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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히브리어는 닮았다
이영지 교수
(서울 기독대학교 대학원 학술원)
본 연구자는 히브리어 성경 필사작업 중 한국어와 히브리어의 닮은꼴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에 그 닮음을 찾아 연구하던 중 학계에 보고하여야 할 의무감을 느끼고 이에 보고하고자 한다.
1. 고조선 대동강변에서 나온 히브리어
고조선의 무대인 대동강변 와당에서 발견된 히브리어가 국립중앙박물관과 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대 히브리어를 쓰는 백성들이 이동한 이유와, 하나님나라의 회복은 성도가 모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광주박물관에는 ‘단결, 협력하다’의 뜻을 지닌 ‘카솨르’ רשק(카솨르/ 협력, 동맹/7194, 7195) 히브리어가 역시 보관되어 있다.
이에 그 자료로서 고대 히브리어가 새겨진 와당을 제시한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던 대동강 변에서의 기왓장에 적힌 히브리 글자이다.
오엽화가 무궁화 꽃이라는 것까지 밝히고 있는 우리나라와 히브리언어와의 관계에 대한 와당의 문자는 히브리인들이 대략 B.C. 1천년경에 사용했다는 문자로 야곱의 12지파만이 사용한 문자라고 현재 해석되어지고 있다.
일반적인 학설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의 알타이산맥까지 이주한 단 지파 민족의 최초 정착지가 중국 서북부 신강 위구르 자치구임에 비추어 애굽에서 벽돌 굽던 기술이 지붕 덮개인 기왓장에서 발견 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가 단기 4343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추어서 볼 때 문정창이 주장하는 한국・슈메르・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와 긴밀성을 가지면서 오히려 한국인과 그 원조를 같이하는 슈메르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 구약을 기본 자료로 밝히면서 동이족을 원류로 해서 슈메르 문명이 성립했다는 설을 내세우는데 주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 연구자가 주장하는 현재의 한국어와 성경 히브리어의 유사성이 오히려 기본형 즉 원래의 언어에 더 가까웁기 때문이다.
정정창은 동이족의 이동경로 등을 들고 5,000여 년 전 고도의 문명을 가진 황색인종이 동방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가 수메르인과 이스라엘인이 되었으며,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한다. 성서》구약을 비롯해 서양학자들의 고고학 관련 책자에서 수없이 고대문명에 대한 서양학자들의 대전제라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다. 문정창은 《가야사》를 저술하면서 가락국 시조 김수로와 신라 문무왕 김법민, 신라장군 김유신 등의 원 조상이 소호금천씨였음을 밝혀낸다.
1977년 중국은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를 발굴했는데 출토품이 B.C. 5,785년 전의 것으로 측정하였다. 출토지가 소호금천씨인 소호국은 남만주~요동반도 지방에 자리했던 나라이다. 바로 남만주~요동반도에 위치한 소호국으로 고조선~고구려 연대까지 한민족의 영역이고, 동 시대 수메르로 건너간 황색인종, 곧 소호금천씨 족속이라는 학설을 내세운다.
문정창은 성서 구약과《대영백과사전》, 존 브라이트의《이스라엘의 역사》, J. D. 더글러스의《The New Bible Dictionary》, 크라머의《History begins at Sumaer》등 서양학자들의 여러 책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수메르의 대표적 유물인 점토판 50만 장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엔릴영웅시>와 <길가메시서사시>를 인용한다.
백두산에서 일제치하 고정록 선생이 발견한 ‘단군지석’에서는 1911년경 일본인들이 백두산에서 벌목하다가 뜻을 알 수 없는 글의 지석(誌石)이 당시 의주 천주교당에 와 있었던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에 의해 ‘히브리’ 문자로 밝혀진 뒤 ‘단군지석’으로 판독되어(약 3천년전 제작) 졌다.
1).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에서 발견된 히브리어의 예
실제 본 연구자는 예수바위(주민의 말)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 2리 왕머리 마을- 즉 왕유를 답사, 예수바위 또는 도마 바위에 대하여 그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로 연구한 바 있다. 예수바위는 유우식(당시 관악고등학교교사)이 처음 발견한 바위로 히브리어가 새겨져 있다.
http://blog.naver.com/guiyeum/30048663357(정수일교수/한겨레 2005.1.3)
경북 영주의 도마상
1) 경북 영주에서 도마의 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분은 당시 서울관악고등학교 역사교사였습니다.
이분은 당시 순복음교회집사님이셨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기도 중에
경북 영주 이곳에 가보라는 음성을 주셨다고 합니다.
맨 위에 오른쪽에 청소하다보니 맨 오른 쪽에 히브리글자 네 자가 보인 것입니다.
[타우멤] = 바로 [도마]입니다.
히브리어 글자를 가장 먼저 학술화 한 분이 이장식 박사입니다.
이 분은 도마연구를 위해서 영국 멘체스터 대학에서 1년간, 미국 예일대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갔었고
(woon 5400)/08. 01. 01. 20:7.. .
2). 1차적 의미와 2차적 의미로 접근
도마바위는 우수한 석공 도마에 의해 기록되었다. 본 연구자는 우선 히브리어 성경에서 도마 글씨에 대한 이해를 히브리어 ‘흠 없는’ 혹은 ‘완전한’ 뜻을 지닌 םי(토밈/흠 없는, 완전케, 민, 28: 9; 시 119: 80; 잠 11: 5; 암 5: 11)・םי(테밈밈/완전, 흠 없는)・ 흠 없는 םי(테밈밈/완전, 레 9: 2; 겔 43: 25, 45: 20, 46: 4)에서 찾고 왼편에서 오른쪽으로 읽어가야만 이해할 수 있는 히브리어 표기법에 주목하였다.
옛 한글과 같이 된 이 표기법은 첫 글자 ‘ת(타브/십자가의 뜻)’로 이 첫 글자를 글자를 문학성이나 예술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ח(헤드/울타리, 집)로 읽기 쉽게 되어 있다. 글자 안에 들어있는 새의 부리와 기와집 끝 모양처럼 된 그림을 넣어 같이 ת(타브/십자가)를 참작할 때만 ת(타브/십자가)로 판독하게 된다. 이 ‘완전함’을 의미한 첫 글자 ת(타브/십자가, 완전함)와 옆 글자 מ로 이어지는 히브리어의의 (톰/완전)이 모여 도마의 읽기 가능성이 열린다.
석공의 예술성이 ת 글자 안에 새가 있고 그 안에다 새의 눈을 넣은 다음 왼쪽 끝 부분을 새의 머리 부분과 부리부분의 일부를 접목시며 תּ자를 만들고 있다. 더구나 다리부분이 첨가된 절묘한 (토)자 만들기는 다음 글자인 מ의 밑에 새의 부리부분을 살짝 붙이면서 (톰), 즉 도마글시로 예술화하였다.
성경에서 의미는 םי(토밈/완전, 무흠)이다. 이 중에서 (톰) 다음의 글자, 즉 여호와의 손이 되는 י(요드)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두 손이 마주한 모습(좌측으로 세 번째 글자)은 또한 끝 글자 ם(맴/물)가 지닌, 바위 즉 뒷면에서의 바위 형태 즉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한다.
무흠하시면서 완전한 분을 석공 도마는 예수님의 만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안긴 요한의 모습인 바위 뒤의 모습과 일치시미고 있다. 끝의 네모 ם(맴)안에는 말씀이 들어 있는 의미로 도마가 앉아 있는 모습(조국현/도마박물관장)일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바위 뒷면과 연관한다면 예수님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은 םי(토밈/완전, 무흠)하신 예수님의 모습의미이다.
도마바위는 한글에서의 ‘ם(미음)’이 세 개나 있다. 곧 히브리어표기로 보면 םממ의 형태이다. 그 안에 새의 목과 부리와 눈, 그리고 가운데 점과 손을 맞잡은 형태, 즉 손을 모은 모습, 그리고 마지막에서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암각하였다. 하나님 아들에 대한 무흠하심을 ‘물’ 히브리어로 반복, םי(템밈밈/완전, 흠 없는) 하였다. םי(테밈밈/완전, 흠없는, 레 9: 2; 겔 43: 25, 45: 20, 46: 4)은 무흠의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시, 암시한 것이다.
םי(테밈밈/완전, 흠 없는)은 ‘예수님’ 주제가 더 강한데 왜 소위 “도마바위”라는 명칭이 따라다닌다. 도마는 신약시대 의 석공이다. 이에 문학적관점과 문인의 오랜 경험(79년 등단)에서 오는 시각으로 글자가 지닌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바위 앞면 글자를 חאמ(토마)로도 읽을 수 있었다. 히브리식의 מ(토마)는 ‘ ָ ’(카메츠/모음발음)이 있어서 보통 때는 ‘아’ 발음이지만 히브리어 첫 글자로 쓰일 때는 ‘오’로 발음하므로 ‘톰’이 된다. 따라서 당연히 ‘א’(아)가 오면서 אמ(토마/도마)이다. 그런데 위 그림에서 보면 두 손을 모은 형태 즉 양 손을 합한 모습이 א(아) 자의 모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도마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조국형/도마박물관장)이 되어 있다.
더구나 히브리식의 끝 발음은 ה(헤/숨구멍, 소망사)나 ח(헤드/지붕)이기 때문에 후자 ח(헤드/지붕)는 예수님 안에 있는 도마의 모습이다.
실제 바위모습은 앞면에서 목이 잘렸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분처상(分處像)이다. 앞면의 바위 전체의 그림은 가슴 부분에다 두 손을 나란히 얹었고 실크 옷 즉 명주옷을 입은 모습에 발가락이 나란히 드러나 있다.
4. 명주옷을 입은
일명 도마 바위벽면에 새겨진 야소화왕’耶蘇花王- '예수 꽃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양문화권의 존칭이다. 예수의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쓰게 된 글자이다.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와 ‘명전행(名全行)’기록은 예수 꽃 왕 인도자라는 뜻이다. 야소는 중국식 문서체의 예수님이고 명전행(名全行)은 이름그대로 예수님의 이름 전체의 이동이다. ‘야소’ 한역(漢譯)은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한다. ‘야소’는 중국 명대 중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한다. 400년께 고구려 광개토왕이 경북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 때문에 단산면에서는 광개토왕에 관한 자료가 발견된다. 이로 미루어 이 현재의 영주시의 부석의 의상대사, 평은면의 도마상, 단산, 순흥의 광개토왕 비의 글자와 같은 서체 등의 연대는 문화의 교류 자료로 지금도 있다. 따라서 그 때 당시에 새겨진 것이라고 또 가정을 할 때에도 그 연대는 고구려 시대로 더 소급된다.
사도 도마의 석화상과 관련한, 그리고 고대 가야문화에서 발견되고 있는 기독교 전래는 숭실대에 보관된 석상에서, 그리고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에서의 히브리인의 모습과 이 처용얼굴을 부적으로 사용하는 풍습들에서 이미 이때에도 바른 신과 역신을 구분하고 있었다. 잡귀를 물러가게 하는 효력이 왜 히브리인의 얼굴인 처용으로 하고 있는 가이고 부적으로 사용하는 가이다.
고려 시대로 이어지는 처용의 구비 문학은 이미 그만큼 민간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형태이고 보면 연대는 더 소급된다. 이 신앙적 개념인 역신을 내쫓는 처용의 의미가 강조된 축사신(逐邪神)은 히브리인의 얼굴이다. 고려에 와서는 궁중의 나례(儺禮-잡귀를 쫓기 위한 의식)와 결부되어 처용희(處容戱), 처용무(處容舞)로까지 발전한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함으로써 상이 조성된 후에 보탠 것으로 본다면 ‘명전행’(名全行) 기록은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과 맞물려 당대의 명장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400년경 고구려 광개토왕이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고 이때의 광개토 왕의 글씨도 발견된 바(KBS/역사탐방) 있기 때문이다.
석상 앞면에서는 히브리인이 두루마기를 입은 그 아래로 발가락이 가지런히 놓이었으며 발밑에는 꽃 모양이 있다.
