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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 김어수 선생의 일대기
1. 김어수는? 2. 김어수 선생의 약력 3. 김어수 선생의 생애 4. 지인들이 전하는 김어수 선생 |
목차
1. 김어수는?
○ 김어수(金 漁水)의 아호는 영담, 본명은 소석(素石)이며 어수는 불문에 출가하여 받은 법명이다. 훗날 이 법명은 자연히 필명이 되었으며 본명 소석은 주민등록상에서만 쓰인 이름으로 남았다.
○ 1909년 1월 4일,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직동리에서 부 김정호 모 박승분 사이에 7대 독자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김정호는 대대로 선비의 가풍을 이어받아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을사 5적을 비롯한 매국노들을 규탄하였는데, 한일 합방이 체결된 후 몸을 피해 고향 영월을 떠나게 되면서 부모를 따라 세 살의 나이에 부산 범어사 근처로 이주하였다.
○ 1922년, 13세에 범어사로 출가하여 25년간 승려생활을 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교육계에 투신하여 부산·경남지역 교감·교장(부산 금정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교직에서 은퇴한 뒤엔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로 전국에서 강론하였다.
○ 1932년 조선일보에 시조 ‘조시(弔詩)’ 발표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연이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충청일보, 경향신문, 불교신문과 문학잡지 등에 시조시와 수필, 칼럼 등을 발표하면서 시조 시인으로, 수필가로 한국 현대 문단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 시조에 남다른 정열과 발표한 공으로 제 5회 노산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6년 한국문인협회 울산지부 초대회장에 선출되었다. 1978년에는 동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1년에는 한국 문인협회 시조 분과 회장을 역임하였고, 1983년에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줄곧 성실한 스승으로, 자비로운 종교가로, 고고한 시인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한국문단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1985년 1월 7일 별세하였다.
○ 대표 작품으로는 시조집 ‘회귀선(回歸線)의 꽃구름’, ‘햇살 쏟아지는 뜨락’, ‘이 짙은 향기를 어이하리’, 수필집 ‘달안개 피는 언덕길’, ‘가로수 밑에 부숴지는 햇살’, 불교경전 번역서 ‘안락국 태자경(安樂國 太子經)’, ‘법구경(法句經)’, 반야심경 해설서 ‘스님에게서 온 편지’, 찬불가(김용호 곡) ‘부처님 오신 날’, ‘부모님의 은혜’ 등이 있다.
○ 김어수는 시조가 아직 현대시로 정착하지 못했던 30년대 초반부터 시작에 전념, 시조를 현대시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어수는 시조를 현대적 감각을 살리면서 자연의 실상을 추구 하였으며, 특히 시조를 불교 정신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독보적인 진경을 보임으로써 종교 문학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2. 김어수의 약력
* 학력 및 경력
1909년 1월 4일 영월군 상동면 직동리 출생
1922년 부산 범어사로 출가하여 25년간 승려생활
1930년(4-노산학회지) 일본 화원중학교 졸업
1938년 중앙 불교전문학교 졸업
1940년 5월 부산중학교 교사
1948년 강경상업학교 교사
1952년 함안농업고등학교 교감
1953년 울산여자중고등학교 교감
1956년 부산대현중학교 교장
1969년 대한 불교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
1978년 동국시조시인회 회장
1980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81년 노산문학회 제5회 시조 문학 부문 수상
1982년 한국문인협회 시조 분과 회장
1983년 한국 현대시조시인협회 창설 초대회장
* 작품 활동
1932년 조선일보에 <조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
이후 문예신문. 금강산. 조광. 동아일보. 자유신문. 현대문학. 월간문학. 민주신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국제신보. 자유민보. 주부생활. 시문학. 등에 작품발표
1937년 안락국태자경 출판
1975년 수필집 <달안개 피는 언덕길> 출판
1976년 시조집 <회귀선의 꽃구름> 출판
1978년 시조집 <햇살 쏟아지는 뜨락> 출판
1979년 법구경 번역 출판
1981년 노산문학회지 얼 말 글 제5집(108쪽)에 搖石公主(요석공주), 格外(격외)의 의미,
어느 가을날 오후, 개구쟁이 日記, 自畵像(자화상), 早春漫情(조춘만정), 石榴(석류), 落書(낙서), 窓(창), 秋山幽谷(추산유곡) 출판
1983년 <이 짙은 향기를 어이하리>, <스님에게서 온 편지>, <가로수 밑에 부숴지는 햇살> 출판
* 참고 자료
- 노산문학회 회지 “얼 말 글” 제 5집(1981년) 108~109쪽
- 어문각판 신한국문학전집 36 시조선집 1977년 발행 546쪽
- 내성의 맥 향토지 제22집 영월문화원 2006년 12월 30일 발행 222쪽
- 한국문협영월지부
3. 김어수 선생의 생애1)
해방 이전
1909년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직동리에서 그의 부친 환갑의 나이에 7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김정호는 대대로 선비의 가풍을 이어받아 을사늑약 이후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등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일본에게 주권이 넘어갔을 즈음, 더 이상 고향에 머무를 수 없었던 그의 가족은 주변의 눈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의 가족이 짐을 푼 곳은 부산 동래 범어사 부근. 그 때 어수의 나이 세 살이었다.
