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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순간적 중생론 조엘 비키 Prepared By Grace, For Grace(서문번역완료)
holyjoy 추천 0 조회 501 13.09.02 07:12 댓글 1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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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9.02 15:36

    첫댓글 일단 싱클레어교수의 추천이 담긴 '서문'을 번역하였는데, 14장의 결론부분을 바로 번역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카페를 위한 특별한 봉사의식 때문입니다. 서론과 본문은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 13.09.02 15:46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13.09.02 16:10

    수고하셨습니다. 저 역시 이제야 조금 시간이 나기는 했는데, 폴 헬름의 책을 통해 홀리조이님이 올리신 글들과 비교해보니, 조금은 감만 잡은듯한데, 확실히 맞는 것인지 글을 올리면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아마도 생각하기에, 순중론과 연중론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닌데도 어쩐일인지 오해하여 대립구도로 간것 같았고
    그 이유가, 사람의 의지가 회심전에 개입되었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지못하거나 이해할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부족함으로, 어떠한 이유라도, 회심전 사람의 의지는 수동적이며, 공로가 없다라는 것을 전제하다보니, 마치, 이러한 내용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어져서 켄달의 비판처럼 극단적인 '알미니안적'으로까지

  • 13.09.02 16:24

    몰리는 곤란한 처지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폴 헬름이 <회심에 있어서의 의지>의 역할에 대해서 말할 때에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그리스도게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역할인데, 이점에서 믿음은 수동적이며, 그 자체로는 어떤 공로가 될수 없으나, 그렇다고 믿음이 전적으로 수동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칼빈은 믿음은 받아들인다는 측면에서 특별하게 언급하고, 회심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새의지가 옛의지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고, 옛의지가 개조되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향된 선한의지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독립적인 인간의 의지가 아니고, 인간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며 전능하신

  • 13.09.02 16:37

    능력으로 선한 것을 택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캔달이 알미니안적이라는 것은 과장이며 왜곡이라고 하는군요.
    좀더 접근하여 보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등은 켄달이 말한것처럼, "동의하는"의 용법이 의지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동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고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구원하는 믿음으로 마음안에 계시된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다고 믿는데, 이것이 새로와진 마음의 행위, 새로와진 의지의 행위라고 했습니다. 또한 대요리문답은 의롭게 하는 믿음을 "복음의 약속이라는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13.09.02 16:48

    어디선가 지기님께서 쓴 글중에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있었는데, 폴 헬름의 <그것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믿음의 행위는 믿는자의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주어지는 행위이다.>처럼, 선한의지로서 영을 따르는 것이지, 그러한 자율적 따름까지도 모두 수동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것으로 이해되어지며, 이 부분이 순중론과 연중론의 오해의 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제가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작성자 13.09.02 16:50

    어느 만큼 정확하게 보시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만큼"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논의의 핵심은, 소위 연중론에서 말하고 있는 '초기중생'의 앞뒤에 조엘 비키박사의 예비적 은혜, 곧 청교도들이나 대륙의 개혁신학자들이 알미니안적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정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는 그 책의 결론적 논의의 적용의 한계점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기 때문입니다. 순중론과 달리, 이것이 중요한 것은,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두 포인트, 곧 중생의 시작점과 마치는 점을 연중론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작점 이전에서의 예비적 은혜의 역사와 그 시작점 이후의 예비적 은혜의 역사

  • 작성자 13.09.02 16:51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심으로 조엘 비키의 결론부분을 서둘러서 번역해 보려고 합니다.

  • 작성자 13.09.02 16:44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진실하게 고민해 본 사람은, 이 문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교실에서나 강의실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공부한 사람은 앵무새처럼 그저 앞에서 가르친 대로 배워서 가르치곤 합니다. 반성도 없이 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문제를 토론하는 자들은, 제일 먼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고 논의되는 바를 자신의 영혼에 먼저 적용시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지식욕구를 만족시킬 지 몰라도, 아무 소용도 없는 논의입니다. 이 논의가 과연 자신의 신앙의 인격에 도움이 되고 도전이 되는가, 아니면 남의 말하는 바를 들을 생각도 없이 힐란하기가 바쁜가, 살펴

  • 작성자 13.09.02 16:45

    보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겠지요. 두려울 진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저주받음이여!

  • 13.09.02 17:15

    그렇다면, 제가 앞의 내용은 초기중생이후, 선한의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어느만큼"이라 하시는 것은 초기중생이전에 대한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서 좀더 부연해보면, 초기중생이전에 , , ,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등의 참회등도 회심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헤의 효과이기는 하지만, 고백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한 인간이 스스로 회심을 준비할수 없다는 것이지(즉, 스스로 준비하는 것), <준비되는 것>은 인정되어지는데, 예를들어, 성경을 읽을수 있고, 설교를 들으며 충고를 받아들이는 행위들과 같은 것도 자율적의지에 의해서 준비되어질수 있다라고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인지요.(폴 헬름의 예비주의 부분에서)

  • 작성자 13.09.03 10:52

    초기중생 이전에도 예비하는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초기중생이 이미 시작된 이후이고 새출생에 이르게 되는 그 과정 속에서도 예비적 은혜가 역사하는데 그 예비적 은혜는 일반은총이 아니라 특별은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은총을 과연 은총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쟁(화란 해방파개혁교회의 비판)을 고려한다면, 그 일반은총 하에서의 예비하는 은혜가 과연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논쟁도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지 않으면, 사람 안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나 회개의

  • 작성자 13.09.03 10:53

    capacity가 생기는 것과 그 capacity에 의해서 믿음과 회개가 활동하는 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한국교계에서는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을 오해해서 마땅히 비판해야 할 부분과 배워야 할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 13.09.03 10:58

    capacity가 너무 어렵습니다. 맛뵈기라도..ㅎㅎ

  • 작성자 13.09.03 13:05

    아니? 하나로님도 이 개념이 어렵다니? ㅎㅎ.....가령 눈 먼 사람이 치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시력이 회복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력이 회복되는 것과 보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눈의 시력이 회복된 그 사람이 눈을 감고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지금 무언가를 보겠습니까? 보지 않습니다. 시력이 있어도 눈을 감고 있으면 보지 못합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시력이 없으면 눈을 아무리 뜬다고 해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의 시력이 있는 사람은 눈을 떠서 보면 보게 됩니다. 여기서 눈의 시력을 볼 수 있는 capacity라고 합

  • 작성자 13.09.03 13:09

    이것을 중생론 논의와 관련하여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믿을 수 있는 믿음의 capacity와 그 capacity로 믿게 되는 것을 구분합니다. 아무리 믿음의 capacity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capacity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믿음을 의지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구원얻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드러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연중론적으로 설명하면, 초기중생은 일종의 capacity가 주어진 것이고, 새출생은 앞서 주어진 그 capacity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복음에 반응해서 그 믿음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capacity에 의해서 말입니다.

  • 13.09.03 13:25

    ㅎㅎ 그러게요. 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줄 알았습니다. 직업이 엔지니어다 보니 언어에 익숙한 헤프닝이군요. ability로서의 capacity이군요. ^^ 그런데, 이 부분이 생각보다 아주 많은 깊은 함축이 담겨 있다고도 보이는데 어쩌신지요.
    섣부른 생각같기는 한데, 결국 <자유의지>까지 어느정도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만. . .^^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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