도자기전문가 송광호는 섬세하고 우아한 명주 실크 옷을 입은 예수님 모습이라 했다. 1908년 중국 둔황에서위 고대 동방기독교 즉 경교(景敎)의 인물상(당나라 말 제작, 일부 학자는 그리스도상이라고 주장)에 나타나는 수세와 비슷하다. 상의 옆구리와 하부에는 무궁화 꽃무늬가 있다. 무궁화는 사전에서 샤론이라고 부르는데 일본 꽃 박람회 때에 ‘한국의 꽃 샤론’이라 하였다. 그리고 분처상의 고리형 목걸이 문양과 겉옷의 가로줄 문양은 둔황 경교화상의 목걸이나 겉옷 문양이다.
제 2절 유추의 가능영역
신라 이전의 나라인 가야의 수로왕릉입구에는 두 마리 물고기가 입을 마주한 문양이 있다. 수로왕의 왕릉에서의 물고기 문양에 대한 유추는 수로왕의 아내 허황옥이가 외국인 인도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고대에도 외국과의 교류는 활발하였던 일(KBS 역사 탐방참조)이고 보면 대동강변에서 출토된 기왓장에서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수로왕능에서 발견된 물고기 문양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1. 유추
예수님의 탄생, 즉 계보인 첫째. 아담 → 둘째 노아 → 셋째 아브라함 → 넷째 모세 → 다섯째 여호수아 및 다윋 → 여섯째 예수 → 일곱째 그리스도의 순서에서 여섯째가 예수님의 자리이다. 이 점은 신라혁거세의 알 6개설과 무관하지 않다.
1). 한국인과 히브리인과의 비교
(1) 몸의 골격구조와 고대 유대인의 골격구조
동아백과사전에는 한국인의 골격 구조와 골상이 ‘고대 유대인’의 골상과 동일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상뿐 아니라 외모 상으로 보아도 원래 유대인은 한국인들처럼 황인종(창 9:25)이다. 머리카락이 검고 키가 작았다(민 13:32-33).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城) 정탐 후 보고하기를, ‘그 곳 사람들은 키가 장대 같고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더라’(민 13:33)라 하였다.
한국에서 그렇듯이 이스라엘은 양반, 상놈제도・정조관념・부녀자들이 물동이를 이고 물 깃는 습관・맷돌질・도리깨, 농사법이 같다. 유월절 절기에 양의 피(血)를 문설주에 발라서 화를 면했던 절기를 한국에서는 팥죽을 쑤어 문설주에 발랐다.
아직도 한국인들도 시골에서 맷돌을 사용한다. 유대인 풍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베두인족은 유목·천막생활을 한다. 고대 유대민족의 전통과 풍습으로 결혼할 때 서약 식을 한 후, 신부의 부모가 사는 천막 근처에 임시로 초당을 짓고 3일 동안 신방을 꾸민다. 유목민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정착된 한국민족도 처녀 때는 빨간 댕기를 하고 결혼할 때에는 빨간 치마에 빨간 끝동과 옷고름이 달린 저고리를 입고서 얼굴에 빨갛게 연지곤지까지 찍는다.
2). 한국의 국화(國花) 무궁화와 사론의 꽃
한영사전은 무궁화의 별명을 'Rose of Sharon', 즉 '사론의 장미'라 하였다. 찬송가 89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론의 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은 무궁화를 '무구케'라고 읽고 있고 학술명은 'Hibiseus Syriacus' 즉 '시리아에서 온 꽃'이라는 뜻이다. 그 연유를 그리스의 알렉산더가 죽은 후 천하를 나누어 다스린 네 명의 장군 중 안티오쿠스가 다스린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포함하고 있었다.
3). 인사
이스라엘과 한국의 인사법이 같다. 유대인들은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고 유대인들은 만날 때마다 우리가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하듯이 '평안한가?' '평안히 가라' 하며 인사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밤새 안녕 하십니까'이고 헤어질 때 ‘안녕히 가십시요’, ‘잘 가세요’ 혹은 ‘잘 계세요’이다. 이 의미는 모두 '평화'의 기원하는 내용이다. 경상북도 영주지방에서는 ‘별고 없으십니까’라고 하면서 안부를 묻는다.
4). 아비, 아빠, 이모, 임마
성경에서 아버지는 'באָ(아브/아버지)이고 ‘아바'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친근감 있게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셨다(막 14:36).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아빠”라는 한국인들의 호칭은 심지어 아내도 남편을 향하여 “아빠”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자기의 아들 딸 들을 다른 이에게 이야기 할 때에 ‘애비, 애미’라 한다.
‘아비’의 개념이 אַ(아브/아비)이고 한국어나 히브리어가 똑 같은 ‘아비’와 ‘아비’는 성경 전체에서 656회 이며 그중에 ‘아비가'만도 60회 이상이다. 그리고 한국어에는 어머니의 언니나 동생을 ‘이모’라고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모친을 ‘이모’ וֹמאּ(이모/어머니)라고 한다. 한국의 경북 지방에서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부를 때 ‘엄마’라고 부르는데 히브리어에서는 ‘임마’ הּאּ(임마/어미, 창 24:28)가 있다.
믿음의 조상 םאַ(아브라함/믿음의 조상)은 글자그대로 의미를 찾아본다면 내가 집 안에 머리가 되어 숨을 쉬게 하는 일을 하는 일의 사역이다. 이때의 집은 하나님의 집 안이다. 내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써 집 안에서 어른 노릇을 할 수 있다. 본래의 이름 ‘아브람’ םאַ(아브람)에게 숨 쉴 수 있도록 하시는 (하/숨구멍, 숨쉼)만 더 붙어서 내가 집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힘으로 숨을 쉴 수 있도록 되는 상태가 된 아브라함이다.
과거의 고향 아람(창 24: 4)에서의 유리하던 곳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온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고 그의 때에 이미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 56)라고 하였다.
5). 제사법
한국이나 옛 이스라엘에서는 다 같이 사람이 죽으면 베옷을 입고 곡을 한다. 산소마다 돌 제단이 있다. 한국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낼 때 장작을 쌓아놓고 소를 잡아 올려놓아 불을 지르며 제사 지냈다. 무덤 양식, 돌담을 쌓은 일은 아직도 이스라엘 북부나 중부 일부에서 돌담으로 지은 집에 살며, 제사를 지낼 때도 마찬가지로 돌 제단을 쌓는다. 한국 또한 돌을 쌓은 집에서 살았으며 제사를 지낼 때 단(壇)을 쌓았고(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 잔을 세 번 돌린 후 제상에 올려놓는다. 유대인들의 장례방식은 상주들이 베옷을 입고 베로 건을 만들어 쓴 뒤 향을 피우며 대나무를 짚고 곡을 했다(창 37:34; 역상21:16).
6). 남녀유별과 남존여비 사상
가장 이스라엘 전통이 남아 있는 베두인이나 한국인 또한 남녀유별과 남존여비사상이 유별나다. 아이를 못 낳거나 딸만 낳으면 이혼조건이 된다. 처녀들 또한 예전의 조선시대 처녀들처럼 머리를 길게 땋는다. 결혼하면 대개 머리를 틀어 위에 올린다. 여인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는 모습과 외출 시에 얼굴을 가리는 풍습은 고대 한국에서 귀한 아낙네들의 풍속이었으며 이스라엘 또한 같다.
7). 생활・도구・옷・음식
한국인 또한 그렇지만 이스라엘인들도 농경법으로 쟁기, 도리깨 등을 사용하고 불집게, 숟가락, 놋그릇을 사용(열하25:14)하였다. 매운 음식과 부추 그리고 아주 깊고 맑은 물에만 사는 이스라엘 잉어(향어) 등을 즐겨 먹었다.
유월절(Passover)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3500년이란 전통을 가진 이스라엘의 명절이다. 한국인들 또한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는다. 풍습으로는 각 방의 문설주를 비롯, 장독과 헛간 등에 뿌렸다.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 팥죽 이야기는 성경의 ‘에서’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인이 먹는 동짓날의 팥죽은 다름 아닌 ‘유월절 행사’의 일부이다. 한국인들은 고사 지낼 때 고사떡을 반드시 붉은 ‘팥 설기’로 한다. 이스라엘 단지파의 자손들에게서 남은 이 관습이 그대로 남아 동짓날 ‘팥죽’으로 이어졌다.
8). 옷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얀 세마포를 입는다. 이스라엘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옷은 하얀 세마포이다. 기본형 שׁישׂ 또는 שׂי (시쉬 또는 시시/기뻐날뛰다, 7797)에서 시작되는 세마포는 שׁוּשׂ(수스/즐거이, 시 119:162)로서 여섯의미와 동일하다. שׁ(쉐쉬/여섯)・א(솨솨)는 표백, 단지 여섯째 부분만 남겨두다, 인도(겔 39: 2)의 의미이고 שׁ ישׁ(쉐쉬 쉐스)는 가는 베(겔 16: 13)이다. 문장중에서는 הה שׂי...הה שׂ(사스 여호와....여사수)로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던, 여호와가 기뻐하시리라(신 28: 63)가 모두 여섯과 관련된다. 그리고 즐거워하며 יי(시시/즐거워하며, 애 4: 21)・שׂי(타시스/기뻐하리로다, 시 35: 9)・םי(예수심/기뻐하며, 사 35: 1)・שׂי(야시스/기뻐하시리라, 사 62: 5)・שׂ(베사스/기뻐서, 사 66: 14)까지 연결된다. 따라서 세마포는 기쁨의미가 있는 흰 베옷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은 부모님이나 가족이 돌아가면 이 베옷을 입었다.
그리고 죽는다는 말을 돌아간다라고 표현하여 히브리적 이해 곧 자신을 죽여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음을 은유하고 있다. 이러한 긴밀성은 이 ה(쉬솨/여섯)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의미까지 들어 있어서 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이에 놀랍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뜻은 잔인한 기쁨의 의미가 들어있다. 한국인 또한 흰옷을 좋아하고 조상이 죽으면 굵은 배를 입고 통곡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 또한 슬픈 일이 발생하면 굵은 베를 입고 통곡(에 4:1; 사 22:12;렘 6:26; 겔 27:31)하였다.
한국 또한 '백의민족(白衣民族)' 별명이 붙어있다. 유대인과 한국인 모두 흰 옷을 즐겨 입는다. 유월절이 되면 남자들은 모두 흰 두루마기를 입고 그리심 산의 꼭대기에 올라가 많은 수의 양을 잡아 제사를 올린다. ‘흰 옷’ 입는 유월절의 나들이 흰 옷은 외출을 하거나 제사에 참여하는 조선시대의 선비들과 같다. 흰 옷은 노동복이 아니라 예복이다. 구약성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이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갈 때 입었던 예복도 바로 세마포 모시옷(레16:4)이다. 한국 민족 또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예절을 갖춘다.
9). 모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자 쓰는 것을 좋아한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검은 모자를 쓰고 다닌다. 한국인도 이미 오래 전부터 모자 쓰기를 좋아해서 이를 이상하게 여긴 중국인이 그것을 기록해 놓았을 정도였다. 지금으로부터 4천 여 년 전에 기록된 중국의 '회남자(淮南子)'에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으니 목덕이 어질어 군자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모자를 쓰고 띠를 띠고 칼을 찼으며……(東方有君子之國 東方木德仁故 有君子之國也 其人冠 劍…… 淮南子 形訓)"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방 안에서까지 갓을 쓰고 감투를 썼고 하인들도 초립을 썼고, 아이들이나 아녀자들까지도 모자를 썼다. <황금나라의 비밀, 신라 황남대총>에서 연구자(2009. 4. KBS)들은 한민족의 기원이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시내의 대릉원에서 출토된 유물의 기원(1973. 7. 6)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신라의 금관은 기원이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유라시아 샤먼들과 동일・알타이 공화국의 우코크 평원에서 발견된 무덤이 신라초기 돌연 출연한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동일・출토된 유물의 대다수가 당시 지중해와 흑해연안에서 사용하던 것과 동일함을 실물과 비교, 제시했다. 이스라엘 앞 바다에 있는 사이프러스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과 신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그것은 똑같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한국어 말하기 붐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2. 절기
1). 음력 8월 15일의 차례와 성서의 7월 15일은 같은 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세 개의 절기(신 16:16)가 있다. 애굽에서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첫 열매를 드린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는 '칠칠절'(출 34:22; 민 28:26; 신 16:10, 16; 대하 8:13)・하나님과 동행한 광야생활을 추억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초막절'(레 23:34; 신 16:13, 16, 31:10; 대하 8:13; 스 3:4; 슥 14:16, 18, 19; 요 7:2)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음력을 사용한다. 그런데 그들의 달력은 우리보다 한 달을 앞서가기 때문에 그들의 7월 15일은 우리의 음력 8월 15일이 된다. 성서의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 15일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신년의 시발점을 동지점에다 맞추어 자월을 정월로 삼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년을 바벨론 달력을 따라 밤과 낮의 길이가 평등한 춘분점에 맞추어 니산월을 정월로 삼아 왔다. 그래서 그 니산월, 즉 정월 보름에 그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일곱 번째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즉 50일째 되는 날에 둘째 절기인 칠칠절, 즉 오순절(7×7+1=50)을 지켰다. 그리고 또 일곱 번째 맞는 달 보름달을 기념하여 티쉬리월 15일에 세 번째 절기인 초막절, 감사절을 지켰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초막절이 7월(Tishri월) 15일이 된 것이다.
