 <투강시 投江詩>가 실려있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 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7)송수산(宋壽山)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며 송보산(寶山)의 아우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세종때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일하여 형제가 같이 판서로
근무하는 영광을 누리었다 전통문학을 전수받고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두루걸쳐
사인(舍人)이 되었으며 도학과 문학으로 이름 높았다 단종(端宗)이 폐위(廢位)되고
1456년에 세조(世祖)가 등극하자 선생께서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의 폐위에 항거하여
형님 송보산을 따라서 장수(長水) 임현내면 침령(砧嶺)에 은거 하였다.
간략하게나마 일곱선현의 이력을 위와같이 알아 볼수있다
월강사에 모셔진 일곱 선현들의 면모를 살피다 보니까 필자 개인의 의문이 생긴다
월강사에 주벽으로 모신 "백장선생" 그리고 "둘째아들 백여옥" "백장선생 손자사위
김남택과 송보산"이 있고 "송보산 친동생인 송수산"도 있다
또한 장수출생 논개의 남편이자 장수현감으로 재직했던 "최경회장군"이 모셔져있다
위와같이 여섯분은 문헌으로 장수와 연관이 있는 분으로 파악되고 알려져 있는데
김남중(金南重)은 문헌상 자료를 찿지 못해서 답답하다 1974년 장수유림들의 의하여
추가로 이 곳에 배향 되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도대체 김남중선생은 장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길없어 아쉽다 나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듯 하다 누군가 자료를 찿는다면 하는
진한 아쉬움을 남기며 머리가 복잡해진다 발길돌려 정처없이 걷고 싶구나.
월강사 內에 모셔진 위패들
~ 장수에서 호롱불 최용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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