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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회상한다)
아버지는 1919년 3.1.운동 이듬해 혼란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부친 이계삼 할아버지와 모친 김영화 할머니 사이에서 5남 1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이은/ 이혜수, 이혜경, 이은성/이영만, 이영혜 , 이영애 이은교/ 3남 3녀, 이은영/ 이준석, 이준혁, 이은규/ 이형만, 이지만, 이형진 그리고 고모님/ 최병호) 할아버지는 문막리 240번지에 지금은 출석교인 500여명이 넘는 문막감리교회를 처음 세우셨고 전도사로 봉직하셨던 분이셨고 할머니는 체구가 자그맣고 자식들을 위해 한평생을 보내신 전형적인 한국 여인이셨다.
아버지는 항상 부지런한 분이셨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시기 까지 나는 한번도 아침에 일어나서 아버지가 잠자리에 계신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이불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있을 때 벌써 앞마당 청소를 다하시고 창호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곤 이불을 개어서 장롱에 넣으시고 커다란 빗자루로 방을 휘휘 청소하셨다. 가끔 청소하는데 방해가 되면 우리는 빗자루로 엉덩이를 몇 대씩 맞고 후다닥 피신해야 했다.
손곡국민학교에서 아버지가 봉직하실 때 여름이면 꼭 물난리가 났던 기억이 난다. 아직 학교에 입학도 안한 나와 동생들은 교장관사에서 학교로 피난을 해서 교실에서 밥을 해먹고 잠을 자는 것이 소풍 나온 듯 즐겁기만 했다.
물난리 피난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다툼을 벌였던 광경이 기억난다.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꾸지람 하셨고 어머니는 진숙이를 등에업고 우시던 모습이다.그런데 그때 두분은 우리가 들으면 교육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싸우셨다. 훗날 그것이 일본어라는 것을 알았고 훗날 나도 자식 앞에서 언쟁을 할 때는 외국어로 하리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국민학교 입학도 하기전에 손버릇이 나빠 부모님께 혼난 기억이 난다. 언젠가 아버지가 월급을 타오셨는데 아버지의 누런 가죽가방에서 월급으로 타온 거금(채권증서가 아니었나 생각됨)을 들고나가 구멍가게 할아버지에게 주고 사탕을 바꿔 먹은 것이다. 구멍가게 할아버지는 교장댁 아들이 훔쳐온 거액의 유가증권을 담보로 사탕을 주고는 부모님께 증권을 반환하고 사탕 값을 받아가셨을 게다. 회초리로 맞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구멍가게 할아버지를 얼마나 야속해 했었는지... 가을날 밤이 익을 때면 아버지는 이른 아침 자식들을 깨워서는 밤숲으로 데리고 가셔서 밤줍기를 함께 하셨다. 막대기와 고무신발만으로 밤을 까서 자루에 넣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밤을 삶아먹기도 하고 구워먹기도 했다.
손곡리 앞개울에 그 시절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아버지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실 때에 가끔 나를 데리고 가셨다. 어느 여름날 호기심이 강하고 어려서부터 방랑벽이 있던 나는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멀리 계곡 위쪽으로 한참 올라가며 민물고기와 가재를 잡았다.
어느 순간 인적이 없음을 느낀 나는 덜컥 겁이나 울며 계속 산속으로 들어갔다. 몇 시간 후 나는 산나물을 캐는 옆마을 할머니에게 발견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할머니가 나에게“ 너는 누구냐” 하고 물으니 엉엉 울면서 “손곡국민학교 교장선생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하더란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웅덩이 같은 데는 여러 사람이 바케스를 들고가 물을 퍼내서 잡았고, 장마가 지난후에는 족대를 들고 개울가 풀섶을 발로 차며 고기를 몰았고, 물살이 있는곳 에서는 전지낚시 그리고 물이 잠잠하고 큰돌이 많은 곳에는 어항을 놓아 고기를 잡았다. 환경문제가 없었던 그시절 어떤이는 상류에 극약을 풀어 온마을 사람들이 다나와 물고기를 줍기도 했으며 국민학교 시절 어린이들은 멱감다말고 힘을 모아 도랑 같은데에 엮귀를 빻아 물에 뿌려 그것을 먹고 몽롱해진 고기들을 잡기도 했다. 나는 언젠가 옆마을 형들과 아버지 자전거를 개울로 가져가서는 세워놓고 자전거에 부착된 라이트 공급용 배터리 발생기를 공회전 시켜 고기를 잡기도 했다.