유대인의 절기는 7이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때문에 7월 15일은 그대로다. 이 유대력으로 7월 15일인 성서의 초막절은 음력 8월 15일에 지켜지는 한국의 추석과 항상 같은 시기, 같은 날짜이다. 그 이유는 유대력이 한국의 음력 보다 한 달이 늦기 때문이다. 한국의 추석과 성서의 초막절은 항상 그 날짜의 때가 일치한다. 두 곳 유대력에서나 한국력에서 모두 윤년이 들어 있는 해에만 한 달의 차이가 난다.
성서는 레위기 16:29(민 19:1, 왕상 8:2)에서 남 왕국 유다에서는 7월 15일을 초막절로 지켜왔으며 왕국의 분열 이후 여로보암 왕 때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이 7월 초막절을 8월 15일로 바꿔서 지켰다(왕상 12:32). 한국의 추석인 8월 15일은 북 왕국의 날짜와 일치한다. 추석의 때는 남 왕국의 7월 15일의 때와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음력을 사용한다. 그런데 그들의 달력은 우리보다 한 달을 앞서가기 때문에 그들의 7월 15일은 우리의 음력 8월 15일이다.
세계 모든 나라들 가운데 음력 8월 15일을 최대의 명절로 지키는 나라는 이스라엘과 한국뿐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레 23:34). 일본에도 음력 8월 15일이 명절이었으나 양력으로 바꾸었다. 한국의 추석과 구약의 초막절은 두 절기 모두 의미뿐만 아니라 때와 날짜가 서로 같다. 추석은 성서의 초막절과 그 날짜가 항상 일치한다. 그 이유는 달력상의 날짜는 다르지만 절기상의 날짜는 항상 동일・달밤을 즐기는 저녁 행사・명절에 고향을 찾으며 조상을 기억하는 풍습・추수한 곡식으로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는 행사이다.
한국에는 비빔밥문화가 있다. 한국의 추석은 비빔밥을 제사음식형식으로 올린다. 한국의 추석은 음력으로 8월 15일이고 이스라엘의 초막절과 같다. 단지 그들의 일력으로는 7월 15일이지만 날자 수만 다를 뿐 시기가 같다.
한국의 음력월은 태양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점에다 두고 이때부터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기 시작하는 달이다. 로마력인 양력은 한국의 음력보다 한 달이 빠르고 유대력은 같은 음력이지만 음력보다 한 달이 더 느리게 오기에 음력과 같다.
2). 초막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헌물은 곡식이 아니라 열매, 즉 추수해 드린 올리브와 무화과 그리고 포도열매이다. 한국도 갖가지 열매를 갖추어 제사를 지낸다. 성묘를 하고 조상 숭배 신앙을 가지며 모든 감사를 먼저 조상께 드린다.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약 320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문화를 만나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이뤄진 감사절 문화이다. 가나안의 수장절은 농경문화에서 온 감사절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장막절의 유목 문화를 가지고 들어와 결합하면서 제3의 초막절을 이루었다.
3). 한국의 절기 명절 추석
한국 문화는 ‘한가위’ 문화이다. 한국의 추석은 음력 8월 15일인데 가장 달이 둥근 때는 아니다. 8월 15에는 햇곡식을 수확하기도 전에 치르는 추석 명절은 성서의 초막절과 같다.
4). 달 문화
창세기 1장은 계속하여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루가 시작되는 그 저녁이 중요했다. 예배 또한 아침 예배보다 저녁 예배가 더 중요하다. 절기 행사 또한 저녁 행사가 중요하다. 달이 동산에서 떠오르는 시각의 초막절 행사는 일곱 가지로 뻗은 촛불로 성전을 밝히고 그 촛불 밑에서 함께 횃불 춤을 추는 춤 놀이・이스라엘 여인들의 뜰에서는 15계단을 내려가면서 계단마다 시편 노래 한 곡씩을 부르며 함께 내려가는 춤 놀이를 한다. 행사는(사 20:29) 7일 동안 밤을 즐겼다. 한국인도 밤의 달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즐긴다.
5). 고향을 찾아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는
한국인은 추석날 밤의 달맞이・횃불놀이・강강수월래의 춤 놀이를 가진다. 이 강강 수월내는 가을 추(秋)자와 저녁 석(夕의 ‘강 강(江)자, 물 수(水)자, 건너올 월(越)자, 올 래(來)’이다. “강 건너, 물 건너, 멀리 멀리서 왔다”이다. 민족의 대이동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아주 먼 우리조상들이 지켜오는 문화이다. 한국은 추석은 성서의 초막절과 같다. 유대인은 세계 속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이 되어 반드시 매년 한 번씩 조상과 고향을 찾고 또 조국을 찾는 그들의 전통은 추석에 고향을 찾는 한국인의 습관과 같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7월 14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일주일간 지켜진다. 특히 첫 날 밤은 그들 모두가 ‘흰 옷’을 입고 출애굽의 역사를 재현하는 축제로 밤을 세운다. 동양선교문화연구원 원장 이인식 목사는 추석의 전래사를 추석과 관련한다.
자료들은 민족의 이동 여하 간에 디아스포라 사상을 중심한다. 한국은 오늘날도 철저히 화목제사・감사제사・성일준수・성전존중・십자가・저녁으로부터 시작하는 저녁기도회・심야기도회・새벽기도회를 실시하고 있다. 왜 한국문화와 이스라엘 문화의 동일성이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현재의 히브리어 성경에서 그 발음과 의미의 유사성이 허다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에 경이감을 금치 못한다.
2. 한국말과 성경의 히브리어와의 발음과 의미의 유사성
- 2010년 6월 10일 현재 조사
진행중-
한국은 단기 4343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문정창이 주장하는 한국・슈메르・이스라엘의 역사의 긴밀성을 한국인이 그 원조가 되는 슈메르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역사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동이족을 원류로 해서 슈메르 문명이 성립했다는 설을 내세운다. 본인이 연구하는 바로도 한국어에서 히브리 성경의 원문보다도 오히려 기본형에 가까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 한국어의 ‘가라’와 히브리어 ‘가라’
: 한국어에는 상대방에게 ‘가라’라고 명령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가라’ א(카라)는 만난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걸다, 초청하다. 부르다(출 1:18), 전파하다, 선언하다, 선포하다, 공포하다, 읽다, 유명한, 말하다(시 3:2, 4), 외치다 등의 뜻이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시키시어서 가게 되고 말을 외치게 되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초청하시어 부르다(시 3:2, 4)의 뜻이므로 ‘가라’ 의미 그대로 본다면 하나님이 시키시는 의미심장한, 즉 한국 언어의 깊이를 실감하는 일이 실제 한국어와 히브리어의 발음과 의미의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다.
* ‘가랭이’와 히브리어의 ‘개라이’
: 한국어의 속언으로 다리를 ‘가랭이’라 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랭이 찢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개라이’ וי(개라이/다리, 출 29:17브)이다.
* ‘커다랗다’와 히브리어의 ‘가도르’
: 아주 크다는 뜻의 히브리어의 기본형은 가돌 לוֹד(가돌/크다)이다. 성경에서의 이 크다는 뜻은 광명으로서 큰 광명으로 하나님이 낮을 주관하게 하심 םוֹיּ ת ל רוֹ-ת(에트-함마오르 하가돌 렘멤메셀레트 하욤/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창 1: 16)에서 점점 더 빛, 즉 밝음이 커진다. 이 때의 ‘ל’(하가돌)의 ‘’(하)는 관사이므로 빼면 ‘가돌’이 된다. 베가돌 לוֹד(베가돌/베가돌, greater and greater, 에 9:4)은 점점 더 커진다이고 역시 접사 ‘’(베)를 빼면 ‘가돌’이다.
* ‘고마우리’와 ‘고마우리’
: 한국어에는 ‘고맙다’의 기본형을 가지는 ‘고마우리’가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의 יוֹלוּמ(타그무로히/보답할꼬, 시 116:12)가 있다. 앞의 (타/이미 그 분이 우리들에게 주신, 시 116:2)의 접두격 조사를 빼버리면 ‘그마오리’이다. 한국어에는 ‘고마우리’가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젖을 뗄 때에도 ל(바이가마르/젖을 떼고, 창 21: 8)로 ‘가마르’가 표현된다. 앞의 접속전치사 (바/그리고, 창 21:8)와 (이/하나님이 지금도 진행하고 계시는 의미, 창 21:8)을 제하고 나면 ‘가마르’ ל(가마르/보답, 창 21:8)는 한국어의 고맙다는 말에 근접한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는 וּל(티그메루/보답하느냐, 신 32:6)이다.
* ‘끝’과 ‘갓’과 ‘갓’
: 한국에서는 갓, 즉 어느 한 쪽 끝을 ‘끝’ 혹은 ‘갓’이라고 한다. 그리고 종결어미에서 ‘끝이다’라고 말한다. 히브리어서는 ה(갓/끝에, 신 14:28), ץ(게즈/끝, 신 15:1, 시 119:96) 기본형인 ‘끝’이 있다.
이 끝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서 ה(미크제/끝에, 신 4:28), ץ(미케즈/끝에, 신 15:1)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는 처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뜻’이라는 의미로 이 ‘....’를 사용한다. 이 접두사를 빼버리면 ‘갓’이다.
* ‘겟불’과 ‘갯불’
: 한국말에 속언으로 ‘겟불도 없다’ 즉 '주어지는 배당이 없다'의 뜻이다. 히브리어에도 겟불 לוּב(겟불/변방, 민 20: 16, 23) 경계선, 영토 לוּב(갯불/끈, 경계선, 영토, 창 10: 19)이 있다.
* 한국어의 ‘나가라’, ‘나그네’와 히브리어의 ‘나가라’
: 한국에는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이 아버지 말을 잘 듣지 않을 때에 자기의 아들딸들에게 ‘나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집을 떠나 있는 사람을 ‘나그네’라 한다. 히브리어는 이방인을 י(나그리/이방인, 신 14:21, 15:3), ר(네가르/이방인, 삼하 22:45, 46)라 한다.
기본형 ר(게르/나그네, 출 23:12)에 비추어 보면 ‘나그리, 나그네’의 ‘나’는 영속적인 의미와 더불어 오랜 동안의 나그네 생활을 의미 한다. 이러한 접두 형태의 ‘나’가 빠지고 ‘그리고’ 뜻의 “베”가 덧붙은 ר(베하게르/나그네, 출 23:12), רוֹג(마고르/나그네, 창 47:9), םי(게림/나그네, 출 22:21, 23:9)의 예가 있다. 한국엗 ‘그네’가 있으며 특히 히브리어 ‘게림’은 신라시대 경주지방을 ‘계림’이라 한 것과 연관하여서도 ‘나그네의 무리’라는 뜻이 됨을 주목하게 된다. 이 나그네는 그냥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무리라는 뜻이 있다.
더구나 나그네의 기본형 ר(게르) 앞의 ‘나’가 지닌 영속적인 의미는 오렛 동안의 나그네 생활을 말한다. 이러한 접두 형태의 ‘나’가 빠지고 ‘그리고’ 뜻의 ‘베’와 ‘관사’ ‘하’가 덧붙은 ר(베하게르/나그네가, 출 23:12), רוֹג(마고르/나그네, 창 47:9), םי(게림/나그네, 출 22:21, 23:9)의 예 또한 히브리어 글자 처음에 오는 ה(헤/하나님으로 하여 숨을 쉬는)・מ(멤/하나님으로부터 온)・נ(누/하나님의 영원하심)가 붙으면서 나그네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나그네나 이방인을 말한다.