그의 부친은 한학자였던 관계로 쉽게 범어사의 소유의 산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세 식구의 생계를 꾸리며 살아갔다. 꼬박 이십리 길을 걸어 나와야 사람구경을 할 수 있는 깊은 산중에서 어수는 산과 하늘, 숲과 냇물을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며 자랐고, 산나물과 버섯, 약초를 캐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다. 어수는 부친에게 4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의 나이 10세 정도에는 이미 사서삼경을 읽을 정도였다. 당시 부산 범어사에서 불교계 인재 양성을 위해 4년제 명정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설립하였고 어수도 이곳에 입학하였다. 철저한 유교 집안이었던 어수의 부모님은 당시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탐탁찮게 여겼지만, 남달리 총명하였던 어수는 입학하자마자 두각을 드러내었고, 곧바로 3학년에 월반하여 14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부친이 돌아가시고 다음해 가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로 어수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이발소, 중국집, 여관집 등등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아버지 때 연관이 있던 범어사에 입산을 하게 된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출가한 그는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밥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청소하는 고된 일과를 보내야 했지만 행자생활도, 학문 수양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강원(講院)을 하며 불교의 학문을 익히던 이 시절 범어사의 같은 방에서 동고동락하며 7, 8년을 함께 수학했던 강석주 스님2)과는 그 인연을 평생 지속한 것으로 알려진다. 1926년에는 공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1930년 5년제인 일본 교토(京都) 하나소노(花園)중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6월에는 조선일보에 ‘조시(弔詩)’를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이후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광, 현대문학 등 신문잡지에 시조시 및 수필을 발표하면서 시조시인으로 입지를 넓혀갔다. 한편,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에 진학하여 재학 중에 <안락국태자경(安樂國太子經)〉(불교시보사. 1937)의 경전번역에 참여하기도 했다.
부친으로부터 청빈하고 곧은 성품을 물려받은 어수는, 젊은 시절 만해 한용운 스님을 모시고 다니며 민족정신을 배웠고 조선인의 문맹 퇴치와 지식함양에 많은 일을 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하던 때에 “조선불교청년동맹회”(지금의 대한불교청년회) 대표로 영접을 나갔으며, 24세에 조선불교청년동맹회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중 발각되어 부산 동래 경찰서에 1년간 수감되어 옥고를 치루는 등 항일 민족 불교운동에 앞장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
해방 이후
어수는 해방을 앞두고 하산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잠깐 재직하다 교육계에 투신하여, 부산을 비롯해 경남 각지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산은 산 물은 물〉(부름. 1981)에서 밝힌 하산의 변에 어수는 “입산도 중요하지만 하산에도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수양을 위해 입산이 필요한 것처럼,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하산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하산 후 정운성(충청도 합덕군 군수)의 여식 정순택 씨와 결혼을 하여 슬하에 명숙 금숙 창숙 철숙 성숙 혜정 그리고 끝으로 남아인 갑철을 낳았다. 김어수의 처남 정인택은 충청북도 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교직을 은퇴한 뒤 그는 1969년 11월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상임포교사에 임명됐다. 하산을 한지 30여년만의 일이다. 상임 포교사는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청담스님이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만든 제도로, 스님과 재가자 모두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첫 회에 무진장스님, 법성스님, 김어수, 선진규 등 4명이 합격했다. 그 후로 어수는 포교사로서 제2의 삶을 살았고, 세상을 뜨기 전까지 15년간 재가자들에게 법문하는 일에 매진했다.
서울 조계사는 물론이며 양산 통도사, 중앙신도회, 대한불교청년회 등 전국의 사찰과 신도회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였다. 감기에 걸려도 자리에 눕는 날이 없었을 만큼, 연간 250회 내지 280회에 이르는 거의 연중무휴의 법문을 다녔다. 어수가 한 손에는 옥으로 된 염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짧은 주장자를 들고 강의 장으로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했을 만큼 명강의로 유명하였다. 또한 어수는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물고기가 그려진 그의 낙관이 찍힌 서예 작품을 얻기를 사람들을 소원하였다고 전한다.
