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렬 성도는 임술(1862)생 입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구릿골 약방에서 약장을 앞에 놓고, 임술생의 딸을 맞이하여 후비소 공사를 보셨습니다. 김형렬의 딸을 증산상제님의 후비로 정하신 것입니다.
@ 기유(1909)년 유월 스무사흗날 오전에 여러 제자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 때가 바쁜 지라. 너희들중에 임술생(壬戌生)으로서, 누이나 딸이 있거든 수부(首婦)로 내세우라." 하시니, 형렬이 대하여 가로대 수부는 저의 딸로 들여세우겠나이다." 가라사대 "세수시키고 빨은(깨끗한) 옷을 가라입혀서 데려오라. " 하시니 형렬이 명하신 대로 하여 그 딸을 약방으로 데려오거늘, 상제님 제자들로 하여금 약장을 방 한가운데로 옮겨놓게 하신 뒤에, 형렬의 딸을 명하사 약장 주위를 세 번 돌게 하신 뒤에 그 옆에 서게 하시고, 경석을 명하사 '대시태조 출세 제왕 장상 방백 수령 창생점고 후비소((大時太祖 出世 帝王 將相 方伯 守令 蒼生點考 后妃所)'라는 글을 쓰게 하시니 경석이 받아씀에 후비소(后妃所)를 후비소(后妣所)라 썻거늘, 가라사대 "잘못 썼다." 하사 불사르시고 다시 쓰게 하사 약장에 붙이게 하신 뒤에, 가라사대 "이것이 예식이니, 너희들이 증인이 되라." 하시고, 형렬의 딸을 돌려보내신 다음에 경석으로 하여금 그 글을 거두어 불사르시니라. (대순전경 pp412-413)
그러나 김형렬 성도는 유교의 체면을 뛰어넘을 수 없어, 증산상제님의 명을 거슬러 자신의 딸을 개가시키고 말았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김형렬 성도의 의중을 미리 예상하시고 고판례 부인에게 후비책임을 넘기는 공사를 보시어, 후비직을 고수부에게 맡기셨습니다.
@ 상제께서 대흥리를 출발하려 하실 세, 고부인의 거처에 경석의 가권과 종도들을 벌려 앉히시고 양지(洋紙)에 부도(符圖)를 그리시고 글을 써서 북을 향하여 소화하시니, 그 글에 쓰시기를 "장상 방백 수령 창생점고 후비소(將相 方伯 守令 蒼生點考 后妃所)"라 하였더라. 이 때에 종도들과 경석의 가권에게 이르시기를 "이 공사는 후비 책임을 정하는 공사이니 너희들은 선위봉공(善爲奉恭)하라 하시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p350-351)
증산상제님이 공사보신 대로 고수부님께서는 김수부로부터 약장을 인수인계하여, 구인제자를 데리고 증산상제님의 법을 용사하는 후비권한을 행사하시게 됩니다.
@ 약방 벽위에 <사농공상(士農工商) 음양(陰陽) 기동북이고수(氣東北而固守) 이서남이교통(理西南而交通)>과 그 밖에 여러 글을 많이 써 붙이시고 백지로 배접한 뒤에, 자현을 명하사 뜻가는 대로 밥사발을 대고 배접한 곳에 오려 떼니 '음(陰)'자가 나타나거늘, 가라사대 "정히 옳도다. 음과 양을 말할 때에 음자를 먼저 읽나니 이는 지천태니라." 또 가라사대 "약장은 곧 안장농(安葬籠)이며 또 신주독(神主櫝)이니라. 이 종이를 뜯을 날이 속히 이르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뒤에 대흥리에 가사 고부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약장은 곧 네 농(籠)바리가 되리라." 하시니라. (대순전경 pp240-241)
@ 스므아흐랫날 아침에 형렬이 와서 천후께 딸 죽은 일을 아뢰거늘, 천후 치상비를 후히 주시고 태인 도듭실 유응화에게서 족도리와 원삼을 빌어다가 새롭게 단장하시고, 사인교를 타시고 약장과 모든 물건을 짐꾼에게 지워 앞세우시고 대흥리로 돌아오사, 약장과 모든 기물을 침방에 봉안하고 부벽시(附壁詩)는 벽에 부치고, 벽 발랐던 종이는 뭉쳐서 천반자(천장) 속에 갊어 두시니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놀래어 이상히 여기더라. 이에 천후, 친자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창립을 선언하시고, 여러 종도들에게 명하사 포교에 종사케 하시고, 신경원과 김병욱에게 명하사 태인장에서 큰 소 한 마리를 사다가 기르시면서 신정을 행하시니라. (천후신정기 p24-25)