히브리어 글자는 처음의 ה(헤/하나님으로 하여 숨을 쉬는)・מ(멤/하나님으로부터 온)・נ(누/하나님의 영원하심)등이 붙으면서 가령 나그네라 할지라도 앞의 ‘나’는 접두사가 되면서 본래의 주인인 하나님의 뜻에 따른 나그네나 이방인을 말한다.
* ‘나아가서’와 ‘나아가스’
: 한국어에는 ‘나아가서’라는 말이 있다. 가까이 근접하는 의미를 가진다. 히브리어에는 ‘나아가스’ שׁ(나아가스/καί προσεγγίσας 나아가서, 신 20: 2)가 있다.
* ‘다 나타났다’의 ‘다 나타’와 ‘타나타,’
: 한국어에는 ‘나타났다’는 말이 있다. 성서에 ‘나타’ ח(나타/나타나고) 기본형은 문장 중에서 ‘타나타’(타나타아흐/뜨고, 출 29:17)가 있다. 또한 ‘나탄’ ן(나탄)은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어 ‘나타났다’로 되어 있다.
* ‘놋’과 ‘놋’
: 한국에서는 ‘놋’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놋’ת(놋/놋, 출 30:18)이 있다.
* ‘내다버려’와 ‘레다부니’
: 한국말에는 ‘내다버려’가 있다. 물건을 버리거나 하는 뜻으로 소외시키는 의미인데 히브리어에는 ‘레다부니’ י(레다푸니/나를 핍박하오니, 버리니, 시 119:86, 161)가 있다. 기본형은 ף(라다프)이다.
* ‘내다봐’와 ‘내다봐’
: 한국말에는 앞을 ‘내다봐’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내다봐’ ה(네다봐/즐거이 드림, 출 35:29)가 있다. ב(베히테나데브/즐거이 헌신, 삿 5:2)의 경우 앞에 붙는 (베히테)는 모두 문법상 붙은 과거형 (테), (히), 베(베/하나님 안)일 뿐 ב(나데하/즐거이, 삿 5:2) 본래 언어는 헌신하는 일이다. 따라서 앞을 내다 보는 일은 헌신에서 이루어 진다.
한국말에는 '나덴다, 왜 그렇게 나데느냐‘가 있다. 곧 ’유난을 떤다‘이다. 이러한 말과 연결은 하나님께 즐거이 드리거나 헌신 할 때에만 성경에서 םי(함미테나데빔/즐거이 헌신, 삿 5:9)이다. 역시 문법적 요소들, 전자, םי(복수)과 앞부분의 (함미테)를 뺀 (나데비/즐거이 헌신)’이다. 헌신 י(히티테나데티/ 즐거이 헌신)에서도 후자 י(티/종결형 어미)와 앞부분의 (히테)의 정관사 밑 시제를 빼면 (나데베/즐거이 헌신), 곧 ‘나데비’이다.
* ‘넓다’와 히브리어의 ‘라하브’
: 한국어에는 ‘넓다’가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ב(라하브)가 있다. '넓히다':- 넓게하다, 공간을 만들다, 넓게 (터지게) 만들다, 넓다, 넓어지다, 크다, 커지다, 광대한 목초지, 확장하다이다.
* ‘네게’와 ‘레그’
: 한국말에는 ‘네게’라는 말이 있다. 이 2인칭 지칭은 히브리어에서도 그대로 레그 (레그/네게)가 있다. 그 예는 (바야아킬레카/네게 먹이신 것은, 신 8: 3)・네게 먹이셨나니 (함마아킬레카/네게 먹이셨나니, 신 8: 16).
* ‘내가 할 일’과 ‘나할’
: 한국에서 자기 것을 순수한 한국말로 ‘내해’(나의 것)라고 하고 ‘나’라는 사람이 ‘할’일이 있다고 한다. 성서의 ‘나할’ ל(나할)은 유업, 기업의 뜻이다. 이 '유업‘은 동적 이미지로서 숨쉬게 해 주는 일이다. 이 ‘내해’의 뜻인 ‘나할’은 ל(할)에서 (헤트)는 지붕, 울타리이어서 하나님 안에서 할 일을 목적 ל(라메드/....하기 위하여)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일을 하여야 하는 사람이다. 시냇물 ל(나할)의미이기도 하여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한자는 川(내)은 졸랑졸랑 부지런을 떨면 내것이 되는, 유업, 기업을 말한다.
* ‘놀라’와 히브리어의 두려움 ‘노라’
: 한국말에는 ‘놀라’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두려움의 의미로 ‘노라’ אוֹנ(노라/두렵게, 습 2:11)가 있다. 기본형은 א(야레)이며 '두려워하다'; 도덕적으로 '경외하다'; 사역동사로 '깜짝 놀라게 하다':- 놀라게 하다, 두렵다(두렵게 하다)이다. 역시 접두사 형태의 וֹנ(노)가 붙음으로써 하나님이 두렵게 하여 ‘놀라’게 하신다의 뜻이다.
* ‘니나누’의 ‘....나누’와 ‘나누’
: 한국어에는 노래의 후렴으로 ‘니나누 니나누 늴리리야’야 한다. 이 때 ‘,,,누’가 히브리어에서 발견된다. 다름 아닌 ‘우리’라는 뜻이다. 접미사 형태 ‘וּנ...’(누/우리, 창 43:2, 3, 4, 7, 8, 21, 22 등)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어와 같은 히브리어가 많은 것에 맞춘다면 한국의 ‘니나누’의 ‘니’는 너이고 ‘나’는 히브리어로 י(아니/나)이므로 한국어에 맞춘다면 ‘니나누’는 너와 나와 우리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후렴구의 ‘니나니’는 너와 나와 우리가 어울려 한 마당이 됨을 말한다. 더구나 ‘וּנ...’(누/우리)는 한국어의 ‘우리’가 ‘וּנ...’(누)의 변형임을 유추하게 된다.
* ‘돌아’와 히브리어 ‘토라’
: 한국어에는 ‘돌아 가’의 ‘돌아’라는 말이 있다.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 있는데 히브리어의 ‘토라’ ה(토라/법, 출 12:49)는 발음과 의미는 한국어에서 많이 쓰이는 ‘돌아간다’의 ‘돌아’에 맞출 수 있다. 당연히 돌아가야 하는 법칙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하고 첫사랑에게 ‘돌아’간다, 본 아내에게 ‘돌아’간다라는 말이 회자한다.
* ‘돋아’와 히브리어의 ‘다드’
: 한국말에는 ‘돋아’라는 말은 ‘해가 돋아,’ ‘싹이 돋아’에서 찾아진.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는 이 ‘돋아’가 다윋과 관련된다. 다윗은 사실 ‘다윋’이고 ‘다비드’이기도 하다. 기본형이 ד(다드/젖꼭지)이고 י(다데하/품, 돋아, 잠 5:19)・י(다데/가슴, 돋아, 겔 23:3)가 있다. ‘가슴에 사랑이 돋아’라는 시적 문구가 있을 수 있다.
* ‘대대로’와 히브리어 ‘라도르 바도르’
: 한국어에는 ‘대대로’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의 오래라는 말과 대대로라는 말이 복합되기도 하고 따로따로 쓰이기도 한다. 히브리어에는 רוֹד רוֹד(도르 도르/대대로, 에 9:28)가 기본형이면서 다양하게 변형을 가진다.
① רוֹד רוֹד(도르 바도르/대대, 에 9:28)
② רוֹד רוֹדּ(레도르 바도르/대대로, 사 34: 17)
③ ר ר םוֹע(레오람 레도르 바도르/대대로 영원히, 시 79: 13)
④ ם(레도로탐/대대로 지키라, 창 17: 9/대대로, 출 12: 42, 27: 21, 출 30: 8, 10, 21, 31: 16; 레 17: 7; 대상 8: 28/그들의 대대로, 민 15: 38)
⑤ םי(레도도테켐/대대로, 창 17: 12; 출 12: 17; 레 29: 42/너희 대대로, 출 16: 33, 민 35: 29)
⑥ םוֹ(레토레도템/대대로, 대상 8: 28, 9: 34)
⑦ םי םוֹע(오람 레도도테켐/출 40: 15; 레 3: 17, 7: 36, 23: 13, 14, 21, 41/너희 대대로 영원한, 레 24: 3/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민 18: 23)
⑧ ם םוֹע(오람 레도도탐/대대로 영영히, 출 40: 15)
따라서 이 대대로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 돋아’라는 뜻으로 하여, 곧 가슴 한 복판에 있는 젖꼭지가 돋아 있는 의미이기 때문에 사랑이 새로 돋아나는 의미이다.
한국어에는 같은 말이나 긴 말은 생략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 ‘도르도르’의 반복 또한 ‘대대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두다’와 히브리어 ‘두다이’
: 한국어에는 어디에 무엇을 ‘두다’가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합한체를 ‘두다이’ י(두다이)라 한다.
* ‘맞닥드린다’의 ‘맞닥’과 ‘맏닫드’
: 한국어에는 누구와 가깝게 만남을 ‘맞닺는다’ 혹은 ‘맞닥드린다’가 있다. 히브리어에는 ‘맏다드’가 있다. ד(맏다드)는 측량(민 35:5)·원근을 잴(신 21:2), 척량(겔 40:20, 24, 41:3 등등)의 의미가 있다.
히브리어의 성격상 앞 ד의 (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미가 있어서 ד의 를 ד(다드)는 가슴과 가슴을 마주한 사랑의 의미가 있어서 바로 다윗의 이름이기도 하다. 애칭으로는 ‘데디’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마음이 곧 척량이 되며 재는 의미가 된다. 한국어에는 가슴을 ‘맞닥드려’가 있다.
* ‘마땅히’와 히브리어 ‘마타이’
: 한국어에는 ‘마땅히’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마타이’י(마타이)가 있다. '넓히다'는 의미이다.
* ‘....마라’와 히브리어 ‘마라’
: 한국어에는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할 때 구두어로 ‘마라’ ה(마아라아)이다. ‘마라’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뜻이며 쓴 물의 의미이다. ר(마르/쓴, 사 5: 20) 뜻은 쓴 물 םי י(메 함마림/쓴 물을, 민 5: 18, 쓴 물의 םי י(밈메 함마림/쓴 물의, 민 5: 18)의 예이다.
* ‘마시게’와 히브리어의 ‘마시게’와 ‘마시킴’
: 한국에서는 술 등을 상대방에게 권유하며 ‘마시게’ ‘마시게.. 후’라고 말을 하고 또 마시기 대회 등이 있다. 히브리 성경에서도 ‘마시게’ ה(마시게/술 맡은, 창 40:1) 와 ה(마시게/술 맡은, 창 40:5), 마시게후 וּה(마시게후/술 맡은 자, 창 40:13)이 있고, 또 마시킴 םי(마시킴/술 맡은 자, 창 40:2, 9, 20, 21, 23, 41:9)이 있다.
* ‘맞아’와 ‘마싸’
: 한국말에는 머리가 돌에 ‘맞아’ 다쳤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를 ‘마사’ א(맛싸/경고)라 하였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온 경고일 때만 ‘마싸이다.
* ‘맞춤’과 ‘미쑤임’
: 한국어에는 ‘맞춤’이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םי(미수힘/바른, 출 29:2)이 있다. 곧 몸에 무엇을 바른다는 의미가 ח(마아쏴/바른, 출 29:2)이다. 한국에서 익숙한 외래어 맛사아지가 있다.
* ‘모자’와 ‘모자’
: 한국어에는 무엇에 ‘맞추어’ 혹은 ‘모자’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맞추어’를 ‘모자’ א(모자/맞추어, 신 19:7)라고 한다. ‘입었고(에 5:8) 뜻을 지닌다. 알다, 살피다, 베푸다의 뜻이 있는바 내가 남에게 맞추어 사는 일로 은혜를 입고 사는 일을 말한다. 곧 덮어 쓴다는 의미이다. 성경에서는 א(모자)가 기본형으로 ן יא(헨 모자티/은혜를 입었고, 에 5:8) 등의 예가 있다.