어수는 중앙상임포교사 시절에도 “나는 이미 타계해서 환속을 한 사람인데 두 떡을 먹을 수는 없다.”고 말하며 큰 절 주지를 마다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중앙상임포교사로 20여 년간 함께 활동한 선진규 봉화산청소년수련원장은 “청렴하고 포교사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한 분이었다. 대불청, 대불련, 각 사찰 신도모임 등에서 법문을 청하면 천리길도 마다않고 달려갔다”고 회상하며, 어수 법사의 제자인 경기 남양주 불암사의 상욱스님은 “어수법사의 법문을 듣고 불교에 귀의한 사람은 물론이고 출가한 사람도 여럿일 정도로 한국최고의 포교사였다”고 전한다.
그렇게 어수는 위대한 법사였지만 동시에 거장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자신이 머문 곳에서는 반드시 시를 써서 남겼고 또한 거처한 불가의 도량에서 특히 불가의 어려운 법문들을 불제자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고, 뛰어난 문학적 기질로 법문들을 시조나 산문집으로 풀어 놓아 많은 이들에게 어려운 불학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다. 또한 어수는 본인 스스로가 “나는 시를 써서 부처님께 공양한다”라고 하였을 정도로 평생을 시와 함께 살았다.
부산, 경남지역에서 교육자로서 지내던 1950년대에는 울산문단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66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울산지부 창립회원이자 초대지부장을 역임했다. 1978년에는 동국시조시인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81년에는 시조에 대한 남다른 공로로 제5회 노산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78년에는 동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1981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시조 분과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3년에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취임하는 등 한국문단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었다.
그는 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 걸쳐 ‘회귀선(回歸線)의 꽃구름’, ‘햇살 쏟아지는 뜨락’, ‘이 짙은 향기를 어이하리’ 등의 시조집과 ‘달안개 피는 언덕길’, ‘가로수 밑에 부숴지는 햇살’ 등의 수필집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당대 김동리 선생, 서정주 시인 등의 문인들과 교우하며 당대 한국 현대 문학을 이끌어갔다. 서정적이면서도 조국애와 민족애가 드러나는 작품을 많이 남긴 그는, 본이 되는 스승으로, 위대한 법사로, 고고한 시인으로 평생을 살다 1985년 1월 7일 7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의 선종 소식을 듣고 찾아온 조계사에는 불교계, 교육계, 문학계 등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4. 지인들이 전하는 김어수 선생
○ 김어수 선생이 교육계(강경상업학교)에 몸담고 있을 때의 제자인 김영배 수필가가 월간《수필문학》에 투고한 글
- 김어수 선생님을 추모하며 (김영배 수필가)
이 세상에 스승 없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 사람은 독학자 아니면 무학자일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돌아간 우리 국토는 승전국들이 치안상 임의로 그어놓은 38선을 두고 북녘은 소련이, 남녘은 미군이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하던 때였다.
그 무렵 나는 당대의 명문 강경상업에 합격해 놓고도 가정 사정으로 입학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밤잠을 설치고 지냈으나 다행히도 수석 합격자라는 특혜로 기부금 전액을 면제받고 입학의 기쁨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락 한 번 싸 가지고 다니지 못하는 가난 속에서 새벽밥을 먹고 6킬로미터나 되는 논산역까지 걸어 나와서야 대전 이리간 통근열차를 탈 수 있었다. 더구나 반장으로 지명 받은 나는 책임감 때문에 차가 연착하는 날은 걸어서 논강 도로 10킬로미터 길을 뛰어가기 일쑤였으므로 이만 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그런 1년을 보내고 이듬해 2학년에 올랐다. 학년이 바뀐 첫 시간에 새로이 맞은 국어선생님은 김어수 선생님이셨다.
"여러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굵은 테 안경에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신사의 얼굴은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으나 말투는 경상도 사투리여서 좀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은 강원도 영월에서 7대 독자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출가하여 부산 범어사에서 25년 간 승려 생활을 하다가 중등교직에 첫발을 디딘 분이셨다. 동자스님이었던 선생님은 사찰에서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교토의 화원중학교(花園 : 하나소노)를 나온 후 중앙불교전문을 나오신 독실한 불교신자이며 학자요 승려였다.
