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사명이다.
1998년 11월에 안양교도소에서 전화가 왔었다. 장애인 재소자들이 있는데 하도 문제를 일으켜 독방에 감금 되곤 하는데, 별의 별 방법을 동원해도 안 되기에 같은 장애인이 교정사역을 하면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 했다고 했다. “아니 장애인이 무슨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들어갔고 그렇게 많아요?”대답은 주로 폭행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나 다리 등을 다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교도소 사역이 13년째다. 천성적으로 도전의식이 강했던 난 지체1급 장애인이었지만 첫날부터 재소자들과의 기선제압 기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목사님들은 존칭하며 험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땐 나는 집사였다. 섬 출신이라 말도 거칠었다. 그런 나였기에 바로 육두문자가 입에서 튀어 나오고 눈싸움에서도 지지 않았다. 어느 재소자가 욕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참내 그 자식 우리랑 같은 과네?~”그 후로 장애인 재소자들은 한 사람도 독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만큼 교정사역이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상담 지원 요청이 왔다. 81년생 남자인데 살인미수로 들어온 미결수인데 자살 위험이 많은 재소자라며 상담이 필요하다고 했다. 날짜를 잡고 시간을 정했다. 지인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개인 사정으로 오전에는 시간을 낼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안산 단원구 와동 125번지에서 새세이손 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강성흔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생명 살리는 일인데 만사를 젖혀두고 참석하겠다고 하신다. 중간에 픽업하여 안양교도소에 도착했다.
교도관의 안내를 받아 상담실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두 개 연결되어 있고 안락한 의자가 몇 개 놓여 있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있다. 에어컨을 틀어 주곤 커피를 가져다주시는 교도관님, 재소자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신다. 잠시 앉아 있는데 또랑또랑하게 생긴 청년이 엉거주춤 들어온다. 순간 이 청년에게서 희망이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소자가 마실 음료도 가져다 달라고 교도관께 부탁을 드렸다. 서로 통성명을 했다.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물었다. 한국 나이로 31살이라고 한다. 우선 기선을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가 50이라고 밝힌 다음 바로 반말로 이름을 불렀다. 네~ 라고 대답을 한다. 그 후론 자연스럽게 큰형과 동생 같은 분위기로 상담이 이루어진다.
신앙을 물어 보고 간단하게 예배를 드려도 되겠느냐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통일찬송가 431장, 새찬송가 549장인 ‘내 주여 뜻대로’를 함께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강목사님께서 읽고 싶은 성경 구절이나 좋아하는 성경 구절 있느냐 물어도 다음에 하겠다고 한다. 목사님의 간단한 설교가 끝나고 기도가 끝났다.
이제부턴 자살위험 재소자의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게 상담의 기본이다. 그런데 입을 다물고 있다. 마음을 열게 해야 하는데 참 답답하다. 전직 두 대통령의 계란프라이 이야기를 해 주며 말을 하도록 유도를 해 본다, 여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기로 했다.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목사님의 멱살을 잡고 흔들던 내가 일주일 후 가게에 불이 나서 75% 전신 화상을 입고 투병 생활한 이야기, 건강하던 청년이 사고로 전신마취 수술을 22번하고 지체1급 장애인이라는 훈장을 달았던 이야기. 14개월 된 아들은 놀이방에 맡겨 놓고 남편은 병실에 입원에 있는데 가게 팔아 도망가 버린 아내를 저주하며 살았던 세월, 그로 인해 저주했던 내 자신이 더 힘들었고, 결국 어떤 계기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고 오히려 도망간 아내를 축복해 줌으로 내가 살아 날수 있었음을 이야기 해 주었다. 결국 5년을 기다리다 이혼해 준 사연, 다시 재기하며 열심히 봉사하고 나누고 살다가 소록도 한센병력자들게 봉사를 다니며 알게 된 여자와 재혼을 하였고, 둘이 열심히 노력하여 땅 790평에 건물 250평을 건축하고 오갈 곳 없는 장애인들을 모시고 살다가 신학을 하게 되었고,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사이에 사채업자의 브로커에게 속아서 11억7천이 되는 재산을 모두 사채업자에게 뺏겨버리고 자살을 해 버린 아내.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산 사람은 죄인이 되어 그 뒤처리를 해 온 이야기. 그러면서도 예수님 의지하며 앞만 보고 살아온 삶을 이야기 해 주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럴 땐 살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더라.”