* 어른을 ‘모시오, 메셔야’와 히브리어의 ‘모시오, 메시야’
: 한국은 어른을 잘 모시는 나라이다. 상대방에게 어른을 잘 모시오, 메셔야. 모셔야, 메시고 등의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יוֹמ(모시아으/구원자)가 있다. 한 구원자יוֹמ(모시아으/구원자), 삿 3:9) ・ 한 구원자 יוֹמ(모시아으/구원자, 삿 3: 15)・ 구원자 יוֹמ(모시아으/구원자, 왕하 13:5)에서 찾아진다.
‘구원될 자들을 위하여’ יוֹמ(레모시아으/그들의 구원자를 위하여, 사 63: 8)에서 ‘....(레)는 목적성 의미인 접두형을 빼면 ‘모시아’가 된다.
* ‘맞불’과 ‘맙불’
: 한국어에는 ‘맞불을 놓는다’는 말이 있다. 성서에는 이 맞불
ל������(맙불/홍수, 범람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상에 대하여 그 대응책으로 맞불을 놓으신다. 반드시 죄악에 대하여서만 이 언어가 사용된 לוּב(람마불/하나님이 창일한 물을 위하여, 시 29: 11)은 ‘..ל’(라메드)의 목적격 접두어에 의해 하나님은 홍수를 주관하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경우이다.
* ‘맛좋다’와 ‘맛조타’
: 한국에서는 음식이 ‘맛좋다’라고 말을 한다. 히브리어에는 무교병을 ‘맞조타’הוֹצ(마조타/무교병)라고 한다. 그리고 יוֹ(미조오타이/계명, 출 16:28, 29:23)가 있다.
* ‘먹을’와 ‘마글’
: 한국에서는 음식을 ‘먹을’일이 있다고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마글 ל(마글/먹기에, 창 2:9), ל(메카콜/먹기에, 시 102:4)이 있다.
* 매우
: 한국어에는 ‘매우’ ‘아주 많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매우’는 히브리어에서도 ‘매우’ ‘심하게’의 뜻으로 ‘메오드’가 있다. 한국어에는 공간을 가득 ‘메우다’가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ד ד(메오드 메오드/아주 많은, 창 7: 19, 30:43)가 있다.
메오드 ד(메오드)의 수치는 100이며 이 2회 리듬은 최상급 תוֹא(메오트/최상급의 비, 아주 많음)의 분량이다. 이스마엘에게는 같은 용어가 제시되면서(창 17: 20)도 축복이 없다.
* ‘마’와 '마’
: 한국에서는 상대방과 말을 할 때 ‘마...’ 라고 시작할 때가 흔하다. 성경에서는 이 무엇을 ‘마’ ה(마/이름이 무엇이냐, 창 32: 27)・마 ה(마/무엇을, 창 37: 15)・마 ה(마/무엇, ה, 수 15: 18)・마 ה(마/무엇을, 왕상 3: 5, 대하 1: 7)・ 마 ה(마/무엇) 357회・마 ה(마/무엇을) 138회・ 마 ה(마/무엇, 대상 3: 5; 대하 1: 7)가 있다.
* ‘모아다’와 ‘모에드’
: 한국어에 사람들을 ‘모아다’ 회의를 한다라고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회(會)를 ‘모에드’ דוֹמ(모에드/회, 출 29:4, 30, 30:26 등)라 한다.
* 땅 속에 ‘묻다’와 무트
: 한국어에는 사람을 땅 속에 ‘묻는다’고 한다. 히브리어에서의 무트 תוּמ(무트)는 죽는다는 뜻이다.
* ‘밑져봐야’와 ‘미쯔베아흐’
: 한국어에는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속언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미쯔바에흐’ (미쯔바에흐/단, 출 29:18, 20, 21, 25 등)가 있다.
* ‘밑에’와 ‘미타’
: 한국말에는 ‘밑에’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도 ‘미타’ ת(밑타트/아래, 창 35:8)가 있다.
* ‘한 다발’의 ‘다발’과 ‘다바르’
: 한국어에는 한 묶음을 통 털어 ‘한 다발’이라 한다. 상대방에게 꽃을 ‘한 다발’ 선물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다바르’ ר(창 15: 4; 17: 22, 23, 18: 30, 32)는 말씀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이 복 받는 이유가 말씀을 상대방에게 한 묶음 드린다고 하는 의미로서 한 다발의 말씀을 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유명한 여 선지자 드보라(삿 4: 4, 5, 6, 9, 10, 14, 5: 1, 7, 12, 15) 또한 말씀을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그것도 바락이라고 하는 사람과 나갔다. 바락 또한 한국에서 익숙한 벼락 또한 복의 의미이고 보면 복이 되는 말씀을 들고 갔기 때문에 전쟁에서 여서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 ‘벼락’과 ‘번개’
: 한국어에는 벼락이라는 말이 있다. 무지한 어머니들은 딸들을 향하여 경상북도 영주의 발음으로 ‘베라먹을 년’이 있는데 ‘벼락을 먹을 년’이며 ‘벼락을 맞아서 죽을 년’의 속어이다. 사실은 복을 받는 다는 의미가 있는 아이러니의 속언이다. 기본형 ק(바락/번개, 번쩍이는 칼, 삼하 22:15/1300)을 가진 이 벼락은 번개 םי(베라킴/벼락, 출 19:16; 시 18:15, 77:19)로 해석되어 졌다. 성경은 우박 ק(바락/우박, 시 18:14)으로도 해석되어 졌다.
*‘바라’와 ‘바라’
: 한국말에는 무엇을 ‘바라’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바라’ א������(바라)는 그가 창조했다(창 1:1)・ 개척(창 5:2; 수 17:18)・ 살찌게 했다(삼상 2:29)・ 지시했다(사 45:7; 겔 21:19)・ 지었다(겔 28:3)의 뜻이다.
한국말의 ‘바라본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바라본다’이다. 한국어의 ‘바다’ 또한 원래의 고어는 ‘바라’이고 靑山別曲에서 찾아진다.
* ‘바리바리’의 ‘바리’와 ‘바리’
: 한국말에는 물건을 많이 싣고 온다는 뜻으로 ‘바리바리’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바리’ אי(바리/살진, 창 41:20) 기본형을 가진 תי(하베리오트/살진, 창 41:20)가 있다. 처음의 (하)는 한국말에 '하 많아서‘의 ‘하..’와 같은 의미의 접두사이기 때문에 나머지 뒷말은 한국어와 같다.
*‘밭’과 ‘바트’
: 한국말에는 곡식을 심어 먹을 수 있는 땅을 밭이라고 한다. 히브리어에도 밭 ת(바트/집, 창 7: 1, 12: 1, 14, 14: 14 등등)가 있다. 한국에서 이 밭은 딸의 의미나 여자의 의미로 쓰이는데 성경에서도 딸을 밭 -ת(밭/딸, 창 30:21; 출 2:7; 레 18:11, 22:12; 대상 2:49)이라 한다.
* ‘바싹 말라’와 ‘몸을 구부려’
: 한국어에는 ‘바싹 말라’와 ‘몸을 구부려’가 있다. 히브리어에는 바싸르 ר(바사르/살, 창 2: 23)이 있고 몸 ףוּג(구프/몸)가 있다.
* ‘뱃살’과 ‘뱃사르’
: 한국말에는 ‘배살’이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의 ‘뱃사르’ ר(벳사르/고기, 출 29:14)가 있다. 이 때 ‘(사)’는 ‘솨’가 아닌 밝은 ‘사’이다.
* ‘사나’와 솨나
: 한국어에는 “왜 사나”란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 ‘솨나 솨나’ ה ה(솨나 솨나/매년에, 해, 신 14: 22, 15:12; 에 9:21, 27)로 2회 반복된다. 1회만 사용될 경우의 ה(솨나/ 세, 창 5:3, 5, 8, 9, 10, 11, 12, 13, 14, 15 등)가 있다.
* 불 살라버리고의 ‘살라버...’와 ‘사르프’
: 한국어에는 불 살라버린다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사르프’ ף(사르프/불사르고, 출 29:14)와 וּפ(사레푸/사르고, 수 6:24)・ף ף(사아라프 바이세로프/불 살라버리고..사르고, 왕하 25:9)・וּפ(베사레푸/사르고, 겔 16:41)가 있다. 물론 앞의 접두사 (바)나 (베)는 이 단어와는 관련이 없는 접두사이므로 실제발음 ‘사르프’이다.
* ‘삼아’
: 한국어에는 ‘짚신 삼아’, ‘아들 삼아’ 등의 ‘....삼아’가 있다. 히브리어에는 사마 ‘ע’(사마아/듣다, 신 13: 9)가 있다.
*불 ‘살라 버린다’와 히브리어의 ‘살라프’
: 한국어에 불을 ‘살라 버린다’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불을 살라 버릴 때의 기본형 사라프 ף(사라프/ 불 살라, 신 13: 17)가 있다. 문장 중에서는 ת(브사라프타/불 살라, 신 13: 17)이다.
* ‘새벽’과 히브리어의 ‘네쉐프’
: 한국어의 ‘새벽’은 히브리어에서는 ‘네쉐프’ ף(네쉐프/여명, 시 119:147)이다. 본래 의미는 '미풍', 즉 (함축적으로) '황혼' (저녁에 미풍이 불 때):- 어두운, 날이 새다(아침), 밤, 여명, )어스름, 황혼, 여명 즉 아침, 저녁의 미풍의 뜻이다.
* ‘세어봐’와 ‘쉐바’
: 한국말에는 무엇을 상대방에게 ‘세어봐’라고 말 하는 경우가 있다. 히브리어에는 쉐바 솨나 ה ע(쉐바 솨나)/매 칠년, 신 15:1)을 기본형으로 하는 쉐바 솨님 םי-ע(쉐바- 솨님/매 칠년, 신 15:1)이 있다.
* ‘시바’와 일곱
: ‘시바’ ה(쉬브아/일곱, 창 7:1, 4, )는 안식의 의미로 7일 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감사함으로 하루를 안식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이다. 성경 창세기 7장은 이 ‘씨바’를 ‘일곱씩’이라는 뜻으로 ה ה(쉬브아 쉬브아/일곱씩, 창 7:2, 3)가 있다. 이 ‘쉬바’는 ‘일곱’ 의미 외에도 실컷 먹이는 의미가 있다.
* ‘소리’와 ‘코리’
: 한국어에는 ‘소리’가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코리’ ילוֹק(코리/소리, 시 119:149)라고 한다. 기본형은 콜 לוֹק(콜/소리, 출 24:3)이다. ‘소리’가 있다. 목소리, 소리, 선언하다, ...노래하다, 소리, ....천둥소리, 목소리, .....고함치다이다.
* ‘씻김’과 ‘씻김 굿’
: 한국에서는 민속으로 ‘씻김 굿’이 있다. 이 ‘씻김’은 씻는다는 의미가 있다. 히브리어에 ‘씻김’ םי(씻김/찌꺼기, 이사하다, 시 119:119)이 있다. 기본형은 גי(씨그/뒤돌아 가다, 변화, 이사) 등의 의미가 있다.
*한국어의 ‘수비’녀겨(훈민정음)와 ‘수부’
: 한국어에는 ‘쉽다, 수이’라는 말이 있다. 한글창제반포문에 나오는 ‘수븨 녀겨’에서 ‘수븨’이이다. 히브리어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수부 ב(수부/돌아오다, 창 18:14)라 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여있더라도 악에서 돌아서기만 하는 아주 ‘쉬운’ 일이다.
*한국어의 ‘세세..’와 히브리어의 ‘쉐쉐’
: 한국노래에 ‘세세세... 아침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라는 동요가 있다. 히브리어어는 기본형 שׁישׂ 또는 שׂי (시쉬 또는 시시/기뻐날뛰다, 7797) 또는 שׂוֹשׂ(소스/즐거이, 시 119:162) 기본형을 가지는 שׁוּשׂ(수스/즐거이, 시 119:162)가 있다.
세마포와 노래는 흰 양털의 의미를 지니는 세마포와 기쁨의미가 같이 포함되면서 흰 베 옷 같은 의미가 되면서 백합화와 같은 이미지를 지닌다.
* ‘아유...’와 레아흐, 혹은 니호아흐’의 ‘..아흐’
: 한국어에서는 냄새가 향기롭게 날 때 ‘아유’ 혹은 ‘아으’라고 감탄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향기가 나는 내음을 모두 ‘레아흐 니호아흐’ וֹחי י(레아흐 니호아흐/향기로운 냄새, 출 29:25)라고 하여 낱말 끝에 ‘.....아흐......아흐 ’라고 한다.