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본교의 기숙사 사감으로 계셨는데 교육에 유난히 열정을 쏟고 계셨다. 교과서가 없던 시절인데도 시간마다 문예문을 등사하여 나누어 주시고 차근차근 우리 문학의 멋과 맛을 보여 주셨다.
어느 날 국어시간이었다. 우리들에게 우리나라의 전통문학인 시조에 대해 강의하시다가 '풀꽃'이라고 표지에 쓰인 자작시집을 펼치시고는 그 중에서 <고향>이라는 시조를 읊으셨다. 지금은 그 글 전문을 기억할 수가 없으나 고향 우물가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반장을 맡고 있는 나였기에 선생님은 일찍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지만 교내 백일장에서 내 시조 <연꽃>이 장원으로 뽑히면서는 특별히 나를 사랑해 주셨고, 그 후도 교내 백일장은 언제나 내 글이 장원을 휩쓰는 바람에 선생님은 나를 유일한 제자로 삼고 틈틈이 문학서적을 빌려주시며 읽어보라고 하셨다.
3학년 때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영하 10도의 강추위 속에 눈이 극성스럽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학생들은 그 눈발을 바라보며 함성을 지르고 설레발을 쳤지만 나는 귀가길 걱정 때문에 침울해 있었다. 그런데 5교시가 끝나고 교실문을 나가시던 선생님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시고는 "수업이 끝나거든 교무실로 좀 오너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에 혹시 내 수업태도가 나빴던 것일까 싶어 내심 걱정이 되었다. 방과 후 나는 교무실엘 들렀다.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달리 선생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미안하지만 오늘밤 내 방에서 일 좀 도와주어야겠다." 하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부탁대로 일과가 끝난 후 도서실에서 책을 읽다가 6시가 되어 기숙사로 들렀다. 사모님은 주저주저 하는 나에게 어서 들어오라며 나를 방으로 안내하시고는 곧바로 밥상을 들여왔다. 굶주림에 늘 허기져있던 나는 그 날 저녁처럼 배불리 진수성찬을 먹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좀 늦게 돌아오신 선생님은 "어? 와 있었나. 고맙다." 하시며 등을 토닥여 주시고는 자신은 이미 식당에서 식사를 했노라고 했다.
나는 선생님이 자리에 앉자마자 일감을 달라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일은 무슨 일이고? 이 설 중에 어찌 집에까지 갈끼고. 나랑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학교에 가자."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눈시울이 뜨뜻해져 윗목에 빽빽이 꽃혀 있는 책의 숲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뜨거워진 눈동자는 많은 책들의 제호를 더듬으며 쉽게 식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교과서만 읽어오던 시골뜨기의 눈에는 그 책의 제호에서 불교, 철학, 문학, 교육 등에 관한 책을 보며 선생님의 넓고 깊은 지식과 학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후 내가 5학년에 오르던 50년 6월 25일, 기어이 전껑이 터졌다. 학교가 휴교되자 나는 왕재산 밑 작은형 집 고구마 굴속에 들어박혀 매일 책을 읽느라 두문불출했고, 한편 선생님은 피난 차 영남지방으로 내려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결국 기약 없는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내가 교직에 몸담고 시골 고교에서 근무하다가 대전으로 옮겨 지낼 때였다. 그리도 존경하는 선생님을 운명처럼 해후하게 된 것은 83년 가을대전에서의 시조백일장 덕분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은 한국 현대시조시인협회 회장으로 계시면서 시조 보급을 위해 각 시도를 순회하며 시조백일장을 개최하시고 있던 때였다. 나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달려가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나를 단박에 알아보시곤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모처럼 뵙는 선생님의 모습은 곱게 늙으신 데다 검은 베레모를 쓰고 계셨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그날 밤 날이 새도록 옛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유성호텔까지 따라갔지만 주위의 사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밤에 헤어지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현대시조》지를 통해 등단의 영광을 맞았으나 당분간은 글쓰기를 멈추고 지냈다.
2년이 흐른 후 나는 편지로나마 선생님의 안부를 물었으나 그 자손이 받고는 간단한 사연을 적어 보냈다. 2년 전 사모님께서 병으로 작고하시자 한 달이 못되시어 선생님도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결국 사모님의 별세에 충격을 받고 절망하신 나머지 그 뒤를 따르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소식에 부모님이 작고하신 만큼이나 가슴을 앓으며 몇 날째 밥맛을 잃었다. 그리고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무심히 세월을 흘려보낸 내 자신을 깊이 후회했다.
