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16후반과 17세기 청교도신학자들의 저서들 속에 나오는 “예비적 은혜”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책들이 이미 산더미같이 많이 있지만, 비키 박사의 『은혜에서 은혜로 예비되다, Prepared By Grace, For Grace』는 대환영입니다. 이 책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복잡한 논의에 있어서 대단히 명백하게 공헌을 하는 것이며 17세기 신학문헌을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부지런히 읽혀질 것입니다. 문헌학자들이든, 역사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을 불문하고 말입니다. 이 세 분야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은 회심의 과정과 심리에 대하여 종교개혁 이후의 사상가들의 가르침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하여 흥미를 지녀왔고 공헌들을 해 왔습니다.
20세기 학문의 일반적인 경향은 청교도들이 회심의 모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해해 온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회심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강조하는 경우는, 청교도들이 그 후예라고 여겨졌던 제네바식의 종교개혁의 그 순수한 신학에 적대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칼빈은 “갑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ne)에 의해서 굴복하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신학에 있어서 “예비”라는 것이 있을 여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혹은 다시 말해서 특별히 칼 바르트의 신학에 영향을 받아서 은혜를 위하여 무언가 “예비될 수 있다”는 어떤 생각도 용어상 모순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청교도들의 연방신학적 정통주의[역주: 연방신학적 정통주의란, 영국의 유명한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한 신학적 주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모든 인류의 연방대표적 머리로 삼으시고 행위언약을 맺으시고, 아담의 타락 후에는 구속받은 인류의 연방대표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서, 모세시대를 통해서 예언되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게 한 은혜언약을 맺으셨다는 이 두 가지 언약을 중심적으로 주장하는 신학이다]를 불신하는 신학자들은 이 정통주의가 예비주의를 낳게 한 모체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게 하지 않고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유명하게도, 존 매클레오드 캠벨(John McLeod Campbell, 1800~1872)는 자신들이 은혜를 받아들이기에 “예비되어” 있지 않다고 느낀 개인들을 직면하게 되는 배경을 통해서 구속의 바로 그 본질을 재정의하게 되었습니다. 회심의 모형론을 조사해 보면 어디서든지 어떤 견해는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게 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견해는 값없이 제공되는 그리스도를 기뻐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주관성을 자극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분명한 어떤 점이 거의 모든 이 논의들에 있어서 놓쳐 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논의들은, 책들과 전문잡지들, 강의실과 연구 도서관들에 둘러싸여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논의가 진행되어온 특징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현미경 아래에 갖다 두고 조사하게 되는 저서들은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이 두 영역은 서로 다른 세계의 담화들입니다. 때때로 역사가들은 지금 듣고 있는 말의 뉘앙스를 깨달을 만 하도록 신학에 대하여 충분한 민감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칼빈은 하나의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회심(an unexpected conversion)을 경험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비적인 전조들이 전혀 없는 그런 회심을 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 그들 또한 타락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만 - 깊은 영적 필요나 죄의 각성, 깊은 죄의식과 수치심을 갖고 목회적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서 시간을 규칙적으로 보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일반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문헌 속에 묘사되고 있는 인간경험의 모형들을 분석한다고 하는 것이 쉬 잘못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로서 우리는 심리치료문헌들 속에서 발견되는 주관적인 경험의 모형론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비평하는 일에 주저하곤 합니다. 우리들은 많은 환자들을 보살피면서 심리적인 경험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인식하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는 최소한 하나의 중요하게 의미있는 차원이 결핍되어 있을 것입니다 - 논의되고 있는 실재를 경험하면서 관찰하는 차원 말입니다. 개인적인 영적 회심의 모형론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유사한 하나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조엘 비키 박사는 이 연구에 역사와 신학 분야에 있어서 능숙하게 단련된 기술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그는 다른 저서들 속에서 청교도들의 1차문헌과 늘어가고 있는 2차문헌들 모두에 대해서 경이롭고도 질투가 나는 박식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적인 전문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비키박사는 상당히 많은 회중들을 대상으로 35년 동안 지속적으로 목회사역을 해 왔습니다. 이 목회사역을 통해서 매주일 설교를 해왔고 남녀교우들과 젊은이들을 목회상담해 왔는데, 이들은 회심이야기들은 청교도 목사들이 정기적으로 만나왔던 사람들과 너무나도 놀랍도록 유사한 회심의 형태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이 책의 공저자인 폴 스몰리(Paul Smally)씨도 10여년 이상 목회사역의 종사해 왔는데, 비키박사의 교회에서 협력하게 되면서 청교도신학에 관한 Th.M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러한 저자들이 함께 쓰게된 이 책은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목회에 뿌리를 둔 문헌들에 대하여 예민한 촉수를 가지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세밀하게 관찰해 본 오랜 경험을 통해서 회심에 나타나는 신적인 형태론에 불가피하게 분명히 민감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동료 목사이면서 교사가 되는 이들의 저서가 읽혀질 때, 다른 세대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주어진 영적 분석이 즉각적으로 감지될 수 있다는 직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거꾸로 이것은 분별력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줍니다. 이러한 분별력있는 판단은 독자들이 청교도 작가들 또한 서로간에 관계들을 통해서 형성하였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예를 들자면, Thomas Hooker에 대해서 Thomas Goodwin이 한 비평 속에서처럼).