그 순간 재소자의 고개가 들리며 눈빛이 흔들렸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마쳐야 할 때임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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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때 폐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저하고 네 살 터울입니다. 아버님은 사업을 하시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셨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결핵을 앓고 있는 저를 걱정하시는 아버님의 넋두리를 가끔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수시로 시뻘건 피가 목구멍을 통해서 쏟아져 나올 때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곤 했습니다. 그런 나를 두고 엄마는 도박에 빠져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가 피를 토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어머니를 찾았지만 어머니는 어디선가 도박을 하느라고 집에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연으로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아버님은 재혼을 하셨습니다. 새엄마는 한쪽 눈이 장애였습니다. 흔히 개눈이라는 의안을 하고 계셨습니다. 새엄마는 당신의 한쪽 눈이 의안이라 제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자격지심이 있었나 봅니다. 어린 마음에도 감정이 묻어 있는 몽둥이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새엄마와는 벽이 생겨버렸습니다. 참 많이도 맞았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새엄마가 때리려면 제 스스로 방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새엄마의 악다구니가 아버지께로 이어졌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고 싶었나 봅니다. 무조건 엄마께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상처가 심한데 무조건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물어 보았습니다. 새엄마와 아들을 택하라고 하면 누구를 택하겠느냐고요. 그런데 아버님의 대답은 새엄마를 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더 부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께서 학비는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고 다녔습니다. 장학금 받은 걸 비밀로 하고 아버지가 주신 학비로 작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커피하우스 같은 그런 사업이었습니다. 프렌차이점을 많이 개설한 회장이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사업을 하는걸 알게 된 아버지는 무조건 무시를 하셨습니다. 필리핀 세부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복수전공을 3개나 택하며 열심히 했습니다. 공부욕심이 많았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비슷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일부러 새엄마와 거리를 두려고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서로 관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새엄마 몰래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중국인과 합작을 했는데 사기를 당해 망했습니다. 우울증이 왔습니다. 2009년에 술과 약을 같이 먹었는데 현지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고 살아났습니다.
사업이 망한 것에 대한 많은 질타가 있었습니다. 2010년에 귀국하여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상황에서 여자 친구를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새엄마와 많이 부딪쳤습니다. 결국 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나도 힘든데…, 나도 상처가 있는데…, 나도 아픈데…, 아픔을 들어 준 것이 아니라 질타만 쏟아졌습니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죽으려고 음주 후 주차된 차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을 했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병원에 있었습니다.
다시 정신 가다듬고 중국으로 출국하여 다시 시작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심한 말을 하며 헤어지자고 하였습니다. 달래고 달래도 악다구니를 하며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자존심 상한 말까지 하면서 헤어지자고 합니다.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슈퍼에서 과도를 사서 차에 두었습니다. 내 스스로 자해를 하여 자살을 시도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먹었습니다. 출국 전에 꽃을 사들고 여자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기분 좋게 술도 한잔 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 상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차에 있던 과도가 생각났습니다. 일곱 번을 찔렀습니다. 그리곤 모르겠습니다. 여자 친구가 크게 다치진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와 처음엔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교도소가 편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면회를 오셨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아버님께 죄송했습니다. 엄마와도 오해가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가족에 대한 제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아버지는 나이가 안 드신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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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그 재소자 형제 입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곁에 있던 교도관도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이렇게 길게 자기 속내를 보인 건 처음이었단다. 내가 질문을 했다. “지금 너에게 희망이 있니?” 희망이 있다고 했다. 출소 후엔 부모님과 웃으며 살고 싶은 것이 꿈이고 희망이라고 했다.
곁에 계시던 강목사님이 ‘소와 호랑이의 사랑’에 대한 예화를 들려주신다. 소와 호랑이가 죽도록 사랑했지만 결국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소는 호랑이에게 준다고 제일 연하고 맛있는 풀을 준비해서 호랑이에게 줬다. 호랑이는 소에게 주려고 제일 연하고 맛있는 고기를 가져다주었다. 서로가 제일 좋은 것을 준비했지만 서로의 방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제의 새엄마도 형제를 사랑했다. 아버지도 형제를 사랑했다. 형제도 부모를 사랑했다. 다만 서로의 방법으로 사랑했을 뿐이다. 재소자 형제는 공감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시편 121편을 읽어 보라고 했다. 다 읽고 나니 간단하게 설명을 해 줬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것을 믿니? 창세기 1l장1절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믿니? 어릴 때 교회 가보곤 안다니다가 교도소에 들어와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며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고 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산이 클까? 작을까? 먼지처럼 너무나 작은 것은 아닐까?”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했다. “그 하나님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널 지켜 주실 것이다. 다윗의 고백이 너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 나눔지 7-8월호를 전해 주면서 이 조막손으로 17년째 매월 2,500권을 만들어 회원들과 재소자들에게 보내고 있으니 읽어 보고 편지 하면 계속 보내 주겠다고 했다. 매월 둘째 월요일엔 안양교도소에 교화 행사를 하러 오니까 힘들면 상담을 요청하라고 했다. 그땐 바로 상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겠다고 했다. 감사하다고 한다. 얼굴이 살아난 것 같았다. 목소리가 처음 들어 와서 인사 할 때보다 훨씬 힘이 있었다. 강목사님의 기도로 상담을 마쳤다. 몇 번이고 인사하며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성령님이 함께 하셨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심을 느낄 수 있었다.
참 감사하다. 나 같은 지체1급 장애인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그 섭리에 놀라면서도 하염없는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교도관은 다른 자살 위험 재소자가 있음을 넌지시 알려 주신다. 그 재소자도 시간을 내어 만나기로 했다. 상처가 사명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자살위험 재소자 상담은 하나님의 은혜로 잘 마칠 수 있었다.
2011. 8. 20.
-자오쉼터에서 양미동(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