*한국어의 ‘아이 벤’과 히브리어의 ‘벤’
: 한국어에서는 아이를 가졌을 때 아이를 뱄다고 한다.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성경의 아들의 기본형 ן ן ן(벤 벤 벤/아들 아들 아들)이다. 네 아들과 네 손자 -ןוּ וּ(우빈네하 우 벤-빈네하/네 아들과 네 손자로 이어진다. 방법은 명령 ה(하미쯔바/명령, 신 1: 1)과 규례 םי(하후킴/규례, 신 1: 1)와 법도 םי(베함미스파팀/법도, 신 1: 1)를 잘 가르치면 아들들이 이어진다.
*‘아가리’와 ‘아칼’:
:한국인들의 속어 중 ‘아가리’가 있다. 성서는 아칼 לאָ(아칼/먹이, 창 3:11, 18, 22, 14:24, 27:10, 31:38, 40, 37:20, 23, 40:19, 47:22; 출 10:5 등 781회나 음식과 관련된다. 아칼 לאַ(아칼/먹다, 먹어버리다, 단 3:8, 4: 30, 33, 6:24, 25, 7:5, 7:7, 19)이 9회・오켈 ל(오켈/양식, 식물, 먹이, 창 14:11, 41:35, 36, 48, 42:7, 10, 43:2, 4, 20)등 42회・האָ(오클라/양식, 식물, 연료, 창 1:20, 30, 6:21, 9:3; 출 16:15; 레위, 11:39, 25:; 렘 12:9; 겔 15:4, 6, 21:32, 37, 23:37, 29:5, 34:5, 8, 10, 35:12, 39:4) 19회・הי(아킬라/식물, 음식, 고기, 왕상 19:8) 1회로 먹이와 관련하여서는 총 843회 사용되었다. 또한 변형된 형태와 관련한다면 더 상당한 회수로 이 음식과 관련하여 예시되고 있다.
떡을 먹고 ם וּלאי ם ל(레에칼 라헴 바이아켈루 라헴/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창 31: 54)・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ם ל(레아콜 레헴/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출 16: 8)・네게 먹이신 것은 (바야아킬레카/네게 먹이신 것은, 신 8: 3)・네게 먹이셨나니 (함마아킬레카/네게 먹이셨나니, 신 8: 16)・먹이니 וּלא(바이아켈루/먹이니, 삿 19: 21)・먹이고 לא(베요아칼/먹이고, 왕상 13: 18)・먹이시며 ל(레아콜/먹이시며, 시 78: 24)・먹이시며 ם(하아카레탐/먹이시며, 시 80: 5)・먹이며 וּהי(바야아키레후/저희에게 먹이며, 시 81: 16)에서 그 일례를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먹었다가 도로 나오는 ‘토할라케’라는 발음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토아클루 וּלא(토아클루/먹지, 신 14: 10/ 먹으려니와, 신 14: 11/ 너희가 먹을찌니라, 신 14: 20)가 있다.
특히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들을 불사르고의 뜻으로 이 아칼은 동일하게 לא(바토칼/사르고, 대하 7:1; 사 44:19)・האָ(아켈라/사르고, 겔 15:4)이 제시된다.
* ‘담’이 들었다와 히브리어의 ‘담’ ם(담)
: 한국어에서는 몸속에서 피가 잘 돌이 않을 때에 ‘담’이 들었다고 하는 속언이 있다. 병 증상의 일부를 말할 때에 담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아담의 담 ם(담/피, 출 12:7; 신 19:6, 13, 21:7)은 피이다. 한국에서의 ‘담’이 들었다는 몸속에서 어혈이 일어나 뭉치어 아픔의 증상을 가지는 것이다.
* 나무에 ‘달리니’아 히브리어의 ‘달라
: 한국어에서는 나무에 ‘달리니’라고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나무에 매여 ‘달리니’를 ‘달라’ ה(달라/달리니, 창 40:19, 22, 에 9:14)라고 한다.
* ‘아비’와 ‘아비’
: 한국말에서 가장 친숙한 말은 아버지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속어는 ‘아비’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 ‘아비’가 무려 656회나 있으며 ‘아브’가 있다. 뜻은 아버지, 양육자, 선조, 조상, 충고자 등이다.
* ‘아래’와 ‘에레쯔’
: 한국어에 ‘아래’와 ‘아래쪽’이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땅을 에레쯔 ץ(에레쯔/땅)라 한다.
* ‘아아싸’와 ‘아아싸
: 한국말에는 다 같이 잘 해보자는 뜻으로 서로 손 벽을 마주치면서 ‘아아싸’라 한다. 성경에서는 이 ‘아아싸’는 하나님이 '만드셨다'와 '행하신다‘가 ‘아아싸’ ה(아아싸/행하다, 만들다)이다. 이 ‘아아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힘의 뜻이 있어서 ‘그가 행하신’의 능동적 결과에 이에 수동적으로 받는 즐거움의 의미가 수반된다.
그 예들은 ה(아아싸/행하신, 신 3: 21・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ה(아아싸/행하시고, 애 2: 17)・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ה(아아싸/행하시는, 단 9: 14)・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האַ - ה(아세-아타아/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삿 10: 15)・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ה(아아싸/행하신, 수 24: 17)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을 알리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을 행하시는 의미로서 ה -ת(에트 엘르아아싸/행하시는 하나님, 대상 2: 39)은 처음 행하시는 일이다.
* 한국어 ‘올쏘’와 히브리어의 ‘오쎄’
: ‘아아싸’의 변형 ‘오쎄’가 있다. 한국어에서는 잘 하는 일에 찬송한다는 뜻으로 ‘올쏘’가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ה(오쎄/행하시며, 시 103: 6)・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ה(오쎄아/행하시는, 삼상 12: 16)・이를 행하시는 ה(오쎄아/행하시는, 암 9: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라 ה(오쎄/행하시느니라, 욥 9: 10)・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ה(오쎄/행하시느니라, 욥 37: 5)・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ה(오쎄/행하시는, 시 72: 18)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ה(오쎄/행하시리라, 사 10: 23)・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ה(베오쎄/행하시는, 시 86: 10, 136: 4)가 있다.
* 한국어 ‘오롯이’와 히브리어의 ‘오로트’
한국에는 땅에서 싹이 ‘오롯이’ 나왔다 한다. 히브리어에는 이삭이 나오고를 오로트 תוֹל(오로트/나오고, 창 41:5)라 한다.
* ‘아싸리’와 ‘아쉐르’
: 한국어에는 ‘아싸리 그렇게 하고 말지,’ ‘아싸리 그렇게 하자’는 사투리가 있다. 히브리어에서 ‘아싸르’ ר(아쉐르/ 관계대명사)는 ‘아싸르 아싸르’ ר ר(아싸르 아싸르/마땅히 너는 십일조를, 신 14: 22)의 기본형을 가진 ר ר(아세르 테아세르/마땅히 너는 십일조를, 신 14: 22)가 있다. 십일조를 내야하는 삶의 지혜를 제시한다.
* “아우”와 “아아흐”
:한국에서는 동생을 ‘아우’라고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형제 즉 아우나 형, 그리고 동생의 뜻이 아아흐 חאָ(아아흐/형제, 동생)이다. 한국에서의 ‘아우’ 라고 발음할 때 입을 크게 벌려 ‘아아우’하는 것과 같다. 성경본문에는 יאָ(아히이카/형제에게, 신 15:2, 7, 9), וי(에하이으/형제에게, 에 10:3)가 있다.
* ‘아프다’와 ‘아프타’
: 한국어에서는 몸이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아하브타 אָ(아프타/사랑하여, 창 22: 2; 신 11: 1)가 있다. 한국어에는 배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는 배아프다 אָ(베아프타/사랑하여, 창 22: 2; ; 레위 19: 18; 신 6: 5, 11: 1)가 있다. 이것은 ‘사랑하여’에 ‘그리고’라는 연결어가 붙어 ‘배아프다’가 되었다. 한국어에서는 매우 아프다가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메 아프다’ תאָ(메아페트/사랑하심을 인하여, 신 7: 8)가 있다.
히브리어의 ‘아파’는 사랑의 의미인 ‘아파’ (아파/곧 너를 사랑하시고, 신 7: 13)가 있다. 기본형은 아하브 באָ(아하브/사랑, 창 37: 3, 4; 신 4: 37, 11: 1)이다. האַ(아하바/사랑)은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성경 사전은 제시한다.
* 한국어의 ‘아나’와 히브리어의 ‘아나’
: 한국말에는 ‘아나’ 농부야 말들어의 ‘아나’ 노래가 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무엇을 줄 때의 속어로 ‘아나’ 받아라고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나의 의미 א(아나아)와 ה(아나아)가 있다. 성경에서 일인칭은 하나님 한 분이다. 그 의미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의미이다.
한국 경상도 말에 ‘아나’ 받아라‘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도 ‘아나’ האָ(아나/577/오 당신께 구합니다. 구원, 욘 1: 14)가 있다. 4990에서 ה(나/제발 바라건데)는 ‘바라건데, 제발’의 뜻이 있다. 동시에 ח(아나아/응답하여, 출 24:3)가 또 있다. 두 팔로 상대방을 안아 보는 몸짓은 구원의 의미이다. 이처럼 상대방을 향하여 사랑으로만 무엇을 전달하여 주는 내용이 담길 때에 상대방을 향하여 ‘아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에는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을 ‘안아’준다라고 한다.
* 한국말에 ‘아따’ ‘에따’ 받아라
:한국어에는 상대방을 향하여 물건을 전해주려 할 때 ‘아따’ ‘에따 받아라’ 한다. 히브리어에는 ‘아따’ האַ(았다/주께서 말씀하시니, 시 119:151)가 있다. 이 기본형은 에트’ ת(에트/전체)이어서 상대방을 향하여 처음과 끝을 온전히 전해주시는 의믹 있다.
* 한국노래의 후렴 ‘에헤야’와 ‘에흐예’
: 한국인의 옛 노래에는 반드시 ‘에헤야’라는 후렴구가 붙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 이 언어가 발견된다. ‘에흐예’의 어근은 ה(하야)이다. 양쪽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숨을 쉬게 한다는 뜻을 지닌다. 여호와의 구두어 에흐예 ה(에흐예)는 (알레프/시작)가 여호와 הה(여호와)의 (요드/하나님의 손)까지 가는 동적 상태로 사랑이 주제가 된다. ה(에흐예)의 기본형은 ה(하야/존재하게 하다) 동사이다.
* ‘자기야’의 ‘...야’와 ‘누나야’의 ‘ ...야’
: 한국말에서는 ‘누나’를 부를 때 ‘누나야’라고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자기야’라고 하며 소월의 시에서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의 김소월 시가 있다. 이 때의 ‘...야’의 특징은 히브리어에서도 ‘히스기야,’ ‘엘리야,’ ‘에레미야’ 등등이 있다. 이 (야)는 여호와의 약자이며 하나님의 손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에 끝말에 ‘...누나’를 붙이기도 한다.
* ‘예쁘다’와 히브리어의 ‘예프트’
1. : 한국어에는 아름다운 대상을 보면서 ‘예뻐’라고 한다. 히브리어에서 아름답다는 말의 기본형이 י(예피/아리따움)⦁예페’ ה(예페/아름답다)⦁ה(야페/아름다운, 신 21:11)이다. 문장 중에서는 ‘예포트’ ת(예포트/아름답고, 창 41:4)가 있다. הּ(요파/그 아리따음, 애 1:11)도 있다. 이 ‘예쁘다’는 또 기본형 ה(파아타아)일 경우 미혹당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예쁘테 ה(예쁘테/미혹, 신 11: 16)로 한다. 아름다운 여자를 ‘예파타 ֵת(예파타/예쁘다, 아름다운, 신 21:11)이라 한다. 하나님의 문법은 반드시 앞에 하나님의 의미가 있는 ‘예’를 넣어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시작할 때이고 그 때의 아름다움은 입으로 말 할 때를 아름다움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전할 때에 예쁘다는 뜻이 있게 된다.