『Prepared by Grace, for Grace』를 특별하게 환영하는 것은, 저자들이 이러한 드문 목회적 관점을 토론의 장에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목회적 경험이 조심스러운 연구과정을 생략해버릴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주제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조사하였고 이차문헌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영국청교도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을 넘어서서 대륙의 신학자들과 최소한 한 명의 유명한 스코틀랜드신학자들까지 넘나드는 그들의 연구는, 전체적 뿐만 아니라 그 개별적인 부분들에서도 또한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독자들은 다양한 청교도 저자들의 작품들이 현미경 하에 놓여져서 드러나게 되는 그 사상들에 대한 주옥같은 그들의 설명의 가치를 분명히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독자들은 또한 비키박사와 스몰리씨의 결론들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드러내는 것은, 이 서문의 저자가 아니라 바로 이 책의 저자들의 특권입니다!
“예비”라는 주제에 대하여 연구하고 글을 쓰는 학도들이나 학자들은 아마도 바라기를(칼빈이 “자유의지”라는 용어에 대해서 가졌던 소원처럼) 이 표현이 너무나도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또한 다양한 용례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으면 할 것입니다. 물론, 어려운 점은, 그 정의가 더욱 직접적으로 이해되고 동의가 될 수 있는 다른 용어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수백년 동안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용어와 씨름해야 합니다. 지금으로선 『Prepared By Grace, For Grace』는 중요한 저서입니다. 오는 세대의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표준으로 남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희망하기는, 비키박사와 스몰리씨가 추구하며 보여주고 있는 학문적이면서 또한 목회적인 균형을 고무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독할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제가 잘못 평가하지 않았다면, 예비라는 주제에 대한 연구 일반에 있어서만 아니라 특별히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신학자들에 대한 계속되는 연구를 계속 해야 할 것입니다.
Sinclair B. Ferguson
First Presbyterian Church
Columbia, S.C.
1) John Calvin의 시편주석 서문, 제임스 앤더슨 역,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Calvin Translation Society; repr., Grand Rapids: Derdemans, 1948. 1:xl.
2) 칼빈은 자신의 『Commentary on De Clementia』에서 subita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칼빈의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 F.L.Battles 와 A.M.Hugo 편역, Leiden: Renaissance Society of America, 1969, 55~56.
3) 예를 들자면, 그의 『The Quest for Full Assurance:The Legacy of Calvin and His Successors』(Edinburgh:Banner of Truth Trust, 1997)과 그의 대표적 삼부작인, 『Puritan Spirituality』(Darlington,U.K.:Evangelical Press,2004), Randall Pederson과 공저인, 『Meet the Puritans』(Grand Rapids:Reformation Heritage Books,2006), 그리고 Mark Jones와 공저인, 『A Puritan Theology: Doctrine for Life』(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2)를 참고하라.
첫댓글 일단 싱클레어교수의 추천이 담긴 '서문'을 번역하였는데, 14장의 결론부분을 바로 번역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카페를 위한 특별한 봉사의식 때문입니다. 서론과 본문은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 역시 이제야 조금 시간이 나기는 했는데, 폴 헬름의 책을 통해 홀리조이님이 올리신 글들과 비교해보니, 조금은 감만 잡은듯한데, 확실히 맞는 것인지 글을 올리면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아마도 생각하기에, 순중론과 연중론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닌데도 어쩐일인지 오해하여 대립구도로 간것 같았고
그 이유가, 사람의 의지가 회심전에 개입되었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지못하거나 이해할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부족함으로, 어떠한 이유라도, 회심전 사람의 의지는 수동적이며, 공로가 없다라는 것을 전제하다보니, 마치, 이러한 내용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어져서 켄달의 비판처럼 극단적인 '알미니안적'으로까지
몰리는 곤란한 처지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폴 헬름이 <회심에 있어서의 의지>의 역할에 대해서 말할 때에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그리스도게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역할인데, 이점에서 믿음은 수동적이며, 그 자체로는 어떤 공로가 될수 없으나, 그렇다고 믿음이 전적으로 수동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칼빈은 믿음은 받아들인다는 측면에서 특별하게 언급하고, 회심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새의지가 옛의지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고, 옛의지가 개조되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향된 선한의지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독립적인 인간의 의지가 아니고, 인간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며 전능하신
능력으로 선한 것을 택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캔달이 알미니안적이라는 것은 과장이며 왜곡이라고 하는군요.