비두국민학교로 전근 가서는 아버지 자전거가 생겼다. 요즘의 자가용보다 더 귀한 자전거였다. 형과 누이는 그때 중학교에 다니느라 원주에 가있었고 나와 경만이는 아버지의 지도로 자전거 운전 연수를 받았다. 키가 작아 왼손으론 핸들을 오른쪽 어깨로는 자전거 안장 받침대를 잡고는 신나게 자전거를 탔다. 가끔 넘어져 팔꿈치가 깨지고 발에서 피가 흘러도 뿌듯한 자가용 자전거 드라이브 놀이였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겠지만 교장 자식들인 우리 형제도 농사짓는데 한몫을 해야 했다.
학교 옆 교지에 우리는 봄이면 상치, 마늘 여름이면 감자, 고구마, 옥수수, 고추, 호박 가을이면 배추, 콩등을 재배해서 자급자족했다.
아버지는 나와 경만이 에게 노동의 중요성을 몸소 가르치셨다. 가장 하기 싫어했던 일은 학교 변소를 쳐서 우리가 경작하는 야채밭에 나르는 일이었다. 똥통에 막대를 끼워 어깨에 메고 옮기는 도중 가끔 형제가 발이 맞지 않아 똥통이 넘쳐 흘러서 몸에 튀기라도 할 때면 씩씩대며 나르던 일이 생각난다. 또한 화장품이 없던 시절 봄이면 수세미를 심어 가을에 수확하여 설거지 하는데 쓰고, 잎이지면 줄기를 잘라 거기에 빈병을 바쳐놓으면 다음날 한 병 가득 수세미물이 고인다. 이것이 그 시절 온 식구가 유용하게 사용하던 천연 스킨로션 이었다.
저학년 때는 개, 토끼, 닭을 기르게 하시더니 고학년이 되니 돼지, 염소를 기르게 하셨다. 어려웠던 시절 그래도 영양실조 걸리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이 그러한 가축 사육 및 채소 재배가 아니었나싶다.
아버지는 개울건너 당뒤 마을 수염이 길었던 김집사님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나와 경만이에게 지게를 맞춰주셨다. 그걸 지고 수업후 시간 날 때 마다 뒷산에 가서 땔감을 해왔다. 어머니가 해온 양에 비하면 아주 작은 양이지만 그래도 두 아들은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왔던 것이다.
여름 방학이 끝날 때 쯤이면 아버지는 항상 아들들과 함께 문막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하셨다. 한여름에 십여리 되는 길을 걸어가서 벌초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이 자식들을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매년 그렇게 하셨다.
비두학교 관사 사랑방에는 악수하는 손이 그려진 미국 원조물자 옥수수가루 자루와 분말우유가루 박스가 방의 반쯤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밤마다 배고픈 온 마을의 서생원들이 다들 몰려와서는 배를 채우고 갔다. 너무나 많은 쥐들이 밤마다 천장위에서 운동회를 하는 바람에 우리는 불면증이 걸릴 지경이었다. 더구나 이놈들이 천장을 뚫고 내려와서는 시식을 하고 가끔 우리들이 자고 있는 이불 위를 운동장 삼아 자고 있는 우리들 얼굴을 넘나들기도 할 때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몽둥이를 드시고 우리 방에 들어와 쥐 소탕작전을 개시했는데 아버지는 쥐를 공격하시다가 실수로 잠에서 덜깬 우리 머리를 타격하여 어머니께 “쥐 잡다가 애들 잡겠어요!” 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쥐를 잡을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하셨다. 그때 이미 쥐차우는 집안 곳곳에 몇 개씩 설치한 후 였는데 이번에는 양동이에 물을 반쯤 채워서 쥐가 천정을 뚫어 놓은 곳 아래에 놓았다. 아침에 양동이를 내려보면 거기에는 물에 빠져 지친 쥐들이 대여섯 마리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선진적인 방법으로 쥐를 퇴치할 수 있었다.