* ‘오냐’와 히브리어의 ‘오냐’
: 한국말에 ‘오냐’라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요나가 처음 탄 배 이름이 ה(오니야/배, 1: 3; 사 43: 11)이다. 오니야는 만나다, 접근하다의 뜻을 가진다. האָ(아아나/나)와 אאָ(아아나), 그리고 האַ(아하바아), באַ(아하브), באַ(아헤브) 모두 여호와의 사랑의 의미를 내포한다. 나의 의미 א(아나아)나 ה(아나아) 모두 또한 여호와 자신을 말하는 나를 지칭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지닌다.
이 요나가 밑층으로 내려간 배는 기본형 세피나 הי(세피나/배, 욘 1: 5)이다. 똑 같은 배인데도 성서는 윗층을 배 ה(오니야/배, 욘 1: 3)라 하고 내려갔을 때를 הי(하스피나/그 배, 욘 1: 5)라 하고 있다. 이 배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의미를 지녔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의 배이다.
* ‘오라’와 히브리어의 ‘오라’
: 한국어에는 ‘오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도 ‘오라’ ח(오라흐, 시 119:101)가 있다. 자주 다니는 '도로'(길)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또한 '대상':- 방법, 길 등급, 여행자, 부대, 대로, 길, 소로이다. 길이 왜 존재하는 가를 성경은 가라는 길이 아닌 오라는 길이라는 뜻이다.
* ‘오래’와 ‘오람’ 영원히, 오래
: 한국어에는 ‘오래’라는 말이 있다. 옛날 오래전부터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에는 ‘오람’ םוֹע(오람/영원히, 오래, 신 13: 17) 등등의 언어와 유사하다. 모두 영원히 간다는 의미와 순수한 한국의 말로는 ‘오래 오래’라고 한다.
* ‘올라’와 ‘올라’
: 한국어에는 산에 ‘올라’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도 같은 뜻으로 ה(올라/올라)가 있다. 히브리어에서 ‘올라’ ה(올라/번제, 출 29)는 잎사귀(창 3:7, 8:11; 시 13; 렘 8:13)이고 번제의 의미가 있다.
그 예는 올라 ה(올라/올라, , 창 19: 15; 레 1: 3; 출, 24:9; 민 28: 3, 6 , 민 29: 2, 8)에서이다. 잎사귀는 וּה(베올레후/잎사귀, 시 1: 3)・ה(베하올레/그 잎사귀가, 렘 8: 13)・ה(레올라/번제로, 창 22: 2; 레 1: 3)의 접두사가 붙은 ‘올라’이다. 그리고 ה(알레/잎사귀, 창 2: 6, 8: 11)가 있다. 올라 ה(올라/위, 번제, 민 20: 28, 신 12: 13)에서 번제는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감을 의미한다.
* ‘오르’와 ‘오르’
: 한국어에는 ‘오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는 ‘오르’ רוֹא(오르/빛, 밝힘, 계몽, 욥 18: 5, 33: 30)・רוּא(우르/불꽃, 빛, 동방, 사 31: 9, 50: 11, 겔 5: 2)이 있다. 그리고 복수로서 םיוּא (우림/밝히는 사역, 대제사장의 흉패 안에 넣는, 출 28: 30, 레 8: 8)이 있다. 또한 글자 끝에 여호와의 뜻인 ה(야)가 붙은 הוּא(우리아/주는 나의 빛, 우리아, 삼하 11: 3; 왕상 15: 5; 사 8: 2)가 있고 접두사 (라)가 붙은 רוֹא������(라오르/빛을 위하여, 창 1: 5)가 있다. 그 중요한 예로는 ל רוֹ-ת(에트-함마오르 하가돌 렘멤메셀레트 하욤/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창 1: 16)에서 빛이 점점 많아져서 밤을 햇빛비치는 낮을 만드는 세계를 뜻한다.
* ‘올랐다’와 ‘올라트’
: 한국어에는 산에 ‘올랐다’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올레트’ ת(올레트/came up, 나오고, 창 41:22)・ת(올라트/번제, 민 29: 6, 6)・노아가 홍수 후에 그에게 감사의 번제 ת(올로트/번제, 창 8: 20)・ת(올로트/번제로, 창 8: 20)가 있다.
* ‘오심,’과 ‘오심’
: 한국어에는 존경어가 발달 되어 있어서 상대방이 온다는 뜻을 ‘오심’이라는 존경어로 표시한다. 성경은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때는 םי(오심/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왕하 17:32)이라고 되어 있다.
* ‘요새’, ‘요사이’와 ‘요셉’
:한국어에는 인사말로 ‘요새 어떻게 지나십니까’와 ‘요사이는 어떠십니까?’라는 말이 있다. 이 뜻은 지금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가 내포된다.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히브리어에는 ‘요셉’ ףוֹי(요쎄프)은 물론 야곱의 아들, 예수님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은 직후 그를 무덤에 묻는 일을 맡는다와 더 한다는 의미와 계속하다, 능가하다, ×좀더, ×함께 모이다의 뜻을 지닌다.
* ‘우리’와 ‘우리야’
: 한국어에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가 ‘우리’이다. 히브리어에는 יוּע...יוּע...יוּע...יוּע(우리 우리....우리 우리/깰찌어다 깰찌어다...깰찌어다 깰찌어다, 삿 5: 12)도 있지만 היוּא(우리야)는 하나님이 빛을 주심의 뜻이다. ה(야/여호와의 준말, 약자)를 빼면 내가 잘났다고 뽐내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한국인들을 복 주시는 것은 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동생활의 뜻인 우리라는 말은 한국의 아주 보편성인 공동개념의 용어이다. 공동으로 힘을 합하는 뜻을 지닌다. 좋은 의미에서 협력(協力) 한다는 뜻이다.
* ‘웃음’과 ‘우스워’
: 한국말에는 ‘웃음’과 ‘우습다’, ‘우스워’ 등의 웃음과 관련된 말이 있다. 히브리어로의 주로 즐거움과 관련된 말이 즐거워함을 י(솨아수아이/즐거워함, 시 119:77, 92)로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고 있다. 이에 내가, 즉 히브리어 א/내가라는 말이 덧붙으면 ע(에스타아솨아/즐거워하며, 시 119:16)이다. 성경의 즐거움은 여섯째 날과 관련되는 여섯, 즉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즐거워하게 된다.
* ‘야호’와 ‘여호와’
: 한국인들은 산에 올라 ‘야호’하고 메아리를 친다. 성서에서는 여호와 הה(예흐바/여호와)이고 일반적 학술용어로는 야훼이다.
* 한국어의 ‘이레’ 곧 7일
: 한국에서는 7일을 ‘이레’라고 한다. 일곱은 םי ת(쉬브아트 암밈)도 이레, יי(하스비이이)도 이레(삼하 12: 18), םי ת(레쉬브아트 하얌임)도 이레(대상 9: 25), םי םי(솨부임 쉬브임)도 이레(단9: 24), םי(솨부임)도 이레( 단 9: 25), םי(하솨부임)도 이레(단 9: 26), וּב(하솨부아)도 이레(단 9: 27)로 번역되었다. 이레의 뜻은 7일을 의미하는데 한국에는 이 7일을 ‘이레’라고 한다.
여호와 이레 ה הה(예흐바 이레아/여호와 이레, 창 22: 14)의 경우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보살피는 뜻이고 보면 이 일곱 날 동안 하나님이 보살펴주심을 인지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ㅇ와 견주어 그 뜻을 음미하면 하나님이 7일 동안, 즉 평생동안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축복받는 민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늘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 ‘엄마’와 ‘임마,’ ‘에미,’ ‘이모’
: 한국의 경북 지방에서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부를 때 ‘엄마’라고 부른다. 이북 지방에서는 ‘에미나이’가 있다. 히브리어에는 ‘엠’ ם(엠/어미, 창 3:20; 출 2:8; 신 21:18, 22:6) 등이 있다. 그리고 한국의 이모가 히브리어에서는 어머니 וֹמאּ(이모/어머니, 창 43:29)가 있다. 한국어에는 어머니의 언니나 동생을 ‘이모’라고 한다. 요즈음은 일반 음식점에 가면 부르기 편한대로 ‘이모’라고 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히브리어에서는 모친 ‘이모’וֹמאּ(이모/어머니, 신 14: 21, 창 21:21, 24:67, 28:7)가 있다.
* ‘아비’와 ‘아비’
: 한국에서는 어른들이 손자 손녀 자기 아들을 말할 때에 ‘아비’라고 한다. 히브리어에도 ‘아비’ י(아비)라고 한다. 그중에 ‘아비가'만도 60회 이상이다.
* ‘아들’과 ‘아드’
: 한국어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들’이라 부른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이 유사한 발음 아드ד(아드/증거)가 있다.
* ‘애먹다’과 ‘애메트’
: 한국어말에는 ‘애먹었다’ 즉 고생을 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도 ‘애매트’ ת(애매트/έπ άληθείας 에프 알레데이아스애매트/참, true, 신 22:20)가 있다. 그 안에 ‘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 ‘곱’과 ‘야곱’
: 한국어에서는 곱빼기의 뜻, 2배의 뜻으로 ‘곱’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야곱 ב(야곱)이 있다. 그 의미가 더한다는 뜻이다.
* ‘에헤야’와 ‘에헤야’
: 한국노래에서 장단을 맞추는 말이나 후렴구에 ‘에헤야 에헤야’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똑 같은 발음이 히브리 성경에서 ‘에헤야’ ה(에헤예/나로 살게 하소서, 시 119:17)에 있다. 기본형은 ‘하야’ ה(하야/생명)이다. 다만 앞에 ‘나’라는 뜻인 (에/나)가 덧붙어서 ‘나로 살게 하소서’이다. 그럼으로 한국에서의 에헤야~ 하고 노래부를 때에 후렴을 넣는 것은 간절히 살고 싶은 마음이 표출된 것이다.
* 이삭과 이삭
: 한국어에는 ‘이삭’이라는 말이 아주 다양하게 사용된다. 히브리어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ק(이쩨하크/이삭, 창 22: 3)가 있다. 진행형 웃음의미이다. 아브라함이 절대자 그에게 절대 순종할 때에 그 보답으로 이삭(웃음)이 주어졌다. ק(이쯔하크/이삭)에서와 같이 앞의 (이/하나님의 손)가 붙음으로 하여 하나님이 웃음을 가져오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 이삭의 기본형은 קחצ(짜하크)이며 하나님이 의롭게 하시기에 웃을 수 있다. 하나님이 넘치도록 두는 ק(요짜크, 두다, 넘치다)는 ק(요나크)가 지닌 젖을 주다, 교육시켜서의 뜻인 ק(하카크/교육시켜서, 삿 5: 14)에서 하나님이 기록하고 세워야만 보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법령 ק(헤케크/다스리는)는 기록의 중요성이 있는 율례 ה(후카/율례, 창 26: 5)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는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젖을 떼고 ל(바이가마르/젖을 떼고, 창 21: 8)에서 절대자에게 보답하는 방법을 택한다.
* ‘있어’와 ‘예쉬’
: 한국어에는 ‘있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여인들은 남편이 멀리 떠나 있더라도 항상 같이 있음을 저녁마다 떠나간 사람을 위해 밥을 놋그릇에 담아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 따끈하게 했다. 아내들은 늘 그 자리에 있다.
히브리어에는 익숙한 ‘예쉬 ש(예쉬/있어, 창 31:29)가 있다. 곧 ・ע(예솨)・ע(예솨/구원자)로 발견되며 더 나아가 예수아 הוּשׁי(예슈아/구원, 시119:155)・(야솨아)로 ע(예솨)・שׁ(예쉬/존재,창 23:8)・ע(예솨/구원자) 등이 있다.
* ‘자글자글’와 ‘자간’
: 한국어에는 얼굴에 주름이 많음을 ‘자글자글’하다고 한다. 히브리어의 노인은 자근 ן(자칸, 창 43:27) 기본형을 지닌다.
* ‘자라’와 ‘자라’
: 한국어에는 씨가 싹이 나서 자라는 것을 ‘자라’라고 말한다. 히브리어에는 ‘자라’ ע(자라/씨)이다. 한국말의 ‘자라’는 성경에서는 ‘자라’ (자라/네 씨가, 창 22:17), 자손 ם(자람/자손, 에 9:27), וֹע(자르오/종족을, 에 10:3)이 있다.