좀더 접근하여 보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등은 켄달이 말한것처럼, "동의하는"의 용법이 의지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동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고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구원하는 믿음으로 마음안에 계시된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다고 믿는데, 이것이 새로와진 마음의 행위, 새로와진 의지의 행위라고 했습니다. 또한 대요리문답은 의롭게 하는 믿음을 "복음의 약속이라는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어디선가 지기님께서 쓴 글중에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있었는데, 폴 헬름의 <그것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믿음의 행위는 믿는자의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주어지는 행위이다.>처럼, 선한의지로서 영을 따르는 것이지, 그러한 자율적 따름까지도 모두 수동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것으로 이해되어지며, 이 부분이 순중론과 연중론의 오해의 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제가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어느 만큼 정확하게 보시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만큼"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논의의 핵심은, 소위 연중론에서 말하고 있는 '초기중생'의 앞뒤에 조엘 비키박사의 예비적 은혜, 곧 청교도들이나 대륙의 개혁신학자들이 알미니안적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정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는 그 책의 결론적 논의의 적용의 한계점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기 때문입니다. 순중론과 달리, 이것이 중요한 것은,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두 포인트, 곧 중생의 시작점과 마치는 점을 연중론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작점 이전에서의 예비적 은혜의 역사와 그 시작점 이후의 예비적 은혜의 역사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심으로 조엘 비키의 결론부분을 서둘러서 번역해 보려고 합니다.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진실하게 고민해 본 사람은, 이 문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교실에서나 강의실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공부한 사람은 앵무새처럼 그저 앞에서 가르친 대로 배워서 가르치곤 합니다. 반성도 없이 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문제를 토론하는 자들은, 제일 먼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고 논의되는 바를 자신의 영혼에 먼저 적용시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지식욕구를 만족시킬 지 몰라도, 아무 소용도 없는 논의입니다. 이 논의가 과연 자신의 신앙의 인격에 도움이 되고 도전이 되는가, 아니면 남의 말하는 바를 들을 생각도 없이 힐란하기가 바쁜가, 살펴
보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겠지요. 두려울 진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저주받음이여!
그렇다면, 제가 앞의 내용은 초기중생이후, 선한의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어느만큼"이라 하시는 것은 초기중생이전에 대한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서 좀더 부연해보면, 초기중생이전에 , , ,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등의 참회등도 회심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헤의 효과이기는 하지만, 고백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한 인간이 스스로 회심을 준비할수 없다는 것이지(즉, 스스로 준비하는 것), <준비되는 것>은 인정되어지는데, 예를들어, 성경을 읽을수 있고, 설교를 들으며 충고를 받아들이는 행위들과 같은 것도 자율적의지에 의해서 준비되어질수 있다라고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인지요.(폴 헬름의 예비주의 부분에서)
초기중생 이전에도 예비하는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초기중생이 이미 시작된 이후이고 새출생에 이르게 되는 그 과정 속에서도 예비적 은혜가 역사하는데 그 예비적 은혜는 일반은총이 아니라 특별은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은총을 과연 은총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쟁(화란 해방파개혁교회의 비판)을 고려한다면, 그 일반은총 하에서의 예비하는 은혜가 과연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논쟁도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지 않으면, 사람 안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나 회개의
capacity가 생기는 것과 그 capacity에 의해서 믿음과 회개가 활동하는 것을 구별해야 하는데, 한국교계에서는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론을 오해해서 마땅히 비판해야 할 부분과 배워야 할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capacity가 너무 어렵습니다. 맛뵈기라도..ㅎㅎ
아니? 하나로님도 이 개념이 어렵다니? ㅎㅎ.....가령 눈 먼 사람이 치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시력이 회복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력이 회복되는 것과 보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눈의 시력이 회복된 그 사람이 눈을 감고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지금 무언가를 보겠습니까? 보지 않습니다. 시력이 있어도 눈을 감고 있으면 보지 못합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시력이 없으면 눈을 아무리 뜬다고 해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의 시력이 있는 사람은 눈을 떠서 보면 보게 됩니다. 여기서 눈의 시력을 볼 수 있는 capacity라고 합
이것을 중생론 논의와 관련하여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믿을 수 있는 믿음의 capacity와 그 capacity로 믿게 되는 것을 구분합니다. 아무리 믿음의 capacity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capacity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믿음을 의지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구원얻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증명되고 드러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연중론적으로 설명하면, 초기중생은 일종의 capacity가 주어진 것이고, 새출생은 앞서 주어진 그 capacity에 의해서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복음에 반응해서 그 믿음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capacity에 의해서 말입니다.
ㅎㅎ 그러게요. 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줄 알았습니다. 직업이 엔지니어다 보니 언어에 익숙한 헤프닝이군요. ability로서의 capacity이군요. ^^ 그런데, 이 부분이 생각보다 아주 많은 깊은 함축이 담겨 있다고도 보이는데 어쩌신지요.
섣부른 생각같기는 한데, 결국 <자유의지>까지 어느정도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만. . .^^ 여러모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