쥐와 관련된 우울한 일화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여름이면 개울에 나가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여선생님포함) 천렵을 할 때면 어린 우리도 참여하여 맛있게 보신탕을 즐기며 영양보충을 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동물을 사랑하셨다. 특히 내가 5학년때 쯤 집에서 기르던 “또끄”는 검은색의 윤기 흐르는 멋진놈 이었다. 그 녀석이 어느 날 입에 거품을 물고는 집안 여기저기를 뛰어 돌아다니다가 안방 마루 밑에서 고통스럽게 울다가 죽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은 것 같다고 하셨다. 우리의 사랑을 받던 “도끄”를 위해 나와 경만이 그리고 진숙이, 진희는 집에서 멀지 않은 야산 밤나무 옆에 땅을 파고는 “도끄”를 위한 묘지를 만들어 묻어 주었다. 그런데 황당했던 일은 다음날 가보니 “도끄”가 부활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정성스레 덮어준 묘지가 열려 있었다. 분명 흙으로 덮어 놨었는데 “도끄” 묘지가 파헤쳐져 있었다. 엉엉 울며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도끄”가 좋은 곳으로 갔는가보다 라며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 훗날 나는 아버지로부터 그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옆 마을 어른들이 “도끄”를 파내어 가져가 영양보충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시골교회를 개척하고 유지하는 일에 성심을 다하셨다. 궁촌리침례교회는 어머니와 함께 흙벽돌을 찍어 세우신 교회이다. 목회자를 도우시는 일도 기쁨으로 하셨고 특히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후원하시는 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까지 하셨던 일이었다.
어느 여름 교회학교가 열렸던 때의 일을 기억한다.
(찐빵을 경만이와 다먹은 사건)
노림국민학교에 와서는 우리에게 야구룰도 가르쳐 주시고 운동장에서 함께 운동도 하시는 자상한 교장이셨다.
매년 새해 첫날이 되면 붓글씨로 좋아하시는 글귀를 쓰셨는데 마지막으로 남기신 붓글씨는 “人生不學 如冥冥夜行”이라는 명심보감의 근학편에 나오는 글귀인데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어둡고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라) 교육자로서 자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하며 숙연해지고 나는 이 글을 가훈으로 삼고 있다. 그런 당부의 말씀 때문에 손자손녀들이 다들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지 않았나 하고 감사한다. 자랑을 보태자면 형님댁 아들 삼열이는 서울대 종교학과, 딸 정은이는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영어교사이고, 내아들 현민이는 서울대 인문계열 재학중이고, 막내집 아들 신영이는 침례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또한 누님의 두아들중 재선이는 상지대를 졸업하고 우체국장으로, 재순이는 한림대를 졸업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누이동생 진숙이 두아들중 서원이는 연세대 천문학과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서호는 인하대에 입학해 ROTC 장교로 배출될 것이다. 막내동생 진희 아이들도 미국에서 다들 우등생으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1927년 영월에서 태어나셨다. 조부님께서는 일제시대에 면장을 하시고 퇴직 후 사업을 하셨고, 어머니는 결혼하기 전까지 조부모님과 함께 생활하셨다.
1944년 17세였던 어머니는 24세의 아버지와 결혼하여서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어려운 형편이어서 텃밭과 학교 관사 옆의 땅에서 채소도 재배하고 가축도 기르면서 생계를 이어나가셨다. 1951년 1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상북도 영천으로 피난을 가셨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원주로 돌아오셔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1966년까지 그곳에서 지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후, 생계를 꾸려나가셔야 했던 어머니는 원성 군청에 부녀상담원으로 취직하셨다. 72년에는 복지부녀계장으로 승진하셨고, 82년 정년때 부녀과장으로 퇴임하셨다. 현재 미국 오레곤에서 막내딸과 함께 지내고 계시다.
첫댓글 너의 자세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다 일기가 어렸다 그러나 다 일거 보고 너무나 기억력이 좋은 진만인 것은 생각한다. 좋은 과거를 가진 너의 앞길에 자녀들 앞길이 길이 열기를 빈다.
어린시절 여러가지 같은 경험을 한 것들이 생각나네요. 문막취병리에 가끔가는데 문막감리교회보면 전도사님의 글생각하며 유심히 살펴볼 것 같네요.