인생은 만나면 헤어지게 되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게 된다는 인연설을 되씹으려 이제는 저승에서나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아니면 다시 한 번 태어난다면 좀더 보은하는 제자가 되어질 것을 생각하며 선생님의 왕생극락을 빌어드리고 있다.
■ 김영배 시조시인. 수필가. 전 논산고 교장 [월간《수필문학》2009년 5월호 <특집| 나의 스승을 말한다> 코너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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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임영석이 한국문학협회와 본인의 블로그에 김어수 선생을 추억하며 올린 글
1. 추억 (시인 임영석)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 아름답다 못해 눈부시다. 이것이 사는 이치인지도 모른다. 스무 살 갓 넘어 고무신을 신고 대둔산을 오르던 일, 영봉형, 배승司兄, 성룡司兄 등 몇 명이 운일암에 텐트를 치고 밥해 먹고 밤별을 보며 얘기를 나누던 것이 2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모두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나는 집에서 허드렛일이나 돕고 글을 쓴다고 허우덩 거리던 시절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글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내 고향 진산면 엄정리로 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 아저씨는 거의 매일 우리집 쓰레트 집 지붕 마루에 앉아, 앞이 훤히 보이는 느티나무를 보며 물로 목을 추기다가 가곤 했다. 물론 서울, 대전등에서 내게 배달되는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때 故 김어수 선생이 보내준 편지글 중에서"인생은 투쟁이요, 쟁취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글이 떠오른다. 그 후 안양 누나 집에 머물며 김어수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역 앞 지하 다방에서 현대시조시인협회 시낭송회가 매월 있었다. 그 시낭송에서 김어수 선생을 처음 뵈었고, 그 자리에는 나이 드신 많은 시조시인들이 자리했었다. 그 자리에 계시던 많은 분들이 지금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않으니 추억만이 아름답게 내 가슴에 자리할 뿐이다. (이하 생략) - 2001년 한국문학협회에 수록
2. 추천 시 (시인 임영석)
落 書 / 김 어수
찢어진 그 세월이 안개처럼 피는 저녁
한결 아쉬움이 餘白에 얼룩지고
다 낡은 조각 종이에 그이 이름 써보다.
말이나 할것처럼 산은 앞에 다가서고
五月 긴 나절에 번저 드는 메아리를
공연히 턱 괴고 앉아 그저기는 내 마음.
그립고 하 허전해 내 그림자 꼬집다가
불현듯 잔디밭에 먼 구름을 흘겨보고
쓰면서 나도 모르는 그 글자를 또 쓰오.
이 시조는 선생이 노산문학상 시조부분 수상을 한 작품이다. 노산문학회에서 발행하는 얼,말,글에 실렸던 작품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반부 노산문학회에서 주최하는 백일장 본선 참가를 하기위해 1982년쯤인가 부터 시조를 공부하는 습작생이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 대회 참가자에게 나누어 주는 노산문학회 얼,말,글이라는 책을 받고 우리글에 대한 애착을 갖고 공부하던 시기였다. 김어수 선생님은 편지에 꼬박꼬박 어린 나에게 임영석 군에게 라는 존칭을 붙여주며 답장을 보내준 글을 나는 잊지 못한다. 당시 내 나이 22살이었다. 이 낙서라는 시조를 읽을 때 마다 선생께서 당부한 "인생은 투쟁하는 者의 것이다"라는 글을 떠올리게 되여 나는 자주 읽는다. - 임영석 시인 본인 블로그(한결-더 좋은 세상:http://blog.naver.com/imim0123)에 게시
■ 임영석(한결) 시인. 2011년 11월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활동 등 |
제 2장 : 김어수 선생의 업적
1. 문학인으로서의 연구 및 평가(김동준 교수)
2. 승려로서의 연구 및 평가( )
제 3장 : 김어수 선생의 문학세계 연구(심경호 교수)
1. 작품 연구
2. 국문학사적 가치 평가
1) <가로수 밑에 부숴지는 햇살>(김어수, 1983) 중 ‘나의 이력서’ 글과 [불교신문 2151호] 기획 연재글(2005.8.3. 날마다 부처님께 詩 공양한 ‘詩人 포교사’) 인용·참조하였으며, 김어수 선생의 생전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진 상욱 스님(남양주 불암사)과의 인터뷰를 정리·요약하였음
2) 1909년 경북 안동시에서 태어나 1933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을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 불교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앞장섰으며 광복 이후에는 왜색불교 청산과 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불교계에서 한국 근ㆍ현대를 관통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큰 스승으로 통한다. 2004년 95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3) 수필집 “가로수 밑에 부숴지는 햇살”(김어수) 제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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