임술생인 김형렬 성도는 8년 동안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성경신을 다해 수종들었습니다. 그러나 증산상제님이 돌아가신 이후 증산상제님의 마음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해, 고수부님을 제대로 모시고 않고 급기야 정부인을 내세워 고수부님에 대항하게 됩니다. 증산교사를 쓴 이정립은, 고수부님을 배반한 김형렬 성도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형렬은 천사(天師)께 맨 처음으로 추종하여 팔 년동안 천사를 정성껏 모셨고 천지공사에 많이 수종들었으므로, 자타가 모두 수제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천사께서 수부를 택정하실 때에 생각이 잘못 들었고, 또 천사께서 화천하신 뒤에 수부로 들여 세웠던 딸을 개가케 한 과실로 인하여, 자기에게 내려야 할 사명이 고부인에게 옮기게 되어, 결국 신해(1911)년에 약방기물을 고부인에게 인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에, 지난 일을 후회하여도 믿을 말이 없어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계축(1913)년 봄에 고부인을 가 뵈이고 현무경을 등본하여 와서 그 오묘한 법을 잠심추구하더니, 이 해 가을에 장기동, 장기준이 찾아오므로 두 사람을 데리고 본소에 와서 고부인께 뵙고, 인하여 이로부터 교단에 협력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갑인(1914)년 정월에 장기동이 본소로부터 와서 경석과 다투고 온 내력을 말하니, 형렬이 크게 분노하여 교단을 이탈하고 이로부터 경석을 크게 미워하며 기동과 교단에서 이탈한 종도들로 더불어 따로 교단을 세우기로 꾀하였다.
이해 가을에 형렬은 정부인을 데려다가 수련을 시켜서 신력을 통하게 되면 받들어 세워서 고부인을 대항하여 딴 교단을 세우려고 계획하였더니, 정부인이 수련석에서 실진(失眞)하였으므로 이 계획이 실패에 돌아가 버렸다. (증산교사 pp63-64)
정부인의 실성으로 고부인에게 대항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악산 금강대에서 수련하여 천서를 받아 포교하였고, 병진(1916)년에는 현무경을 그린 부적을 전국 삼백육십 군의 전신주에 묻게 하여 일본변란의 공사를 보았으나, 실패하여 신도들이 흩어지고 맙니다. 그 후 흩어진 신도를 모으기 위해, 무오(1918)년 전주 위봉사 주지 곽법경과 협의하여 위봉사를 전주포교당으로 삼아 교단 재건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기미(1919)년 구월 증산상제님 탄신절에, 신도 수십 인과 금산사 미륵전에 들어가 치성을 올리다, 금산사 주지 김윤창의 고변으로 일본경찰에 잡혀 들어감으로써 다시 좌절하게 됩니다.
일본경찰에서 풀려나온 후, 임술(1922)년 구월에 미륵불교를 세워 보천교에서 탈퇴한 이상호가 가담하는 등 교세가 불어나다가, 이상호와의 갈등으로 간부들이 불화하여 교단이 침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오(1930)년 12월 26일에는 증산상제님이 출세한다고 신도를 모아 큰 치성을 모셨으나, 결국 헛말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흩어져 다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김형렬 성도는 신도를 수습하기 위해, 그동안의 계시받은 천서를 모아 편집한 중화경(中和經)을 발간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모든 것이 실패하고 결국 임신(1932)년 10월에 깊은 아쉬움을 남기고 사망하게 됩니다. 미륵불교는 김형렬 사후 해산되어 버렸습니다.
김형렬 성도는 자신의 잘못된 처신으로, 증산상제님의 후비로 책봉된 그의 딸도 사망함으로써 후비직을 고수부님에게 넘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실수와 과욕으로 딸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임술생 김형렬 성도의 한계는 고수부님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김형렬 성도가 처음에는 대흥리에 계신 고수부님을 모시고 포교에 종사하였으나, 자신의 딸에 대한 미련과 차경석 성도와의 갈등으로 고수부님에게 대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김형렬 성도의 한계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임술생인 김형렬 성도가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고수부님을 증산상제님과 명실상부하게 정음정양의 위격으로 모시지 않고 자신이 만든 교리로 독자적인 신로를 걸었기에, 결국은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