* ‘자라’와 ‘자라’
: 한국에서는 씨가 ‘자라’ 혹은 키가 ‘자라’가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자라’ ע(제라/씨, 창 1:11, 12, 29, 4:29 등)이다. 한국말의 자라와 똑 같은 ע(자라/씨, 창 15:3)도 있다.
한국어에는 베짠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וּנ(베짜레메누/우리의 형상을 만드시고, 창 1:26)이 있다.
또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은 , ע(케제라/씨 같고도, 출 16:30)이다. ע(케제라)는 접미사 (케)를 빼면 역시 씨와 종자 ע(레째라/종자도 심고, 창 47:24)이다. 동사로서 '씨 뿌리다'; 상징적으로 '퍼뜨리다', '심다', '열매를 맺다', 낳다, 열매 맺다, 씨 뿌리(다, 는 자), 산출하다, 심다이다.
* ‘잡아’와 ‘자바’
: 한국어에는 무엇을 ‘잡아’가 있다. 히브리어에는 ‘자바’ ה(자바/잡아/2076)는 '동물을 살육하다'(보통 제사에서)이다. 기본형 자바 ח(자바/잡아)는 한국어에서도 ‘생축을 잡아’와 같다. 생축을 잡아 ח(티제바/생축을 잡아, 신 12: 15)・우양을 ‘잡았다’ (베자바트/잡았다, 신 12: 21)는 앞의 접두사 (베/그리고)를 빼면 한국어의 ‘잡았다’와 일치한다.
‘잡았다’의 기본형은 하나님의 명령 ה(자바)이다. 생명을 살게 하는 자 주권이며 명령이다. 희생의 의미로도 쓰이는 이 말은 한국어의 ‘잡아’의 뜻과 일치한다. 잡아 ה(자바/잡아)는 ה(쩨바아/제사를, 창 31:54; 삼상 9:12; 왕하 10:19;사 57:7; 호 6:6)・י(지베헤/제사를, 시 27:6)・ה(쩨바/제사를, 시 50:14, 23).
이 ‘잡아’는 (베자바타/제사를 드리되, 신 16:2)로 ’베‘는 모두 본래의 단어 ‘자바’와는 별개인 접두사 형태이다. 또한 ה
(미쯔바/단, 신 22:28, 29; 삼상 15:22)・ (하미쯔베아흐/단에, 왕상 12:32; 왕하 16:12) 역시 앞의 접두사 형태인 하나님으로부터 온 뜻의 (미)를 빼 버린다면 ‘잡아’이다. (레즈보아흐/제사를, 신 16:5; 삼상 16:2)・ח(레자바흐/제사를, 수 22:26)・וּח(예자베후/제사를, 호 4:13)・וּח(이제베후/제사를, 호 8:13)・וּח(바이제베후/제사를, 삿 2:5; 대상 15:26)・(베리즈보아흐 제바/제사를 드렸는데, 삼상 1:3)・(바이즈바아흐/제사를 드리는, 삼상 1:4; 삼하 6:13; 대하 28:4; 느 12:43)・וּח(티쯔바후/제사를 드릴 것이며, 왕하 17:36)・י(조베헤/제사를, 호 13:2)이다. 또한 이 자바는 명령의 자바 (메자베하/ 명령, 신 15:6) ה(하미제바/명령, 신 15:6)로 하나님의 명령이 곧 ‘잡아’의 뜻이 있게 된다.
* ‘잡았다‘와 ’쩨바오트‘
: 한국어에는 ‘째보았다’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의 쩨바오트’ תוֹא(쩨바오트/만군)는 만군으로 하나님을 돕는 군대이다. 이 발음 그대로 한다면 ‘째 보았다’는 ‘만군의 여호와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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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와 ‘제’
: 한국말에는 상대방을 향하여 물건을 받으라고 할 때 ‘자’ 받아라 하고, 대중을 향하여 ‘자 자 여러분’ 한다. 히브리어에는 ה(제/이것이니, 이러하니, 출 29:1; 신 14: 7, 15:2, 10, 21:20)가 있다.
* ‘치마’와 ‘치므라’
: 한국에서는 여인이 치마를 입는다. 특유한 한국여인의 치마는 길고 넓은 12폭 치마를 입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히브리어에서는 의복인 치므라 ‘ה(시므라/의복, 신 21:13, 22:3)가 있다.
* 한국 사투리 ‘쪼매’와 히브리어의 ‘조매오트’
: 한국어에는 조그마한 뜻을 지닌 사투리 ‘쪼매,’ 혹은 ‘쪼매하다,’ 혹은 ‘쪼맿다’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의 기본형 ה(조마/싹튼)을 가진 ‘조매오트’ תוֹח(조매호트/나오는,sprung up, 창 41:5)가 있다.
* ‘좋은’과 ‘토브’
: 한국말의 ’좋다‘가 있다. 성경에서는 בוֹת(토브/좋다)인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31)’이다. ‘토브’ בוֹט(토브/선한, 아름다운, 최선의, 창 1:4, 2:9; 출 2:2; 신 1:35, 5:33; 욥 10:3; 시 135:3; 사 7:15)는 한국식 고형에는 같은 뜻으로 ‘됴타, 됴븐’이 있다.
* ‘재미있다’와 ‘재미로트’
: 한국말에는 ‘재미있다’가 있다. 히브리어 성경은 ‘재미로트’ תוֹרי(재미로트)가 있으며 기본형은 רי(zaw-meer':자미르), ר(자미르: 자미르), הי(zem-ee-raw':재미라)가 있다. 악기로 반주되는 '노래':- 시(인), 찬미, 노래의 뜻이며 손가락들로 '튕긴다'는 개념으로 악기의 현이나 부분을 '만지다', 즉 '연주하다'; 음성에 맞추어 음악을 '연주하다', 따라서 노래와 음악으로 '축하하다':- 찬양하다, 찬송하다, 성가(들), 시(들), 노래하다, 음악을 만들다의 뜻이다. 그리고 (사메아흐/즐거워하며, 대하 23:13)와 기본형 ח(사메흐/즐거워하며, 대하 23:13)가 있다.
* 탐낸다의 ‘탐’과 ‘탐마’
: 한국에서는 남의 것을 탐낸다고 한다. 히브리어에서도 ‘탐’ א(탐마/더럽히지, 신 21:23)가 있다. 그리고 ‘부정한 자가 [א(하타메아/부정한 자가) ό άκάθαρτος(아카다르토스/부정한 자가)]가 있다.
* ‘하나라’와 ‘하나라’
: 한국말에는 ‘하나라’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의 ‘하나라’ ה(하나라/그 처녀의, 신 22:15, 16)가 있다. 앞의 정관사 (하)를 빼면 ‘나아라’이고 이 말은 한국에도 있다. 처녀가 개입되면 모든 것이 나았는데서 오는 말이기도 하다. 처녀가 시집가면 그 집이 대를 이을 것이고, 심청전에서는 처녀가 인당수 물에 들어가면 심봉사 눈이 떠졌다. 그리고 처녀가 시집을 가면 그 집의 식구들과 하나를 이룬다.
* ‘하여’와 ‘하야’
: 한국말에는 ‘하여’가 있다. 히브리어는 기본형 ה(하야)를 가진 바의,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여호와 הה(여호와)를 들 수 있다. 한국말에는 ‘하여’라는 말이 있고 ‘내빼서’(달아나서)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의 ‘하야 네페쉬’ 생명 ה שׁ(네페쉬 하야/생명, 창 1: 30)은 한국말에 ‘..하여 내빼서’ 즉 그래서 ‘달아나서 살았다‘가 있다.
* ‘탈나’와 ‘탈라’
: 한국에서 ‘탈나’는 의미의 ‘탈나’가 있는데 히브리어에도 ‘탈라’ האָ(탈라/고난을, 민 20: 14)가 있다.
* ‘토하라’와 히브리어의 ‘토하라’
:한국어에는 ‘토하라’라는 말이 아주 불쾌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실제 히브리어에는 여자가 아름다운 모습을 ‘외모가 아르다운’을 ראַ-ת(예파트 토아르/외모가 아름다운, 신 21:11)라 하였다. 따라서 속이 아닌 겉 모양을 속에서 토해 내는, 것을 외모라 하였다.
* ‘토해 봐’와 히브리어의 ‘토에바’
: 한국에서는 먹은 것을 내 뱉을 때 ‘토해버린다’고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가증한 뜻으로 기본형 הוֹת(토에바/가증한, 신 13: 15)가 있다. 성경사전에는 ה(토에바/가증한), ה(토에바/혐오, 가증한)를 제시한다.
* 입으로 뱉을 때 ‘페’와 히브리어의 ‘페’
: 한국의 말은 입으로 뱉을 때 '패' 한다. 이 ‘페’는 히브리어에서도 입 ה(패/입술, 출 4: 10; 수 1: 8; 잠 13: 2)의 뜻이다. 히브리어에는 페아 האָ(페아아/끝, 겔 48: 1)와 파아아, האָ(파아/뿌리다, 신 32: 26)가 있다. 한국인들은 상대방을 비웃거나 혹은 장난조로 ‘피’라고 말한다. 이 ‘피’ י(피/몫, 신 21:17)는 몫이라는 뜻이 있다.
* ‘패내’와 ‘파나’와 히브리어의 ‘패내’와 ‘파나’
: 한국말에서는 무엇을 파낼 때 ‘패내’라고 한다. 히브리어에서 ‘패내’ י(패내/나타나는 사역, 외모, 표면, 창 1:2, 6:1)가 있다. ‘파나’ ה(파나/대면, 확인, 창 18:22; 사 53:6)가 있다.
* ‘돌아’과 율법 ‘토라’
: 한국어에는 ‘돌아’와 ‘돌아와’ ‘돌아 온다’가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율법은 ‘토라’ הוֹת(토라)로 발음한다. ה -הוֹת(토라 -모쉐)은 모세의 율법(왕하 14:6)・הוֹת(하토라) 또한 그 율법의미이며 וֹת(베토라테하)는 주의 율법(신 33:10; 수 8:34), הוֹת(베토라)는 율법에(왕상 2:3)이다. 율법은 곧 나쁜 생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때에 하나님을 섬기라는 법칙을 적은 율례이다.
* ‘하! ’ 숨쉬다와 히브리어 헤
: 한국인들은 숨을 ‘하!...’하고 내어 쉰다. 히브리어 ה(헤/숨구멍)는 숨을 쉬는 숨구멍이 있어서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 ‘하다’와 ‘하타’
: 한국어의 끝부분은 문어체로 ‘...하다’가 있다. 히브리어 성경은 ‘하타’ הי(하타/하다, 창 1:3 출 3:14; 레 26:12)가 있다. 따라서 처음의 (하)는 원래 접두사 역할로 그가 숨쉬게 하기에 숨을 쉬는 숨구멍의 뜻이다. 이 처음 글자를 빼면 한국어의 ‘있다’와 같은 הי(이타)가 된다.
* 끝날 때의 발음“...다(타)”와 히브리어의 끝 자 “ת”(타)
: 한국어에는 항상 끝 날 때의 말이나 문장이 반드시 “...다”로 끝나며 말 할때에도 “....다(타)”로 되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끝은 “..ת”(타브)로 끝난다.
* ‘하여’와 ‘하야’
: 한국인들의 말 중에는 그리하여의 ‘하여’ 혹은 ‘하여’라고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하야’ ה(하야/생명)이 있으며 앞에 (예)가 붙은 הה(예흐바/여호와)가 있다. 한국인들이 축복을 받는 이유는 이렇게 말들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사상이 들어 있다. 즉 ה(헤/숨구멍)가 2회이어서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는 뜻이 있다.
* ‘하자’와 ‘하제’
: 한국말 중에는 ‘하자’라는 말이 있다. 청유형 의미를 지닌다. 내일의 순수한 한국말은 ‘하제’이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은 ‘하제’ ה(하제/이제, 출 1:18; 에 1:18)가 있다. 물론 기본형은 한국에서 대중을 말 할 때, 혹은 대상을 향하여 ‘자’라고 하는 바, 히브리어의 ה(제/이것이니, 신 14: 7, 15:2, 10) 기본형에 정관사 ‘그’가 더 붙어 ה(하제)이다.
* ‘할레레’와 ‘할랄’
: 한국 속언 중에는 ‘헬레레’한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할-랄’ ל(할랄/상처, 상함, 시 109:2, 애 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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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히브리어에 관심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배워보도록 할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